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 트렌드

참을 수 없이 지루한 아름다움

2018.06.28

by VOGUE

    참을 수 없이 지루한 아름다움

    립스틱 케이스만 한 미의 기준에 갇힌 대한한국 여자들.

    남다른 개성으로 사랑받는 그녀들! 개성파 아티스트 이사마야 프렌치, 버즈컷 듀오 애드와 아보아 & 루스 벨, 빨간 머리 호연, 백반증 모델 위니 할로우, 복고풍 뷰티 아이콘 에이미 와인하우스.

    내 친구 ‘루’는 홍콩 사람이다. 우리는 인도네시아에서 만났다. 얼마 전, 짧은 고향 방문을 앞두고 루는 걱정에 휩싸였다. “엄마가 날 죽이려고 할 거야.” 그는 그을린 피부 때문에 혹독한 잔소리를 들을 거라 예상했다. “홍콩은 외모 압박이 너무 심한 사회야. 외국에서 잘 지내다가 고향에만 가면 피부가 어떻네, 살이 쪘네 빠졌네, 메이크업을 안 하네, 집요한 외모 품평을 듣고 불안에 휩싸여.” 나는 코웃음을 쳤다. “과연 한국보다 심할까?”

    2년 전, 나는 별생각 없이 고향에 갔다가 2박 3일 동안 논스톱으로 계속되는 어머니의 히스테리에 굴복해 피부과에 끌려가서 필러를 맞았다. 어머니는 당신 딸이 더 이상 스무 살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볼에도 뭘 넣어야 했는데. 볼이 꺼졌어. 볼이 통통해야 예쁜데. 볼이 볼록해야 어려 보이는데. 그 간호사는 뭘 맞았는지 볼이 볼록하더라고. 요즘은 볼에다 줄기세포를 넣는다더라. 아니다, 실을 넣을까? 연예인 K 봐라, 주름 싹 지우고 얼굴 빵빵하게 만들더니 10년은 어려 보이잖니. 며칠만 더 쉬다 가면 안 돼? 주사 한 방이면 되는데. 제발 볼에다가…”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는 고장 난 녹음기처럼 같은 말을 끝없이 되풀이했다. 그다음에 만났을 때는 더 심했다. 부모님이 불시에 서울을 다녀가는 바람에 나는 일하느라 밤을 새우고 퀭한 얼굴로 샤워도 못한 채 달려 나갔고, 그 자리에서 나를 5년 만에 만난 이모님이 “너, 왜 이리 얼굴이 꺼칠하니?”라고 걱정한 것을 ‘네 딸 늙었다’로 받아들인 어머니의 분노가 폭발했다. 어머니는 가족 모임 도중에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당장 성형외과로 나를 끌고 가 ‘여기 응급 환자가 있습니다!’ 외칠 기세였다. “제발 엄마, 나는 이제 마흔 살이야. 스무 살 아이돌처럼 보일 수도 없을뿐더러 그래서도 안 돼!” “그런 게 어딨어! 요즘 같은 세상에. 잡티며 주름이며 낯가죽 얇은 거며, 요새 너처럼 관리 안 하는 여자가 어디 있다고! 부모 앞에 그런 꼴로 나타나는 게 아니야!” 어머니는 마치 내가 사고로 급사라도 당한 것처럼 슬픔과 설움이 가득한 얼굴로 오열할 듯 말했다. 그 일을 잊은 것인지, 요즘도 어머니는 매일 내가 고향에 오기만 학수고대한다. 전화를 끊을 때면 기대에 달뜬 목소리로 묻는다. “그래서 언제 한국에 온다고? 다음에 오면 같이 병원 가서 레이저도 싹 하고 보톡스도 몇 방 맞고…” 하지만 나는 지금의 내 얼굴에 만족하고, ‘그런 꼴’이 아닌 모습으로 애써 변하고 싶지도 않기 때문에, 부모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예의를 차린다. 내 나름의 효도다.

