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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범람

2020.02.12

장르 범람

한국 장르소설은 확장됐다. 독창적 변주와 기발한 반전의 이야기로 전통적 소설 독자도 모았으며, 국내외 영화, 드라마의 영감이 되는 K-문학으로 성장했다.

강예신, ‘아마도, 이곳은 천국일 거야’. 280x180x5cm. wood, paper, drawing. 2019.

지난해 문학과 소설 이슈를 꼽는다면 SF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김초엽의 첫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고, 2010년대 소설 베스트 10을 꼽을 때 반드시 들어가는 화제작이 되었다. 그리고 출간 6개월 만에 3만 부가 넘게 팔리며 독자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은 베스트셀러다.

작가 김초엽의 소설만이 아니다. SF 장르 전반이 지금 한국 문학, 대중문화 주류에 들어섰다. 독특한 상상력의 소설이며 드라마로도 각색된 <보건교사 안은영> 등으로 주목받은 정세랑의 신작은 SF 단편집 <목소리를 드릴게요>다. 중견 작가 김보영은 중·단편 소설 세 편을 미국 최대의 출판 그룹인 하퍼콜린스와 출간 계약했다. 듀나, 정세랑, 정소연이 편집위원을 맡은 SF 무크지 <오늘의 SF>도 창간했다.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SF 장르가 부상 중이다. SF 영화와 드라마는 미래 세계와 로봇, 우주선 등이 사실적으로 등장하기에 제작비 상승 요인이 있어 그동안 많이 제작되지 않았다. 하지만 2020년에는 <건축학개론>의 이용주가 연출한 <서복>과 <늑대소년>의 조성희가 연출한 <승리호>가 개봉된다. <서복>은 복제 인간이 등장하는 SF 스릴러로 박보검과 공유가 출연한다. 우주로 향하는 <승리호>는 김태리와 송중기가 출연하고 유해진은 모션 캡처를 통해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정우성이 제작에 참여하는 넷플릭스 SF 드라마 <고요의 바다>도 제작된다.

천만 관객을 동원한 연상호의 <부산행> 속편 <반도>도 제작된다. 전작에서 4년의 시간이 흐른 후 좀비 때문에 초토화된 한국에서 탈출하는 이야기다. 강동원, 이정현 등이 출연한다. 원래 좀비물은 호러에 속하는 장르였다. 하지만 <28일 후>에서 분노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으로 인간이 폭주한다는 설정이 나오면서 좀비물은 SF로 편입되었다. 작품의 설정과 성향에 따라 좀비물은 SF와 호러를 넘나드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넷플릭스에서 공개되어 세계적 인기를 얻은 좀비 드라마 <킹덤>도 SF라고 볼 수 있다. <킹덤> 시즌 2도 3월에 공개된다.

한국 SF의 약진은 그동안 작가와 마니아들이 기울인 다양한 노력의 결과다. ‘환상문학웹진 거울’은 오랜 기간 SF와 판타지 등의 장르소설을 창작하고 보급했다. 아작과 허블, 구픽 등 SF 전문 출판사는 해외 SF 거장의 작품을 꾸준하게 출간하는 동시에 국내 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했다. SF는 과학,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하는 사변 문학이라는 점에서 기존 문학계와도 다양하게 접점이 있었다. 배명훈, 듀나 등은 장르와 정통 문학의 중간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또한 과학과 테크놀로지라는 주제는 정부 단체와 기업의 지원과 후원을 받기도 좋았다. 무엇보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상상력을 지닌 젊은 작가들이 치열하게 작품을 창작한 결과가 거대한 태풍을 불러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에서도 SF를 비롯한 장르소설이 확실하게 주류에 올라선 것일까? 그 점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대중문화 전반으로 본다면 장르물이 중심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영화와 드라마, 영상물에서는 확실히 주류다. 웹툰과 웹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웹툰과 웹소설에서 시작된 작품이 영상화되는 경우가 점점 늘고 있다.

지난해 12월 스튜디오N은 스튜디오드래곤과 함께 드라마 <스위트홈>을 공동 제작한다고 발표했다. <스위트홈>은 네이버 웹툰에 연재된 크리처가 등장하는 스릴러가 원작이다. 스튜디오N은 이미 웹툰 원작의 <타인은 지옥이다>와 <쌉니다 천리마마트>를 만들어 화제를 모았다. 각각 고시원 스릴러, 병맛 코미디라는 수식어를 달았다. 흥미를 끌 수 있는 독특한 장르를 내세워 어필하는 것은 대중에게 가장 쉽게 작품의 이미지를 전달하는 방법이다.

