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리라는 계절
폭풍 같기보다는 잔잔한 호수에 가까운 여정이었다. 영화 <오아시스>를 거쳐 <폭싹 속았수다>에 당도한 문소리가 변함없는 보폭을 유지한다.

평창동에 이렇게 소박하고 아름다운 정원과 갤러리 등 건물이 많다는 걸 오늘 촬영 덕분에 알았습니다.
저도요. 지하 스튜디오가 아니라 자연광 아래여서 정말 좋았어요. 촬영하면서 햇빛을 맞으니 따뜻하고 덩달아 마음도 편안했어요.
오늘 착용한 보테가 베네타 의상은 당신 일상에도 잘 어울리는 옷일까요?
가죽옷이 다들 멋지다고 해주셔서 기분 좋았는데, 제겐 살짝 무겁더라고요.(웃음) 지금 입은 옷(비스코스 소재의 크림색 셔츠와 바지)은 가볍고 좋군요. 화사한 날씨와도 잘 어울리고요.

‘안디아모(Andiamo)’에는 이탈리아어로 ‘가자!’ ‘떠나자!’는 기분 좋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보테가 베네타의 안디아모 백과 함께하는 여정을 그린다면 어떤 풍경이 떠오를까요?
많은 생각 할 필요 없이, 지금 들은 그대로 이탈리아로 떠난다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몽글몽글해지는데요? 저는 기껏해야 근사한 결혼식을 상상했는데 말이죠.(웃음) 살다 보면 그런 과감한 선택이 필요할 때가 있죠.
전 세대의 고른 사랑을 받은 <폭싹 속았수다>를 촬영하며 생애 가장 혹독한 추위를 경험했습니다. 작품 배경이 된 제주는 남편 장준환 감독과 설립한 영화사 연두의 사무실이 있는 곳이죠. 제주와의 인연이 점점 깊어지는군요.
두 집 살림을 하다 보니, 아무래도 제주와 많이 친해졌죠. 예전에는 비행기 타는 것도 힘겨웠는데, 지금은 확실히 수월해졌어요. 해가 들었다가, 비가 왔다가,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가, 워낙 변덕스러운 제주 날씨도 이젠 즐길 줄 알고요. 제주의 자연은 사람을 가만히 놔두지 않아서 늘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하거든요.

이동이 많은 당신의 일상에 언제나 동행하는 것은 무엇인지 문득 궁금하군요.
다이어리, 필통, 책, 텀블러, 손수건, 뭐가 너무 많나요? 온도 차가 심하거나 먼지가 많으면 비염이 심해져서 손수건은 꼭 챙기고, 텀블러에 따뜻한 물도 담아서 다녀요. 다이어리는 왠지 없으면 불안하고요. 휴대폰 메모장에 쓰면 되는데 어느새 습관이 되었어요.
한동안 작품을 소개하는 자리마다 눈물을 보였을 정도로 <폭싹 속았수다>를 특별한 출연작으로 회고합니다. 아이유와 함께 꿈 많은 제주 소녀 ‘오애순’의 생애를 아름답게 완성했어요.
댓글도 잘 안 보고, SNS도 안 해서 반응을 세세히 접하진 못했지만, 주변 사람들이 잘 봤다고 하면서 유난히 자기 얘기를 많이 하는 것을 보고, 이 드라마에 남다른 지점이 있다고 느꼈어요. 이 작품은 그냥 따라가는 게 아니라 자기 기억을 떠올리며 감상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그 옛날 우리 집이 꼭 그런 모습이었다, 어렸을 때 우리 엄마가 그랬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통해 촬영할 때는 예상치 못한 작품의 힘을 깨달았어요. 각자가 자기의 추억을 대입해서 감상했기 때문에 반응도 다양한 것 같고요.