    가족만 그런 건 아니다. 지난번에 내가 발리에서 6개월을 보내고 귀국했을 때, 친구들의 첫마디는 모두 같았다. “왜 이렇게 얼굴 살이 빠졌어?” 체중은 똑같고 뱃살이 오히려 늘었다는데도 한껏 안쓰러운 척 “무슨 병이라도 걸린 거 아냐?” 덧붙인 사람도 있고, 머릿결이 거칠어졌다거나 주름이 늘었다며 타박을 늘어놓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대화를 스무 번쯤 반복하려니 구역질이 났다. 그래서 이번에 귀국하면서, 나는 작은 노트를 준비할까 생각했다. [저는 원래 ‘볼 때마다 더욱 말라 보이는 얼굴’을 가진 사람입니다. 주름과 잡티, 피부색은 포기했습니다. 지난번에도 같은 지적한 거 기억나시죠? 반복하기 지쳐서 이렇게 적어왔습니다. 아래는 이번 달 내게 ‘왜 이렇게 얼굴 살이 빠졌어?’라고 물은 사람의 명단입니다. 이름을 적고 사인하세요.]

    누가 만든 기준인가
    물론 나도 예쁜 사람들을 좋아하고, 아름다워지고 싶다. 한국처럼 외모 품평이 인사말을 대신하고 타인의 약점을 조롱하는 게 유머로 통하는 나라에서 못생긴 여자로 산다는 건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성형수술도 반대하지 않는다. 나도 몇 군데 손을 봤고, 그 덕에 삶이 백배는 편해졌다고 믿는다. 문제는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범위가 너무 좁다는 거다. 나는 마흔 살에는 마흔 살답게 아름답고, 쉰 살에는 쉰 살답게 아름답고 싶다. 하지만 이 빌어먹을 나라에는 다양성이란 없다.

    나는 열대의 섬마을에 사는지라 수영복을 자주 사는데, 한국에 온 김에 인터넷 쇼핑을 좀 해보려다 말았다. 근육이라곤 한 점도 없는데 가슴은 큰 말라깽이들이 아기처럼 뽀얗고 말랑말랑한 속살을 드러낸 채 컬러 프린트로 출력해서 오려 붙인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큰 눈과 입술, 뾰족한 콧대, 예각에 가까운 날카로운 턱선을 하고 모래밭에 서서 말갛게 웃는 사진은 아무리 봐도 기이하다. 전혀 건강해 보이지 않는다. ‘나는 무해합니다’를 강조하다 못해 생기라곤 없는 풀 죽은 표정이나 맹한 눈빛들이 기분을 더 우울하게 만든다. ‘이 비키니는 해양 스포츠가 아니라 인스타그램용 셀피 찍을 때와 선탠할 때 남자들에게 잘 보일 용도로 만들어졌습니다’라고 광고하는 듯하다. 2D 캐릭터처럼 생기 없고 비례 안 맞는 이 인체들이 어찌하여 ‘모델’이라는 것이 되었나 생각해보면, 짚이는 데가 있다.

    한국 남자들은 남들 앞에서 좀처럼 애인이나 아내 칭찬을 하지 않는다. 특히 외모에 대해서는 그렇다. 그런데 드물게 여자 친구 외모를 자랑하며 자기 이상형이라고 말하는 남자를 몇 번 만난 적 있다. 주변 여자들은 잔뜩 기대에 차서 사진을 보여달라고 조른다. 남자는 약간 부끄러워하면서 스마트폰 갤러리를 열어주고, 다 함께 그것을 관람한 여자들은 난처해하며 화제를 돌린다. 그리고 돌아서서 쑥덕거리는 거다. “일본 애니메이션 야동과 온라인 게임을 너무 많이 봐서 인간과 그래픽을 구별 못하게 된 거 아니야? 이거 완전 사이버펑크네.”

    2D형 미녀들의 옆에는 걸 그룹 스타일이 버티고 있다. 당장 홍대 쪽이나 성수동에 나가보라. 밀가루처럼 하얀 얼굴에 빨간 립스틱을 칠한 고만고만한 여자 아이들이 디테일만 다를 뿐 컨셉은 같은 하나의 걸 그룹처럼 차려입고 돌아다닌다.

