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아나 그란데의 세계
세계적 명성, 음악계의 존경, 1억 명이 넘는 소셜 미디어의 팔로워까지. 여기, 모든 걸 다 가진 가수가 있다. “아리아나 그란데처럼!”
대해 열광하는 한 가지는 자연스러운 아이라이너와 아이폰을 계속 고수하긴 하지만 사실 그녀가 자칭 괴짜라는 점 때문이다. 이런 점을 바탕으로 이 이탈리아계 미국인 가수는 영구히 할로윈 데이처럼 살아가는 다소 난해한(하지만 섬세한) 라이프스타일을 택했다. 새봄이 한창일 때 그녀의 정교한 철제 난간에는 여전히 가짜 거미줄이 잔뜩 쳐져 있고 많은 플라스틱 호박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나는 가을을 가장 좋아해요”라고 그녀는 차분하게 말한다. “가을이 끝나갈 즈음이면 나는 ‘이런 가을이 계속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해요. 그 순간 나는 ‘잠깐만… 나는 어른이고 여긴 내 집이니까… 가능해!’” 그녀는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궁전을 한눈에 훑어본다. “뭔가를 좀더 설치할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란데와의 인터뷰 경험은 10대의 밤샘 파티 같은 느낌을 준다. 그녀는 엉덩이에 손을 얻은 포즈를 취한 채 자신이 오늘 걸친 의상을 가리키며 “나는 연회색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한편 그녀의 가벼운 수다는 종종 초현실적이다. “나는 구름을 좋아해요.”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한다. “당신이 이렇게 햇살 좋은 날에 와서 사실 슬프군요”라고 그녀는 계속 울려대는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며 말한다. 흐릿한 어느 날 아침 정원의 모습을 담은 사진첩을 나에게 보여주면서 말했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빠르게 깜빡거린다. 사람들이 ‘모든 것이 송두리째 바뀐 해’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누구라도 아리아나 그란데의 인생에서 지난 1년의 시간을 상상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2017년 봄, 한때 어린이 스타였던 그녀는 부족한 게 없어 보였다. 10억 번 이상 스트리밍된 아주 전염성 강한 R&B와 EDM 느낌의 팝송 카탈로그, 표가 완전 매진된 투어, 패션 상품, 세계에서 가장 짧은 스커트를 찾는 숭고한 미션에 나선 연대기를 찍은 듯 기막히게 멋진 여러 뮤직비디오 등. 그녀는 4옥타브를 넘나드는 자신의 탁월한 목소리 음역대에 힘입어 쌓아 올린 음반 제작 이력 덕분에 성공의 길로 들어섰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가짜 스캔들, 매혹적인 남자 친구들, 대중음악 분야에서의 최고 인기 스타에게 군더더기처럼 따라붙는 그 밖의 다른 모든 것과 더불어 수억 명에 달하는 팬 군단 ‘아리아 나토르’를 양산해냈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높게 반 묶음 하는 업스타일을 세상 누구보다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10대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자로서는 정말이지 대단한 삶이다.
