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적으로’ 과거를 소환 중인 빈티지 시계
빈티지 시계에 대한 끈질긴 관심은 단종된 모델을 되살리는 걸 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과거의 브랜드를 현재로 소환하고 있다.

보베(Bovet), 랑에 운트 죄네(A. Lange & Söhne), 자케 드로(Jaquet Droz), 율리스 나르덴(Ulysse Nardin)의 공통점은? 삐, 잘나가는 하이엔드 시계 브랜드! 땡, 그렇게 쉬운 질문이 아니다. 정답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가 부활에 성공한 하이엔드 워치 브랜드라는 것. 위풍당당한 지금의 위상에 비하면, 과거에 겪었던 굴욕과 부침 따위는 이들에게 웃어넘길 수 있는 추억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시간의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잠들어 있는 시계 브랜드의 수는 적지 않은데, 최근 빈티지 워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동면 상태에 있던 그들이 일제히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물론 가장 좋은 브랜드는 가장 야심 찬 사업가의 몫이다. 라 파브리끄 뒤 떵의 장인들에게 시계사의 아이코닉한 두 인물, 다니엘 로스와 제랄드 젠타의 시계 브랜드 부활을 일임한 루이 비통은 얄미울 정도. 브라이틀링 CEO 조지 컨(Georges Kern)은 빈티지 시계 수집가들 사이에서 광풍을 일으킨 유니버설 제네브(Universal Genève)를 낚아채는 데 성공했고, 몇 달 전에는 갈레(Gallet) 인수 소식까지 알렸다. 전 율리스 나르덴 CEO 파트릭 호프만(Patrick Hoffman)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시계 브랜드 파브르 뢰바(Favre Leuba)의 재론칭을 준비 중이다. 미국 3대 시계 브랜드의 하나였던 벤루스(Benrus)도 컴백 초읽기에 들어갔다. 어디선가 들리지 않나? 째깍째깍, 초조하고 분주한 초침 소리가.
“최근 50년간 가장 기대되는 재론칭이라고 할 수 있죠.” 올해도 벌써 반이 지났지만, 시계 마니아들은 목이 빠지게 내년을 기다리고 있다. 조지 컨의 말대로 모두를 설레게 만든 건 유니버설 제네브의 부활 때문. 유니버설, UG 또는 유제니(U-Genny)라는 깜찍한 별명으로 불리는 이 브랜드는 파텍 필립의 저렴이 버전으로 빈티지 워치 시장에서 급부상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말하는 UG의 진짜 매력은 1894년 론칭 당시의 다채로운(괴짜스럽게 느껴질 정도) 포트폴리오. 항공기 조종사와 우주 비행사는 물론 영화감독, 심지어 은행원을 위한 크로노그래프도 제작한 적 있는데, 예를 들어 영화와 TV 제작자를 위한 시계 ‘필름 컴팩스(Film Compax)’에는 사용한 영화 필름 롤의 양을 초와 분당 피트 단위로 측정할 수 있는 눈금이 새겨져 있다(강박적인 시계 수집가들은 출시한 지 80년이 지난 이 모델이 현재 전 세계에 7피스 남아 있다는 것까지 밝혀냈다!). ‘폴라우터(Polerouter)’도 UG의 대표적 모델로, 1954년 스칸디나비아 항공사가 처음으로 미국-유럽 노선을 개설할 때 의뢰해 탄생한 시계다.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에서 유럽으로 향할 때 자기장이 가장 강한 북극을 지나야 하기에 조종사와 승무원에게 반자기장 시계가 필요했고, 당시 무명의 주얼리 디자이너였던 제랄드 젠타가 디자인을 맡은 이 모델은 UG 시계 모델의 원형으로 자리 잡았다. 인덱스의 숫자 표기까지 최소화해 심플하고 우아한 다이얼은 그야말로 시계 미학의 정점.
조지 컨은 이 흥미로운 브랜드를 ‘제대로’ 되살리고 말겠다는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게 확실하다. 30여 명의 빈티지 UG 수집가를 섭외해 ‘성덕’ 고문단을 구성한 그는 중요한 판단이 필요할 때마다 예의 바르게 그들의 의견을 물어본 후 일을 진행시키고 있다. 빈티지 시장에서 부상하게 된 이유에 착안해 접근 가능한 ‘캐주얼 럭셔리’ 카테고리로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것 또한 용의주도한 계획의 일부다(‘접근 가능한’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주관적인지 잊지 말자. 컨이 정한 UG의 판매 예상 가격은 2,500만원대다). “세련된 취향을 가진 부유층도 애플 워치를 착용합니다. 하이엔드 기계식 시계에서 원하는 걸 찾을 수 없기 때문이죠. 그들을 겨냥해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려 합니다.”
