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영과 사카구치 켄타로가 건넨 다정한 진심
어색한 듯 끝내 하나로 이어지는 두 이름.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의 이세영과 사카구치 켄타로가 비로소 건넨 다정한 진심.
오늘도 선명한 잔상, 사카구치 켄타로
앞에 안착한 사카구치 켄타로(Kentaro Sakaguchi)의 모습이 지나치게 멀끔했다. <보그> 디지털 콘텐츠 촬영을 앞두고 있던 그는 검은색 니트에 화이트 셔츠를 받쳐 입은 단정한 차림이었고, 머리카락은 새카맸으며, 대체로 진중하게 이야기하다가 예기치 않은 데서 아이처럼 투명하게 웃었다. ‘과연 로맨스의 정석 같은 남자로군.’ 마주하자마자 고개를 끄덕인 바로 그런 매력으로 사카구치 켄타로는 꽤 오래전부터 수많은 한국 팬의 마음을 붙잡아왔다(그날 <보그> 촬영 스태프 중에도 그의 오랜 팬이 꽤 있었다). 지난해 켄타로는 한국에서 마침내 첫 팬 미팅을 열었다. “사실 저는 조금 긴장했어요. 한국 팬들과 직접 만나서 교류하는 건 처음이었으니까요. 에너지가 정말 좋았던 것이 기억나요. 아주 단순한 한국어를 해도 열정적으로 반응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일본에서 팬 미팅을 열면 제가 더 많은 말을 해야 하거든요.(웃음) 그런데···” 번지려던 웃음을 멈추고 그가 돌연 나에게 질문을 건넸다. “한국 사람들은 과연 저의 어떤 면을 좋아해주시는 걸까요?”
좋게 얼버무리려다가 그의 사뭇 진지한 표정에 마음을 고쳐먹은 나는 당신이 단순히 잘생긴 배우만은 아니며 누군가의 가장 예쁘고 아름다운 시절을 상기시키는 순수성을 지닌 배우 같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눈썹을 추켜올리며 호응했다. “아, 소데스네(그렇군요).” 서툴고 귀여운 매력의 조연으로 주연급 임팩트를 남긴 드라마 <히로인 실격>(2015), 애틋한 짝사랑으로 보는 이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했던 <당신을 울리는 사랑>(2016), 고마츠 나나와 위태로운 위로를 주고받는 청춘 영화 <남은 인생 10년>(2023) 속 그의 얼굴이 연달아 스쳐 지나갔다. 그의 첫 한국 드라마 출연작이 된 쿠팡플레이 오리지널 시리즈 <사랑 후에 오는 것들> 역시 로맨스. 일본 유학 중인 한국 여자 ‘최홍’이 일본 남자 ‘준고’를 만나 애달픈 사랑과 이별을 경험한 후 시간이 한참 지나 한국에서 재회하면서 다시 이어지는 끈질긴 사랑 이야기다. 여기서 켄타로는 후회와 그리움으로 가득한 남자 준고를 연기한다. 벌써 10년 넘게 배우로 활약하며 특히 로맨스에서 강세를 보인 그이기에 대중의 기대치는 이미 한껏 치솟은 상태. 다행히 그도 마찬가지였다. “스태프들이 다 한국인이니까 그런 환경에서 내가 준고로서 어떻게 의견을 내고 소통을 해야 할지, 어쩌면 벽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고민을 안고 첫 촬영에 임했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모든 상황이 순조롭게 흘러가더군요. 대본이라는 방향성이 있기 때문에 다들 같은 방향으로 전진할 수 있었으니까요. 거기서 긴장이 풀리고 난 다음부터는 최대한 열심히 소통하려고 노력했어요.”
남성 패션 잡지 <멘즈 논노> 전속 모델로 활동했으며 프라다 앰배서더로 활약 중인 그이기에 연기에 관한 더 깊은 이야기로 진입하기 전 먼저 패션에 관한 질문부터 건네기로 했다. “과거의 준고와 현재의 준고가 보여주는 패션이 확연히 달라 보이길 바랐어요. 옷이라는 게 그 사람의 인상, 어쩌면 인격까지 보여주는 요소잖아요. 인기 있는 소설가가 된 현재의 준고는 다소 샤프하고 날카롭게 보였으면 좋겠다 싶어 색깔을 절제하고, 어두운 색감의 옷을 주로 입었어요. 대학생 신분인 과거의 준고를 연기할 땐 실제로 여러 번 세탁한 셔츠 같은 걸 입고 촬영했고요.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일삼았던 그 시절의 준고는 멀쩡한 새 옷을 입는 날이 거의 없으니까요.”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영역 안에서 최대한의 디테일을 챙길 뿐, 그는 뭐든 강하게 주장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감독님이나 의상 팀에서 바라보는 준고도 중요하잖아요. 존중해야 한다고 봐요. 의상이든 연기든 제 의견이 없는 편은 아니지만 100%의 확신이 아니라면 언제나 전문가들에게 맡기는 쪽을 택하곤 합니다.”