그러다가 비극적인 일이 발생했다. 2017년 5월 22일, 그녀가 영국에서 ‘Dangerous Woman’ 월드 투어를 진행하던 중 맨체스터 아레나 공연이 끝난 직후 관중이 쏟아져 나오던 때에 살만 아베디라는 한 젊은 남자가 현관 로비로 걸어 들어와 사제 폭탄을 터트렸다. 그 사건으로 그 테러범뿐 아니라 그녀의 팬 22명과 그들의 부모까지 목숨을 잃었다. 그날 사건은 그보다 10여 년 전 발생한 7·7 폭탄 테러 이후 영국에서 발생한 최악의 테러로 기록됐고, 500명의 부상자가 추가됐다. 그란데의 관중이 아주 젊은 축에 속한다는 사실은 오히려 공포를 가중시킬 뿐이었다. 아리(그녀의 팬들이 그녀를 부르는 애칭)는 또한 보통 사람들과 조금 다른 사람들에게는 피뢰침 같은 존재다. 그녀의 콘서트장은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들과 걱정이 많은 사람들이 긴장을 풀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공간이며, LGBTQ 아이들은 아리와 ‘만나 인사하는’ 시간에 ‘Break Free’ 노래와 함께 종종 처음으로 커밍아웃을 한다. 그녀는 그들을 따뜻하게 포옹하며 “오늘 밤 쇼는 여러분의 커밍아웃 파티가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날 밤 행사를 소셜 미디어와 전 세계 뉴스 채널에서 실시간 공개하면서 이것이 누구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던 극도의 고통이었다는 게 명확해졌다. 그란데는 한밤중에 트위터를 날렸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마음이 산산이 부서졌다. 너무 유감이다.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그래서 그녀는 뭔가 특별한 일을 벌였다. 맨체스터시에서 죽은 자들을 기리고 희생자 가족들을 위한 기금을 모으기 위해 추모 콘서트를 벌이겠다고 발표했다. 처음에는 이 같은 제안이 대중의 지지를 많이 얻지못했다. 영국 언론인 피어스 모건 같은 슬픔 감시꾼들이 나서서 그녀의 제안이 타당한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밤이 되자 여성들이 나왔다. 그녀는 콜드플레이와 리암 갤러거에서 저스틴 비버와 마일리 사이러스에 이르는 음악계 최고의 스타들을 끌어모았으며 청바지와 트레이닝복 상의, 스파이크 힐 차림으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슈퍼히어로가 되어줬다. 그녀가 지역 학교 합창대와 함께 부른 노래는 매우 아름다우면서도 대단히 인상적이었고 치유하는 힘이 있었다. 예상외의 국보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그란데는 밀레니얼 세대가 아닌 이들에게는 여전히 미스터리한 존재다. 그녀는 친구가 많아도 파파라치와 신변 안전에 신경 쓰다 보면 여행이 따분해지기 십상이라 친구들과 그냥 집에서 어울려 노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정말이지 그란데도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우뚝 선 (아마 리한나, 테일러 스위프트, 제니퍼 로렌스처럼) 단지 소수의 여성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성공한 여성이다. 매년 수억 파운드의 수익을 올리는 그란데는 멀티 플랫폼 제국을 그녀의 작은 어깨에 짊어지고 다니며 그녀를 광적으로 추종하는 소셜 미디어 팔로워들 덕분에 업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소셜 미디어에서 팬들의 추종을 그녀보다 많이 받는 예술가는 아마도 거의 없을 거다. “나는 그들을 너무, 너무, 너무, 너무 사랑해요”라고 그녀는 외친다. “나는 매일 그들에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트윗인 ‘안녕!’이라는 인사말을 건넸다가 결국 아주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돼요.” 그녀는 짧은 한숨을 쉬며 말한다.
널리 알려진 대로, 그녀는 키가 153cm 정도밖에 안 된다. 이런 사실을 미리 알고있었다 해도 실제로 그녀가 얼마나 자그마한지 직접 보면 깜짝 놀란다. 그녀가 이따금씩 갑자기 나를 껴안으며 내 주위를 우아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내가 아주 매력적인 참새 한 마리를 접견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우리는 마실 차를들고 대형 탁자가 있는 다이닝 룸으로 이동했다. 탁자에는 각종 문서가 흩어져 있었고, 화장품도 잔뜩 쌓여 있었으며, 오래된 선글라스도 여러 개 놓여 있었다. 그녀는 이곳에 3년을 살았는데도, 아직도 벽에는 할 일 목록을 손수 적어둔 끝이 살짝 말려 올라간 얇은 A2 사이즈 종이 몇 장 (“할 일: 싱글 앨범 출시, 뉴욕 가기…”) 말고는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그녀가 현재 기르는 일곱 마리의 개를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비싼 학생 숙소 같다. 그녀는 툴루즈 로트렉이라는 엷은 갈색의 작은 잡종을 제외한 모든 개를 자기 방에서 내쫓았다. 툴루즈는 “몹시도 예술가 같다”고 그녀는 설명한다.
