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nsation & Sublimation
170년 역사의 로에베를 이끌고 있는 조나단 앤더슨. 오래된 하우스를 자극하고, 그 정신을 새롭게 채색하는 그를 〈보그〉가 서울에서 만났다.
“새로운 취미예요.” 조나단 앤더슨이 쑥스럽다는 듯 짧게 답했다. “제가 직접 편집하고 음악까지 골라서 만들어요.” 공기는 꽤 차갑지만 온화한 햇살이 쏟아지던 초겨울 아침, 앤더슨은 서울 성수동의 어느 카페 책장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긴 다리를 구부리기 위해 몸을 비트는 그에게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영상에 대해 내가 묻던 참이었다. 그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기내용 영화와 항공지도, 창밖 풍경을 편집한 영상을 포스팅했고, <보그> 인터뷰 전날 밤에는 수프얀 스티븐스의 새 노래에 맞춰 서울의 단풍을 찍어 올렸다. 한복을 입은 채 고궁을 구경하는 관광객, DDP 앞에서 몸을 흔드는 어린 학생, 그리고 자신이 머물고 있는 신라호텔 객실의 블라인드도 모두 그의 피사체가 됐다. 서울에 도착한 직후 짧게 자른 머리를 어루만지던 그에게 스티븐스의 노래에 대해 질문을 한 번 더 던졌지만, 그는 잡담은 그만하고 어서 빨리 인터뷰를 시작하자는 눈빛으로 나를 재촉했다. “원작은 정말 환상적이었죠.”
조나단 앤더슨은 로에베 2018 봄 컬렉션을 소개하는 전시를 위해 서울에 들렀다. 4년 전, 170년 역사를 지닌 이 스페인 브랜드 수장이 된 후 첫 한국 방문이다. 디자이너가 서울에 오는 일이 빈번해졌지만, 패션 궤도의 정상에 오른 인물이 직접 움직이는 건 사실 흔치 않은 일이다. 그가 도착하기 전부터 방문을 환영하는 인스타그램 포스팅이 이어졌다. 행사 당일에는 나 같은 패션 기자에게 “오늘 로에베 행사 가나요?”라는 메시지도 여러 번 도착했다. 사실 이런 일이 썩 놀랄 만한 것은 아니다. 짧은 시간 동안 그는 브랜드 위에 쌓인 170년이라는 역사의 먼지를 탈탈 털어냈다. 그러자 어느새 로에베는 감각적 이미지와 기묘한 아이디어로 똘똘 뭉친 2017년 가장 현재적인 브랜드로 변모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우리가 어디를 향해야 할지 알고 있었어요.” 그 시작에 대해 묻자 앤더슨이 에스프레소를 한 번에 들이켰다. “여정이 아주 길 거란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2013년 9월, 그가 로에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패션계의 반응은 반가움과 의문이 뒤섞였다. 일부는 런던의 젊은 패션 천재가 오래된 브랜드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을 거라 기대했고, 누군가는 그 접근 방식이 지나치게 도발적이진 않을까 우려했다. 그리고 1년 뒤 데뷔작인 2015년 봄 컬렉션을 통해 그는 로에베가 앞으로 다른 방향으로 질주할 것임을 공식 선언했다. 스웨이드 조각을 덕지덕지 붙인 드레스와 거친 상아색 볏짚을 꼬아낸 듯한 톱은 신선했고, 일면 소박하기까지 했다. 런던의 JW 앤더슨 라벨을 통해 선보이던 중성적이고 복고적인 접근은 파리로 향하는 유로스타 창밖으로 던져버린 듯했다.
로에베와 앤더슨의 기묘한 실험은 계속됐다. 투명 PVC 바지 시리즈가 등장하는가 하면, 일본의 어느 상점에서나 볼 수 있는 고양이 인형인 마네키네코를 닮은 목걸이와 이브닝 드레스가 함께 등장했다. 나파 가죽을 동그랗게 잘라 스커트를 만들거나, 니트 드레스에 투박한 가죽 벨트 장식을 더하기도 했다. “패션의 ‘F’를 강조한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제게 주어진 가장 큰 임무였습니다. 하우스 역사도, 가죽 이미지도 모두 무겁게 다가왔죠. 저는 그 모든 무게를 덜어내고 싶었습니다.”
