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

양지바른 여자, 나가사와 마사미

2017.07.13

양지바른 여자, 나가사와 마사미

일본의 여배우 나가사와 마사미가 한국에 다녀갔다. 12월 개봉작이자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인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들고서였다. 극 중에서 항상 기운 넘치고 밝았던 그녀는 부산에서도 활기찬 에너지를 뿜어냈다. 가을 바다에 잠시 여름의 그림자가 비쳤다.

CSH_8419-2

나가사와 마사미는 지난여름을 바다 마을에서 살았다. 가마쿠라를 배경으로 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새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 네 자매 중 둘째 코우다 요시노를 맡았기 때문이다. 요시다 아키미의 만화를 원작으로 고레에다가 네 자매의 실제 삶을 지켜보듯 찍은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타이틀 그대로 배우들의 일기처럼도 느껴진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출근하거나 학교에 가고, 자매들끼리 크고 작게 싸우는 소소한 일상이 차곡차곡 담겨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배우들이 영화 속에 살게 한다. 2004년 그를 세계에 알린 칸국제영화제 수상작 <아무도 모른다>는 부모 잃은 아이들의 시간을 그저 느긋하게 카메라로 응시한 작품이었고, 2008년 작 <걸어도 걸어도>는 아들을 잃은 가족의 귀향길을 함께 동행하듯 담아낸 영화였다. 다큐멘터리 기법에 가까운 연출 스타일이다.

“언제 촬영을 시작하는지 모를 정도로 배우도, 스태프도 릴랙스된 기분이 있었어요. 물론 긴장은 하지만 감독님이 자연스러운 연기를 원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압력을 주진 않아요.” 아직 젊은 여배우 입장에선 이렇게 무방비한 현장에 지레 겁을 먹을 만도 할 텐데 나가사와 마사미는 그저 천연한 에너지로 현장을 살아냈다. “각본도 매일 바뀌었어요. 감독님이 배우의 의견이나 스태프 의견을 듣고, 혹은 배우들의 연기를 보고, 그날의 공기를 느끼면서 원래 있던 장면을 없애거나, 없던 장면을 새로 만들어 넣거나 했죠. 근데 항상 무리가 없게 느껴지는 게 좋았어요.” 그러니까 나가사와 마사미는 예쁘지 않은 모습이 담기진 않을까, 혹은 망가진 얼굴이 찍히는 건 아닐까 조바심 내는 성미의 여배우는 아닌 거다.

2007년 무렵 일본에선 단관 계열 영화의 인기와 함께 소녀 배우들의 붐이 있었다. 아오야마 신지의 영화, 그리고 <나나> <좋아해> 등으로 알려진 미야자키 아오이나 <하나와 앨리스> <훌라 걸스> 등으로 국내에도 팬을 많이 가진 아오이 유우, 그리고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 영화 <구구는 고양이다>의 우에노 주리 등 80년대 후반에 태어난 여배우들이 함께 활약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전까지 일본은 쓰마부키 사토시, 다마키 히로시 등 청춘 남자 배우들이 중심이었는데 소녀 배우들이 총출동하는 야구치 시노부의 영화 <스윙걸즈> 이후 그 흐름이 달라졌다. 일본의 영화 전문지 <키네마 준보>는 “지금 일본 영화는 (미야자키 아오이와 아오이 유우를 함께 지칭해) W아오이와 나가사와 마사미가 두 축이다”라 평가할 정도였다. 그리고 나가사와 마사미는 그 멤버 중 가장 대중적인 얼굴의 소녀 스타였다. 아오이 유우가 교실 가장 뒷자리에 앉아 홀로 몽상에 빠져 있는 학생이라면 나가사와는 스포츠부의 매니저를 자처하며 활기차게 뛰어다니는 학생에 대응한달까.

