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준을 굴러가게 만드는 것

방송에서 어눌한 말투로 얘기하던 김민준은 사실 의도한 단어를 골라내고 망설임 없이 문장을 늘어놓는 달변가였다. ‘지적 허기짐’에 가까울 에너지가 인간 김민준을 잘 굴러가게 만들고 있었다.

와펜 장식이 있는 재킷과 타이거 프린트의 티셔츠는 발맹(Balmain at Je Ne Sais Quoi), 더티 워싱의 데님 팬츠는 돌체 앤 가바나(Dolce&Gabbana), 브레이슬릿은 크롬 하츠(Chrome Hearts), 워커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김민준이 드라마 〈다모〉에서 검의 고수였던시절, 드라마 세상은 ‘실장님’의 시대였다. 처음부터 무게 잡힌 캐릭터로 등장한 김민준은 그 ‘실장님’의 대열에 낄 수도 있었다. 모델 출신의 매끈한 라인에 학창 시절 운동을 했다는 배경까지 거드니, 트렌디 드라마가 원하는 남자 배우의 재료를 제법 갖춘 신인이었다. 그러나 그는갈지자로 걸었다. 아직 신인 딱지를 떼지 못한 상태에서 보란 듯이 ‘추리닝’과 슬리퍼 바람의 백수로 나타났다(〈아일랜드〉). 대기업 총수의 아들이자 현직 검사(〈프라하의 연인〉), 약 대신 자신의 스윗함을 처방할 듯한 핸섬한 의사(〈외과의사 봉달희〉)는 김민준의 선한 목소리나 인위적으로 표정을 짓지 않는 얼굴과 썩 어울렸다. 섬뜩한 조폭(영화 〈사랑〉)과 그에 비하면 차라리 소프트했던 조폭(〈친구–우리들의 전설)〉의 모습은 새삼 김민준이 다부진 턱선과 터프한 이목구비를 지닌 ‘남자’임을 주지시켰다. “허우대 멀쩡한 남자 배우에게 들어올 수 있는 뻔한 역할들은 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일장일단이 있어요. 대중적으로 어필할 만한 어떤 이미지를 갖지 못한 것 같기도 해요.”

‘어떤 이미지’를 구축하지 못한 배우 김민준이 지난 가을 MBC〈놀러와〉에 출연했다. 촬영 현장에서 잘 버티기 위해 액션 신을 찍을 때는 보호대를 착용하고, 한 겨울엔 특수 조끼를 입었다는 비밀을 털어놓던 그가 자기 입으로 말했다. “이제 연기만 좀 더 잘하면 될 텐데….” 그 장면을 방송으로 보던 서숙향 작가(〈파스타〉〈대한민국 변호사〉)는 뒤집어졌다. 그리고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의 주연에 김민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돈 많은 잘난 남자인데, 오지랖 넓고 푼수 같은 남자. 5월 11일 첫 방송 예정인 드라마 〈로맨스 타운〉의 김민준이다. 그동안 〈식모들〉이라는 제목으로 불렸으나 전국여성가사사업단 ‘우렁각시’의 반발 때문에 전혀 다른 뉘앙스의 제목으로 갈아탄 이 드라마는 로버트 알트만의 영화 〈고스포드 파크〉의 의뭉스러운 묘사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부자들이 모여 사는 타운, 고용자와 하인들이라는 분리된 커뮤니티, 개성을 지닌 수상한 식모들이 사건의 관찰자이자 주체자가 되는 스토리 등. 베이비 페이스의 식모와 마치 부부처럼 단둘이 사는 김민준은 그러나 식모 무리와 고스톱도 치고 수다도 떨면서 여기저기 참견한다.“마냥 폼 잡아야 되는 건 굉장히 부담스러워요. 포맷 있는 캐릭터가 싫어요. 왜 부자는 늘 멋있고 장애인은 불쌍하게 등장하죠? 예를 들어 이것 저것 다 잘하는 재벌 장애인 캐릭터도 있을 법한데.”

김민준은 ‘부르주아틱’한 문화 활동에 거부감이 있다. 운동을 좋아하는 그는 남을 고용해서 자신이 즐긴다는 게 싫어서 웨이크 보드도한번 안 타봤다. 어릴 때 아버지가 말을 사서 승마하는 것에도 거부감이 들었다. “순간 집안이 윤택해져서 오히려 트라우마가 생긴 경우예요.” 자전거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진 김민준의 집에는 몇 대의 자전거들이 뒹군다. “자전거가 저에게 주는 게 많아요. 온전히 사람의 힘으로 최고속도를 낸다는 희열은 고성능의 오토바이로 달렸을 때의 짜릿함과 또 다르거든요. 아드레날린을 분출시키진 못하지만 모르핀을 생성시키는 느낌.” 자전거 마니아의 길로 들어서면 티타늄이나 카본이들어간 1천만 원대 자전거에 눈을 뜨게 마련이지만, 그는 보통의 자전거보다 10배 비싼 자전거가 성능도 10배가 되진 못한다는 것을 안다.그의 방에 뒹구는 자전거들은 덴마크에서 직접 사왔다는 클래식한 모델, 어느 브랜드의 대표가 직접 커스터마이징 해준 자전거 등이다. “소유할수록 번뇌가 생긴다는 불교적인 말을 믿어요. 아, 유신론자이지만 무교예요.”

김민준은 그걸 자존심이라고 생각한다. 부산 출신인 그는 지방의 모델이기에 제대로 오디션 기회조차 얻지 못했던 시절, 적대감과 콤플렉스를 안고 살았다. 서울로 진출한 부산 킹카는 집안의 원조를 받지 않는다는 철칙을 세웠다. 아는 형의 집에 얹혀살며 빨래를 했고, CF출연으로 돈을 모아 반지하방으로 진급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를 옆에 두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외제차를 선물로 주겠다는 유혹까지 받는 연예인 김민준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건, 물론 화려한 생활도 한번 해봤기 때문에 가능하다. 보통 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하이테크도 누려봤고, 화석연료를 뿜으면서 거칠게 달려도 봤고, 고가의 샴페인에 취해도 봤으니까. “만약 이 길로 들어서지 않았다면 럭셔리한 생활에 대해 동경을 가졌을 수도 있어요. 저는 지적 허영심이 큰 아이였거든요. 어릴 때 친척 집에 가면 다양한 세상이 궁금해서 늘 서재에 ‘찌그러져’ 있었죠. 보고, 만지고, 겪는 것에 대한 호기심은 지금도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