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엄태화 감독, 먼지와 꿈 사이에서

2025.05.22

엄태화 감독, 먼지와 꿈 사이에서

무주산골영화제가 선정한 ‘디렉터즈 포커스’의 첫 번째 주인공이자 지금 가장 뜨거운 감독으로 꼽히는 엄태화.
부조리에 떠밀린 이들과 회색 사회를 판타지에 절묘히 비추고 있다.

해마다 6월, 청량한 무주 덕유산 일대에서 열리는 무주산골영화제가 13회를 맞았다. 영화 애호가들의 즐거운 낙원으로 정평이 난 영화제는 올해 특별한 프로그램을 신설했다. 세 편 이상의 장편영화 또는 OTT 시리즈물을 연출한 상업 영화 감독 가운데 흥미로운 영화 세계를 그려나가는 경우를 집중 조명하는 ‘디렉터즈 포커스’다. 첫 번째 주인공은 장편영화 <잉투기>(2013)로 데뷔해 <가려진 시간>(2016),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를 거치며 시대의 공기를 예민하게 감각해 영화적 상상력으로 그려내고 있는 엄태화 감독이다. 한국 영화 산업의 전에 없는 위기 속에서도 대중과 평단의 고른 지지를 받는 그의 영화를 집중 조명하며 한국 영화를 응원하고 길을 모색하려는 시도다. 6월 6일부터 8일까지 열리는 영화제 기간에 엄태화 감독의 장·단편 영화를 두루 상영하며 관련 토크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그 산들바람을 맞기 전 감독을 미리 만났다.

‘디렉터즈 포커스’의 첫 번째 주인공이다.

영광이다. 나야말로 이번 기회로 단편 작업부터 돌아보며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가면 좋을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것 같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촬영을 마치고 지난 영화들을 가만히 떠올려보니 장르는 달라도 묘하게 이어졌다. ‘집’에 대한 관심은 <신봉리 우리집: 흔한 이야기>(2010), <유숙자>(2010) 때도 있었고,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명화·민성 부부와 영탁의 관계를 상기해보면 삼각관계의 미묘한 갈등이라는 측면에서 <숲>(2012)도 떠오른다. 매번 다른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여기지만, 내 무의식의 기반에는 이런 게 있구나, 이어지는 게 있나 보다 싶다. 다음 영화는 또 어떨지 궁금해진다.

무의식이라고 표현했는데, 꾸준히 관심 두는 것을 놓치지 않고 그러모으는 작업 방식의 다른 말 같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이사를 많이 다니면서 오히려 뭔가를 잘 못 버리게 됐다. 짐을 줄여야 하다 보니 이것저것 버려야 했는데 정작 그때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궁금해도 찾아볼 자료가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인지 반대로 뭔가를 잘 못 버린다. 영화를 찍는 것도 맞닿아 있는 듯하다. 내가 언젠가 느낀 기분, 봤던 것들을 모아 내 안에서 일종의 화학작용을 일으켜 영화 매체로 나오는 게 아닐까. 지난 시절의 나뿐 아니라 어떤 시기를 붙잡아두고 그려보고 싶다.

일상의 경험과 관심을 시각화하는 데 어린 시절부터 즐겨 봐온 만화 또는 그림이 중요한 방편인 듯싶다. 당신 영화를 보면 만화 캐릭터 같은 인물이나 만화 같은 설정, 이미지가 떠오른다.

미취학 아동 때 집으로 VHS 만화 비디오가 배달되면 일주일에 한 편 이상씩 꼭 챙겨 봤다. <드래곤볼> <슬램덩크>를 보고 따라 그리기도 했다. 동생(배우 엄태구)이 인터뷰 때 많이 얘기했는데 둘 다 <명견 실버>를 엄청나게 좋아해 테이프가 닳도록 봤다. 지금도 심심할 때면 틀어놓는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작업 때 음악 감독님께 이 만화 음악을 들려드리고 레퍼런스로 삼아보자고 제안했다. 만화가 영화보다 상상력을 더 넓게 펼쳐볼 수 있는 매체 같다. 본격적으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만화를 더 챙겨 봤다. 만화적인 설정, 이를테면 시간이 멈춘다든지 세상이 망한다든지 하는 것을 참고하게 된다.

퍼넬넥 코튼 포플린 셔츠, 코팅 코튼 소재 라이더 블루종, 빅 사이즈 치노 팬츠는 르메르(Lemaire), 레이스업 슈즈는 토즈(Tod’s).

언제 어떤 계기로 영화를 만들기로 했나?

