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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유람하고 그랑 팔레에 정박한 샤넬 크루즈호

2018.07.06

세계를 유람하고 그랑 팔레에 정박한 샤넬 크루즈호

1919년 첫 항해를 시작한 샤넬호가 100년 후 크루즈 패션의 정통성을 되살린 컬렉션으로 돌아왔다. 세계를 유람하고 그랑 팔레에 정박한 샤넬 크루즈호.

“저는 그랑 팔레를 사랑해요. 어릴 때 자동차 쇼를 구경하러 부모님과 여기 왔을 때를 기억합니다. 정말 매력적인 장소였죠. 이곳에서 패션쇼를 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습니다.” 2018/19 크루즈 컬렉션에 대한 첫 단서는 그랑 팔레라는 장소였다. 두 번째 단서는 쇼 전날 도착한 선박 일러스트의 초대장과 분홍색 티셔츠. 그리고 5월 3일 목요일 저녁, 그랑 팔레 입구에 설치된 승선 안내 데스크에 스트라이프 보트넥을 입은 직원들이 탑승객 900여 명을 반겼다. 갈매기가 끼룩끼룩 우는 소리, 웅장한 뱃고동 소리, 배가 끼이익 하고 정박하는 음향 효과는 밤 부둣가에 온 듯한 현장감을 고조시켰다. 입구를 지나자 눈앞에 펼쳐진 건 그랑 팔레 내부를 꽉 채운 100m 길이의 초대형 샤넬 크루즈호! 같은 장소에서 거대한 우주정거장을 완공하고(2017 F/W), 고대 그리스 신전(2018 크루즈)과 에펠탑을 세우고(2017 꾸뛰르), 폭포가 쏟아지는 절벽(2018 S/S)을 창조한 샤넬이지만 이번에야말로 가히 압도적이고 또 정교했다. 무엇보다 크루즈 선박에서 크루즈 컬렉션을 선보이는 것만큼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방식이 있을까? “첫 아이디어는 진짜 크루즈 선박을 빌려 24시간 동안 여행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상상을 만족시키는 배가 없다는 걸 알게 됐죠.” 샤넬의 패션 부문 사장 브루노 파블로브스키의 말이다.

선박 굴뚝에 연기가 나며 쇼의 시작이 가까워짐을 알리자 크리스틴 스튜어트, 마고 로비, 릴리 로즈 뎁 등 샤넬 앰배서더들이 그랑 팔레 항구에 도착했다. 한국에서는 배우 김고은이 참석했고, 자크무스, 마린 세르 등 파리의 젊은 디자이너들도 거장 라거펠트 선장의 초대를 받아 프런트 로에 착석했다. “샤넬과 계약상으로 1년에 네 번 컬렉션을 열게 되어 있지만, 지금 10차례를 합니다. 신경 쓰지 않아요. 저는 일하고 싶고 늘 새로운 것을 하고싶습니다. 고객에게 다른 어떤 브랜드에서도 할 수 없는 선택권을 주고 싶습니다. 그게 바로 제 관심입니다.” 80대 중반이지만 끊임없는 상상력으로 35년째 샤넬호를 운항 중인 선장의 설명이다.

뱃고동 소리가 잠잠해질 때쯤 그랑 팔레 벽면이 밤하늘의 별빛으로 반짝였고 쇼가 시작됐다. 배로 들어가는 계단에는 ‘라 파우자(La Pausa)’라는 단어가 쓰인 흰색 니트를 입은 남자 선원들이 남았다. 이윽고 컨테이너 박스 뒤쪽에서 남자 선원들과 같은 니트와 스트라이프 팬츠, 베레모를 착용한 모델들이 걸어 나왔다. 구명 튜브를 형상화한 동그란 가방과 목걸이, 닻 모양 브로치, 푸른 바다의 물결처럼 찰랑거리는 러플 드레스, 파란색 틴트 선글라스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88벌의 룩은 하나도 같은 게 없었지만, 모델들은 모두 깨끗한 흰색 메리 제인 슈즈 차림. “선상은 다른 어떤 곳보다 깨끗하니까요.” 컬렉션 후반에 등장한 지그재그 패턴은 라거펠트가 20세기 영국예술 운동 중 하나였던 소용돌이파(Vorticism)에 영감을 얻은 것이다(제1차 세계대전 즈음 동맹국 전함에 쓰인 카무플라주와 비슷하다). “1~2차 세계대전 중에 바다를 항해한 보트, 원양 정기선을 좋아합니다.”

