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 Luxe
‘럭셔리’, ‘하이엔드’라는 수식어 대신 ‘신뢰할 수 있는’이라는 작위를 얻어낸 브랜드, 시슬리의 창업자 마담 도르나노가 〈보그〉에 초대장을 보내왔다. 백작 부인이 직접 큐레이션한 ‘메종 시슬리’ 의 세계.
파리 8구 프리드랑 5번가에는 작가 생텍쥐페리가 근무했던 문화재 지정 건물이 있다. 이 역사적인 빌딩의 앤티크 장식 출입문을 열면 달을 형상화한 디모르 스튜디오의 조명이 따뜻한 빛을 뿜어낸다. 인디아 마다비의 ‘젯랙’ 소파에 앉아 에스테티션이 가져다준 질문지에 답을 하고 나면 조각가 브로니슬로 크리지스토프가 디자인한 문고리를 지나 트리트먼트 룸으로 안내 받게 될 것이다. 눈을 감고 누워버려 눈치채지 못할 테지만 스파 캐빈을 감싸고 있는 벽지는 아르 데코를 대표하는 디자이너, 자크 에밀 룰만의 1874년 핸드 프린팅, ‘세포들’이다. 이렇듯 당신이 ‘메종 시슬리’에서 경험하게 될 동선에는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아트 피스가 즐비하다. 재미있는 건 그중 어떤 것도 존재를 주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올해 2월 문을 연 이곳은 창업자 마담 도르나노가 직접 큐레이션한 ‘진짜 시슬리’. 럭셔리로 가득 차 있으나 기이할 정도로 편안해 순박하게까지 느껴진다. 어떻게 이런 공간을 계획했을까. 백작 부인에게 만남을 청하니 “언제나처럼 센 강변 아파트에서 기다리겠노라”는 회신이 도착했다.
VOGUE 10년 만에 같은 소파에 다시 마주 앉다니, 감회가 새롭다. 마담의 우아함은 세월도 빗겨간 것 같다.
Isabelle d’Ornano 반갑고 또 고맙다. 집, 가구, 나의 일과까지 모든 것이 10년 전과 거의 같다. 달라진 게 있다면 언제나 함께하던 남편이 더 이상 곁에 없다는 사실뿐.
VOGUE 시슬리의 공동 창립자, 故 위베르 도르나노는 아주 인상적인 인터뷰이였다. 철저하게 장인 마인드로 무장한 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d’Ornano 열다섯 명으로 시작한 초창기부터 돌아가시기 전까지 평생을 정말 까다롭게 굴었지. 좋은 의미의 고집쟁이였는데, 돌아보니 그건 자신감이었던 거 같다.
VOGUE 인터내셔널 PR 매니저 베로니크가 당신이 상을 치른 후에 예상보다 빨리 일에 복귀했고 요즘은 이보다 더 열정적일 수 없다 싶게 활약하고 있다고 귀띔해줬다.
d’Ornano 시슬리는 내 남편과 나 자신이니까. 특히 최근 더 바빴던 건 올해 2월 문을 연 메종 시슬리 때문이다. 샹젤리제 거리와 가까이 있는데 혹시 가봤나?
VOGUE 물론이다. 당신이 직접 고른 오브제로 꾸몄다는 설명도 들었다. 오피스와 부티크 매장, 스파 캐빈이 모두 한 건물에 모여 있는, 꿈의 공간이더라. 건물 전체가 시슬리 소유인가?
d’Ornano 그렇다. 사실 그 건물은 국가적으로 의미가 남다르다. 예전에는 비행기로 우편물을 운송하는 항공 서비스 사업을 하던 장소로, 실종 전 생텍쥐페리가 근무했던 곳이기도 하다.
VOGUE 역사적인 장소였군!
d’Ornano 법규에 따라 보존해야 하는, 문화재 지정 건물이다. 멋진 공간인 만큼 공도 많이 들였다. 현관을 두 개로 나눠서 하나는 우리가 근무하는 사무실로 통하게 하고 다른 문은 고객이 제품을 체험할 수 있는 부티크와 스파 캐빈으로 연결했다.
VOGUE 어떤 일에도 시간을 들이는 브랜드라, 메종 시슬리를 만드는데도 오래 걸렸을 거 같다.
d’Ornano 시슬리가 좀 느리지? 우리가 뭐든 오래 잡고 있는 습성이 있다는 거, 스스로도 알고 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슬리 케어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공간은 이미 다른 곳에도 있었으니 서두를 필요가 없기도 했고. 오랜 시간 적절한 건물을 물색한 뒤 1~2년 정도 신중하게 꾸몄다.
