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

나를 위한 컨텐츠 시대

2020.11.10

by 김나랑

    나를 위한 컨텐츠 시대

    남의 컨텐츠를 채워주던 나날은 안녕.
    이들이 ‘나’의 컨텐츠로 소통을 시작한 이유.

    순정을 바치는 일 나의 컨텐츠를 시작한 연유라. 한동안 자리에 눌러앉아 생각을 해봤다. 내가 모르고 있던 나만의 연유가 있을 거야. 그걸 찾아낼 때까지 나훈아 콘서트를 보지 않겠어. 정말이야. 하지만 생각의 회로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나는 오히려 나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나의 컨텐츠를 시작한 때가 언제였지? 아니, 내가 나의 컨텐츠를 만들고 있는 게 맞기는 한 건가?

    물론 대답은 ‘예스’다. 나는 지독히도 나 같은 나의 컨텐츠를 만들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 나에게 그 시작이 언제였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대답할 수 없다. 애초에 그러지 않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의 컨텐츠를 만들지 않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 시작점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다. 나는 남의 컨텐츠 만들기를 중단한 적도 없고 나의 컨텐츠 만들기를 새로 시작한 적도 없다. 늘 나의 컨텐츠만 만들었다.

    그리고 이는 내가 힙합 저널리스트로서 20여 년을 살아온 것과 관련이 있다. 힙합 저널리스트는 내가 만든 직함이다. 그 이전에는 아무도 힙합 저널리스트인 적 없다. 그 이후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한국에서 나만 힙합 저널리스트다. 외로워서 어떡해. 외롭다는 것 말고도 또 하나의 의미가 존재한다. 보고 배울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 그것이다. 내가 첫 번째이자 유일한 사람이니 보고 배울 사람도 없었고 가르쳐줄 사람도 없었다. 또 이미 존재하는 회사에 들어가 그 회사 일을 해주고 월급을 탈 수도 없었다. 나는 그냥 혼자 나의 컨텐츠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쯤에서 균형을 잡아보자. 기준을 조금 더 엄격히 적용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지금까지 내가 해온 일은 모두 내가 좋아서 한 것이 맞다. 관심사를 벗어났거나 싫은데 억지로 한 일은 없었고, 돈 때문에 눈 질끈 감고 한 일도 역시 없었다. 그러나 내가 좋아서 한 일이 모두 나의 컨텐츠는 아닐 수도 있음을 상상해본다. 이를테면 주제가 정해진 강의를 수락한 일도, 컨셉이 이미 결정된 출판 제안을 받아 책을 쓴 것도, 그리고 음원 서비스 회사가 채워주길 원하는 특정 장르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든 일도, 기준에 따라 남의 컨텐츠를 만든 행위로 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기준을 적용하고도 살아남는 일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리고 그 일이야말로 진정한 나의 컨텐츠라고 부를 만한 일일 것이다. 2020년 10월 7일 오전 1시 59분 현재, 대략 두 가지 일이 떠오른다. 하나는 서울힙합영화제다. 다양한 흑인·힙합 영화를 통해 힙합 음악과 문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던 나는 꼭 이런 영화제를 만들고 싶었다. 별별 영화제가 다 있는데 힙합 영화제가 없는 게 말이 안 된다고도 생각했다. 그래서 직접 주최하고 기획하고 동료를 모았다. 상영작도 직접 선정했고 영화제 인사말도 공들여 썼다. 서울힙합영화제는 두 번 열렸다. 2015년에는 KU시네마테크에서, 2016년에는 CGV 홍대와 CGV 청담씨네시티에서.

    다른 하나는 동교동계 바이닐 프로젝트다. 한국 힙합 명작을 엄선해 나의 개인 스튜디오인 동교동계 이름으로 바이닐을 제작·판매하는 일이다. 이건 현재 진행형이다. 올해 시작했다. 동교동계 바이닐 프로젝트를 시작한 연유는 이렇다. 지금 우리는 대-스트리밍 시대의 한복판에 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좋은 앨범을 들을 때마다 여전히 손으로 만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나에게 음악이란 음원만이 아니다. 커버와 속지와 크레딧과 그것을 열고 꺼내고 읽는 경험 역시 나에겐 모두 음악이다.

