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의 새 희망으로 떠오른 중동

상상 초월의 부를 자랑하는 중동이 패션의 새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다. 사막의 신기루처럼 홀연히 나타나 패션계를 장악하고 있는 패션 아라비안나이트.

변화한 중동 패션의 새로운 모습들. 왼쪽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디나 압둘아지즈. 칼 라거펠트와 함께 포즈를 취한 쌍둥이가 바로 아부 하드라 자매. 프랑카 소짜니, 나오미 캠벨, 리카르도 티시 등은 두바이에서 열린  행사장을 찾기도 했다.

지난 9월 8일 저녁 6시, 첼시 27번가의 어느 지하 스튜디오는 기대로 가득했다. 뉴욕 패션의 숨은 보석이었던 디자이너 다니엘 셔먼의 첫 번째 ‘이든’ 컬렉션이 곧 열리기 때문이었다. 미국 <보그>와 <뉴욕 타임스> 등 유력 매체들은 물론 바니스, 삭스 피프스 애비뉴, 버그도르프 굿맨 등 힘 ‘쎈’ 백화점 바이어들, 그리고 U2의 보노, 제프 쿤스, 크리스티 털링턴, 헬레나 크리스텐센 등 유명 인사들이 모두 쇼를 기다렸다. 갑자기 맞은편 프런트 로 <보그 코리아> 기자들 쪽으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향이 풍겨왔다. 향기와 함께 눈에 띈 건 바닥에 떨어진 다이아몬드 커프. 옆자리 여인이 의자에 앉으면서 팔찌를 떨어뜨린 것. 눈치채지 못한 그녀에게 커프를 건네자,환한 미소로 감사 인사가 돌아왔다. “정말 고마워요. 이렇게 팔찌가 많으니 하나가 떨어져도 몰랐네요. 정말 고마워요!” 그러고 보니 푸른색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그녀의 팔엔 온갖 보석 팔찌들이 채워져 있었다. 올랭피아 르 탱과 보테가 베네타의 악어 클러치를 매만지던 그녀는 알고 보니, 사우디아라비아 최고의 멀티숍 ‘D’NA’ 주인인 디나 압둘아지즈(deena Abdulaziz)였다.

몇 년 전만 해도 패션쇼 프런트 로의 구분은 단순했다. 미국 기자들과 바이어, 유럽 기자들과 바이어, 그리고 한국,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구역. 하지만 어느 순간 아시아 구역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인해전술을 바탕으로 한 중국 프레스와 바이어들 때문이다. 사정없이 늘어나는 중국인들로 인해 한국 기자들은 양옆에서 서라운드 시스템으로 들리는 북경어 때문에 베이징 한복판에 서 있는 기분. 그다음은 인도, 그다음은 터키였다(정확히 각 나라의 <보그>가 론칭된 순서!). 카푸치노빛 피부에 완벽한 헤어&메이크업, 화려한 패션 감각을 갖춘 그들은 패션계에서 점점 비대해지고 있는 신대륙의 힘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 프런트 로를 야금야금 차지하기 시작한 새로운 국적이 있으니, 바로 사막의 나라들에서 온 중동 사람들이다.

이든 쇼에서 만난 압둘아지즈야말로 변화한 아랍 패션의 아이콘 같은 인물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에 자리하고 있는 멀티숍입니다. 곧 도하에도 두 번째 매장을 오픈할 예정이죠.” 2005년 사우디아라비아 왕자와 결혼하면서 ‘프린세스’라는 칭호를 달게 된 그녀는 결혼하자마자 중동 패션을 바꾸려는 자신의 야심을 실현해나갔다. 웨딩드레스는 아제딘 알라이야가 디자인했고, 크리스찬 루부탱이 그녀의 이름을 따 ‘디나’라는 구두를 만들어줄 만큼 패션계 큰손. 디나의 회원제 멀티숍은 오픈부터 성공이었다. 더 로우와 오스카 드 라 렌타부터 아크네와 알렉산더 왕까지 판매하는 이곳엔 특별한 점이 또 있다. 여성들의 옷차림에 대해 까다로운 잣대가 있는 만큼, 디자이너들이 D’NA만을 위해 디자인을 수정하는 것. 예를 들어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는 사우디아라비아 여성들을 위해 바닥까지 내려오는 랩 드레스를 따로 제작했다. “디자이너들이 오히려 재미있어합니다. 다들 이 지역의 특성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에는 근사한 패션 숍이 하나 더 있다. 1999년 오픈한 ‘아트 오브 리빙’에는 발맹의 시퀸 장식 미니 드레스부터 준야 와타나베의 아방가르드한 팬츠까지 모두 만날 수 있다. 이곳 주인은 룰라 아부 하드라라는 인물이지만, 오히려 이곳을 유명하게 한 것은 그녀의 쌍둥이 딸, 사마와 하야 아부 하드라(Sama & haya Abu Khadra). 어릴 때부터 엄마 손을 잡고 파리 패션쇼에 드나들었던 쌍둥이 자매는 폭포처럼 쏟아지는 곱슬머리로 단숨에 패션 피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지금은 LA에서 대학생활을 하고 있지만 패션계와 멀어지진 않았다. 샤넬의 리틀 블랙 재킷 사진전 피사체로 등장해 두바이에서 열린 샤넬 전시회 파티에 참석하는 건 물론, 매 시즌 파리 패션 위크에 VIP 자격으로 방문하고 있으니까. 이번에도 미우미우 쇼에서 두 자매를 둘러싼 전 세계 패션 피플들은 물론, 중동 기자들의 취재 열기가 뜨거웠다.

