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 혐오자와 TAS2R38 유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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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 혐오자와 TAS2R38 유전자

2019-04-30T13:23:25+00:00 2019.04.30|

혹시 짜장면 위에 살포시 얹은 오이채는 항상 걷어내나요? 김밥 사러 가면 꼭 오이 빼달라고 하고요? 오이 냄새만 맡아도 진저리를 치나요?

오이김밥에서 오이를 빼달라고….? 영화 <우리들> 스틸 컷.

당신이 그토록 멸시하는 오이는 사실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부의 상징이었답니다. 당시 신분 높은 귀족만 신선한 오이를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손님을 접대할 때 요리에 오이를 듬뿍 넣어서 부를 과시하곤 했죠. 영국 왕실에는 지금까지 그 전통이 이어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티타임에 오이 샌드위치가 빠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왕님의 티타임에 빠지지 않는 디저트, 오이 샌드위치.

오이는 피부 미백에도 좋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비타민 C 성분 때문인데요. 하지만 오이에 들어 있는 비타민 C의 함량은 딸기의 4분의 1에 지나지 않습니다. 게다가 특이하게도 오이 껍질에는 비타민 C를 파괴하는 효소 아스코르비나아제가 있어서 껍질을 잘 벗겨 먹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죠. 하지만 95%가 수분인 데다 오이 내부는 외부 기온보다 훨씬 낮은 상태를 유지하는 특징이 있어서 여름철에 달아오른 피부를 진정시키기 좋습니다.

오이의 비타민 C를 섭취하려면 껍질을 잘 벗겨야 합니다.

설명만 들어서는 딱히 싫어할 이유가 없는 채소인데요. 왜 오이 혐오자라는 표현이 생겼을까요? 배추 혐오자, 호박 혐오자, 미나리 혐오자는 없는데 말이죠. 오이 혐오자들은 손톱만 한 크기라도 오이라면 질겁하고 오이가 닿은 젓가락조차 거부합니다. 대체 왜 오이만 이렇게 미움받는 거죠? 오이 혐오가 어찌나 일반적인지 아이돌 중에서도 오이 혐오를 커밍아웃한 이들이 있습니다. 제시카는 대표적인 오이 혐오자로, 오이뿐 아니라 참외, 멜론 같은 박과 식물에도 거부감이 있다고 밝혔어요. 동생인 크리스탈도 오이를 싫어한다죠.

“자, 먹어요. 어서!” “제가 오이를 못 먹는 데에는 그분의 뜻이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형제님.”

일부 과학자들은 오이 혐오가 DNA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쓴맛을 감지하는 TAS2R38이라는 유전자가 있는데요. 유기물질 PTC(Phenylthiocarbamide, 페닐티오카르바미드)로 검사해 쓴맛을 느끼면 PAV 타입, 느끼지 못하면 AVI 타입으로 나뉘며 AVI 타입은 맛을 느끼지 못하는 미맹으로 분류됩니다. PAV 타입 중에는 AVI 타입보다 무려 100배에서 1,000배까지 쓴맛을 더 강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는데요. 이들이 오이 혐오 성향을 갖게 된다는 겁니다.

그럼 편식이 아니라 혀의 문제라는 거?

이들이 강하게 느끼는 것은 쿠쿠르비타신(Cucurbitacin)이라는 성분의 쓴맛입니다. 오이뿐 아니라 수박, 참외, 멜론 같은 박과 식물에 들어 있습니다. 품종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오이가 덜 자랐을 때 이 맛이 강하고 익을수록 줄어듭니다. 이 성분은 스테로이드의 일종으로 벌레나 초식동물이 오이를 먹는 것을 막기 위해서 발달한 독 성분이에요. 그러니 박과 식물의 쓴맛을 참고 먹다간 식중독이 걸릴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박과 식물에 들어 있는 쿠쿠르비타신, 네가 감히 내 님을…

하지만 유전자와 오이 혐오의 관계에 대해 확실하게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왜냐하면 맛이 아니라 특유의 향 혹은 식감 때문에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예민한 PAV 타입 중에 브로콜리나 토마토를 못 먹는 대신 오이는 먹을 수 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오이 혐오와 TAS2R38 유전자 사이의 상관관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거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이 혐오를 입맛이 미숙하다거나, 편식으로 단정하고 비난하거나 먹으라고 강요해선 안 됩니다. 싫은 건 싫은 거니까요. 모든 걸 다 잘 먹을 필요도 없고, 누구나 싫은 것 하나쯤은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