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트렌드

언더웨어 신에 불고 있는 새로운 바람, ‘보디 포지티브’

2018.07.14

by VOGUE

    언더웨어 신에 불고 있는 새로운 바람, ‘보디 포지티브’

    나의 몸을 긍정하는 것, ‘보디 포지티브(Body Positive)’는 지금 패션계가 취하는 태도다. 이 새로운 바람은 언더웨어에도 불고 있다.

    검은색 브라렛은 미드에어×66100, 틴트 선글라스는 젠틀몬스터(Gentle Monster), 분홍색 벨트 바지는 오프화이트(Off-White at matchesfashion.com).

    유행이 지난 옷보다 손이 더 안 가는 게 있다. 몸에 맞지 않는 속옷이다. 20년 가까이 브라를 착용했지만 어깨와 몸통을 압박하는 느낌과 여태 익숙해지지 않았다. 여기서 더 괴로운 건 불편한 데다 디자인까지 마음에 안 드는 것. 여자 속옷에 있기 마련인 리본 혹은 물방울무늬를 볼 때마다 나는 속으로 ‘노 땡큐!’를 외쳤다. 마지못해 최선책이 아닌 차선택을 택해야 할 때면 허탈한 생각마저 들었다. 나만 유달리 까다로웠던 걸까? 한국에 맞는 사이즈가 없는 여동생을 위해 나는 해외 출장길에 속옷 코너에서 한 바구니씩 공수해오곤 했다.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었다. 다만 기성복이 주는 선택의 다양성만큼 속옷도 딱 그만큼의 선택의 폭이 넓었으면 했다.

    그러던 중 인스타그램 피드에 뜬 리한나의 속옷 브랜드 새비지×펜티(Savage×Fenty) 이미지는 속옷에 대한 흥미를 다시 불러일으켰다. “새비지는 모든 체형과 사이즈를 위해 나옵니다. 여러분 준비됐나요?” 리한나가 플러스 사이즈 모델 오드리 리치(Audrey Ritchie)가 출연한 티저 영상과 함께 이런 말을 포스팅했다. 이에 걸맞게 고객과 직접 거래하는 DTC 브랜드 새비지×펜티는 정식 론칭 전 홈페이지를 오픈하고 고객들로부터 이메일 구독 리스트를 받을 때, 속옷 사이즈도 기재하게 만들었다. 브라 사이즈는 32A부터 44DDD까지, 팬티는 XS부터 3XL까지. 이 체형의 스펙트럼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기타(Other)’란에 체크할 수 있다. 광고 캠페인 또한 전형적이지 않았다. 까까머리에 앞니가 벌어진 모델 슬릭 우즈(Slick Woods), 정식 모델이 아닌 버즈피드 프로듀서 재즈마인 로빈스(Jazzmyne Robbins), 리한나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해 인도 여성의 고정된 이미지를 바꾼 사남 신디(Sanam Sindhi) 등 패션계에서는 주목받았으나 ‘속옷 광고’ 모델로 매치되지 않은 여성들이 주인공이었다.

    단순히 유명 인사가 만들었다는 이슈를 넘어, 속옷을 둘러싼 기존 관념을 깬 새비지×펜티의 첫 컬렉션은 순식간에 품절되었다. “경계를 확장하고 여성이 자신을 투영해볼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는 건 제게 중요합니다.” 제품은 섹시한 롬퍼스, 가터벨트, 코르셋, 끈팬티부터 하이웨이스트 팬티까지 또 패드가 없는 브라렛부터 볼륨을 강조하는 푸시업 브라까지. 다양한 인종과 체형의 모델들이 피부에 주근깨가 있든, 셀룰라이트가 있든 상관없다는 듯 속옷을 입고 있었다. “속옷을 통해 당신이 섹시함을 느끼고 즐겼으면 좋겠어요. 저는 빅토리아 시크릿 모델 몸매가 아니에요. 하지만 제 스스로 아름답다고 느끼고 새비지를 입었을 때 자신감이 생기죠.”

    리한나의 새비지×펜티 성공은 이전에도 ‘보디 포지티브’를 중요한 가치로 내세운 속옷 브랜드가 있었기에 가능했을지 모른다. “과하게 성적 대상화된, 포토샵 보정을 한 속옷 모델을 보는 데 지쳤어요. 큰 키에 늘씬한 금발 미녀는 부정할 수 없이 아름답지만, 세계에 있는 모든 여성들을 대변하는 건 아니잖아요. 속옷 브랜드가 바뀌길 기다리는 것보다 제가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죠.” 런던을 기반으로 하는 브랜드 네온 문(Neon Moon)의 창립자 하야트 라치(Hayat Rachi)가 <보그 코리아>에 전했다. “최근 몇 년간 속옷 시장은 많이 변했습니다. 우리처럼 ‘무보정’ 캠페인을 하는 브랜드도 늘어났죠.” 하야트는 속옷은 매일 갈아입는 것이기에 자신을 대변하는 중요한 패션이라고 전했다. “신발장을 비유해보죠. 킬 힐을 신고 싶을 때도 있지만 킬 힐로만 가득 차진 않았고 편한 신발도 있죠. 속옷도 그렇게 다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단순히 여성 고객뿐 아니라 속옷 생산에 참여하는 여성들의 처우도 신경 쓴다. “특히 브라를 만드는 데에는 정말 많은 수작업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노동 착취를 하지 않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스웨트숍 프리(Sweatshop Free)’ 브랜드인 게 자랑스러워요.”

