홍경 “불안해요. 저는 항상 불안해요”
홍경의 표정이 변한다. 풋풋한 눈빛은 때때로 차갑다가 언젠가는 다시 낭만으로 차오른다. 그 불안과 설렘과 무모함과 호기심 그리고 예민함을 포착했다. 투명한 젊음의 어느 날을.
“그 사람이 홍경이었어?” 처음 홍경과의 촬영이 잡힌 후 주변 사람들에게 홍경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대체로 이런 반응이 돌아왔다. 홍경은 그런 배우다. 어느 순간 ‘누구지?’ 하는 생각에 이름을 검색해보게 되거나 갑자기 인스타그램 릴스 알고리즘에 등장하는 배우 말이다. 그러다 드라마 <악귀>의 형사 ‘이홍새’ 역할을 보고는 그 츤데레적 면모에 설레고, 아마 영화 <댓글부대>에서 “팹택 연기 좋다”는 댓글을 무수하게 발견하게 될 거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홍경의 모습은 KBS 단막극 <딱밤 한 대가 이별에 미치는 영향>에서의 ‘구원빈’이다. 곧고, 바르며, 온 마음이 투명하게 보이는 체육 선생님. 홍경은 그 작품에서 ‘날씨 좋네요’ 같은 아주 평범한 대사를 세상에서 가장 말갛고 예쁘게 말한다. 하지만 어느 작품에서의 홍경을 기억하든, 같은 얼굴을 다시 볼 가능성은 적다. <D.P.>에서 ‘조석봉’을 지독하게 괴롭히던 ‘류이강’도, <약한영웅 Class 1>에서 굴곡 있는 ‘찐따 빌런 오범석’도 모두 홍경이다. 그러니까 결국 “그 사람이 홍경이었어?”다.
실제로 만난 홍경도 그랬다. 예상하기 어려웠다. 홍경은 촬영을 위해 두 번의 사전 미팅을 청했다. 화보 촬영 전에 이렇게 만나자고 하는 경우는 (꽤 오랜) 기자 생활 동안 결코 흔치 않은 일이었다. 약속 시간보다 10분 먼저 도착했는데도 그는 하얀 티셔츠를 입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과 두툼한 대본이 눈에 들어왔다. “당일 만나서 순식간에 촬영하고 헤어지는 것보다는 해보고 싶은 것들을 서로 나누고 촬영하는 게 재미있으니까요. 알아가는 시간을 갖고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서로 공을 주고받으면서 뭔가를 만드는 순간을 마주하고 싶었어요.” 사전 미팅의 이유였다. 홍경은 본인의 지금, 청춘, 20대의 한 순간을 생생하게 포착하고 싶어 했다. 원하는 바를 분명하게 말하면서도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두 번째 만남은 조금 더 편안했다. 사진가 목정욱과 영상 감독 송태종도 함께였다. 이번에는 촬영 자체보다는 사적인 취향이나 관심사에 대한 일상적 대화가 오갔다. 우리는 피자와 콜라를 사이에 두고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동안 했다. 폴 토마스 앤더슨과 베넷 밀러의 영화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노팅 힐>에 대한 감상이 오갔다. 2시간 가까이 술 한 잔 없이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가는 길에 사진가는 찍고 싶은 얼굴을 찾았다고 털어놨고, 영상 감독은 그가 미묘하게 극단적이기 때문에 특별하다고 했다. 그를 만나보면, 아니 그의 작품을 주르르 이어보면 이게 어떤 의미인지 당신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촬영 당일, 우리는 홍경의 여러 얼굴을 보았다. 한없이 맑다가 불손하고, 수줍으면서도 과감하고, 비상하다 추락하며, 어딘지 혼란스러우면서도 강단 있는 표정을 말이다. 마냥 푸르른 청춘은 아니었지만 있는 그대로의 젊음은 맞았다. 끈적이는 한여름 밤, 모든 촬영을 끝내고 어떤 소음도 없는 숲속의 어느 집에서 밤 9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 마주 앉았다. 홍경은 다시 하얀 티셔츠 차림이었다.