사랑으로 가득한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로망을 자극한 오애순과 양관식의 사랑을 비롯해 자식과 부모에 대한 사랑, 이웃과 타인에 대한 애증과 연민 등 보는 이마다 주목하는 사랑의 면면도 달랐어요.
인류와 인간에 대한 애정이 정말 깊다는 점에서 임상춘 작가님이 참 귀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스쳐 지나가는 동네 슈퍼 할아버지, 할머니와 애순이네가 이루는 관계도 그렇고, “이놈의 시키야” 하고 머리에 꿀밤 한 대 때리며 시작하는 사소한 인연도 허투루 다루지 않더라고요. 촬영할 때는 너무 고생스러워서 그런 순간을 온전히 다 느끼지 못한 것 같아 조금 아쉬웠어요.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시처럼 아름답더라고요.
그런 문학적인 대사가 오롯이 다 잘 전달될 수 있을까, 오히려 걱정했어요. 요즘은 이야기 전개와 컷 전환이 다 너무 빠르잖아요. 느긋하게 감상하기 힘든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볼 때마다 매번 다른 문장이 마음에 꽂힌다”거나 “놓친 대사가 계속 눈에 띈다”는 얘기를 들으면 마음이 놓였죠. 그런 주옥같은 대사로 꽉 찬 작품에 참여하다니 큰 행운이에요.

가사와 육아 외에 여자가 다른 꿈을 꾸기 쉽지 않았던 시대상 속에서 오애순은 주변의 응원과 지지에 힘입어 끝내 자신의 시집을 출간합니다. 실제로 국어 선생님이 되기 위해 사범대학에 진학했을 만큼 당신도 만만찮은 문학소녀였죠.
어렸을 때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긴 했지요.(웃음) 예전에는 학교 앞 서점에서 책을 사면 주인이 손수 북 커버를 만들어주기도 하고, 그러면 거기에 한마디 써서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그랬어요. 남자 선배가 시집을 선물하면 ‘무슨 뜻일까’ 남몰래 궁금해하기도 했고요. 그리고 그 시 뭐죠? “하루 종일 당신 생각으로 ··· 하루해가 갑니다.” 아, 김용택 시인의 ‘6월’! 아르바이트하면서 그 시를 가게 장부에 옮겨 적었던 일이 갑자기 기억나는군요. 시인과 촌장의 노래를 들으면서요.(웃음) 그 시를 비롯해 여름에는 유난히 생각나는 문학 작품이 많군요. 왠지 릴케 시도 떠오르고, 헤밍웨이도 7월에 태어나서 7월에 죽었나, 아마 그럴 거예요(헤밍웨이는 1899년 7월 21일에 태어나 1961년 7월 2일에 사망했다).
책을 사랑하는 만큼 대본을 꼼꼼히 보겠어요.
지금은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그래도 돌이켜보면 2000년대 초반에 좋은 대본이 많았다는 생각은 들어요. 제가 맨 처음 접한 대본이 이창동 감독님 대본이었으니까요(문소리는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1999)으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감독님 사무실에 가면 검토를 기다리는 대본이 늘 쌓여 있었는데, 그걸 읽는 게 재미있었어요. 그렇게 좋은 대본을 많이 접한 시간이 훌륭한 자산이 되었을 거라 막연히 느끼고 있습니다.

뇌성마비 장애인을 연기하며 베니스국제영화제 신인배우상을 수상한 <오아시스>부터 정말 다양한 역할에 도전해왔습니다. 지금은 감독, 각본가, 프로듀서로도 활약하고 있고요. 지난 25년을 돌이켜봤을 때 가장 아이코닉한 순간은 언제일까요?
가장 아이코닉한 순간이요? 두 가지 장면이 떠오르는데··· 하나는 제가 출산 후에 영화 만들겠다고 중앙대학교 대학원에 다니던 때예요. 아이 키우면서, 학교에서 수업 들으면서, 작품까지 만드는 참 버거운 일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정말 성실하게 공부해서 장학금까지 받았어요. 교수님들도 “이렇게 열심히 다닐 줄 몰랐다”고 말씀하실 정도로요. 그러다 어느 날 복도에서 대학원 동기인 배우 류덕환 씨를 만났어요. 학교 다니는 제 몰골이 말이 아니었는지 덕환 씨가 제 손을 잡으면서 조심스럽게 묻더군요. “누나, 배우 계속할 거지?” 크게 웃으면서 “내가 뭐 다 놓아버린 사람처럼 보이니?”라고 대답했는데 문득 떠오른 그 순간이 <여배우는 오늘도>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는군요.
며느리, 딸, 엄마, 아내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분투하는 자전적인 이야기를 덧씌운 영화였죠. 새빨간 드레스를 입은 채 속 시원한 웃음을 터뜨리던 포스터가 떠올라요.
두 번째 기억나는 순간이 바로 그 영화 포스터를 촬영한 날이에요. 단국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일 때였는데 촬영 장소로 학교 운동장을 빌렸죠.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날이었어요. 땅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운동장에는 개미 한 마리 없었죠. 그 가운데 드레스를 입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넘어지고··· <여배우는 오늘도>라는 작품을 만들며 그간의 배우 인생을 정말 많이 되돌아봤는데, 그 포스터에 모든 순간이 응축돼 있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끝내 웃음을 터뜨린 그 모습은 기억에 오래 남을 만한 한 장면이죠.