그림 그리기를 참 좋아했다. 만화도 따라 그리고 미화부장도 했다. 그러다 미대에 입학해 디자인을 공부했다. 휴학 기간에 CF 현장 아르바이트를 거쳐 영화미술 팀 일을 했는데 영화 현장이 아주 재밌었다. 돌아다보니 초등학생 때도 학예회를 하면 내가 대본을 쓰고 친구들을 모아 극을 올리곤 했다. 그 기억도 떠오르면서 영화야말로 하고 싶은 일일 거 같았다. 복학했을 때 마침 영상디자인과가 신설돼 자연스럽게 영화 수업을 들었고, 졸업 작품 <선인장>(2003)을 찍었다. 졸업 후, 박찬욱 감독님이 연출한 가수 이승열 씨의 뮤직비디오 작업을 시작으로 <쓰리, 몬스터>(2004), <친절한 금자씨>(2005), <파란만장>(2011, 감독 박찬욱, 박찬경)의 연출부 일을 했다. 그리고 한국영화아카데미에 들어가 데뷔작 <잉투기>를 만들었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현피 문화’를 그린 <잉투기>, 세월호와 애도의 시간을 돌아보는 <가려진 시간>, ‘아파트 공화국’으로 명명되는 한국 사회가 떠오르는 <콘크리트 유토피아>까지. 시대라는 텍스트 또는 콘텍스트와 접속하는 영화를 만들어왔다.

장편을 세 편 찍고 보니 의외로 내가 사회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잉투기> 때 처음에는 ‘잉투기 대회’가 그저 웃기고 재밌어 보여 블랙코미디로 그려보자 싶었다. 근데 막상 준비 과정에서 그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에 대해 알게 되자 내가 그들을 지나치게 희화화하려는 건 아닌지 반성했다. 그러면서 실은 그들과 내가 별반 다르지 않구나 싶었고 2012년 청춘들의 이야기를 그려보고 싶었다. 2012년 판 <바보들의 행진>(1975, 감독 하길종)이랄까. <가려진 시간>도 애초부터 지금과 같진 않았다. 당시 쓰고 있던 스릴러물이 있었는데 배가 침몰하는 장면이 있었고 그때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거다. 내가 안산에서 초중고를 다 나왔다. 그러다 보니 내게도 세월호가 트라우마가 됐다. 그렇게 기존 작업을 엎고 다시 썼다. 당시에는 영화와 세월호를 바로 연결하기가 조심스러운 면이 있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김숭늉 작가의 <유쾌한 왕따>를 재밌게 읽으면서 관심을 뒀다. 아파트에 살아본 나도 그렇지만 한국인에게 아파트는 익숙한 곳이니까. 그런 익숙한 곳에서 만화에서처럼 재난 상황이 일어난다면 어떨까 떠올리니 자연스럽게 사회적인 이슈가 들어갔다. 한국을 압축적으로, 함축적으로 그리는 공간이 됐다. 뭔가가 나를 사회적인 이야기로 데려가는 듯하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집이라는 주거 공간, 집으로 대변되는 가족 또는 공동체의 복잡 미묘한 관계, 아파트라는 공간을 둘러싼 욕망,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이라는 그간의 관심과 시도의 총체로 보인다.

아파트라는 공간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게 아닐까. 디스토피아, 아포칼립스라는 설정에 대한 관심은 어린 시절 본 <터미네이터>(1984, 감독 제임스 카메론)의 영향도 있을 거다. 코즈믹 호러 장르와 그 세계관에 관심이 많다. 쓰고 있는 시나리오 가운데도 그런 유가 있다. 인간은 알 수 없는 어떤 존재, 그런 존재에 의해 벌어지는 상황, 그런 환경 속에서 인간들이 지지고 볶는 것이야말로 내가 보고 있는 세상이다. <잉투기>를 봐도 웹 세상이 디스토피아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심해졌다.

당신이 그리는 인물들은 대체로 무리나 집단, 공동체의 믿음과 상식에 균열을 내거나 그로부터 어긋나 있을 때가 있다. 노숙자, 잉여라고 불리는 사람들, 기존 질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겪는 이들, 성적 지향으로서의 퀴어뿐 아니라 기이하고 괴상하다는 의미로서의 퀴어를 포함한다.

그렇게 봐준 게 흥미롭다. 내가 회색분자 같은 면모가 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통해 세상이 흑백만 있는 게 아니라 회색 영역이 있다는 것, 여러 색이 섞인 지점이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귀가 얇다.(웃음) 이 사람 얘길 들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고, 저 사람 얘길 들으면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어딘가 이상해 보이는 사람을 봐도 뭔가 이유가 있겠지 하며 그걸 찾아보려고 한다. 절대 악에도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지나치게 연민 어린 시선으로 인물을 그릴 위험이 있다는 것도 알기에 조심스럽다. 어딘가 모나고 튀어나와 있는 듯한 인물에 관심이 가고 그들의 전사가 궁금한 건 분명하다.