아리아나는 <보그> 촬영을 위해 다소 멋지게 차려입었다. 꽃무늬 패치 프린트를 아무렇게나 붙인 헌 트레이닝복 상의, 그녀가 전속 계약한 리복의 검정 레깅스, 코믹 효과를 내기 위해 녹음기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이며 말한다. “미스터리한 헤어밴드까지!” 확실히 그녀는 힐에 집착한다. “오버사이즈 남성용 재킷을 드레스처럼 걸치고 롱부츠에 대개 팬츠를 입지 않은 차림새”가 그녀가 가장 선호하는 룩이라고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설명한다. 컬러가 핵심이다. “내 팬들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깔을 알아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어요.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은 라벤더였다가 노랑이 되기도 하고, 또 지금은 아이스 블루예요.”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말한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한쪽으로 갸우뚱한다. “이를테면 회색과 섞은 아이스 블루죠.”
인터뷰를 진행한 시점은 장대한 4개월간의 자발적 소셜 미디어 사용 금지 기간이(그녀의 인스타그램 군단은 트위터와 페이스북 사단이 그랬듯 상실감에 빠졌다) 거의 끝나가는 때였다. 그란데는 자신의 싱글 ‘No Tears Left to Cry’로 의기양양하게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마지막 며칠 동안 사생활을 즐기며 완전한 휴식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며칠 안에 개인적 슬픔과 보편적 카타르시스를 주제로 한 이 싱글곡은(숨을 멎게 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대성공을 거두며 출시 몇 시간 후 85개국에서 동시에 아이튠즈 차트를 석권했다. 나를 위해 자신의 스피커를 툭툭 치며, “이번 앨범이 처음에는 아주 감각이 젊고 젠체하지 않는 것처럼 들리지만, 음악을 들으면 그게 정말 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녀는 이 네 번째 앨범을 ‘Sweetener(달콤한 것)’라고 부른다고 설명한다.(그리고 7월 13일 아리아나는 이 앨범의 두 번째 리드 싱글곡인 ‘God Is a Woman’을 발표했다)
강렬한 비트와 경탄을 자아내는 그녀의 보컬이 방 안을 가득 메운다. 퍼렐 윌리엄스와 맥스 마틴이 제작을 맡았고, 특별 게스트에는 두아 리파도 있었다. 최고의 스태프가 참여한 앨범에서 아리아나는 이번 프로젝트 전반을 통솔했는데, 나는 그녀가 정말 영리하다고 생각한다. ‘Get Well Soon’이라는 트랙에서 그녀는 일종의 자기 치료 매뉴얼을 써서 거기에 가장 전염성이 강한 멜로디를 갖다 붙였다. 여기에 눈물과 웃음이 동시에 있는 것 같다고 나는 그녀에게 말한다. “음악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자유, 행복을 선사해야 해요”라고 그녀는 대답한다. 그러고는 그녀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해진다. “나는 많은 사람이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각자 걱정거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라고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한다. 당신의 걱정거리는 뭐냐고 내가 물었다. “내 걱정거리 자체가 바로 걱정거리”라고 아리아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나는 늘 걱정거리가 있어요. 모든 사람이 걱정거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 번도 그걸 입 밖으로 말해본 적 없지만 투어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가 그 어느 때보다 가장 힘들었어요.” 2017년 9월, 그녀는 아시아와 남미, 호주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콘서트를 마친 후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와 자신이 늘 해오던 것, 바로 ‘일’을 할 거라고 주장했다. “내가 집에 와서 바로 새 작업을 시작하고 싶어 하자 모두가 미쳤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보란 듯이 다음 날 바로 스튜디오에 나갔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자신을 ‘일중독자’라고 설명한다.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이 일이에요. 어릴 때부터 알았죠. 열네 살에 브로드웨이에 데뷔한후 쉬지 않고 일하고 있거든요.”