2013년 설립되어 장르 전문으로 특화된 고즈넉출판사를 2017년 인수 확장한 고즈넉이엔티는 최근 지식 재산권(IP) 판매로 대부분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 박은우의 스릴러 소설 <청계산장의 재판>은 유니버설 TV와 계약했고, 이종관의 <현장검증>은 영화 제작사 NEW와 계약했다. 고즈넉이엔티의 2019년 매출의 80%는 국내외 영상화 판권과 해외 출간 수입이다.

장르가 가장 확실하게 자리 잡은 곳은 아무래도 웹툰과 웹소설이다. 확고하게 문화 산업으로 틀이 다져진 웹툰에 비하면 웹소설은 아직도 성장 중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2018년 한국 웹소설 시장 규모는 4,300억원을 넘어섰다. 2014년에는 200억원 규모였다. 웹소설 플랫폼 중 가장 큰 네이버 웹소설의 정식 연재 작가 중 2018년 1억원 이상 수입을 올린 이는 26명이었다. 최고 수입은 미리 보기와 원고료를 합쳐 4억7,000만원이다. IP 판매를 통해 올리는 수익은 별도다. 놀라운 수치다.

웹소설에서는 로맨스와 판타지 장르가 정상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2018년 연재를 시작한 <재혼황후>는 누적 조회 수 1,800만 회, 누적 매출 10억원이다. 황제의 불륜으로 밀려난 황후가 신세 한탄에 머물지 않고 치열하게 싸워나가는 흥미로운 로맨스다. 여전히 신데렐라 스토리의 로맨스도 인기가 있지만 여성이 세계와 맞서거나 프로페셔널한 직업에 대해 보여주는 등 다양한 로맨스가 등장하며 장르를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2007년부터 연재되며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누적 판매 부수 600만 부가 넘은 남희성의 <달빛 조각사>는 최근 게임으로도 출시되어 인기다.

웹소설은 1990년대 후반부터 인터넷 게시판에 연재되었던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 이우혁의 <퇴마록>, 귀여니의 <늑대의 유혹> 등이 단행본으로 출간되며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붐이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온라인에서 한 회씩 구독할 때마다 결제 가능한 시스템이 구축되면서 웹소설은 웹툰과 함께 스낵 컬처의 핵심으로 성장했다. 다만 웹소설의 로맨스와 판타지 장르 부흥과는 달리 전통적 장르라고 할 미스터리, 호러 등은 아직 고전하고 있다.

대신 범죄와 스릴러 장르는 영화, 드라마에서 호황이다. 드라마로 제작되었던 <나쁜 녀석들>은 영화로도 완성되어 지난해 450만 명이 넘는 관객이 관람했다. 인기작 <시그널>과 <비밀의 숲>은 올해 시즌 2가 방영된다. 주로 케이블 채널을 통해 선보인 <터널>, <보이스>, <구해줘>, <추리의 여왕>, <라이프 온 마스>, <실종느와르 M>, <왓쳐> 등 완성도를 인정받으면서 시청자들의 호응까지 받은 범죄 드라마는 대단히 많다.

아쉬운 것은 소설로 발표되는 범죄물, 미스터리와 스릴러 소설이 꽤 많은데 영상화에서도 성공을 거두는 경우는 많지 않다는 점이다. 정유정의 <7년의 밤>과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은 각색이 애매했고 흥행도 부진했다. 송시우의 소설을 각색한 드라마 <달리는 조사관>도 시청률이 좋지 않았다. 올해 넷플릭스 최고의 드라마로 평가되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르포인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를 원작으로 했다는 점에서 보이듯, 해외 영화와 드라마는 출간된 소설과 르포 등을 원작으로 하는 경우가 다수다. 웹툰에서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되는 작품이 늘어나는 것에 비하면 아직 종이 책으로 출간되는 장르소설의 영상화가 부족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한국의 장르소설은 확연하게 확장되었고, 성장했다. 대중문화에서 장르가 주류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익숙한 캐릭터와 공식을 제시하면서도 독창적 변주와 기발한 반전으로 무한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장르다. 한국에서는 전통적 장르소설이 지지부진한 사이에 웹툰과 웹소설에서 대중적 장르물의 확산을 가져왔고, SF는 판타지와 결합해 대중적으로 확장하는 동시에 소수자에 대한 시선 그리고 사고 실험을 통해 전통적 소설 독자에게도 호응을 얻고 있다. 아직 소설의 영상화라는 점에서는 한 단계 도약이 필요하지만 현재 보이는 장르 부흥만으로도 충분히 박수 칠 수 있다.

남은 것은 국내 작가의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져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것이다. <부산행>이 <월드 워 Z>보다 높이 평가받는 것처럼, 한국 SF와 범죄소설이 대중의 찬사를 받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2020년의 꿈이다.

    김봉석
    사진
    Courtesy of 강예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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