사운드트랙 또한 여행이라는 컨셉과 맞았다. ‘발파라이소’에 가고 싶다고 노래하는 파울라 무어의 ‘Valparaiso’, 피날레를 장식한 펫샵보이즈의 ‘Go West’까지. 20분간 관객들은 이곳이 땅과 맞닿은 세트장이란 현실을 잊은 채 매료됐다. “그랑 팔레에서는 외부적 요소로부터 방해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칼이 이번 컬렉션을 통해 전하고 싶은 이미지와 일맥상통하는 시적인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브루노 파블로브스키가 전했다. 쇼가 끝나자 패션 스튜디오 디렉터 버지니 비아르(Virginie Viard)와 함께 선장이 피날레 인사를 하러 나왔다. 그리고 관객들은 칼을 따라 배 안으로 들어가 이번 쇼의 백미인 선상 파티를 즐겼다. 선장도 1층 테이블에 앉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런웨이 모델들은 디스코 볼 앞에서 춤을 췄으며 샤넬의 귀여운 어린이 모델 허드슨과 제임슨 크로닉 형제는 다람쥐처럼 배 안을 돌아다니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라 파우자’라는 이름은 코코 샤넬이 생전에 지내던 여름 별장 이름에서 따왔어요.” 시끌벅적한 선상 파티에서 샴페인을 가지러 가는 도중 샤넬 스태프가 귓속말로 전했다. 코코 샤넬은 요트 여행을 즐기기로 유명했다. 요트 ‘플라잉 클라우드’는 웨스터민스터 공작과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진 장소가아닌가. 샤넬은 이 요트를 타고 모나코 몬테카를로에 정박하던 도중 알프스 산맥과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카프 마르탱(Cap-Martin) 마을을 발견했다. 그리고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지대가 높은 마을 로크부륀(Roquebrune)의 땅에 1930년 별장 라 파우자를 완공했다. 그 후 20년 동안 친구들과 이곳에서 휴가를 보냈다. 갑판에 올라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니 흑백사진에서 본 적 있던 코코(요트에 올라탄)의 모습이 떠올랐다. 버뮤다 쇼츠 혹은 통 넓은 팬츠에 선원풍 모자, 스트라이프 보트넥 셔츠를 입고 햇살을 만끽하는 장면 말이다. 지금 이곳에 코코는 없지만 그녀의 여행 같은 삶이 우리 시대 크루즈 컬렉션을 존재할 수 있게 한 이유 아닐까.

사실 코코 샤넬은 크루즈 컬렉션이라는 개념을 패션계에 처음 소개한 디자이너다. 1919년 가을 프랑스 남서부 비아리츠(Biarritz)에서 선보인 여행을 위한 리조트 컬렉션 말이다. 저지 소재의 옷과 스웨터는 기존 기성복보다 좀더 가볍고 편안했으며 도시보다 해변 휴양지에 어울릴 옷이었다. 미국 <보그>는 그해 11월호를 통해 “그녀가 작년에 선보인 옷과 특별히 다르진 않지만, 동시에 파리에서 선보이는 컬렉션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소개한 적 있다. 라거펠트 역시 여행 테마를 놓친 적 없다. 최근에는 더 집중하는 듯하다. 1983년 샤넬 가문에 입성했을 때 크루즈 컨셉을 되살린 그는 올해 하반기를 위해 두 가지 캡슐 컬렉션인 스키복 ‘코코 네쥬(Coco Neige)’와 수영복 ‘코코 비치(Coco Beach)’를 공개했다(더위를 피해 추운 곳으로 피하거나, 추위를 피해 따뜻한 곳으로 향하는 여행 컨셉).

칼 라거펠트는 뉴욕, 로스앤젤레스, 베니스, 서울, 쿠바 등에서 패션쇼를 발표했지만 최근엔 연이어 파리에서 쇼를 발표하고 있다. 패션 여정의 종착지로 파리를 확정하는 듯 말이다. 샤넬은 9월 파리 패션의 중심가인 생토노레에 새 플래그십 스토어 오픈을 앞뒀으며 2년 후에는 마레에 뷰티 매장도 연다. “세상은 바뀌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제가 살던 과거의 파리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합니다.” 언젠가 라거펠트의 말처럼 그가 살았던 과거의 역동적 파리는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창조적 발상과 노력 덕분에 오래된 그랑 팔레는 변화무쌍한 패션 성지가 되었다. 1900년 만국박람회를 위해 지은 이곳은 전 세계로부터 새롭고 진귀한 것이 죄다 모였다. 100년 후인 지금, 전 세계 패션 피플들은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새로운 패션을 보기 위해 이곳으로 향한다.

    에디터
    남현지
    포토그래퍼
    GETTYIMAGESKOREA, COURTESY OF CHANEL
    스폰서
    샤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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