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최유돈의 가장 사적인 공간

2026.06.01

디자이너 최유돈의 가장 사적인 공간

시선이 머물고 손길이 닿은 물건. 그 사이를 유영하는 공기. 런던에 사적인 공간을 마련한 디자이너 최유돈이 〈보그〉를 초대했다.

모처럼 해가 쨍하게 뜬 4월 어느 날, 유돈초이를 이끄는 디자이너 최유돈을 그의 취향이 가득 묻어나는 런던 집에서 만났다.
옐로 골드와 오팔이 화려하게 어우러진 피아제 시계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았다.

집 구조와 형태가 독특하다.
집은 5층 규모의 스킵 플로어(Skip Floor) 구조로, 반 층씩 어긋나게 연결된 형태다. 집을 구입한 결정적 계기는 아티스트 빈스 하트(Vince Hart)의 작품이었다. 그의 대형 컬러 블로킹 회화를 소장하고 싶던 차에, 6m에 달하는 이 집의 리빙 및 다이닝 공간이 그 작품을 수용하기에 완벽하다고 판단했다. 집은 스위스 건축가 장 폴 자코(Jean-Paul Jaccaud)와 타냐 자인(Tanya Zein)이 설계했다. 정형화되지 않은 각도를 곳곳에 적용한 점이 흥미롭다. 특히 정교하게 디자인된 나무 손잡이와 덴마크 디네센(Dinesen)사의 원목 바닥이 전하는 자연 친화적이면서도 고급스러운 질감에 깊이 매료되었다. 타인에게는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구조였지만, 내게는 빈티지 가구와 빈스 하트의 작품을 배치할 아이디어가 즉흥적으로 떠오를 만큼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이 집은 ‘불안정한 균형’이라기보다 캐릭터가 분명하고 뻔하지 않은 즐거움을 준다.

이곳에서 보내는 당신의 하루가 궁금하다.
아침이면 정원을 마주한 꼭대기 층 방에서 일어나 블라인드를 올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아래층 부엌으로 내려가 이탤리언 모카 포트로 에스프레소를 내린 뒤, 1시간 동안 산책을 한다. 매일 아침 목욕을 즐기고, 전날 준비한 도시락을 챙겨 스튜디오로 출근한다.

처음 구입한 빈티지 시계인 까르띠에 탱크.

옐로 골드 소재의 롤렉스 시계에서 느껴지는 클래식한 멋.

꽃을 비롯해 식물이 가득하다.
매주 일요일 아침 일찍 이스트 런던 컬럼비아 로드의 꽃 시장을 찾는다. 바쁜 일상 속에서 시작한 걷기 운동의 연장선으로 꽃을 사기 시작했는데, 직접 스타일링하는 행위 자체가 정서적으로 도움이 된다.

가장 공들인 공간은.
2층 옷장은 본래 스터디 룸 용도의 메자닌(Mezzanine, 중이층)이었으나, 부족한 수납을 보완하기 위해 워크인 클로짓으로 개조했다. 커스텀 가구 회사 ‘언커먼 프로젝트(Uncommon Project)’에 의뢰했으며, 요제프 알베르스(Josef Albers)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노란색 바탕의 과감한 배색으로 집 안 곳곳에 컬러감을 부여했다. 패션 디자이너로서 색에 대한 접근은 비교적 수월하지만, 인테리어는 한번 결정하면 쉽게 바꾸기 힘들기 때문에 유돈초이의 컬렉션 작업보다 더 신중을 기했다.

거실의 USM과 이딸라 화병에서 기능적 미학이 느껴진다.
초록색 USM 모듈러는 빈티지 딜러인 친구에게 구입해 직접 유닛을 추가하며 손때 묻힌 가구다. 디자인할 때 이유 없는 디테일을 지양하는 편이다. 가구든 옷이든 유행을 타기보다 오래 간직할 수 있는 기능적 본질을 갖춰야 한다는 신념은 라이프스타일에도 투영되어 있다.

