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la
영화 〈더 울버린〉의 신비로운 빨간 머리 여인을 기억하나? 할리우드가 사랑하는 여배우이자 루이 비통의 뮤즈인 후쿠시마 리라가 서울에 왔다.
후쿠시마 리라(Fukushima Rila)는 아름답고 개성적인 할리우드 여배우들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띈다. 깡마른 몸에 커다란 눈, 넓은 이마와 묘한 대조를 이루는 작고 뾰족한 턱. 케이트 모스보다 딱 1cm 큰 168cm의 키로 일본과 뉴욕을 오가며 모델로 활동해온 리라는 배우로서 자신의 첫 작품 <더 울버린>으로 단숨에 영화계의 샛별로 떠올랐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타인의 죽음을 보는 초능력을 지닌 미스터리 검객 유키오 역을 맡아 울버린의 보디가드를 자처하며 상처 입은 슈퍼히어로의 곁을 지켰다. 잔뜩 몸을 키운 휴 잭맨 옆에 선 빨간 머리의 동양 아가씨는 작은 인형 같았다. 무표정한 얼굴은 어떤 특수 효과 없이도 강렬한 아우라를 자아냈다. 마블 코믹스의 돌연변이만큼이나 신비롭고 비현실적이다.
“외계인 모양의 이모지랑 저랑 닮지 않았나요? (휴대폰을 꺼내 보여주며) 이거요! 혼혈이냐고 물어보는 사람들도 종종 있는데, 그럼 전 농담 삼아반은 일본인이고 반은 화성인이라고 답하기도 하죠. 별로 기분 나쁘지 않아요. 이런 이미지 덕분에 제가 이 일을 할 수 있는걸요.”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진행 중인 루이 비통 전시 오프닝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2박 3일간 한국을 찾은 후쿠시마 리라는 서울에 머무는 동안 <보그 코리아>와 만나고 싶다며 러브 콜을 보내왔다. 활기차게 스튜디오 문을 열고 들어선 리라는 서울 디자이너들의 의상과 부채, 노리개 같은 전통 소품, 전통시장에서 구한 물건을 보물이라도 되는 듯 세심히 살펴보았다. 한글로 자신의 이름을 새긴 모자를 선물하자 진심으로 기뻐하며 즉석에서 셀카를 찍기도 했다.
리라의 서울 방문은 이번이 세 번째다. 지난해 사카이 청담 플래그십 스토어 오픈 때 디자이너 치토세 아베, 앰부시 디자이너 버발, 윤 등과 함께 한국을 찾았고, 2011년엔 친구와 여행을 온 적이 있다고 했다. “광장시장에서 떡볶이 같은 길거리 음식을 쉴 새 없이 먹었죠. 찜질방에서 때밀이 아주 머니에게 오일 마사지도 받았고요.” 리라가 제일 좋아하는 한국 음식은 간장게장이다. 오늘의 촬영을 위해 이틀 전부터 절식하는 중에도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간장게장을 먹고야 말았다. “도쿄에도 한식 레스토랑이 많지만 간장게장은 여기 와야만 먹을 수 있거든요. 진짜 맛있어요!”
루이 비통의 뮤즈이기도 한 그녀는 얼마 전 교토 인근 시가현의 미호 박물관에서 열린 2018 루이 비통 크루즈 쇼의 오프닝 모델로 섰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피라미드로 유명한 건축가 I.M. 페이가 설계한 미호 박물관은 전설의 이상향 샹그릴라에서 영감을 얻어 완성한 푸른 숲의 천국 같은 곳이다. “정말 너무 멋졌어요. 할 말을 잃을 정도였죠. 무엇보다 그렇게 큰 쇼에서 워킹을 한다는 게 영광이었어요.” 루이 비통의 니콜라 제스키에르와는 3년전 <퍼플> 매거진을 통해 인연을 맺었다. 당시 편집장 올리비에 잠과 니콜라가 디자인의 영감을 얻고자 도쿄로 여행 오면서 자연스럽게 리라가 이들의 가이드가 됐다. 이후, 리라는 몇 차례 루이 비통 쇼에 초대를 받았다. 하지만 모델로 쇼에 등장한 것은 처음이다. 터널의 끝에서부터 시작된 런웨이는 영원처럼 길게 이어졌다.
“긴장감보단 책임감이 컸죠. 잘해내야만 한다는!” 리라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며 함께 런웨이에 오른 한국 모델 최소라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제 바로 다음 순서가 소라 씨였는데, 저보다 키가 훨씬 크잖아요. 보폭이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안 따라잡히려고 엄청 빨리 걸었어요. 다 끝나고 내려오니까 다리가 후들거리더라고요.(웃음)”
쇼의 피날레를 장식한 건 배두나였다. 둘은 닮은 점이 많다.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모델 출신의 아시아 여배우인 데다 별나라에서 뚝 떨어진 듯 독보적 개성과 분위기를 풍긴다. 리라는 두나의 오랜 팬이기도 하다. “<공기인형>부터 배두나 씨가 출연한 영화 대부분을 봤어요. ‘한국에 이렇게 대단한 여배우가 있구나!’ 깜짝 놀랐죠. 배우로서는 저보다 한참 선배라 처음엔 어렵게 생각했는데, 너무 편하게 대해주더군요. 서로 공통된 친구들이 많아 두나 씨가 도쿄에 올 때면 만나곤 해요. 참 좋은 사람이에요.”