확신과 열정을 안고 그에게 준고가 되어줄 것을 제안한 문현성 감독은 누구보다 고마운 존재였다. 영화 <화려한 휴가>(2007) 스크립터로 시작해 <코리아>(2012), <서울대작전>(2022) 등을 연출하며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을 통해 처음으로 드라마, 그것도 로맨스에 도전한 문현성 감독이기에 당연히 마음에 꼭 드는 배우와 함께하고 싶지 않았을까. “사실 촬영은 시간을 역행해서 진행했거든요. 제 첫 촬영이 5년 전에 이별한 홍과 오랜만에 재회하는 장면이었는데 어떤 감정에 집중해야 할지 난감하더라고요. 그래서 감독님께 조심스럽게 여쭈었어요. 홍이 혼자 있을 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 촬영 장면을 보여줄 수 있는지. 그걸 봐야 제대로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때 감독님이 딱 한 컷을 보여주시며 홍의 감정에 대해 잘 설명해주셔서 집중력 있게 촬영할 수 있었죠.”
켄타로에게 연기의 가장 즐거운 점은 타인의 삶을 살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10년 동안 연기를 하면서 단 한 순간도 시큰둥하게 느낀 적 없는 즐거움이다. 이를 위해 그는 현장마다 집요하게 몰입하고, 주변 배우들의 연기를 살핀다. 이세영은 그런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몰입도가 정말 높은 배우예요. 본인의 집중력이 좋으니까 보는 이들도 집중하게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기더라고요.” 배우로서 착실한 행보에 더해 인간적인 매력과 취향까지 인정받으며 높아진 인지도와 영향력은 그로 하여금 현장에 진정성 있게 임해야 한다는 기분 좋은 부담감을 안겨주었다. “5년 전쯤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발언권과 영향력이 커지면서 현장의 많은 것이 제 손에 달려 있게 됐으니 현장을 긍정적인 환경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요. 짧게는 3개월, 길게는 6개월 넘게 서로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데 이왕이면 모든 스태프와 배우가 의미를 느끼고, 행복할 수 있는 촬영 현장이면 좋잖아요. 이번에 준고를 연기할 때도 그런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연인으로 마주한 또래 배우 이세영에게도 그는 최선의 마음을 건넸다. 언어 장벽으로 삶과 연기에 관한 더 깊은 마음을 나누지는 못했지만 진심은 전해졌을 것이다. “내 마음이 잘 전달됐을까, 정말 괜찮았을까, 걱정했던 순간은 우리 둘 다에게 있었을 거예요. 그래도 장면 장면마다 홍과 준고의 사랑을 어떤 방식과 호흡으로 표현해야 할지 함께 깊이 고민했어요.” 켄타로는 이세영과 연기하며 거리감을 느낀 적은 없다고 단언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나와 상대만 느낄 수 있는 거리감이 있잖아요. 콕 집어 설명하긴 어려운데 연기를 하다 보면 그런 거리감 때문에 서로의 연기가 엇갈리는 경우가 있거든요. 너무 가까워서 전달해야 할 감정이 흐려진다거나, 반대로 서로의 간격이 너무 멀어서 감정이 연결되지 않을 때가 있죠. 그런데 세영과 연기할 때는 거리감이 정말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런 면에서 서로 잘 맞아떨어진 것 같아요.” 로맨스물에서 시청자와 관객은 배우의 일거수일투족을 유난히 집중해서 응시하기 마련이다. 대사와 말투, 비언어적 표현 하나하나 밀도 있게 바라보면서. “그렇기 때문에 상대 배우와 마음의 거리감을 좁히는 것은 중요해요. 어떻게 보면 연기와는 상관없는 요소일 수 있지만 작품 퀄리티와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죠.”