한편으로 이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그녀의 대담무쌍한 추진력은 음악계에서 전설과 같다. 사람들에 따르면 중산층 집안 출신인 그녀는 네 살 때 엄마 조안이 후덥지근한 플로리다주의 보카러톤시의 집 근처에서 열린 셀린 디온 콘서트에 그녀를 데려갔을 때 팝 디바로서 그녀의 인생이 정해졌다고 한다. 셀린 디온이 우렁찬 목소리로 ‘My Heart Will Go On’의 두 번째 앙코르를 부르는 동안 “네가 저렇게 노래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니?”라고 조안이 묻자, 어린 아리아나는 태연히 “그럼요!”라고 대답했다. 여덟 살 즈음 그녀는 지역 TV에 출연해 아이스하키 시합에서 애국가를 불러 지역 극단의 스타가 됐다.(그녀에게는 뮤지컬을 사랑하는 이복 오빠 프랭키가 있었다) 열 한 살에 그녀는 조숙하게 동성애에 대한 가톨릭의 입장을 반대하며 가톨릭을 떠나 카발라 신비주의가 되었으며 열네 살에는 뉴욕으로 가서 전문 극단의 뮤지컬 배우가 됐다. 그녀의 목적은 늘 대규모 음반 계약이었지만, 음악 차트에서 성공하기에는 자신이 아직 너무 어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현명하게 10대 초반에 아동 TV로 무대를 옮겼으며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던 중 니켈로디언 채널의 인기 프로그램
그러나 어떤 점에서는 그녀의 성장 과정 자체가 매우 빨랐고 힘들었다. 지난 10년 동안 거의 매일 자진해서 일했다는 점을 언급한다. “일상생활을 하는 것보다 음악 작업을 할 때가 더 편한 것 같아요.” 물론 작년에는 모든 상황이 너무도 리얼했다. 나는 ‘원 러브 맨체스터’ 콘서트에서 그녀의 공연을 지켜보며 얼마나 특별한 경험을 했는지, 그런 비극적 상황에서 그녀가 어떻게 진짜 사랑의 시금석이 돼주었는지 말했다.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순간을 기대하고 있었어요”라며 그녀는 사과했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흐르고, 그 비극을 해소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들이며 애쓰더라도 소용없을 수도 있어요. 아마 그 누구도 비극을 완전히 극복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리라 생각해요. 정말 미안해요. 얘기를 하다 이렇게 눈물이 쏟아질 줄은 몰랐어요.”
그녀는 다시 마음을 추스른다. 테러 희생자를 추모하는 자선 콘서트는 자신에게 정말 소중했다. 그녀는 그 문제를 짚고 넘어가고 싶어 한다. “나는 늘 영국을 사랑했지만, 결코 한 번도 어느 도시나 어느 국가가 정말 최악의 인간성을 보여주는 사건을 갖고 그것을 최선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꿔놓는 것을 본 적 없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어떤 말로도 맨체스터 사람들에 대한 나의 사랑과 흠모하는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녀는 아직도 자신의 현지 팬들이 소셜 미디어상에서 서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는 큰 감동을 받는다. “해리 스타일스가 맨체스터에서 콘서트를 계획하고 있었고, 나는 나의 일부 팬이 그 공연을 보러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그들은 내 콘서트 이후 처음으로 그 장소에서 열리는 콘서트에 가는 것이었죠. 그들이 서로 소통하고 서로를 챙겨주는 모습을 보며 너무 자랑스러웠어요…” 그녀는 약간 더듬거렸다.