카타르의 도하는 세계적인 예술 도시로 거듭나는 중. 위는 프라다와 데미언 허스트가 함께 준비한 오아시스 프로젝트. 히잡을 쓴 여인은 카타르의 공주이자 전 세계 최고의 예술품 컬렉터인 셰이크 알-마야사. 아래는 공주가 프라다와 함께한 ‘큐레이트’ 프로젝트.

사마와 하야 쌍둥이 자매야말로 패션계가 그토록 원하는 새로운 고객일 수 있다. 상상을 초월한 부와 패션을 즐기며 꾸뛰르 드레스를 거침없이 사들이는 바로 그 소수의 고객 말이다. 샤넬의 패션 부문 사장인 브루노 파블로스키는 인터뷰에서 중동 고객들이 가장 큰 꾸뛰르 고객으로 성장했다고 설명했다. “새로운 꾸뛰르 고객들이 늘고 있습니다. 이들은 평범한 옷이 아닌, 자신들만을 위한 옷을 원하죠.” 칼 라거펠트 역시 1억원이 훌쩍 넘어가는 드레스를 거침없이 주문하는 중동 고객들의 재력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30분 만에 꾸뛰르 26벌을 주문하곤 합니다. 이름을 밝힌 순 없지만, 중동 고객이었죠.” 라프 시몬스의 우아한 디올 꾸뛰르도 중동에서의 인기 덕분에 매 시즌 20% 이상 성장 중. 지난해 <보그 코리아>와 만났던 니나 리치의 피터 코팽 역시 중동 고객들과 꾸뛰르 작업을 진행한다고 귀띔했다. “가끔 웨딩드레스를 원하는 고객들이 있어요. 우리는 꾸뛰르 하우스는 아니지만, 그런 고객들을 위해 특별히 주문 제작을 진행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국적 역시 중동? “맞아요, 대부분 중동입니다. 어깨나 소매가 드러나는 평범한 드레스는 입을 수 없으니, 모든 걸 고객 마음에 들도록 바꿔서 디자인하죠.”

오일처럼 차고 넘쳐나는 중동의 돈을 잡기 위한 패션 브랜드들의 노력은 이미 시작되었다. 지난 10월 10일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두바이의 부르즈 할리파 부근 하늘은 불꽃놀이로 반짝였다. 두바이의 쇼핑몰 ‘두바이 몰’과 이태리 <보그>가 함께 ‘보그 패션 익스피리언스’ 행사를 개최한 것. 두바이 몰 곳곳에서 열린 이번 행사는 두바이에 하이패션을 소개하는 게 취지다. 이태리 <보그>의 지난 25년 표지들이 전시되는가 하면, 시몬 로샤를 비롯한 젊은 디자이너 패션쇼가 열렸고, 아르마니, 발렌티노, 고티에, 디올, 지암바티스타 발리 등 꾸뛰르 드레스들이 고객들과 만나는 행사도 열렸다. 한마디로 ‘패션 나잇 아웃’의 두바이 버전!

이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자선 갈라 디너 파티였다. 이태리를 대표하는 테너인 비토리오 그리골로와 발레리노인 로베르토 볼레의 공연에 이어 진행된 경매 수익금은 500만 달러를 거뜬히 초과했다(기금은 아프리카 아동을 돕는 자선단체에 기부될 예정). 베르사체와 카발리, 버버리, 샤넬, 발렌티노, 아르마니 등이 자신의 패션쇼에 초대하는 특별한 패키지를 준비했고, 이 티켓은 중동의 갑부들이 엄청난 가격에 구입했다. 심지어 그리골로가 입은 턱시도 셔츠마저 즉석에서 4만 달러에 팔릴 정도. 이태리 <보그> 편집장인 프랑카 소짜니가 직접 초대한 나오미 캠벨, 지방시의 리카르도 티시, 도나텔라 베르사체, 로베르토 카발리, 라포 엘칸, 디스퀘어드2의 케이튼 형제들은 중동의 힘을 몸소 느꼈을 것이다. 소짜니 옆에 앉은 조나단 뉴하우스(<보그>를 소유한 콘데나스트 인터내셔널 회장)의 함박 미소로 볼 때, 아라비아판 <보그>가 론칭될 날이 머지않았음을 예상할 수 있었다.