이번에는 조금 객관적인 시선으로, 켄타로가 이세영을 배우로서 찬찬히 가늠했다. 이세영이 지닌 특유의 밝은 에너지와 솔직한 화법, 긍정적인 태도를 지나 회상이 멈춘 지점은 이세영의 목소리. “클라이맥스에 가까운 통화 장면을 촬영할 때였어요. 화면으로는 세영의 모습이 나오고, 저는 스튜디오 밖에서 통화에 응했죠. 그런데 세영의 목소리만 듣고도 지금 홍이 어떤 감정을 겪고 있는지 낱낱이 알 수 있었어요. 머릿속에 홍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죠. 이세영이란 배우에 대한 존경심이 피어난 순간이었습니다.”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은 무려 2005년 출간된 공지영과 츠지 히토나리의 한일 합작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이별을 결심하고, 이별 후에도 때로 서로를 그리워하는 이 현실적인 사랑 이야기를 로맨스 장인이자 다독가인 켄타로는 어떻게 느꼈는지 궁금했다. 여러 모양의 로맨스를 연기해온 그는 개인적으로 어떤 로맨스물을 좋아하는지도. “새드 엔딩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에요. 하지만 사랑에는 아픔도 있잖아요. 그리고 곰곰이 돌아보면 이별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고요. 두 남녀가 서로 만나 사랑하는 것도 인연이지만 이별하는 것도 어쩌면 인연 아닐까요?” 가장 애정하는 로맨스 영화는 <첨밀밀>(1996)이라고 했다. “사랑하던 연인이 서로를 떠나 각자의 여정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방황도 하고, 좋아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하기도 하는 이야기인데 마음을 힘들게 했던 스토리라 그런지 왠지 모르게 계속 기억나는군요. 분명 새드 앤딩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어쩌면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웃음)”
하지만 안타깝게도 켄타로는 <사랑 후에 오는 것들>에 충분히 몰입하지 못할 듯하다. “1회부터 마지막 회(6회)까지 내내 전전긍긍하는 마음으로 혼자 조용히 시청하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영화 <헬 독스>(2022)에서 사이코패스 설정의 캐릭터를 훌륭하게 연기해내며 일본 아카데미상 우수 남우조연상을 수상했을 때도, 같은 방송사에서 이례적으로 두 작품(<Dr. 초콜릿>(2023)과 <CODE -소원의 대가->(2023)) 연속 주연으로 발탁됐을 때도 그는 항상 자신의 연기가 다소 부끄럽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냥 그런 게 있어요. 저만 아는 그 부끄러움요. 60대, 80대가 되어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수줍은 미소를 남기며 마지막 말을 마친 켄타로가 예의 바르게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 한동안 기분 좋은 공기가 맴돌았다. 첫사랑의 기억처럼.
작은 것을 위하는 마음, 이세영
여름이 가실 듯 가시지 않던 9월 어느 날, 사실 이세영은 순서상 사카구치 켄타로보다 먼저 촬영장에 도착했다. 새하얀 잔꽃이 빽빽하게 새겨진 샛노란 민소매 드레스를 입고, 발랄하게 검은색 백팩을 멘 채 말이다. 그가 사뿐히 움직일 때마다 허리까지 늘어진 풍성한 파마머리가 느리게 일렁거렸다. 아직 가시지 않은 여름과 마주한 느낌이었다. “여름이 떠나간다고요? 저에게는 10월까지 여름인데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화 내내 이세영의 답변은 대부분 예측을 벗어났다. 인터뷰를 준비하며 그에 관한 여러 가지 숨은 사실을 많이 알아냈음에도 여전히 그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았던 것이다. 이날 이세영의 ‘출근 룩’ 역시 평소 취향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 했다. “지퍼만 내리면 바로 옷을 갈아입을 수 있어서 입고 온 원피스고요. 사실 평소 즐겨 입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개인적으로 레더 아이템을 좋아하죠.”
이세영은 뭐든 익숙한 게 좋다. 선택을 앞두고 크게 고민하는 법이 없다. 아역 배우로 활약하며 촬영장은 계획대로 되지 않고, 늘 변수가 생기는 장소임을 일찍이 깨달은 영향도 있다.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뭘 먹을까, 뭘 입을까, 고민할 에너지가 저에게는 없어요. 촬영이 있을 땐 맨날 같은 옷을 입고 현장에 가죠. 오늘 먹은 오징어덮밥이 맛있으면 내일도 주저 없이 그걸 고르는 사람이고요.” 하지만 대본은 늘 새롭다. (그의 신념에 따르면 “그래야 한다”.) 게다가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은 일본 배우와 호흡을 맞춘다는 사실 말고도 그에게 수많은 도전 과제를 부여한 작품이다. “자전거, 운전, 노래, 기타, 러닝, 일본어를 배워야 했어요. 그런데 단 하나도 완벽하게 해내지 못했죠.(웃음) 연출과 편집의 도움으로 다행히 촬영은 잘 마쳤지만, 완전히 실패한 도전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과정이 전혀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매력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대본을 읽은 다음 원작 소설을 읽었어요. 최홍의 시점에서 쓰인 책을 먼저 읽고, 그다음 준고 시점에 쓰인 책을 읽었죠. 2개의 시점으로 쓰인 소설이라는 것도 흥미롭고, 문현성 감독님은 또 이걸 어떻게 그려낼지 호기심이 커지더라고요.”
