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로에베의 고향, 공예의 나라에서

2025.06.26

로에베의 고향, 공예의 나라에서

로에베 재단 공예상이 마드리드로 금의환향했다. 어느 때보다 많은 인파 속에서 로에베가 공예의 위상을 끌어올렸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번 행사의 무대가 된 마드리드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회화 컬렉션을 보유한 공간과 색감이 돋보이는 올해 후보작이 아름답게 어우러졌다.
마드리드에서 개최된 2025 로에베 재단 공예상 전시는 6월 29일까지 관람객을 만난다.

마드리드 바라하스 공항에 도착한 것은 자정이었다. 낯선 분위기에 경계심이 곤두서는 것을 느낀 나는 인스타그램 앱을 켰다. 오전 7시 한국에서 실시간으로 업로드되는 소식을 마주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스크롤을 내리자 로에베가 카파도키아에 쏘아 올린 거대한 토마토 열기구와 런던 셀프리지스 백화점에서 팝업 스토어를 선보이며 힙스터들을 줄 세운 로에베 말차 스무디가 연달아 등장했다. 그러는 사이 체크인 완료. 객실로 들어가니 이번에는 토마토 향초가 놓여 있었다. 로에베의 세계관으로 깊숙이 진입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COURTESY OF LOE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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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공식 일정은 2025 로에베 재단 공예상 최종 후보 30인과 디자인, 건축, 저널리즘, 큐레이션 등 여러 분야를 대표하는 심사위원 및 전문 패널들이 자유롭게 교류하는 자리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만남의 장이 된 미쉐린 그린 스타 레스토랑 트라모(Tramo)는 공예에 관한 흥미롭고 진중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도록 싱그러운 음식과 샴페인, 무알코올 진토닉을 계속 내보냈다. 예술가와 심사위원, 취재진이 모두 어우러지는 풍경을 위해 로에베에서 세심하게 자리를 배치한 덕분에 올해 공예상 최종 후보 30인에 포함된 3명의 한국 작가들과도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 아름다운 오브제의 기능을 강조한 다른 후보작과 달리 명확한 용도를 지닌 이정인, 류연희, 신선이 작가의 작품은 유난히 친숙하고 반가웠다. 이정인 작가는 100겹의 한지로 제작한 구조적인 의자(A Soft Landscape)를, 류연희 작가는 구리로 만든 비정형적인 바구니(Baguni)를, 신선이 작가는 정교한 은입사를 새긴 3단 접시(Embracing Lotus)를 선보였다. 서로의 작업에 관한 격의 없는 대화가 무르익는 도중, 뒤늦게 합류한 한국조형디자인협회 조혜영 이사장이 적절한 타이밍에 부르짖었다. 그는 2021년부터 로에베 재단 공예상의 전문 패널로 활약 중이다. “평범한 항아리는 이제 재미없어요! 좀 색다른 걸 보고 싶어요. 이정인 작가의 구름처럼 떠다니는 듯한 의자, 정말 멋지지 않나요?”

쿠니마사 아오키의 ‘Realm of Living Things 19’이 2025 로에베 재단 공예상 최종 수상작이다.

그녀의 발언은 지극히 주관적이었지만, 이번 후보작에서 느낀 개성과 맞닿은 지점이 있었다. 보도 자료를 통해 분명히 밝혔듯, 올해 로에베는 전통 공예 기법을 현대 작가의 시선에서 마음껏 탐구하고 변형한 창의적인 작품에 매료된 듯 보였다. 그런 점에서 유리와 은, 낙엽 등의 익숙한 소재를 새로운 방식으로 시험한 일본 작가들이 강세를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올해 최종 후보에는 총 5명의 일본 작가가 이름을 올렸다). 다음 날 성사된 인터뷰에서 로에베 재단 회장 쉴라 로에베(Sheila Loewe)는 흥미로울 거라고 운을 떼며 심사 과정의 뒷이야기를 들려줬다. “아주 오래된 기술이 적용된 작품이었어요. 겹겹이 쌓은 클레이 코일을 압축하고 그걸 가마에서 구웠는데 기술 수준이 그 정도로 높지 않았다면 제작 과정에서 산산조각 나고 말았을 겁니다. 뛰어난 디테일이 돋보인 그 작품에 대해 어떤 심사위원은 “3D 프린터가 이걸 보고 배워야겠군요!”라고 말했을 정도예요. 이런 공예야말로 AI의 위기를 비롯해 온갖 신기술이 우리를 피로하게 만드는 세상에서 무사히 존속할 수 있을 거라 느꼈습니다.” 쉴라 로에베가 언급한 그 테라코타 작품은 쿠니마사 아오키(Kunimasa Aoki)의 ‘Realm of Living Things 19’으로 2025 로에베 재단 공예상 최종 수상작이다.