    이목구비의 KS 마크
    물론 걸 그룹 메이크업이든 사이버펑크 마스크든 그게 자연스러운 본인 취향이면 뭐라 할 일이 아니다. 누가 성형을 해서 얼굴에 코를 세 개 붙이든 눈을 불가사리 모양으로 트든 관심 없다. 하지만 나는 ‘이런 것이 예쁜 것이다’라고 정해놓고 소몰이하듯 여자들을 밀어붙이는 사회 분위기가 불만이고, 그에 부화뇌동하여 오로지 그 타이트한 미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느라 너무 많은 시간과 돈과 열정을 허비하고 끝내는 개성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안쓰럽다. 마흔 살이 이마에 주름 하나 없는 스무 살처럼 보이기를, 스무 살이 세상 물정 하나 모르는 유아처럼 보이기를 강요하는 이 사회의 ‘동안 지상주의’는 내 삶에 심각한 스트레스를 초래하기도 한다. 눈은 클수록, 코는 높을수록, 입술은 도톰할수록 좋고, 피부는 하얗고 잡티가 없어야 하며, 턱은 짧고 이마는 볼록하고 얼굴 면적이 작아야 하며, 몸은 기아처럼 말라야 한다는 게 이 사회가 말하는 미의 이상향이다. 그리하여 억지로 그 공식에 끼워 맞춘 외모가 아름다우냐 하면, 별로 그렇지도 않다.

    요즘 나는 다양한 외모와 인종이 모여들어 배낭여행이나 해양 스포츠를 즐기는 동남아 관광지에 산다. 거기서도 이따금 옷차림에 잔뜩 신경을 쓰고 풀 메이크업을 하고 아기처럼 말랑한 피부를 가진 인형 같은 이목구비의 스무 살짜리 동북아 관광객이 타인의 시선을 잔뜩 의식하면서 돌아다니는 걸 본다. 가슴 아프게도, KS 마크를 붙여도 좋을 만큼 규격화된 그들에게선 아무런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품만 난다.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유튜브로 메이크업을 배우고, 화장을 안 하면 왕따를 당한다고 한다. 중학교 졸업 선물로 성형수술을 해주는 부모가 있다기에 깜짝 놀란 게 몇 년 전인데, 지난달엔 “아이가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일찍 성형수술을 해서 그게 제 얼굴인 줄 알고 자라게 해주고 싶다”며 세 살짜리도 성형이 가능하냐고 병원에 상담한 부모의 사례를 SNS에서 보았다. 그들은 기술을 통한 미의 상향 평준화를 꿈꾼다. 하지만 변별력 없는 아름다움은 더 이상 아름다움이 아니다.

    우리 그냥 곱게 늙게 해주세요
    나는 올해 마흔두 살이 되었다. 내 나이에 걸맞게 주름이 있고, 여름 나라에 살아서 피부가 어둡다. 메이크업은커녕 선블록도 바르지 않기 때문에 잡티가 많아졌고, 흰머리 염색을 쉽게 하려고 몇 년 기른 머리카락도 최근 짧게 잘랐다. 그래도 그곳에선 외모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내가 아름답다고 말해준다. 이유는 하나다. 내가 그들과 다르게 생겼기 때문이다. 눈썹이 두껍고 눈이 꺼지고 얼굴이 크고 턱이 각지고… 그런 디테일까지 평가하는 사람은 없다. 나도 그들에게 말한다. 당신도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한국에 도착하는 순간 시련이 시작된다. 보고 싶대서 벼르고 별러 만난 친구들은 내가 이제 완연한 중년 여성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마치 수치스러운 일인 양 조심스럽게 일깨워준다. 내 머리 모양이 한심하다고, 스타일이 누추하다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6개월 만에 한국에 돌아온 나는 불과 이틀 만에 귀국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나는 왜인지 비자가 만료될 때마다 여행 삼아 한국에 다녀가겠노라 결심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내가 더 이상 이곳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기분이 든다. 섭섭하진 않다. 나도 이제 이 나라가, 그리고 립스틱 케이스만 한 미의 기준에 갇혀 서로를 힐끔거리는 당신들이 지루해서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컨트리뷰팅 에디터
      이숙명
      일러스트
      스노우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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