그녀는 모든 희생자의 가족과 거의 모든 부상자를 만났고, 그들 대부분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내가 그곳에 있을 때 사람들과 주고받은 특별한 상호작용에 대해 늘 생각해요. 앞으로도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어요. 특히 새피의 아버지를 기억할 거예요…” 새피 루소는 그날 밤 목숨을 잃은 여덟 살짜리 소녀다. “나는 트위터로 자주 밀리(당시 열다섯 살로, 다리에 폭탄 파편이 박혔다)의 안부를 묻곤 해요.” 거의 모든 말이 새로운 눈물을 자아낸다. 집에 돌아왔을 때 마주한 아찔함과 극도의 불안이 사실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징후일 것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지만 엄연한 사실이에요”라고 그녀는 무릎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한다. “모든 사람이 내게 그렇게 말했어요. 나뿐 아니라 너무도 많은 사람이 그처럼 심각하고 엄청난 상실을 겪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기란 어려워요. 그러나 그건 실제 있었던 일이에요. 나는 그런 아픔을 겪은 가족과 팬들을 알고 있어요. 거기 있던 사람 모두가 엄청난 고통을 겪었어요. 시간이 가장 중요해요. 내가 나 자신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아무 말도 해서는 안 돼요. 그 비극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울지 않기란 도무지 불가능해요.”
눈물 때문에 앞서 발랐던 그녀의 완벽한 시그니처 아이라이너가 지워진 모습을 보니 나는 너무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여전히 정말 말이 안 될 정도로 어려 보인다. 자신이 나를 걱정시키고 있다는 생각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벌떡 일어나 음악을 틀었다. “미안해요, 미안!” 그녀는 계속 말한다. 그란데가 약간 어려운 사람, 즉 성차별적 표현을 쓰자면 ‘디바’로 유명하던 때가 있었고, 확실히 이 정도로 유명해진 대부분의 어린이는 뭔가 조금 다르긴 하다. 그러나 오늘날 그녀의 주된 걱정거리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에 관한 걱정이다. 기억해야 할 사실은 그녀가 보기 드물게 친절하다는 점이다.‘’
그녀는 성공한 래퍼이자 프로듀서인 맥 밀러와 최근에 결별했다. 그녀는 언제나 페미니스트로서 입장을 분명히 했다. “Call her by her name”은 신문 헤드라인에서 유명한 여성들이 그들의 반쪽에 의해 규정되는 모습을 보며 그녀가 내린 의견이다. 3월에는 워싱턴 D.C.에서 ‘우리의 삶을 위한 행진’을 벌였고 코첼라에서 깜짝 장기 자랑을 벌이는 등 지난 몇 달 동안 공식적인 행동을 몇 차례 했지만 낮 시간은 대부분 스튜디오에서, 밤 시간은 대부분 집에서 보냈다. 또 치료를 받았고 드라마 시리즈인 <그레이 아나토미(Grey’s Anatomy)>를 수없이 많이 봤다. 그녀는 가족과 함께 요리를 했고(“우리는 오늘 밤 소스를 만들 거야. 아주 이탈리아식으로… 애호박 파스타로”), ‘6마일 달리기’를 여러 차례 나갔다. 정말로 미안한 기분이 드는 날에는 이전에 생각지도 못하던 일을 하거나, 그냥 침대에 들어가 하루를 보내곤 했다. 일만 계속하며 ‘가열차게’ 달려온 그녀의 짧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잠시 멈춘 순간이었다.
지금 그녀는 그 모든 눈물을 조금씩 이겨내려 한다. 높은 곳에 우뚝 솟아 있는 자신의 대저택에 앉아 애완견 툴루즈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지상으로 내려갈 채비를 하는 듯하다. “당신이 정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어 뭔가 만들고는, 갑자기 그것을 세상에 줘버리게 될 거예요. 그렇다면 이제 그것은 더 이상 당신 것이 아니에요”라고 말하며 그녀는 조만간 대대적으로 출시할 자신의 앨범에 대해 설명한다. 적절한 시점에 우리 대화는 팝의 파워, 2억 팔로워를 보유한 힘, 오늘날의 국제 정세로 흘러가다 결국 어깨를 살짝 으쓱했다. “때로 그것은 단지 어떤 상황에서 빛이 되기도 해요.”
- 에디터
- 김나랑
- 포토그래퍼
- Craig McD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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