다이어트에 들어간 브랜드에 필요한 전략은 여러 가지였다. 파리 시내의 아름다운 유네스코 본사 빌딩을 쇼장으로 선택한 것(“프랑스적이지도, 영국적이지도, 스페인스럽지도 않은 공간이죠”), 어두컴컴한 밤 대신 환한 오전 시간에 쇼를 연 것(“투박하고 ‘포멀’한 느낌을 걷어내고 싶었어요”), 고향인 마드리드 대신 이비자와 포르멘테라 등 스페인의 휴양지를 강조한 것(“스페인 출신 브랜드라는 건 변하지 않지만, 자유롭고 편안한 분위기를 담고 싶었어요”)도 포함된다.
앤더슨의 과감함은 캣워크 밖으로도 이어졌다. 그는 첫 광고 캠페인을 사진가 스티븐 마이젤이 촬영한 이태리 <보그>의 1997년 화보 이미지로 골랐다. 화가 알렉스 카츠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화보에 등장한 커스틴 오웬과 매기 라이저 등이 입은 옷은 물론 로에베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미지가 발산하는 분위기가 앤더슨이 꿈꾸던 로에베의 그것과 완전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 후로도 꾸준히 마이젤과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가와 함께 이미지를 바라보는 방법에 도전하고 싶었습니다.
마이젤뿐만이 아니었다. 사진가 제이미 혹스워스, 캐스팅 디렉터 애슐리 브로카우, 뮤직 디렉터 미셸 고베르, 그래픽 디자이너 M/M 파리 등 강호 최고의 고수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앤더슨의 부탁에 새 로고를 만들고, 이비자를 테마로 한 플레이리스트를 공개하는가 하면, 새로운 형식의 룩북을 촬영했다. “그들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은 행운입니다. 그들이 지닌 날카로운 비전을 전적으로 신뢰하니까요.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것을 어떤 식으로 표현할지 정확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하는 동지들 중 중요한 인물 중 하나는 스타일리스트 벤자민 브루노. 파리 <보그> 출신인 그는 앤더슨의 모든 작업을 함께 한다. “벤자민은 제게 있어 가장 중요한 ‘콜라보레이터’입니다.” 이유는 간단했다.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이 함께 일했으니까요. 아주 좋은 친구이자 절대적 신뢰를 갖고 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No’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2008년 남성복 컬렉션으로 시작한 앤더슨은 빠른 속도로 패션계의 정상에 올랐다. 여성복을 시작하자마자 탑샵과 협업 컬렉션을 선보였고, 베르수스 디자인을 잠시 맡기도 했다. 그런 뒤 2013년 거대 기업 LVMH의 투자와 함께 로에베도 이끌게 됐다. 그렇다고 본업에만 몰두한 건 아니다. 올해 초엔 영국의 어느 미술관에서 공예와 순수 예술, 패션을 연결한 전시를 직접 큐레이팅했고, 유니클로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컬렉션을 완성시켰다. 분주하게 일한 덕분에 북아일랜드 작은 마을 출신의 미소년은 30대 초반에 커다란 성공을 손에 쥐었다. “제시간에 출근해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 일을 마칠 수 있도록 하는 훌륭한 팀원이 있습니다.” 그가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제 역할은 지휘하는 겁니다. 디자인은 일부일 뿐입니다. 수백 명의 사람을 같은 방향으로 끌고 나갈 수 있어야 하죠.”