그 에피소드가 증명하듯 도전과 모험을 즐기는 배우입니다. 영화 <세자매>(2021)에서 교회 집사 역할을 위해 6개월간 교회를 다니고, <정년이>에서는 대학 시절 즉흥적으로 1년 반 동안 소리를 배운 경험에서 도움을 얻었다는 식의 흥미로운 일화가 수두룩하더군요. 당신을 계속 움직이게 하는 동력은 뭔가요?
불안인 것 같아요. 이게 맞을까, 저게 맞을까, 더 좋은 방법이 있는데 내가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불안을 줄이고 확신을 갖기 위해 도움을 많이 구하러 다녀요. 판소리나 핸드볼처럼, 명확한 무언가를 배워야 하는 캐릭터는 오히려 마음이 놓이죠. 그렇게 배우면서 인물의 몸과 마음을 자연스럽게 덧입게 되니까요.
25년간 해온 연기를 영원히 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연기의 어떤 점이 그토록 좋은가요?
이제는 뭐 다른 거 하기에도 늦은 감이 있고,(웃음) 그냥 현장이 좋아요. 좋은 데 가서 여유를 만끽하는 시간도 물론 필요하지만요. 오늘도 길거리에서 화보 촬영하는데 힘들지 않고, 좋기만 했어요. 현장에서 머리를 맞대고 ‘이렇게 해볼까, 저렇게 해볼까’ 고민하는 시간이 제일 재미있죠.

그래도 영감을 재충전하는 시간은 필요하죠.
아이가 있다 보니 여행을 틈틈이 많이 다니려고 노력해요. 어쩔 수 없이 변동과 변화가 많은 삶이지만 남편도 영화 만드는 사람이고, 우리 가족은 제 일에 대해 너그럽게 이해를 많이 해주는 편이라 감사하고 있어요.
어머니(이향란)도 배우입니다. 최근 방송에 함께 출연해 “어머니의 계절은 여름 같다”고 이야기했어요. 당신의 지금은 어떤 계절에 가깝나요?
가을? 남들이 보기엔 주렁주렁 열매가 많이 맺히는 시기처럼 보이지만, 자락자락 털리고 떨어지는 것들도 많답니다.(웃음) 책임져야 될 게 많고, 먼저 베풀고, 챙길 것도 점점 더 많아져요. 아직도 어른이 안 된 것 같은데, 현장에서 후배들은 점점 더 저를 어른처럼 대하죠. 그 앞에서 ‘나만 생각하기에도 급급해서’라고 말하기도 창피하잖아요. 하지만 잘 쌓아왔다는 생각에 기뻐요. 수확을 많이 해서 다 같이 나눠 먹을 수 있으면 제일 좋은 거 아닐까요?

성실한 직업인으로 살아온 스스로에게 ‘폭싹 속았수다’라고 응원을 건넨다면?
잘했다거나 수고했다는 말, 저한테는 잘 못해요. 다행히 남편이 그런 역할을 잘해주고 있죠. “여보 좀 쉬어요” “조금 누웠다 해요” “오늘 안 해도 괜찮아요”··· 저에게 늘 그러거든요. 내일이면 또 한 걸음 가야 하고, 그러느라 찬찬히 뒤를 돌아볼 시간은 별로 없지만 덕분에 무섭진 않아요. 그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한 삶이죠. (VK)
*5인의 컬처 아이콘과 진행하는 <보그>와 보테가 베네타의 협업 프로젝트 ‘안디아모와의 동행: ICONIC JOURNEY’. 이탈리아어로 ‘가자(Let’s go)’라는 뜻이 담긴 안디아모(Andiamo) 백을 서로 다른 컬처 아이콘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특별한 콘텐츠가 매월 공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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