VOGUE 메종 시슬리의 카페테리아나 접객실 등의 공간을 돌아보며 우리가 지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당신의 아파트와 닮았다고 느꼈다. 취향과 스토리가 녹아 있는 공간 말이다.
d’Ornano 모두 내가 직접 고르고 배치한 것이다. 고객들이 시슬리라는 브랜드에서 체험했으면 하는 것을 모아 공간에 투영하고 싶었다. 사실 이 아파트도 브랜드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잘 알겠지만 시슬리는 패밀리 비즈니스를 하는 브랜드라 나와 남편의 이미지가 곧 브랜드 이미지이기도 하다.
VOGUE 가족이 브랜드의 이맛돌이라는 뜻인가?
d’Ornano 그렇다. 이건 시슬리가 다른 브랜드와 구별되는 아주 중요한 특성이다. 가족 경영의 가장 큰 장점이 뭔지 아나? 타협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다.
VOGUE 무엇과의 타협인가?
d’Ornano 퀄리티! 만약 우리가 월급쟁이였다면 자리 보존을 위해 실적을 우선했을 거다. 하지만 도르나노 가문이 이어지는 한 ‘질이 좋지 않아도 판매만 잘되면 된다’는 생각 따윈 있을 수 없다. 브랜드와 제품은 자식이니까.
VOGUE 현재 2세, 필립이 최전방에서 활약 중이다. 지켜보니 어떤가? 청출어람인가?
d’Ornano 세대가 다르니 운영 스타일이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이 사업을 시작할 때 필립은 겨우 열두 살이었지만, “시슬리의 자산은 퀄리티”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으며 자랐기 때문에 중심이 흔들릴 일은 없다.
VOGUE 홀로 고집스레 퀄리티를 추구하다 보면 억울한 일도 생긴다. 공들여 개발한 제품을 모방한 상품이 6개월 안에 쫙 깔려버릴 때도 허다하지 않나!
d’Ornano 경쟁은 나쁜 게 아니니까 화낼 필요 없다. 그저 ‘사용해보면 알겠지’라며 기다릴 뿐. 고객도 이런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다. 얼마 전 “시슬리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냐”는 설문 조사에서 보상이 되는 답을 들었다.
VOGUE 뭐라고 답하던가? 럭셔리 혹은 하이엔드?
d’Ornano 아니, ‘신뢰할 수 있는’이라고 답했다. 이건 도르나노 패밀리가 단순히 지분만 가지고 있는 소유주이거나 지시만 하는 디렉터가 아니고, 제품을 만드는 데 직접 참여하는 크리에이터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VOGUE 그런 ‘신뢰’가 메종 시슬리에도 녹아 있나?
d’Ornano 당연하다. 고품질의 제품을 충분히 즐긴 뒤, 아늑하고 따뜻한 공간에서 편히 쉬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만든 곳이다. 그곳은 절대 과시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다.
VOGUE 스파 캐빈과 나머지 공간의 톤이 좀 다르다. 캐빈은 지나치게 미니멀한 데 반해 여타 공간은 아파트의 거실이나 코지한 카페테리아같이 다소 복잡하고 가정적이다. 시슬리같이 큰 브랜드가 왜 공간의 톤을 통일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왜 더 웅장하게 만들지 않았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d’Ornano 메종 시슬리는 럭셔리에 대한 강박을 버린 곳이니까. 하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거다. 대놓고 화려한 곳보다 아름답고 편안한 공간을 꾸밀 때 훨씬 더 많은 비용이 든다는 걸.
VOGUE 스며드는 럭셔리, 진짜 명품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d’Ornano 시슬리에게 럭셔리는 곧 자유다.
VOGUE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
d’Ornano 아니, 한계를 두지 않는 것. 남편은 시슬리 창업 전에도 많은 브랜드를 성공시켜온 화장품 전문가였다. 누구보다도 업계를 잘 아는 사람이 막상 자신의 것을 만들 때가 되자, 뭐라고 말했는지 아나? 포뮬러를 만드는 과학자들에게 “가격에 상한선을 두지 말고 최고를 만들라”고 했다.
VOGUE 내용물의 가치에 비하면 패키지가 굉장히 단순하다.
d’Ornano 미니멀한 패키지는 남편의 의지였다. 그는 사람들이 화장품을 살 때 ‘이 돈으로 패키지를 사는구나’라는 느낌을 주어선 안 된다고 거듭 강조하곤 했다. 의사나 피부과 전문의들이 보고도 ‘이건 럭셔리 제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했지.
VOGUE 스파 캐빈이 왜 그렇게 단순한 디자인으로 꾸며져 있었는지 알 것 같다.
d’Ornano 외양은 너무나 심플하지만 그 안에 놓인 침대의 안락함, 천장 장식과 조명의 안정감, 벽지의 디테일 등은 정말 신경을 많이 썼다. 실제로 돈도 많이 들었고.