유구한 역사를 지닌 브랜드가 새 디자이너를 받아들이면, 그 루트는 대부분 비슷하다. 아카이브 속에서 적절한 디자인을 찾아 현대적으로 탈바꿈시키거나 그 이미지를 통해 구두와 핸드백을 판매하는 이미지를 쌓는 것 말이다. 하지만 앤더슨은 무작정 과거로 후진하진 않았다. “과거는 무척 중요합니다. 미래에 대한 공명판이 되어주니까요. 덕분에 미래를 조망할 때 도움이 되는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는 양날의 칼 같은 위험성도 인지하고 있다. “지나치게 향수에 빠지거나 진부한 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에만 기대면 안 됩니다.” 170년간 이어진 로에베 역사 중 무엇이 현시대에 어울리는 재료가 될지에 대한 결정은 온전히 앤더슨의 것이다.
파격적 이미지와 전위적 디자인의 컬렉션은 앤더슨의 로에베를 주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인스타그램 속 ‘좋아요’를 얻는 것과 고가의 핸드백을 판매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그에게 올해 국내 어느 일간지의 설문 조사 결과를 들려주었다. 20대 이상 여성에게 100만원을 어디에 쓰겠느냐고 물었을 때, 60%는 여행을 하겠다고 답했고 20%는 공연 등 문화생활을 선택했다는 결과 말이다. 이른바 ‘명품’ 의상이나 소품을 구입하고 싶다는 여성은 18%가량에 그쳤다는 것도 덧붙였다. “맞아요, 업계가 변하고 있어요. 소비자들도 변하고 있죠. 그래서 저는 문화가 점점 더 중요한 시대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이야말로 럭셔리죠.” 현시대의 럭셔리는 어떤 의미일까, 라는 다음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그가 한발 먼저 나가 있었다. “새로운 현상이에요. 더 이상 기존 형태에 럭셔리를 담을 순 없습니다. 갤러리에 가고, 미술 작품을 감상하고, 새 영화를 보고, 음악을 즐기고, 밤 문화를 나누는 것. 뭐든 경험하는 것이 현시대의 럭셔리 아닐까요?”
다시 문화와 지식, 핸드백 사이에 선을 긋는다면? “단순히 백을 팔고 싶진 않습니다. 하나의 철학을 전하고 싶습니다. 우리만의 문화를 담는 거죠.”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시작한 건 ‘로에베 크래프트 프라이즈’다. 전 세계 공예가들을 상대로 한 콘테스트로 2017년 첫 번째 수상자를 발표했다. “멋진 경험이었습니다. 특히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분야의 인물들을 소개할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앤더슨의 공예에 대한 열정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런던에 자리한 자택엔 수많은 도자기와 가구, 소품으로 가득하다. 또 이런 작품이 로에베 매장에 등장할 때도 있다(한국의 달항아리 50여 점은 곧 전 세계 로에베 매장을 장식하게 된다). 서울에 와서도 여러 갤러리와 풍물 시장을 도느라 바빴다고 그는 얘기한다. 그 여정 가운데 윤형근의 단색화, 양병용의 소반, 풍물 시장에서 발견한 원앙 나무조각 등이 앤더슨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여행을 하면 이전에 보지 못한 것, 제가 미처 알지 못하던 것을 발견할 수 있어요. 그것만큼 환상적인 건 없죠.” 이러한 ‘발견’이 로에베 쇼윈도에 영감을 주거나 구두 굽에 영향을 끼칠지도 모를 일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모든 것이 영감인 삶을 다르게 표현한다면, 바라보는 걸 멈추지 못하는 삶이 아닐까? 혹시 끝없이 자극과 아이디어를 찾아 헤매는 일이 고단하진 않을까? 앤더슨에게 이 모든 것이 본능에 가까울 뿐 의무와는 다르다. 영감을 얻는 것이 공기를 마시는 것 같다고 말하는 건 꽤 간지러운 일이지만 앤더슨은 망설이지 않았다.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그것이 흥미로운 거라면 좋습니다. 제가 창조할 수 있는 재료가 되니까요.
- 에디터
- 손기호
- 포토그래퍼
- Mok Jung Wook
- 모델
- 정청솔, 서유진, 배유진
- 헤어
- 박규빈
- 메이크업
- 유혜수
- 장소
- 'Earth House', Concrete Box House' by Byoung Soo 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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