    사실 바이닐을 개인적으로 사 모은 지도 꽤 되었다. 동교동계 스튜디오에는 몇천 장의 바이닐이 있다. 하지만 그중 한국 힙합 앨범은 5%도 채 되지 않는다. 확실히, 너무 적다. 늘 아쉬워만 하다가 어느 날 결심했다. 내가 직접 만들자고. 직접 만들어서 직접 손으로 만지겠다고. 그렇게 JJK, 빌스택스, 더 콰이엇의 앨범을 바이닐로 발매했다. 내가 직접 쓴 라이너 노트를 삽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국 힙합의 새로운 역사를 내 손으로 만들고 싶었다.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선물로 가닿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쓰고 보니 공통점이 보인다. 영화제는 영화제고 바이닐은 바이닐이지만 둘 사이에 비슷한 점이 있다. 순정을 바치는 일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그냥 좋아서 했고 하고 싶어서 했다. 그 마음으로 끝까지 밀고 나갔다. 누가 시킨 적도 없으며 보장된 것도 없다. 돈이 아예 안 되진 않겠지만 돈이 돼도 별 의미가 없는 수준이다. 또한 처음부터 모든 것을 내가 만들어가야 한다. 더불어 책임과 위험부담도 역시 내가 진다. 일이 잘못되거나 실수가 발생하면 내가 가장 먼저, 가장 많이 욕먹는다. 써놓고 보니 좋은 점이 없다. 순정을 바치는 일이란 대개 이렇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 일을 필요로 한다. 순정을 바치는 일이 내게는 꼭 필요하다. 절반은 자유롭지만 나머지 절반의 자유를 돈과 맞바꾼 일 가운데, 내 생각대로 하고 있다고 여겼지만 실은 정해진 방향으로 이끌려가는 일 가운데, 그리고 나의 컨텐츠를 만들고 있다고 믿었으나 남의 컨텐츠를 채워주고 있었던 일 가운데, 나는 순정을 바치는 일을 필요로 한다. 순정을 바치는 일만이 내게 줄 수 있는 것이 있다. 순정을 바치는 일만이 내게 주는 충만함이 있다. 순정을 바치는 일을 하게 되면 기꺼이 감내할 수 있는 일이 무한하게 늘어난다. 나는 순정을 바치는 일 안에서만 휴식할 수 있다. 나는 그 일이 필요하다.

    밥벌이를 위해 좋아하지 않는 일을 어쩔 수 없이 한 적은 없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모든 일은 많이 좋아했든 조금 좋아했든 최소한 내가 좋아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로만 가득해서는 부족하다. 그런 일로만 가득하다면 행복하면서도 불행할 것이다. 사람은 순정을 바치는 일 하나쯤은 품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요즘의 나에게는 동교동계 바이닐 프로젝트가 그런 존재다. 100% 나의 컨텐츠 말이다. —김봉현(힙합 저널리스트)

    자발적 노동의 즐거움 지난주 ‘목요일 어떻습니까’의 두 번째 연재를 시작했다. 매주 목요일 아침 8시 이메일로 배달하는 에세이 구독 서비스다. 올봄 시작한 프로젝트로, 이런 일을 도모하게 된 것은 코로나19 때문이다. 차마 ‘덕분’이라곤 말하지 못하겠다.

    10년 넘게 회사에 속해 잡지를 만들다 프리랜서가 된 지 5년쯤 되었다. 영화 저널리스트라는 명함으로 먹고산 이래 최악의 보릿고개를 경험 중이다. 영화계가 코로나의 직격탄을 맞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알 것이다. 새로운 영화 소식이 없으니 자연히 방송 출연과 원고 청탁도 줄어들고, 무엇보다 영화관 출입이 힘들어지니 GV(관객과의 대화) 등의 행사도 사라졌다. 오랫동안 몸담아온 세계가 멈춰버렸다. 수순처럼 불안과 무기력이 번갈아 찾아왔다. 살면서 다양한 부침을 겪었다고 자부했지만, 내가 전쟁 세대도 아니고 이 전 지구적 카오스를 어떻게 관통해야 좋을지 몰랐다.

    아쉬운 건 나를 포함한 영화 팬들이 극장에 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영화관이 바이러스의 온상이라도 된 듯한 사회 분위기가 이어졌고, 나 역시 영화를 응원한답시고 사람들에게 ‘영화 보러 극장 가세요’라고 말할 처지는 못 되었다. SNS를 통해 관객이 다음 GV 계획을 문의할 때나 ‘예전처럼 극장에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같은 메시지를 보내올 때면 마음 한구석이 아릿해졌다.