원작 소설을 읽은 다음 이세영이 한 일은 연인으로 마주한 켄타로의 출연작 <남은 인생 10년>을 감상한 것이었다. “엄청 울었어요. 아니, 고마츠 나나가 너무 예쁜 거예요. 그 후 고마츠 나나의 출연작을 여러 편 찾아봤죠.” 역시 이번에도 예측 불가능한 답변. 이세영과 켄타로의 케미스트리도 못지않을 거라 이야기하자 이세영이 가냘프게 웃었다. “사실 켄타로와는 아주 깊이 교류했다고는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정서적으로는 굉장한 친밀함을 느꼈죠.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데도 불구하고요. 그러고 보니 우리, 서로 혈액형도 모르네요.” 촬영하며 켄타로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느낀 순간을 묻자 이세영이 또 한 번 머뭇거렸다. “저는 고생할수록 가까워진다고 믿는 사람인데, 촬영이 그렇게 고생스럽진 않았거든요.(웃음) 마지막까지 서로 배려하는 환경에서 촬영을 마쳤고, 그러다 보니 상대의 인간성이 눈에 띄게 드러난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대화가 진행될수록 이세영은 쉽게 과장하거나 축소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믿음직한 화자였다.
이번에는 사카구치 켄타로라는 배우에게서 받은 인상을 묻자 이세영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듯 말이 빠르게 이어졌다. “목소리가 정말 좋아요.” 켄타로와 똑같은 질문에 대한 정확히 똑같은 답변. “제가 통화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였어요. 일단 본인 촬영이 다 끝났는데도 대사를 받아줘서 고마웠고, 두 번째로는 사전에 서로 약속한 게 아니었는데 켄타로가 저의 정적을 자연스럽게 받아주길래 속으로 ‘우리 좀 잘 맞네’ 싶었죠. 좀 이상한 표현인데 뭔가 예뻐 보이더라고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되게 소년 같아요. 저는 배우라면 나이가 몇 살이든, 연차가 몇 년 차든 순수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믿거든요. 피터 팬처럼요. 그런데 켄타로가 그래요. 눈빛도 항상 생기 넘치고, 장난기도 많고, 현장에서 마음이 늘 열려 있고요.”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나는 켄타로와 이세영에게 비슷한 지점이 꽤 많다고 느꼈다. 두 사람 다 미래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 않고, 솔직한 태도로 현장에 임하며, 역할과 스스로를 분리할 줄 아는 현실감 있는 배우였다. “그런가요? 살짝 경쟁심을 느낄 때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해요. ‘아니, 이건 내 포지션인데?’ 하면서요.(웃음) 켄타로의 한국어 실력도 제 일본어 실력보다 훨씬 빨리 늘더라고요. 어느 날 촬영장에서 켄타로가 꽁꽁 언 한강을 보고 ‘저 얼음으로 빙수를 만들어주세요’라고 말했던 게 기억나요. 정확히 한국어로 그렇게 말했어요. 이거, 웃기고 싶었던 거 맞죠?”
의심 없는 실력을 갖춘 두 배우가 서로 시너지를 주고받으며 훨훨 날아다니는 광경이 얼마나 보기 좋은지, 이세영과 켄타로의 몰입감 좋은 로맨스를 감상하는 관객의 마음은 아무래도 내내 흡족할 듯하다. 그러나 이세영은 로맨스를 여전히 가장 어려운 장르로 꼽는다. <왕이 된 남자>(2019), <옷소매 붉은 끝동>(2021~2022), <열녀박씨 계약결혼뎐>(2023~2024) 등 특히 사극 로맨스에서 진가를 발휘하며 로맨스 연기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랑해야 되니까요. 적어도 연기하는 순간에 저는 상대를 진짜 사랑하려고, 상대에게 진짜 서운해하려고 노력해요. 로맨스는 감정이 들통나기 쉬운 장르거든요. 신경을 더 많이 쓸 수밖에 없어요.”