오늘 어떤 기분으로 왔어요? 뭔가 기대하는 표정이었는데.
설렜어요. 화보를 촬영할 때, 어느 순간에는 아직도 많이 어색하거든요. 그런데 이번처럼 사전에 만나서 서로 생각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면 확실히 재미있게 작업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연기하면서도 뭔가 확 빠지는 순간들을 참 좋아하는데 오늘은 그런 순간을 많이 맛봤어요.
처음 만났을 때 “젊음에 관한 기록이었으면 좋겠다”고 했죠. 왜 젊음을 주제로 하고 싶었어요?
제가 지금 스물여덟이니까, 20대의 끝자락에 있는 셈이에요. ‘20대만이 갖는 상징성이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아직 20대를 다 보내지 않았고 30대가 되어도 그 시간에서 새로운 걸 얻겠지만, 지금 이 순간순간이 아주 소중할 거라는 걸 피부로 인지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계속 남기고 싶지 않나 싶어요. 외모뿐 아니라 생각도, 마음도 시시각각 변할 텐데, 이때만 가지고 있는 무엇을 담아보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하반기 개봉을 앞두고 있는 <청설>도 첫사랑, 청춘에 대한 영화죠.
개인적으로 정말 의미있는 작품이에요. 20대를 보내기 전에 사랑이란 감정을 처음 느끼는 캐릭터를 꼭 만나고 싶었거든요. 이 인물의 삶은 물론이고 처음 마주하는 사랑의 형태나 굴곡이 정말 궁금했어요. 10대든 20대든 젊은 날을 지나면서 누구나 느끼는 보편적인 감정이 있는데, 첫사랑도 그중 하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연대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여겼어요. 촬영을 마치고 보니 더욱 그래요. 누가 누군가를 사랑하며 보이는 모습들이 담긴 작품, 이런 이야기가 지금 이 시기에 나오면 참 좋겠다 싶어요.
당신의 첫사랑도 20대였나요?
그런 것 같은데요. 저의 첫사랑도.
첫사랑의 기준이라는 게 사람마다 다르잖아요.
저에게 첫사랑은 마냥 반짝이는 순간만 있는 게 아니라 처음 느껴보는 감각을 마주했던 경험이었어요. 정말 행복했던 순간도 있지만 타인 때문에 마음이 시리고 애달팠던 기억이요. 혼자서는 느낄 수 없는 여러 감정을 누군가를 만나서 알게 되는 것, 막 속이 요동치고 뒤집어지는 그런 것.
사전 미팅에서 매 작품 다른 얼굴을 가진 것 같다고 했을 때 겨우 고맙다고 말하면서 무척 수줍어했어요. “얼굴을 갈아 끼운다”는 댓글까지 있을 정도인데, 자각하지 못하고 있나요?
잘 모르겠어요. 정말 감사한 말이지만, 스스로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볼 수가 없으니까 ‘이 작품에서도 다르고, 저 작품에서도 다르네’라고 헤아리지 못하죠. 그리고 솔직히, 그런 말 듣는 배우들이 많잖아요. 그래서 믿지 않아요.(웃음) ‘아, 그냥 해주는 말인가 보다’ 하고 넘기는 쪽이죠. 다만 답습하는 건 굉장히 싫어해요. 그래서 화보도 이전에 해보지 않았던 것, 일말이라도 뭔가 다른 방향으로 시도하는 걸 선호합니다.
본인에게도 낯선 얼굴이 있어요?
항상 그래요. 아직 필모그래피가 많이 없어서 그런지 늘 낯설어요. 그래서 몸부림치고 잘 보지 못해요. 버티면서 봐요.(웃음)
그렇다면, 그럼에도 조금은 익숙한 얼굴이 있나요?
글쎄요. 없는 것 같아요. 사실 아직도 제가 누군지, 실제 나의 모습이 어떤지, 외적으로 어떤 이미지로 비치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다들 알까요? 다들 아나?
자신의 모습, 스스로의 얼굴을 계속 발견하는 중이군요.
그러고 있어요. 지금 말할 수 있는 건, 저는 자연스러운 걸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꾸미지 않은 모습이요.