중동의 어마어마한 재력은 단순히 고객의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다. 지난 몇 년간 유럽의 오랜 패션 하우스들은 모두 아랍 왕족들의 쇼핑 목록 상위에 올랐다. 두바이에 자리한 아르마니 호텔, 팔라초 베르사체, 쿠웨이트의 미쏘니 호텔 등도 그런 브랜드 쇼핑의 결과. 최근엔 런던의 가방 디자이너 안야 힌드마치, 발렌티노, 그리고 해로즈 백화점까지 모두 카타르 왕족이 운영하는 ‘카타르 럭셔리 그룹’에 매각됐다. 또 카타르 왕족은 루이 비통이 소속된 LVMH 그룹의 주식도 1%쯤 사들였다. 단순히 핸드백 쇼핑객이 아니라, 바야흐로 브랜드를 사기 위해 돈을 쓰기 시작한 것. LVMH와 케어링, 리슈몽 등 럭셔리 그룹 출신의 경영진을 섭외한 후, 공격적으로 유럽의 럭셔리 브랜드 쇼핑에 나섰다는 후문이다.

중동은 이제 패션계와 다양한 비즈니스를 펼친다. 1·2 아르마니 호텔이 자리한 두바이 부르즈 할리파의 풍경. 3 쿠웨이트의 호텔 미쏘니. 4·5 두바이의 팔라초 베르사체 리조트.

그런가 하면 패션계에서 카타르 왕족의 힘은 남다르다. 10월 21일 영국 BBC는 ‘카타르: 현대미술의 가장 손이 큰 바이어’라는 기사를 보도했다. 카타르 국립 미술관 관장이자 국왕의 딸인 셰이크 알-마야사에 관한 기사로, 그녀는 2년 전 비공식적으로 가장 비싼 예술 작품을 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세잔의 작품으로 무려 2억5,000만 달러!). 여기에 무라카미 다카시의 베르사유 전시, 데미언 허스트의 테이트 모던 전시도 모두 이 공주님 덕분에 가능했다. 겨우 서른 살의 나이에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수집가로 떠오른 그녀. <뉴욕 타임스>의 추측에 따르면 공주가 1년 동안 사들이는 예술품의 예산만 해도 10조 달러를 넘어선다. 그리고 모든 예술품은 장 누벨이 디자인한 카타르 국립 미술관, I.M. 페이가 디자인한 이슬람 예술 박물관 등을 통해 전시될 예정이다. 미술관 개관은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 맞춰 진행될 듯. 이렇게 되면 이웃인 아부다비에 자리하게 될 루브르와 구겐하임 미술관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

예술계의 큰손 하면 빠질 수 없는 미우치아 프라다는 재빨리 카타르 공주와 손을 잡았다. 올해 말까지 진행되는 ‘큐레이트’라는 공모전을 카타르 박물관 기구(카타르의 공식적인 예술 기관)와 함께 주최한 것. 참신한 전시 기획을 가진 차세대 큐레이터를 찾는 프로그램을 프라다 여사가 공주에게 제안했고, 셰이크 알-마야사는 기꺼이 기금을 내놓았다. 수상자들은 도하의 미술관 전시를 통해 세상에 데뷔할 예정이다. 그리고 10월 9일 카타르의 수도, 도하의 사막에는 수상한 건물이 들어섰다. ‘프라다 오아시스와 데미언 허스트의 파머시 주스 바(Prada Oasis and Damien Hirstʼs Pharmacy Juice Bar)’라는 이름의 텐트는 프라다와 데미언 허스트가 함께 준비한 예술 프로젝트. 각각의 특징을 살린 팝업 형식의 베두인 텐트를 마련한 뒤, 고객과 관람객이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뭔가 뜬금없는 전시라고? 모두 공주의 허락과 지원 아래 이뤄졌다(알-마야사 공주는 데미언 허스트의 최근 도하 전시를 주최하기도 했다).

이렇듯 아랍의 오일 머니는 오뜨 꾸뛰르 드레스부터 이태리의 오랜 패션 브랜드, 거액의 예술품까지 싹쓸이하고 있다. 보시다시피 그들이 패션계에 중요한 시장으로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니다. 서울 패션 위크에 참석하는 해외 바이어들 가운데 가장 알짜 바이어들 역시 중동 출신이다. 비록 여성들에게 운전도 허락하지 않는 나라에서 패션이 부흥한다는게 아이러니하지만, 전 세계 패션의 시선은 지금 중동 사막에 쏠려 있다. 여성들의 얼굴을 꽁꽁 감춘 히잡 속에서 패션 열전이 펼쳐지고 있는 지금, ‘사막의 신기루’와 ‘신기루 같은 패션’은 꽤 어울리는 조합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