아름다운 오브제의 매력을 강조한 다른 후보작과 달리 명확한 용도를 지닌 이정인 작가의 작품이 유난히 친숙하고 반가웠다. COURTESY OF LOE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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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처음으로 심사위원에 합류한 건축가 프리다 에스코베도(Frida Escobedo)는 모든 출품작에서 “기억과 시간, 그리고 두 요소에 대한 인간적인 개입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터놓았다. 산뜻한 핑크빛 수트 차림으로 나타난 그녀의 음성이 꿈결처럼 부드럽게 이어졌다. “엄청난 맥락을 부여하지 않고도 모든 심사위원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작품에서 엿보이는 반복 노동의 흔적과 연약하지만 강렬한 기억이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달했죠. 모든 후보작은 지역성을 강하게 드러내면서도 불필요한 구분과 차이를 지워버리는 너그러운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공예의 마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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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히 작품만 보면 작가의 국적을 유추하기 힘들 정도로 후보작이 매해 점점 더 초국적인 특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은 에스코베도의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일본 유리 비즈로 목걸이를 만든 영국의 캐롤라인 브로드헤드, 일본의 시보리(조르개) 방염 기법을 차용한 패브릭 작품을 선보인 스페인의 마리 이자벨 푸아리에 트로야노 등 현대 공예가들은 자신이 나고 자란 곳과 무관하게 소재와 기술을 자유롭게 선택해 작업에 임했다. 이런 현상에 대한 생각을 묻자 쉴라 로에베가 화답했다. “로에베 재단 공예상을 글로벌 플랫폼으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만족스럽습니다. 스페인, 일본, 한국 등 전 세계 작가들이 적극적으로 영향을 주고받게 된 거죠. 덕분에 흥미로운 흐름이 계속 이어집니다. 홍합에서 추출한 섬유로 오르 스튜디오와 세실 파일헨펠트 작가가 함께 완성한 패브릭 작품을 보셨을 테죠. 바하마 출신의 아니나 메이저는 직조 기술을 직물이 아닌 점토라는 소재에 접목했고요. 특별상을 받은 수막쉬 싱 스튜디오의 작품처럼 아름다운 추억과 이야기가 작업의 시작이 된 작품도 존재합니다. 이런 폭넓은 흐름이 공예를 더 ‘힙’한 것으로 보이게 하고 있어요.”

아름다운 오브제의 매력을 강조한 다른 후보작과 달리 명확한 용도를 지닌 신선이 작가의 작품이 유난히 친숙하고 반가웠다. COURTESY OF LOE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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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더 늘어나는 지원자는 행복한 고민이다. 2023년에는 117개국에서 2,700여 점, 2024년에는 124개국에서 3,900여 점, 올해는 133개국에서 4,600여 점의 작품이 몰려들었다. 쉴라 로에베가 말했다. “정말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출품작이 들어와요. 로에베 공예상에 대한 어떤 홍보도 한 적 없는 이란에서만 수백 점의 출품작이 몰려왔습니다. 이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난생처음 여권을 만든 작가도 많답니다. 로에베와 로에베 재단은 예술가를 성심성의껏 대하고, 이들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무엇보다 기쁜 것은 시상식이 끝난 후 다시 각자의 세계로 돌아간 작가들이 더 창의적인 작업을 선보이며 로에베 홍보대사로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이죠.” 전시가 열리는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에서 다시 마주한 1962년생 작가 류연희 역시 로에베에 대한 고마움을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한국의 전통 공예가 정말 빠르게 현대화되고 있습니다. 그 생생한 지금을 로에베를 통해 더 많은 이들에게 알릴 수 있어 기뻐요.” 이날을 위해 동창에게 직접 의뢰한 한복을 입고 등장한 그녀를 포함해 전시장에 모인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에 호기심을 보이며 다가온 모든 이들에게 작품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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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오브제의 매력을 강조한 다른 후보작과 달리 명확한 용도를 지닌 류연희 작가의 작품이 유난히 친숙하고 반가웠다. COURTESY OF LOEWE

시상식이 열리기 전 잠시 주어진 여유 시간에 나는 레이나 소피아 국립 미술관에서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프라도 미술관에서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쾌락의 정원’을 감상하는 것으로 마드리드 3대 미술관을 정복했다. 그리고 저녁 9시. 마드리드 3대 미술관 중 남은 하나인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으로 돌아왔다. 해는 그제야 저물기 시작했지만 날씨는 여전히 후덥지근했다. 쉴라 로에베를 비롯한 심사위원단, 스페인 영화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Pedro Almodóvar)와 셀러브리티가 참석한 가운데, 미술관 정원에서 시상식이 시작됐다. 파리의 팔레 드 도쿄에서 열린 지난해 시상식에 비해 인구밀도가 눈에 띄게 높았다. “여긴 마드리드잖아요.” 옆에 있던 로에베 홍보 담당자가 속삭였다. 그녀의 말은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축제에 진심이라는 것과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곳이 다름 아닌 로에베의 고향이라는 사실(로에베는 1846년 마드리드의 작은 공예 워크숍에서 탄생했다). 그리고 후자는 로에베 재단 공예상을 널리 알린 핵심 인물이었던 조나단 앤더슨이 떠난 후 처음으로 개최한 시상식 내내 쉴라 로에베의 가슴을 들뜨게 하고 있었다. “런던 디자인 뮤지엄, 뉴욕의 이사무 노구치 뮤지엄, 서울공예박물관 등 해외에서 전시를 열 때마다 아름다운 공간에 감탄하는 한편 향수병이 깊어지곤 했습니다. 그리고 로에베 재단 공예상의 여덟 번째 전시를 위해 드디어 마드리드로 돌아왔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이 전시는 공예 분야에서 아주 중요한 이벤트로 자리 잡았고, 좋은 성과와 함께 모국으로 돌아올 수 있어 정말 행복합니다. 로에베의 고향이자 공예의 나라인 이곳에서 되뇌었습니다. 공예는 로에베의 시작이자 핵심이라는 것을요.” 시상식이 끝나갈 무렵, 로에베의 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잭 맥콜로와 라자로 에르난데스 듀오가 샴페인 잔을 들고 조금 시원해진 공기를 만끽하는 모습에 이목이 집중됐다. 새로운 예술가들과 함께 로에베 재단 공예상이 내년에는 또 어떤 신선한 반향을 일으킬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VK)

    피처 에디터
    류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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