어쩌면 뒤이어 재등장할 갈레가 진정으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게 되지 않을까? 가격 면에서 말이다. 2026년 중반부터 500만~800만원대 가격표를 붙이고 브라이틀링 부티크에서 판매를 시작한다는 소식은 조금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지난 5년 동안 평균 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한 브라이틀링의 자매 브랜드로 새로운 고객층을 사로잡는 것이 주요 임무. “매장에 왔다가 가격이 너무 비싸서 돌아가는 고객이 많았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제안할 대안이 생긴 거죠.” 그렇다고 1826년 설립된 갈레의 역사를 가벼이 여기는 건 금물이다. 1903년 라이트 형제가 처음으로 동력 유인 비행에 성공했을 때 그들이 사용한 포켓 워치와 스톱워치도 갈레 제품이었고, 1939년에는 최초의 방수 크로노그래프 시계를 제작한 브랜드 중 하나였다.
이쯤 되면 부활한 시계 브랜드인 만큼 역사가 ‘확실히’ 오래된 브랜드는 뭘까, 궁금해진다. 1737년에 시작된 파브르 뢰바의 기록은 시계 발전의 연대기라 할 만하다(참고로 파브르 뢰바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시계 브랜드 2위로 밀어낸 블랑팡은 뢰바보다 2년 앞선 1735년에 설립됐다). 스위스 르로클(Le Locle)의 시계 장인 아브라함 파브르(Abraham Favre)가 시작했다는 역사의 서두부터 꽤 예스러운 이 브랜드는 1865년 영국령 인도로 진출하면서, 해외 진출한 최초의 스위스 시계 브랜드라는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파브르 뢰바의 가장 큰 성취는 1962년 아네로이드 기압계를 장착해 고도와 기압 측정이 가능한 최초의 기계식 손목시계 ‘비브왁(Bivouac)’의 탄생이다. 당시로서는 21세기 스마트 워치의 등장에 비할 만한, 혹은 그보다 훨씬 더 혁신적인 시계사의 지각변동이었다. 1964년 세계적인 등반가 월터 보나티(Walter Bonatti)와 미셸 보쉐(Michel Vaucher)가 알프스의 악명 높은 그랑드조라스 휨퍼 피크 북벽을 최초로 정복한 나흘 동안, 캠프를 설치하고 흉포한 날씨가 잠잠해지길 기다릴지 계속해서 나아갈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비브왁의 작은 다이얼에 표시된 고도계와 기압계였다. 이후로 이 모델은 여러 탐험가들이 고산 등반과 극지 탐험에 필수 도구로 착용하며 상징적인 시계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1985년 파브르 8대손이 매각한 후, LVMH와 인도의 타이탄 컴퍼니(Titan Company)를 비롯해 다섯 번이나 소유주가 바뀌면서 파브르 뢰바는 꽤 고단한 시기를 보내야 했다. 거의 바뀔 때마다 재기를 시도했지만, 마녀의 저주라도 받은 것처럼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했기 때문. 그러던 중 2023년 인도 대기업 KDDL의 스위스 자회사 실버시티 브랜드(Silvercity Brands)가 파브르 뢰바를 인수했고, CEO로 영입한 파트릭 호프만이 재론칭 작업에 공을 들이고 있다. 그는 지난 10년간 시계 시장에 일어난 변화가 기회가 됐다고 설명했다. 경기 침체로 다른 브랜드에서 제조량을 줄이고 주문을 취소한 덕에, 장인들이 한가해지고 자재가 남아서 새로운 컬렉션을 준비해 완성하기까지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는 것. “인지도 높은 몇몇 브랜드가 가격을 인상하면서 우리가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시계 시장의 성장 가능성 역시 우리가 자리한 틈새시장에 있다고 봅니다.” 재론칭과 함께 출시한 새 컬렉션의 가격은 300만원대 후반인 가장 심플한 디자인의 ‘딥 블루(Deep Blue)’부터 700만원대인 ‘치프 크로노그래프(Chief Chronograph)’ 사이다. 600만원대로 출시한 ‘시 스카이(Sea Sky)’는 빈티지 다이버 워치 디자인을 재현한 크로노그래프 시계로, 인기를 끌기 위해 작심하고 레트로 트렌드를 적극 반영한 모델이다. “오늘날 소비자들은 과거를 향하고 있어요. ‘제네바 워치 데이즈 2024’에서 처음 선보였을 때 제품군에서 우리가 옳았다는 게 입증됐습니다.”