    베이지색 브라렛은 미드에어×66100(Mid Air×66100), 검은색 바지는 루이 비통(Louis Vuitton), 흰색 샌들은 프라다(Prada), 후프 귀고리는 샤넬(Chanel), 엄지에 낀 반지는 크롬하츠(Chrome Hearts), 나머지 반지는 쇼 주얼리(Scho Jewelry).

    모든 체형을 만족시키려면 그만큼 다양한 경험을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일도 필요하다. 마이크로소프트와 베인 캐피탈 등 샌프란시스코 테크 회사에서 일하던 미셸 램(Michelle Lam)은 어느 날 속옷 피팅 룸에서 2시간 동안 피팅을 하고도 빈손으로 나왔다. ‘내 몸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라고 생각한 미셸은 ‘속옷 제작에 빅데이터와 기술을 반영하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가 번뜩 떠올랐다고 <보그 코리아>에 전했다. 이때의 경험은 트루앤코(True&Co.)를 창업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우선 ‘핏 퀴즈(Fit Quiz)라는 걸 만들었어요. 오프라인 가게에서 불쾌한 피팅 경험을 하지않아도 집에서 자신의 몸에 맞는 브라를 찾을 수 있는거죠. 600만 명이 넘는 여성들이 자신의 몸에 대한 데이터 1,800만 개를 우리에게 공유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브라를 출시하니 놀라운 반응을 보였습니다. 봉제선이 없는 ‘트루 보디(True Body)’ 브라를 입으니 정말 편하다는 유방암 수술을 받은 고객, 수년간 브라를 착용하지 않던 70대 어머니에게 브라를 사드렸다는 고객의 후기를 들었을 땐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이 밖에 ‘누드(Nude)’ 컬러의 속옷은 인종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출시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모두를 위한 누드(Nude for All)’ 슬로건을 내세운 LA 브랜드 ‘나자(Naja)’, 드라마 <걸스>의 두 주인공 레나던햄과 제미마 커크의 현실적 몸매를 광고 이미지로 쓰고 포토그래퍼 페트라 콜린스와 현실적인 여성의 몸을 이미지로 담은 뉴질랜드 브랜드 론리(Lonely)가 지난 몇 년간 지속적으로 속옷과 여성에 고착된 이미지를 변화시켰다.

    한국에도 ‘보디 포지티브’를 내세운 속옷 브랜드가 있다. 브라렛 전문 브랜드 미드에어 정승윤 디자이너와 플러스 사이즈 매거진 <육육일공공(66100)>의 편집장이자 모델 김지양이 만든 ‘미드에어×66100’이다. “대부분의 여성이 실제 본인의 사이즈가 아니라 입고 있는 옷이나 속옷의 사이즈를 자신의 사이즈로 알고 있을 겁니다.” ‘더 많은 여성에게 더 많은 속옷 선택권을’이라는 모토로 진행한 크라우드펀딩은 성공적이었다. 숨 막히지 않는 브라와 살을 파고들지 않는 팬티를 제작했고 S~XXXL라는 관습적인 사이즈 표기 또한 1~6의 숫자로 바꾸었다. 그 결과 목표 금액을 2,100% 넘기며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홈쇼핑에서 파는 10개들이 세트든,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꾸뛰르 란제리든, 우리 여자들이 지금껏 접한 속옷은 있는 그대로의 몸을 칭찬하기보다 보정하기에 가까웠다. 리한나는 <보그>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전했다. “새비지는 자신의 감정과 선택에 완전한 주체성을 가지는 걸 중요시해요. 모든 사람들이 결정은 자신이 한다는 걸 확신하게 만드는 거죠.” 물론 초등학생 때부터 차곡차곡 서랍 안을 가득 메워온 속옷을 대대적으로 바꾸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변치 않는 사실이 있다면, 자기 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취향을 더한 속옷을 사는 게 재미있다는 것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 개인적 기쁨을 더 많은 여자들이 누려야 한다.

      에디터
      남현지
      포토그래퍼
      김영훈
      모델
      차수민, 이민조
      헤어
      오종오
      메이크업
      황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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