리라는 봉준호와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물론 한국 드라마도 즐겨본다. 기회가 된다면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하고 싶은 욕심도 있다. “원래 배우를 꿈꾼 건 아니었어요. 모델 일을 하다 보면 가끔 연기력이 필요할 때가 있잖아요. 그래서 연기 수업을 받았는데, 제가 사람을 좋아해서인지 맡은 인물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 재미있더라고요. 역할을 통해 많은 걸 배우게 돼요.”
<더 울버린>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폭스사는 영어와 일본어를 모두 구사할 줄 아는 일본 배우를 찾고 있었다. 마침 리라는 뉴욕에서의 모델 생활을 정리하고 도쿄로 돌아온 후였다. 운동 삼아 태권도를 비롯한 무술도 틈틈이 배우고 있었다. 리라를 비롯해 오디션에 참여한 모든 배우들은 영화에 대한 내용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매번 다른 테스트 자료를 전달 받았다. 극비리에 진행된 오디션은 캐스팅이 확정되기까지 무려 1년 6개월이 걸렸다. “촬영이 시작되고 난 후에도 방심할 수 없었어요. 간혹 캐스팅이 뒤집히는 경우도 있으니까. 저로서는 매일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죠. ‘진짜 하는구나’라고 확신이 든 건 촬영이 절반 가까이 진행되었을 때예요. 휴 잭맨과 같이 찍은 분량이 많았거든요!(웃음) 아무래도 그의 스케줄을 다시 조절하긴 힘들지 않겠어요?” 리라는 꽤 단단한 사람이다. 낯선 미국 땅에서 서양 모델들과 경쟁하며 커리어를 쌓는 동안 쉽게 실망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애써 광고를 촬영했지만 그녀의 모습만 포토샵으로 지워진 경우도 있었다.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서라면 괜찮아요. 제가 아무리 열심히 했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저는 그렇게 단련되어왔어요.”
이후 리라는 <애로우> <왕좌의 게임> 등 미국 드라마와 여러 편의 일본 드라마에 연이어 출연해왔다. 올해 초 개봉한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에서는 게이샤 로봇 역을 맡아 단역임에도 강렬한 존재감을 선보였다. 로봇의 얼굴만 리라의 얼굴을 본떠 CG로 합성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마스크를 쓰고 직접 연기했다. “80%가 실사 촬영이었어요. 마스크 때문에 호흡곤란으로 실신한 적도 있는걸요. 그래도 정말 기뻤어요.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애니메이션을 실사화한 작품에 출연한다는 사실이 말이죠. 그 세계의 일부가 될 수만 있다면 풀 한 포기라도 상관없었어요.” 이로써 리라는 마블 코믹스와 DC 코믹스, 그리고 재팬 애니메이션까지 모두 섭렵한 유일한 여배우가 되었다. “아, 저도 인간이 되고 싶어요.(웃음) 물론 SF나 판타지가 유쾌하긴 하죠. 슈퍼히어로나 안드로이드는 고민이 없잖아요.” 만화 원작이 아닌 <왕좌의 게임>에서 그녀가 맡은 역할은 무당이었다.
최근 TV도쿄에서 방영된 <100만엔의 여자들>은 리라의 출연작 중 가장 현실적이다. 이 드라마는 넷플릭스를 통해 오는 8월 15일 전 세계 190여개국에 공개된다. “이번엔 보통 사람을 연기합니다! 외톨이였던 한 남자의 집에 어느 날 다섯 명의 여자가 찾아들며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는데, 누가, 무엇을 목적으로 이들을 초대했는지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추리물이에요.” 그녀는 매 작품을 통해 배우로서 자신의 한계와 가능성을 시험해나가는 중이다. 아직 보여주지 못한 모습이 더 많다. “연기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잖아요.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매번 불만족스럽지만 너무 초조해하진 않으려고요. 제게 주어진 역할을 하나씩 하다 보면 부족함도 채워지겠죠. 평생 하고 싶은 일인 만큼 그렇게 천천히 나아가고 싶어요.”
후쿠시마 리라의 인생은 예기치 못한 우연과 간절한 바람으로 여기까지 흘러왔다. 모델이 된 것도 스무 살이 넘어서다. 헬레나 크리스텐슨 같은 슈퍼모델들을 동경했던 그녀는 그런 멋진 모델들의 매니저가 되고자 모델 에이전트에 이력서를 제출했다가 모델로 발탁됐다. 현재 그녀는 하늘을 날고 가상과 현실을 오가는 배우이자 눈부신 패셔니스타다. 그야말로 만화 같은 일이다. 그리고 모든 만화 속 스토리가 그러하듯 이 꿈 같은 성공담은 해피 엔딩이 예정되어 있다. <보그 코리아>와 후쿠시마 리라의 특별한 하루도 행복하게 끝을 맺는다. “이제 뭘 하냐고요? 밥부터 먹어야죠. 메뉴는 당연히 간장게장입니다.(웃음)”
- 글
- 이미혜 (컨트리뷰팅 에디터)
- 포토그래퍼
- JANG DUK HWA
- 코디네이터
- 아키코 하마오카(Akiko Hamao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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