1999년 일본의 최대 연예 에이전시 도호의 ‘신데렐라 오디션’에서 우승해 데뷔한 나가사와 마사미는 이후 꾸준히 출연작을 늘려갔다. 데뷔작인 SF <크로스 파이어>부터 코믹한 청춘물 <로보콘>, 그리고 그녀를 스타로 만들어준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와 각각 야구와 다이빙을 소재로 한 <터치>와 <러프> 등. 대부분 청순하고 맑은 기운을 뽐내는 영화였고, 어디서든 무드 메이커의 역할을 자임하는 캐릭터였다. “사실 모델을 하고 싶었어요. 어릴 때부터 키가 컸고, 패션 잡지도 좋아했거든요. 돈이 없어도 좋은 옷 입을 수 있을 것 같았고.(웃음) 그러다 연기를 하게 된 건데 사실 초반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했죠. 젊을 때는 소위 아이돌 영화를 많이 했고요. 그래서 밝고 경쾌한 이미지였던 것 같아요.” 시즈오카의 바다 마을 이와타 시에서 뛰어놀다 상경한 열네 살 소녀는 14년이 지난 지금 일본 대중의 완벽한 스타가 되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에는 항상 죽음이 어른거린다. 데뷔작인<환상의 빛>은 남편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영화였고, 두 번째 장편 <원더풀 라이프>는 생과 사의 경계 ‘림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바닷마을 다이어리>에는 장례식을 포함해 모두 세 번의 제사가 있다. 한 번은 딸들을 뒤로한 채 새살림을 차렸던 아버지의 장례식이고, 또 한 번은 네 자매의 할머니 제사며, 마지막 한 번은 단골 식당 여주인의 장례식이다. 사건으로만 본다면 꽤나 하드코어한 막장 드라마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죽음의 충격을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죽음 이후의 풍경이나 소중한 사람을 잃고 남겨진 이들의 일상에 마음을 쓴다. 영화는 세 자매가 갑자기 나타난 배다른 동생을 받아들이는 이야기이기도 한데 그 과정이 곱고 아름답다. 그리고 둘째 요시노를 연기한 나가사와 마사미가 아프고 쓰리기 마련인 가족 간의 상처의 시간을 활기차게 이끌어간다.

“촬영 전 감독님, 스태프들과 만나 인사하는 자리였는데 고레에다 감독님과 눈이 마주친 순간이 있었어요. 그때 그 시선이 ‘요시노, 부탁한다(웃음)’ 같은 느낌이었달까요. 네 자매 모두 친하게 지내는 가운데 요시노가 때로는 좋고, 또 때로는 나쁜 사건을 일으키죠. 태풍까지는 아니지만 어떤 일의 소용돌이요,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역할이랄까요.”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 나가사와 마사미는 브래지어 차림으로도 태평하게 집 안을 돌아다니고, 남자 친구에게 차인 뒤에도 맥주 한잔에 잊어버린다. 고레에다 감독의 설명대로 “자유분방한, 새 남자를 찾아 딸을 두고 떠난 어머니가 가장 많이 겹치는” 캐릭터인 거다. 그리고 이는 <바닷마을 다이어리>가 상처 가득한 가족의 이야기임에도 따뜻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어디부터가 촬영이고, 어디까지가 촬영 이외의 시간인지 경계가 모호해진” 현장의 시간 속에서 나가사와 마사미는 그냥 코우다가의 둘째 딸 요시노가 됐다.

국내에선 주로 청춘 영화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탓에 <바닷마을 다이어리> 속 나가사와 마사미의 모습은 다소 의외로 느껴질 수도 있다. 일단 그녀는 교복 차림이 아니고, 학교가 아닌 직장으로 출근하며, 영화 오프닝에선 남자 친구와의 베드신도 있다. “저도 이제 스물여덟이고, 연령과 함께 작품 속 역할도 나이를 먹어간 게 아닌가 싶어요. 어릴때는 그때 나이에 맞는 작품이 많았고, 이제는 또 더 어른스러운 역할을 하고요.” 하지만 조금씩 무게감을 더해가는 그녀의 근래 필모그래피가 단지 한두 살씩 늘어가는 나이 때문은 아니다. 나가사와 마사미는 단순한 대중 스타로는 남고 싶어 하지 않는, 아티스트로서의 욕심을 품고 있다. “오디션 없이 제가 작품을 고를 수 있게 된 게 최근 3~4년 정도예요. 그러면서 작품을 할 때 ‘단지 여배우로서 현장에 있다’는 느낌만으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작품을 함께 만들어가는 사람으로서의 인식이 명확해야 한달까요. 단순한 동경이 아닌 내가 이 영화에 대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것을 명확히 보여줄지에 대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고요.

나가사와 마사미는 지난 5월 <바닷마을 다이어리>로 칸국제영화제에 다녀왔다. 2013년엔 대만 드라마 <쇼콜라>를 찍으며 중국어 대사를 익혔고, 또 다음 해엔 오우삼 감독의 <태평륜> 연작을 촬영했다. 장쯔이, 금성무, 송혜교 등이 출연한 대작이다. “스무 살 지나면서부터 배우로서의 자각이 생긴 것 같아요. 예전엔 직업이 여배우라 말하는 게 부끄러웠고, 지금도 일부러 말하는 일은 별로 없지만, 또 여배우 일을 하면서 여배우라고 말하는 데 주저하는 것도 책임감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영화제 참가하면서, 합작 영화를 하면서 국적이 다르다는 게 개성이란 생각도 했고요.” 그저 맑은 미소의 ‘신데렐라 걸’ 나가사와 마사미는 이제 확실히 어엿한 숙녀가 되었다. 양지 한편의 짙은 그늘도 즐길 줄 아는 여배우로의 성장이다.

    에디터
    정재혁
    포토그래퍼
    PARK JI WOO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