잠재력을 지닌 빈티지 시계 브랜드가 스위스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거의 대부분 스위스 브랜드인 것은 사실이지만). 해밀턴, 부로바와 함께 미국 3대 시계 브랜드로 꼽히는 벤루스도 지난 4월 열린 ‘타임 투 워치스’에서 부활 소식을 알렸다. 우리나라에서는 ‘밀덕’ 사이에 미 군용 시계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1960년대 연간 100만 개를 생산할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한 브랜드다.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배우 스티브 맥퀸, 대서양을 횡단한 조종사 찰스 린드버그, 야구 선수 베이브 루스 등 미국의 아이코닉한 인물들이 착용한 걸로 유명하다.
사모펀드의 인공호흡을 받고 있는 벤루스는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 브랜드와 군용 시계라는 정체성에 ‘올인’해 ‘가열차게’ 밀어붙이고 있다. 사무실도 1921년 설립 당시 본사가 있던 맨해튼 미드타운 6번가의 히포드롬 빌딩에 다시 마련했다. 새로 출시한 모델은 배우 스티브 맥퀸이 1968년 영화 <블리트(Bullitt)>에 차고 나온 3061을 재해석한 ‘3061 GT’와 1962년 베트남전에서 미군이 착용한 군용 시계에서 영감을 얻은 34mm 시계 ‘DTU 팬텀’. 혹시 벤루스 인스타그램 계정을 보고 3061 GT보다 DTU 팬텀 쪽이 맥퀸 본인의 시계였던 오리지널 3061과 훨씬 더 비슷하다고 느꼈다면, 나쁜 시력 탓이 아니다. 3061은 1960년대 군용 시계로 탄생한 DTU-2A/P의 민간인 버전(민간인 버전이라니, 쿨하다!)으로, 소재와 미세한 디테일 차이만 있을 뿐 기본적으로 동일한 모델이다(그리고 어쨌든 오리지널을 복각한 3061 BU도 출시했다. 클래식한 군용 시계를 찾아 헤매는 밀덕들을 놓쳐선 안 되니까). ‘타입 1’과 ‘타입 2’는 1970년대 네이비실(미 해군 특수부대)과 미 육군 저격수가 착용한 모델과 흡사한 방수 시계다(가슴이 웅장해진 자, 군용 시계의 세계로 온 걸 환영한다). 올해 정식 론칭을 앞두고 2020년부터 한정판 시계를 소량 출시하며 시장 반응을 살펴온 벤루스의 가격은 100만원대 초반부터 200만원대 후반이다.
그 외에도 최근 몇 년 사이 먼지를 털고 일어난 브랜드의 수는 상당하다. 스위스 사업가 해리 굴(Harry Guhl)은 활동을 중단한 시계 제조사의 이름이나 브랜드의 지식 재산권을 취득해 재판매하는 사업을 하고 있으며 그가 재론칭으로 이끈 브랜드만 해도 17개가 넘는다. 하지만 모든 브랜드가 재론칭에 성공하진 않기에 그가 시도한 브랜드는 훨씬 더 많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알 만한 역사적인 시계 브랜드(위에 언급한 브랜드를 포함해)는 거의 모두 부활했거나 이미 누군가에게 인수된 상태다. “그런 브랜드는 전부 역사적 유산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재기를 시도할 만합니다. 중요한 목표는 목적의식과 믿을 수 있는 품질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거죠. 성공적으로 부활한 브랜드가 처음 출시한 모델을 살펴보면 그들이 왜 성공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브랜드는 재기를 시도할 최소한의 조건은 충족한 듯하다. 하이엔드와 보급형 사이 가격대를 공략하면서 기술력과 헤리티지까지 갖춘 새로운 카테고리를 제시한 것 또한 상당한 매력 포인트. 한때 그들만의 리그였던 디자이너 패션이 2000년대 이후 ‘민주화’되는 과정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빈티지 시계 브랜드의 부활은 시계 시장에 일어나는 민주화 운동의 신호인지도 모른다. (VK)
- 패션 디렉터
- 손은영
- 글
- 송보라
- 사진
- GETTYIMAGESKOREA / COURTESY OF BREITLING, BENRUS, FAVRE LEU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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