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뉴스

로마에서 온 편지

2020.04.21

by 손기호

    로마에서 온 편지

    모든 것이 멈춘 유럽의 디자이너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디올의 여성복 아티스틱 디렉터인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Maria Grazia Chiuri)가 로마에서 <보그>에 자신의 근황을 전해왔다.

    디올의 여성복 아티스틱 디렉터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

    패션이 작은 분야일지라도, 모두가 함께한다면 변화를 일구어낼 있습니다

    로마에 있는 저의 집에서 이 글을 적습니다. 3월 말 즈음부터 가족과 가까운 곳에 있기 위해 돌아왔죠. 이탈리아는 현재 낯설고도 두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탈리아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지는 나날이기도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위기 동안 의사와 간호사의 헌신을 목격하며, 겸허한 마음을 가짐과 동시에 제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사를 그분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이탈리아인의 타고난 감성으로, 우리는 서로 간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가깝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는 힘든 지금 이 시간을 헤쳐나가는 데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거리를 두고 함께 일하기

    디올에서의 많은 업무는 이탈리아에서 이루어집니다. 저는 로마에 살고 있죠. 가족도 로마에 있습니다. 디올의 공장은 이탈리아에 몇 곳이 있는데, 토스카나에도 한 군데 있습니다. 보통 한차례 컬렉션을 진행하기 전에, 이탈리아에서 최종 시안과 샘플을 확인하기 위한 시간을 보냅니다. 이번 시즌만큼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확인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코로나로 상황이 악화되었을 때, 저는 팀원들에게 우선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지금은 정말로 스스로부터 챙겨야 할 때입니다. 새롭게 일하는 방식을 찾아야 해요.” 우리는 즉시 원격으로 업무를 진행할 수 있도록 컴퓨터를 챙겼죠. 저는 팀원들과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것을 좋아하고, 늘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래서인지 특히 제 사고방식으로는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것이 정말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어느새 팀원들과 떨어져 일한 지 몇 주가 흘렀습니다. 페이스타임이나 왓츠 앱을 통해 여러 가지를 공유하고 있죠. 솔직히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아이디어를 내고 스케치를 하는 것도 일이지만, 우리의 일이라는 것은 더욱 ‘현실적’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일에 실제로 깊이 관여하며, 직접 손을 대는 일이거든요.

    최근에 프랑스 브르타뉴의 르동이라는 지역에 있는 베이비 디올 라인 제작실 중 하나를 재오픈했습니다. 마스크를 만들기 위해서였죠. 이런 패션계의 시스템이 굉장히 자랑스럽습니다. 수많은 산업 분야가 자신들의 노하우, 생산 설비, 자원을 동원해 의료계가 현재 필요로 하는 물품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패션계 역시 이런 상황에 마스크 생산을 통해 즉각적으로 대응했다는 점이 정말 기쁩니다. 디올, 아르마니, 프라다 같은 대형 브랜드뿐 아니라 소규모 회사까지도 참여하고 있죠. 지금 일어나는 일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집에서도 바쁘게 살기 

    이번 위기 동안, 저는 특히 밤 시간에 독서를 많이 했답니다. TV로는 뉴스만 봅니다. 늘 뉴스만 보는 것도 스트레스기는 하지만요. 최근에는 롤랑 바르트의 <모드의 체계>, 뤼스 이리가레의 <다른 여성의 검시경>, 한야 야나기하라의 <리틀 라이프>, 라누치오 비안키 반디넬리의 <로마>, 게오르그 짐멜의 <유행철학>을 읽고 있습니다. 영화도 보는데,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집에 있다는 것은, 모든 사적인 취향이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에 있다는 것이죠.  직업상 세계를 떠도는 삶을 보냈기에 집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지금같이 어려운 시기가 아니었다면 대단히 즐거운 일이었을 겁니다. 좋아하는 책, 제 취향의 물건에 둘러싸여서 말이죠. 요리도 하고요. 큰 상자에 추억이 담긴 편지와 사진을 최근 순서대로 정리하여 모아두기도 한답니다. 확실한 것은 이런 유례없는 사건으로 집에 머무르기보다는, 스스로의 선택으로 머무르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는 겁니다.

    미래를 보되, 과거에서 배우기

     디올에서 일하며, 과거와 미래를 함께 생각해왔습니다. 브랜드의 역사부터 전통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을 파악하는 것은 미래를 결정하기 위해 중요하거든요. 창업자 크리스찬 디올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람들에게 아름다움과 행복을 전하기 위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전쟁 이후에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현실을 잊고 싶어 하기 마련입니다.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잊고 싶은 거죠. 하지만 이번 코로나 사태는 너무나도 낯설고, 예상치 못한 장벽입니다. 이전에는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기도 합니다.

    이탈리아인은 표현이 매우 풍부하죠. 아는 사람을 만나면 볼에 입을 맞추고 악수를 합니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겪고 난 후에도 사람들이 그렇게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갈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게 중요한 것은 계속 긍정적인 관점을 유지하고, 팀워크와 연대 의식의 중요성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패션업계에서 이런 것이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는 점이 뿌듯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가치를 활용하여 긍정적인 일을 만들 수 있습니다. 작은 부분일 수도 있지만, 모두가 힘을 합치면 큰 변화를 일구어낼 수 있습니다.

    Rosalind Jana, 손기호
    포토그래퍼
    GettyImages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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