곳곳의 사진 작품이 공간의 밀도를 높이는 것 같다.
패션을 전공하며 존경해온 거장들의 작품을 20년간 수집해왔다. 첫 소장품인 릴리안 배스맨(Lillian Bassman)을 시작으로 세실 비튼, 데보라 터브빌(Deborah Turbeville), 헬무트 뉴튼, 최근의 사라 문(Sarah Moon)에 이르기까지 이 아카이브는 패션 학도의 자부심과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빈티지 시계도 많이 소장하고 있다.
20대에 처음 구입한 빈티지 까르띠에는 사각형 가죽 스트랩 시계에 대한 오랜 로망의 산물이다. 앤디 워홀이나 이브 생 로랑 같은 아이콘이 보여준 클래식한 가치를 동경했다. 최근 선물 받은 예거 르쿨트르 리베르소는 폴로 경기 중 유리를 보호하기 위해 고안한 메커니즘이 매력적이며, 트렌드와 활용도를 고려해 스틸 소재를 선택했다. 갓 구매한 럭셔리 제품에서 느껴지는 ‘뉴 머니’ 같은 분위기보다 시간이 흘러도 가치를 잃지 않고 사용자의 손때가 묻은 품질 좋은 물건을 소장하는 것이 멋진 취향이라 믿는다.

최근에 선물 받은 예거 르쿨트르 리베르소.

여러 차례 고장 났지만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아버지의 오메가 시계.

본인 스타일링에서 시계와 주얼리는 어떤 역할을 하나.
기본에 충실한 옷을 선호한다. 단조로워 보일 수 있는 룩에 시계와 주얼리를 더함으로써 전체적인 스타일을 한 단계 격상시키고 활력을 불어넣는다.

집을 나서기 전, 가장 마지막에 고르는 시계와 주얼리는.
일상은 의외로 단조롭다. 주로 집과 아틀리에를 오가기에 데일리 워치로 롤렉스 데이트저스트 41mm를 즐겨 차며, 작업 중에는 주얼리를 거의 착용하지 않는다. 다만 특별한 약속이나 파티가 있을 때는 대담한 주얼리로 스타일을 변주한다.

애틋한 의미를 지닌 시계와 주얼리가 있나.
부모님께 물려받은 물건은 무엇보다 특별하다. 수차례 고장 났는데도 간직하고 있는 아버지의 스틸 오메가 시계, 어머니의 흑진주 루비 브로치, 버킹엄 궁전에 초대받는 등 중요한 자리에 아버지와 함께한다는 의미로 착용하는 피아제 시계가 그렇다. 30년 전 아버지가 이 시계를 사셨을 때는 지나치게 화려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최근 이 독특한 디자인이 주는 힘을 새롭게 깨달았다. 자주 착용하지 않더라도 디자인에서 ‘개성’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일깨운다.

구조적인 실루엣의 렉토 재킷에 어머니가 물려준 브로치 두 개를 함께 매치했다.

여행을 기념하는 방식이 있나.
물건을 사는 데 신중한 편이라 빈도가 높지는 않지만, 여행지에서 주얼리 구매는 특별한 서사가 된다. 마라케시 전통 마켓의 실버 주얼리, 베를린 앤티크 마켓의 시그넷 링, 멕시코시티에서 산 반지 등 여행지에서 모은 피스가 내 인생을 얘기해주는 것 같다.

최유돈이 여행을 기념하는 방식. 낯선 도시의 매력이 담긴 주얼리를 하나씩 모았다.

공간을 완성하는 마지막 터치는 결국 향이다.
후각이 민감한 편은 아니지만, 신선한 히아신스나 로즈제라늄처럼 깨끗하고 가벼운 꽃향기를 선호한다. 묵직한 향보다는 라이트한 느낌을 즐기며 다양한 향초를 시도해보는 편이다.

집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것은 무엇인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여러 공간으로 나뉘며 발견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개미집’ 같은 독특한 구조가 이 집의 큰 매력이다.

평생 단 하나의 시계와 가구만 소장할 수 있다면.
시계는 아버지의 온기가 담긴 피아제를, 가구는 15년 전 구매해 집 안의 다채로운 컬러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미드 센추리 데니시 사이드보드를 선택하겠다. TG

묵주 반지와 까르띠에 반지에 체인을 연결해 목걸이처럼 활용한다.
신은지

신은지

패션 에디터

세상 모든 일은 패션으로 해석된다고 믿습니다. 패션 너머의 사회적 맥락과 문화적 흐름 탐구하기를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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