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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를 읽어야 하는 이유

2016.03.15

애거서 크리스티를 읽어야 하는 이유

추리소설의 전설 애거서 크리스티전집이 79권으로 완간됐다.잔인한 설정이나 과한 장치 없이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는 솜씨가 역시나 대가의 필치다. 열대야에 지친 밤, 애거서 크리스티 어떠세요?

‘나에게 맞는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을 찾아라!’라는 진단 메이커(kr.shindanmaker.com/438020)가 있다. 진단 메이커는 요즘 SNS를 통해 퍼져나가는 일종의 놀이인데, 빈칸에 자신의 이름을 입력하면 ‘당신의 인생을 네 글자로 함축해드립니다’ ‘아이돌이 된다면’ 등의 다양한 진단 결과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이 여기 들어갈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역시 그만큼 책이 많기 때문이다.

올봄, 황금가지는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을 79권으로 완간했다. 장·단편을 모두 아우르고 있으며, 유작을 포함해 66편의 장편과 150여 편의 중  단편 등 모든 작품을 수록한 한국 유일의 완전판이다. 이번 전집은 2002년부터 출간을 시작해 13년이 걸렸는데,이 시리즈의 총 판매 부수는 50여만 부에 이른다. 기네스북 기록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40억 부가 넘게 팔려나갔다. 이번 전집에는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이라는 설명이 따라붙는다.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하지 않은 번역서도 베스트셀러가 되던 90년대 한국에서 이미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은 꽤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애거서 크리스티재단과 공식 계약한 뒤, 빠진 작품 없이 완역한 것이 이번 전집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쓴 미스터리 소설의 훌륭함은 그 많은 책이 다 각각의 의미로 재미있다는 것이다. 영화처럼 빠른 장면 전환과 잔인함, 경쟁이라도 하는 듯한 설정이 즐비한 2010년대에도 1920년대부터 쓰인 고풍스러운 미스터리 소설들이 여전히 전 세계 공항의 소설 코너에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서점의 규모가 줄어도 크리스티의 책은 빠지는 법이 거의 없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시드니 루멧 감독이 연출하고 잉그리드 버그만, 숀 코네리, 로렌 바콜 등이 출연한 1974년 작 영화가 가장 유명한데, TV 드라마로는 영화감독으로도 활동 중인 미타니 코키가 각본을 쓴 스페셜 드라마로 일본에서 올 초 방영되기도 했다. 그녀가 탄생시킨 탐정 캐릭터 중 에르큘 포와로와 미스 마플은 영국과 미국에서 자신이 등장하는 미스터리 시리즈 드라마의 주인공이 됐고, 이후 많은 탐정 캐릭터에 영감을 주었다. 뛰어다니며 사건을 해결하는 대신 주변 사람들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캐치해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미스 마플의 경우, <제시카의 추리극장> 같은 옛 미국 드라마에 영감이 되었다.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의 미덕은 책의 분량과 스타일에도 있다. 영어 원서의 두께로 비교하면 장편소설의 분량이 요즘 나오는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의 절반 정도. 읽는 데 걸리는 시간으로나 들고 다니는 무게로나 부담 없이 고를 수 있다. 하지만 더 결정적으로는 고전적 퍼즐 미스터리가 주를 이루는 우아한 세계가 주는 편안함이 있다.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강간, 강도, 그리고 대규모 학살을 가능케 할 대량 살인 무기와 테러는 여기 등장하지 않는다. 1~2차 세계대전을 다 경험한 작가이고 소설 속에도 종종 전쟁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인간 본성의 악마를 끄집어내기 위해 굳이 잔인한 설정을 끌어들이지 않는다. 주로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이지만 그보다 훨씬 가벼운 일상적인 범죄 사건을 탐색하는 일도 있다. 마치 미스 마플이 추리할 때처럼, 독자는 안락의자에 앉아서 등장인물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적 면면을 살피며 누가 범행을 저질렀을지 느긋하게 탐색해가는것이 재미다. 그리고 미스터리는 마지막에 말끔하게 풀려나가고 범인은 밝혀진다. 사회적 요인에 의한 악의 탄생보다는 개인의 치정에 의한 범죄가 많이 등장하는 홈드라마의 인상도 없지 않지만 그래서 더 사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미스터리 소설 역사의 초기 거장이니만큼 애거서 크리스티의 많은 소설은 이후 수많은 방식으로 변주된 트릭의 원형을 제시하기도 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친절한 금자씨>는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가장 중요한 트릭을 연상시키며,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셔터 아일랜드>(원작 소설은 데니스 루헤인의 <살인자들의 섬>)는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과 나란히 놓고 보면 흥미롭다. 일본 만화 <소년탐정 김전일> 시리즈를 비롯해 많은 미스터리 소설과 드라마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식으로 인물 수에 맞는 인형을 늘어놓고 도망갈 수 없는 곳에 사람들을 가둔 뒤 한 명씩 죽여나간다. 공포 소설에 가까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도 있지만 미스 마플이 등장하는 작품, 특히 단편은 단막극처럼 쉽고 가볍게 읽힌다. 다양한 색깔을 지닌 여러 작품의 모음인 셈이다. 그녀의 책을 한 권 좋했다면 다른 책도 좋아할 확률이 기하학적으로 높아지는 것이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생전 자신이 직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10편 꼽았는데, 그 리스트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살인을 예고합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 <열세 가지 수수께끼> <0시를 향하여> <끝없는 밤> <비뚤어진 집> <누명> <움직이는 손가락>이다. 2009년 영국 <가디언>지가 선정한 애거서 크리스티 베스트 10은 크리스티의 리스트와 여섯 권이 겹치고,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팔린 크리스티의 작품은 세 권이 겹친다. 모든 리스트에 제목을 올린 책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오리엔트특급 살인>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이지만 그 밖에도 많은 책이 독자를 기다리고 있다는뜻이다. 그러니 ‘진단 메이커’를 해보면 모르던 제목의 소설을 뽑게 되곤 한다. “평생의 반려 반찬은 계란말이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감자 고로케보다는 카레 고로케를 더 좋아하는 당신에게 <맥긴티 부인의 죽음>을 권해드립니다”라는 식. 나는 이런 결과를 받았다. “미드보다는 영드를 좋아하는 감성의 소유자이면서 열다섯 살 때 아저씨가봐준 타로 점을 여태 믿고 있는 당신에게 <운명의 문>을 권해드립니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뽑은 베스트, <가디언>지 베스트, 세계 베스트셀러 톱 10, 한국 베스트셀러 5 등 어떤목록을 골라도 매번 다른 책을 만나게 되는 일을 피할 수 없고, 한두 권 읽다 보면 언제 느긋하게 홍차를 홀짝이며 이 소설들을 쌓아두고 차근차근 읽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들곤한다. 그러니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은 초콜릿 상자와 같다. 어떤 것을 집을지는 알 수가없다. 하지만 초콜릿을 먹게 되는 것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다혜(〈씨네21〉 기자)
    에디터
    정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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