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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 관한 초단편소설_정대건 ‘멀리 가는 이야기’

2026.05.08

가족에 관한 초단편소설_정대건 ‘멀리 가는 이야기’

집에 돌아가면 나는 딸이 된다. 할머니는 천국에 갔지만 여전히 나의 할머니다. 오늘 우연히 만난 당신과도 가족이 될지 모른다. 여러 세대의 소설가들이 가족에 관해 쓴 초단편소설 8편.

멀리 가는 이야기

Artist: Andi Fischer

남자는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창가 쪽을 훑었다. 사진으로 본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다, 그녀를 발견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채도가 높은 푸른색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축구 유니폼이라는 게 분명해졌다. 가슴에는 스폰서 로고와 N 자 엠블럼이 선명했다. 그는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여자도 그를 알아보고 웃으며 인사했다. 남자는 인사를 받으며 자리에 앉았지만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소개팅에 축구 유니폼이라니. 그는 모처럼 바버숍에서 손질한 머리를 괜히 한 번 쓸어내렸다.

“혹시 제가 마음에 안 드는데 억지로 나오신 건가요?”

남자가 장난스레 묻자 여자는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아니요. 이게 제가 가진 옷 중에 제일 멋진 옷이라서요.”

“축구 유니폼이요?”

“네. 나폴리 유니폼이요.”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축구를 아주 좋아하시나 봐요.”

남자는 미세하게 비꼬는 투로 말했지만, 여자는 웃으며 받았다.

“모태 신앙이에요. 갓난아기 때부터 아빠가 나폴리 유니폼을 입혔거든요. 아빠가 나폴리를 정말 좋아했어요.”

남자는 말을 이해하는 데 잠깐 시간이 걸렸다. 여자는 그런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두 사람은 음식을 주문했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 남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김민재 얘기도 하고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어쩌죠, 제가 축구를 잘 몰라서.”

“괜찮아요. 그래도 김민재가 나폴리에서 뛰었다는 건 아시네요. 사실 축구를 좋아한다기보다는 나폴리를 좋아하는 거예요. 나폴리에서는 축구가 종교거든요.”

“왜 하필 나폴리였어요?”

여자는 유니폼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통영 출신인 아버지는 ‘동양의 나폴리’라 불리는 고향에서 자라면서, 가보지 못한 먼 땅에 막연한 친숙함을 품었다. 동네에 소문이 날 만큼 노래를 잘해 가수를 꿈꿨으나, 가난은 그에게 마이크 대신 트럭 핸들을 쥐여주었다. 그렇게 평생 형제들을 뒷바라지했지만 돌아온 것은 배신과 사기뿐이었다. 그는 상처로 얼룩진 일상 속에서 ‘산타 루치아’를 흥얼거리며 나폴리를 동경했다. 가까이 있는 삶이 늘 그를 할퀴었기에, 자꾸만 먼 곳을 바라봐야 했던 사람이었다.

남자는 여자가 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 눈을 빛내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버지에게 부족함 없이 사랑받아서 그런 남자를 찾는 타입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가까이에 있는 가족은 뭐가 되나요?”

남자가 조금 날카롭게 되물었다. 사업에 미친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가 평생 고생한 걸 보며 자란 그에게 ‘먼 곳만 바라보는 사람’은 책임감 없이 느껴졌다. 여자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빙긋 웃었다.

“아빠가 분명 보통은 아니셨죠. 주변에서도 괴짜라고들 했어요.”

“신기하네요. 보통은 그러면 아버지를 미워하거나 그러지 않나요.”

“그래도 저는 받은 유산이 있어서요.”

남자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유산? 여자는 조금 들뜬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가족을 데리고 나폴리에 간 적이 있어요. 평생 소원처럼 말씀하시던 성지순례였죠. 연말이었는데 새해 불꽃놀이가 정말 대단했어요. 시민들이 하나둘 자발적으로 폭죽을 쏘아 올렸는데, 끝없이 이어졌어요. 도시 전체가 불꽃으로 물들었어요. 아빠는 그 광경을 제게 꼭 보여주고 싶어 했어요. 그 순간, 삶이 축복처럼 느껴지더라고요. 그게 제게는 가장 큰 유산이에요. 삶을 축복으로 여기는 감각이요.”

남자는 말없이 듣고 있었다.

“물론 다 미화일 수도 있겠죠. 그냥 아빠가 가정에 좀 소홀한 사람이었고, 저는 거기에 의미를 붙인 걸 수도 있고요.”

그 말에 남자는 피식 웃었다. 방금까지 자신이 했던 생각을 정확히 들킨 기분이었다. 그녀의 솔직함이 마음에 들었다.

“소개팅마다 이렇게 유니폼 입고 나오세요?”

남자가 이번에는 비꼬는 투 없는 농담조로 물었다.

“네. 들켰네요.”

여자가 웃었다.

“효과 있어요?”

“없었으니까 또 나왔겠죠.”

남자는 그녀의 대답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렸다. 이제 가려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효과가 아예 없진 않아요. 그래도 대화에 열린 사람인지, 편견 가득한 사람인지 알 수 있거든요.”

여자가 남자의 눈을 보며 대답했다. 남자는 자신이 늘 하던 소개팅이 아니라, 어디 먼 여행지에서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었다. 그게 싫지 않았다.

“더 재미있는 사실 알려드릴까요?”

여자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36년 전에, 아빠가 엄마를 처음 만날 때도 저처럼 파란 나폴리 유니폼을 입고 나오셨대요.”

“와우, 진짜요?”

“엄마는 분명 실망하셨을 거예요. 그런데 이 이상한 남자 이야기를 한 번 더 들어보자 하셨고, 그 일로 아주 멀리까지 가셨죠.”

아주 멀리까지. 남자는 여자가 한 말을 천천히 되새겼다. 가족을 이루고, 자식을 낳고, 함께 나폴리 축구장에 가서 노래를 부르고, 새해 전야 불꽃놀이를 보며 삶이 축복이라고 느끼게 되는 것.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자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괴짜인지 아닌지는 늘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달린 것 같아요.”

“받아들이는 사람이요?”

“독특한 아버지만큼 그걸 받아준 어머니도 보통 분은 아니셨죠. 누군가에겐 그냥 소개팅에서 이상한 사람 만난 이야기로 끝나겠죠. 축구 유니폼을 입고 나와 뜬금없이 가족사를 늘어놓던 이상한 여자. 그런데 또 누군가에겐···”

여자는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아주 멀리까지 가는 이야기의 시작일 수도 있고요.”

정대건 정대건의 두 번째 장편소설 <급류>를 읽으며 울지 않은 자가 몇이나 될까. 출간된 지 4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베스트셀러에 자리하고 있다. 그는 다큐멘터리 <투 올드 힙합 키드>로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우수작품상과 관객상을 수상했으며, 영화 <사브라>와 <메이트>를 연출했다. 독립 영화 감독을 주인공으로 삼은 장편소설 <GV 빌런 고태경>이 2020년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 장편소설 부문에 당선되며 본격적인 집필 활동을 시작했다.

그래도 가족

김나랑

김나랑

피처 디렉터

글을 쓰고 인터뷰를 하고 매번 배웁니다. 집에 가면 요가를 수련하고 책을 읽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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