VOGUE ‘과시하지 않는 고품질’이라는 신념이 공간에도 투영된 것이군.
d’Ornano 그렇다. 반면 스파 후에 다과를 즐기는 카페테리아는 감정적인 공간이다. 벽에 걸려 있는 아프리카풍 그림은 수단에서 구호 활동을 하고 있는 지인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이고 천장의 조명은 재활용품을 실용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다. 시슬리는 단순한 화장품 브랜드가 아니라 우리 가계의 혼이 담긴 것임을 보여주고 싶었다.
VOGUE 기승전, 퀄리티 있는 제품 이야기로 계속 돌아온다.
d’Ornano 그럴 수밖에. 이번에 새로 출시하는 크림을 사용해봤나? ‘블랙 로즈 스킨 인퓨전 크림 플럼핑 & 래디언스’ 말이다. 자부심 넘치는 제품이다.
VOGUE 완전히 새로운 텍스처였다. 이 또한 당신이 제안한 것인가?
d’Ornano 이번엔 고객들의 요구가 단초가 됐다. 블랙 로즈 마스크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후, 주기적으로 배달되는 고객 카드에 “크림도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많았다. 그 결과 바르면 물기가 스며 나오는 완전히 새롭고 프레시한 텍스처의 제품이 탄생했다.
VOGUE 가볍고 신선한 느낌이라 타깃을 낮추는 데도 도움이 되겠다. 요즘 밀레니얼들은 비싼 스킨케어 제품에 돈을 잘 쓰지 않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d’Ornano 경험하면 알게 되겠지. 다만 좀 먼저 살아본 어른으로서 좋은 제품으로 케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너무 늦게 깨닫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VOGUE 하지만 밀레니얼들은 셀피에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세대다.
d’Ornano 셀피, 나르시스적인 아름다움이지. 하지만 심오한 것,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아름다움은 그보다 더 중요하다. 구글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자기 아이들의 컴퓨터 사용을 제한한다는 거 알고 있나? 빠르고 쉬운 것에는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메이크업은 재미있고 화려해서 쉽게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지만, 진짜 피부에 좋은 새로운 스킨케어 제품을 만드는 건 ‘야망’이라 불릴 정도로 어렵다.
VOGUE 밀레니얼은 아직 나이 들지 않은 세대라 아직 안티에이징의 중요성을 체감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d’Ornano 그럴지도. 아름다움이란 본인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느끼는 것이고, 나이에 어울리는 아름다움은 세대마다 다르니 지금 밀레니얼들은 그들 나름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있는 거겠지.
VOGUE 그렇다면 지금 당신의 나이에 어울리는 아름다움은 뭘까?
d’Ornano 잘 늙는 것. 가능한 빨리 케어를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 내가 그렇게 못했기 때문에 절감한 부분이다. 한창때를 스페인에서 보내며 해를 지나치게 많이 봤다. 자외선 차단제를 더 열심히 썼더라면 좋았을 것을.
VOGUE 시슬리에 끝내주는 자외선 차단제가 많은 이유가 그건가?
d’Ornano 태양을 즐기게 해주는 거다.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해야 하지만 해를 보는 것도 그만큼 중요하니까. 기분이 좋아지잖아. 피부과 의사들도 하루에 적어도 10~15분,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지 않고 햇빛을 쪼여야 비타민 D 생성 등 건강에 좋다고 조언한다. 아, 그리고 자기 관리에 있어 중요한 한 가지, 살찌지 말아야 한다. 난 스물다섯 이후로 딱 1kg 쪘다.
VOGUE 평생 같은 몸무게를 유지하고 있다고? 그게 가능한가?
d’Ornano 다행히 ‘절제’에 소질이 있거든. 먹는 것을 좋아하지만 대신 많이 걷고 일주일에 두 번씩 짐에서 운동 한다. 좋은 재료의 음식을 먹는 것도 젊음의 비결이자, 진짜 퀄리티 있는 삶을 실천하는 방법 중 하나. 좋은 재료는 물론 비싸지만 포장만 그럴듯한 럭셔리 레스토랑의 음식보다 신선한 재료에 지불하는 돈이 덜 아깝지 않나? 무엇이든 과대 포장 되는 것이 문제다. 세상만사 본질을 마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VOGUE 하지만 퀄리티와 현실 사이에 괴리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에코서트 식재료, 유기농 코튼 셔츠 그리고 시슬리는 모두 비싸다.
d’Ornano 뷰티 제품의 제1원칙이 뭔지 아나? 사용자가 ‘정말 기분 좋다’고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소비자는 마음에 들면 경제적 여유가 충분치 않아도 구매한다. 우리 고객 중에는 2~3개월에 ‘시슬리아’ 크림 한 통을 사는 것이 유일한 사치인 사람도 많다. 결국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다. 시슬리를 산 것을 후회하지 않을 만큼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 말이다.
- 에디터
- 백지수
- 포토그래퍼
- COURTESY OF SIS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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