보통 배우를 인터뷰하기 전에는 전작을 다시 살펴보곤 하는데, 이번에는 홍경이 좋아하는 영화를 다시 봤어요. <매그놀리아>나 <머니볼>, <퍼펙트 데이즈>, <펀치 드렁크 러브> 같은 작품이요. “당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는 말이 있죠. 이번 경우에는 “당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알려달라”인 것 같아서요.
맞아요. 그게 더 빠를 수도 있죠.
그러니까 오늘 밤 돌아가서 영화 세 편을 봐야 한다면 어떤 작품을 고를 건가요? 결국 ‘오늘의 홍경’을 설명하는 영화인 거죠.
항상 제가 이런 질문을 하다가, 받아보니까 굉장히 고민되는군요. 음··· 먼저 루카 구아다니노의 <아이 엠 러브>. 볕이 느껴질 정도로 뜨겁고 감촉까지 전달될 만큼 예민하고 기민한 영화니까요. ‘<아이 엠 러브> 보면 참 어울리겠다, 이 여름날에’ 하고 탁 떠올랐어요. 그리고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전에 만났을 때 목정욱 실장님과 스탠리 큐브릭 이야기를 했잖아요.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서 반가웠어요. 당시에 어떻게 그런 걸 구현해냈는지, 볼 때마다 정말 충격적이에요. 평소에도 사운드나 이미지나 감각으로 굴러가는 작품을 좋아하고 무빙 이미지를 만드는 작업을 재미있어하는데, 이 영화는 저에게 완벽한 무빙 이미지예요. 마지막으로는 정관조 감독님의 다큐멘터리 <녹턴>. 이 작품을 보면서 정말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이 작품 진짜 좋아해요.
영화 <머니볼>에는 이런 명대사가 나오죠. “야구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 원문은 “How can you not be romantic about baseball?”인데, 야구와 낭만, 사랑이라니, 생소하면서도 단번에 이해가 되는 대사예요. 배우로서 야구를 영화로 바꿔본다면 어떨까요? ‘이래서 영화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라고 할 만한 사적인 순간이 있나요?
저는 영화를 보는 것도 좋아하지만 플레이어로서 연기할 때 더 재미를 느껴요. 아직 경험이 부족하니까, 정말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한편으로는 방법론이라는 게 정말 존재할까 싶을 정도로 막막하지만 몇몇 결정적인 순간이 있어요. 대본을 보면서 뭔가 발견할 때나 연기하면서 잡생각 없이 지금에 온전히 집중해서 내 몸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순간들. 이런 때가 플레이어로서는 행복한 순간이죠. <머니볼>식으로 말하자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요.
사실 행간을 계획적으로 잘 살리는 배우라고 봤어요. 한숨을 작게 쉬거나 눈을 껌뻑이거나, 대사와 대사 사이 감정의 흐름을 세심하게 표현한다고요.
제가 그런가요? 의도한 건 없어요. 이 인물이 순간에 느끼는 게 무엇이고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가늠하지 않아요. 요즘엔 그 계획이 좀 더 필요하다고 느끼지만, 지금은 그 순간 자체에 집중하는 것도 힘들어요. 정말 빈말이 아니에요.
굉장히 일관성 있게 복잡한 사람인 거 알아요? 좋아하는 영화도 그렇고, 지금 이 인터뷰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요? 사실 복잡한 거 좋아해요.(웃음)
그리고 미학적으로 예민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아름답다는 건 상대적인데, 무엇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느끼나요?
어떤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건 굉장히 직관적인 순간일 테고 그 감정이 어떤 것 때문에 발동됐는지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글쎄요. 제 마음을 건드리는 건 나의 모습을 마주하게 하는 무엇이에요. 동질감이나 연대를 느끼게 하는 것들. 대칭보다는 비대칭, 빈틈 있고 균열이 있는 것들에 아름다움을 느껴요.
미묘하게 극단적이에요. 세심한데 본능적이고, 자기 세계가 확고하지만 불안하고.
오, 맞아요. 불안해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전 항상 불안해요. 하지만 불안이 주는 이상한 텐션이 있잖아요. 그게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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