캐시미어 트위드 코트는 로로피아나(Loro Piana), 퍼넬넥 코튼 포플린 셔츠, 빅 사이즈 치노 팬츠는 르메르(Lemaire), 레이스업 슈즈는 토즈(Tod’s).

낯설고 모난 인물을 향한 다수의 반감, 불편함, 혐오를 그리는 동시에 모난 인물뿐 아니라 인간을 향한 연민의 정서도 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명화의 대사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었어요”가 응축하고 있듯.

혐오만 해서는 답이 없었다. 나도 당신도 다 불쌍한 인간 아닌가. <잉투기>를 만들며 그런 생각을 많이 했고 그러면서 연민이라는 키워드를 떠올렸다. 물론, 모두를 다 연민하게 될 때 갖는 위험성도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장편 작업을 거듭하면서 그런 생각을 더 하게 됐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때 리얼리티를 가장 많이 신경 썼다고 했다. 판타지 장르 안에서 핍진성을 높이고 현실성을 부여한다는 건 뭘까?

만화를 좋아해 만화 같은 설정을 가져오지만, 만화처럼 보이는 데는 거부감이 있다. 강박적으로 진짜처럼 보이길 바란다. <가려진 시간> 때도 영화 속 세상이 진짜처럼 보이길 바랐다. 영화의 세계에 나름의 규칙을 만들어나갔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도 아포칼립스라는 판타지 세계지만 한국의 아파트와 그곳에서 벌어진 재난 상황에서 한국인이 어떻게 대처해나갈까를 노골적으로 보여주기에 조금이라도 가짜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집의 시간들>(2018, 감독 라야) 같은 다큐멘터리도 찾아봤고, 실제 철거하는 아파트 단지에 가서 소품으로 쓸 만한 것도 많이 가져왔다. 고증을 철저히 했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판타지 같은 일이라고 했을 때 한국 사회가 더없이 잘 드러나야 한다고 여긴다. 그래야만 ‘아, 이게 정말 우리들 이야기구나!’ 하며 보게 된다.

부조리한 사회를 그리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 이를테면, 인물들이 보여주는 엉뚱하고 느닷없는 액션이다.

웃기고 싶다는 욕망은 늘 있다.(웃음)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는 이병헌 선배님 덕분에 더 많이 시도해볼 수 있었다. 선배님께서 처음 시나리오를 읽고는 블랙코미디로 봤다고 한다. 반상회 장면을 찍는 과정에서 “우리 영화 웃긴 영화군요!”라고 말씀하셔서 “맞습니다. 더 편히 해주셔도 됩니다”라고 했더니 그때부터 정말 날아다니셨다. 선배님의 유머가 타율이 아주 높다.

엄태구 배우를 비롯해 단편부터 작업해온 배우들이 장편에서도 역할 비중에 상관없이 등장한다.

배우들을 참 좋아한다. 너무 사랑스러운 존재들이다. 자신이 아닌 인물을 연기하고, 한껏 몰입했다가 막 달려와서 모니터링하는 모습이 순수한 원석 같다.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서 영화 산업의 현재를 어떻게 평가하고, 이후를 어떻게 전망하나?

영화 산업의 규모는 축소될 거라 예상한다. 실제로 투자가 정말 많이 줄었다. 그럼에도 극장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서 영화를 본다는 건 그것만의 독자성이 있으니까. 오히려 관객이 영화를 고르는 기준이 높아졌고 까다로워졌음에 주목한다. OTT로도 편히 영화를 볼 수 있는데 굳이 극장에 가는 건 그만큼 특별한 경험을 원하기 때문이다. 영화만 재밌다면, 관객은 분명 극장을 찾는다. 그럴수록 영화의 본질이 무엇인지, 영화를 왜 보는지, 재밌는 영화란 뭔지에 골몰한다.

차기작 준비가 한창인 것으로 안다.

이번에도 아파트가 나온다. 아파트, 부동산을 둘러싼 미스터리, 호러 장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인간 군상에 집중했다면, 이번에는 좀 더 개인의 이야기로 들어간다. 집에 대한 욕망을 대표하는 영탁 같은 인물을 더 파고든다. 캐스팅 중이고 잘 진행된다면 올해 찍는 게 목표다. (VK)

    피처 디렉터
    김나랑
    컨트리뷰팅 패션 에디터
    송보라
    포토그래퍼
    김수진
    정지혜(영화 평론가)
    헤어
    최은영
    메이크업
    김지현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