이번에는 전과 달리 현실적인 사랑을 그려내며 이세영은 ‘사랑을 함으로써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자주 고민했다. “스태프들과 그래서 사랑 후에 과연 무엇이 오는지 함께 이야기한 적 있어요. 온전한 이해, 죽음, 이별··· 다양한 답변이 등장했는데 개인적으로 제일 공감한 건 죽음이라는 것이었어요. 저는 죽을 때까지 사랑하며 살고 싶거든요.” 언어 장벽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타인을 보면서 배우고, 성장하고, 부딪히고, 상처받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믿어요. 완벽한 인간은 세상에 없잖아요.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러운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그 과정에서 상처받더라도 저는 뭔가를 계속 뜨겁게 사랑하면서 살아갈 자신이 있어요. 제 진심을 돌려받지 못해도 괜찮아요.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보람 있거든요.” 순간 30년 가까이 배우로서 그가 어떤 마음으로 촬영장을 오갔을지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2021년 <옷소매 붉은 끝동>으로 MBC 연기대상 미니시리즈 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그리고 2023년 <법대로 사랑하라>(2022)로 제50회 한국방송대상 최우수 연기자상을 수상했을 때 이세영은 매번 자신의 이야기를 아끼고, 함께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표하는 쪽을 택해왔다. 지난해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제 소감보다는 그동안 방송을 위해 헌신해온 수많은 방송인분들께 너무 멋지고, 대단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앞으로도 좋은 방송 많이 만들어주시고요. 저도 좋은 방송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이세영은 아직 만나지 못한 수많은 역할을 상상하면 가슴이 뛴다. 미래에 대한 비전이 불확실한 시기 자신에게 와준 영화 <수성못>(2018)을 한동안 가장 고마운 작품으로 꼽았던 그가 이번에는 다른 작품을 언급했다. “드라마 <화유기>(2017~2018)에서 일인이역으로 연기한 사랑스러운 좀비 소녀 ‘진부자’와 카리스마 넘치는 ‘아사녀’에 아직도 애정이 많이 가요. ‘부자’는 참 할 게 많은 역할이었어요. 아이돌 연습생이라 춤도 춰야 하고, 좀비처럼 움직여야 하기도 했고, 분장도 오래 걸렸거든요. 촬영할 때는 미션을 완수하는 느낌으로 강박적으로 임하느라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이야기의 완벽한 설계 안에서 모든 설정이 잘 맞아떨어졌다는 느낌이 들어서 되게 짜릿하더라고요.” 나이, 직업, 외모, 심지어 좀비라는 설정에도 개의치 않고 이세영은 언제나 역할 그 자체가 되어 이야기에 편안하게 스며든다. “선입견이 안 생길 순 없지만 아직도 더 다양한 연기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절실해요. 역할이 작건, 크건, 전혀 상관없어요. <화유기>의 ‘부자’도 시놉시스에서는 아주 작은 역할로 숨어 있었어요. 그런데 제 눈에는 결코 작아 보이지 않더라고요.” 모든 역할이 운명처럼 그에게 찾아왔다. 꼭 맞는 타이밍에, 꼭 필요했던 모습으로. “<사랑 후에 오는 것들> 역시 너무너무 좋은 시기에 저에게 찾아와줬어요. 결국 제 것이 됐다는 건 필연적으로 제가 꼭 해야만 했던 작품이라는 뜻이죠.(웃음)”
사실 시청자 이세영의 장르적 취향은 로맨스보다는 스릴러 쪽에 치우쳐 있다. “그런 작품이 좋더라고요. 퇴근해서 먹을 것 앞에 두고, 소파에서 ‘이거 보다가 자야지’ 싶은 생각으로 재생 버튼을 누르는 재미있고 흡인력 있는 작품요. 연기하기에는 로맨스가 좋지만··· 언젠가 그런 긴박감 넘치는 액션 스릴러에도 출연하고 싶어요.” 독서 취향은 훨씬 다채롭다. 그는 최근에만 김사과의 <풀이 눕는다>, 심윤서의 <홈, 비터 홈>(이세영의 또 다른 차기작 <모텔 캘리포니아>의 원작 소설이다), 안온의 <일인칭 가난> 그리고 셸리 리드의 <흐르는 강물처럼>을 연달아 읽었다. 매번 새롭지 않아도 충분히 누릴 만한 가치가 있는 삶. 모든 연인에게 그토록 흔한 후회라는 감정이 이세영에게 여전히 낯선 까닭은 그의 시선이 한결같이 지금 이곳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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