    잉여의 시간은 낯설었다. 넉넉히 가져본 적이 없는 자는 쓸 줄을 모른다. 사람을 만나기도 민폐인 시대, 넷플릭스와 왓챠만 끼고 살다 보니 멍청이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칩거 생활을 하는 나를 찾아온 후배는 답답하다는 듯 한 소리 했다. 선배는 왜 청탁받은 글만 쓰세요? 순간 정신이 차가워졌다.

    그렇게 ‘목요일 어떻습니까’가 시작됐다. 나의 본분은 글쓰기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살았다. 내가 기자가 된 것은 방송이나 강의, 관객과의 대화를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영화 글쓰기 강의를 할 때도 매체에 기대지 않고 어디든 자유롭게 글을 써서 내보일 수 있는 플랫폼의 시대라고 강조하곤 했다. 그 말에도 책임지고 싶었다.

    모든 전업 글쟁이가 이렇진 않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되도록 매체 특성에 맞는 글을 쓰고 싶어 하는 편이다. 내 스타일을 고집하기보다는 클라이언트의 성향 먼저 고려한다. 내가 아티스트가 아닌 기능장이라 여기기에 거기서 발동한 직업의식일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보그> 편집장의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눈치를 살피고 있다.

    그러니 부디, 개인 프로젝트에서만큼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해보고 싶었다. 쓰는 내가 재밌으면 분명 읽는 사람도 그럴 것이다. 김만중 선생이 모친을 위로하기 위해 세상에 <구운몽>을 내놓았듯, 코로나 시대에 심심한 사람들을 위해 재미있는 글을 쓸 것을 다짐했다. 나는 언제나 내 직업이 세계의 고통과 위기 앞에 무용하다 생각했지만, 이번만큼은 힘을 발휘해보고 싶었다.

    일단 구독료부터 고민이 되었다. 애초에 큰돈을 벌겠다고 나선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무료 컨텐츠는 말이 안 되었다. 최소한의 비용 지불은 소비하는 쪽에도 전혀 다른 질의 경험이 된다. 주 구독자는 대부분 20대일 테니 주머니 사정에 부담되지 않을 선을 나름대로 정해보았다. 글 열두 편에 1만5,000원이니 한 편당 1,250원꼴이다. 커피 한 잔 값에는 한참 못 미치고, 과자 한 봉지 값 정도이니 괜찮겠다 싶었다.

    막상 사적인 이야기를 원 없이 풀어내려고 보니 오히려 허들이 느껴졌다. 날 선 영화 비평이 아닌 에세이를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의 원칙은 이랬다. 솔직 담백할 것. 느끼하거나 현학적이 되지 말 것. 요즘 같은 시국에 나에게 돈까지 내고 글을 읽어주는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하지만 예고 없는 솔직함 또한 누군가에게는 피로가 된다. 그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찾아야 했다. 에세이에 걸맞은 페르소나가 필요했고, 이 작업은 의외로 까다로웠다.

    흥미롭게도, 내가 적절히 솔직해지는 만큼 돌아오는 반응도 좋았다. 이번엔 독자가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는 감각이었다. 어느 때는 에세이 분량에 버금가는 장문의 편지도 받았다. 누군가는 목요일 덕분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나는 글쓰기의 신묘함을 믿는다. 글은 출렁이는 우리의 마음을 어르고 달래며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물론 이처럼 거창한 것이 아니어도 주말 아침 내 글을 출력해 읽으며 커피를 마시는 시간이 즐겁다는 반응 또한 가슴 설렜다. 최초의 의도가 도달된 것이다. 나는 나의 기쁨을 위해 노트북 앞에 앉았을 뿐인데, 어느덧 사람들의 일상에 침투해 서로를 위로하고 위로받고 있었다.

    평소 내 성향을 생각해보면, 내 글을 원하는 사람들을 제 손으로 불러 모아 라벨을 달고 글을 판매하는 방식은 어쩐지 자의식 과잉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장사로 치면 그동안은 도매상에 가까웠기에 소매상이 되어 소비자와 직접 연결된다는 것도 두려운 시도였다. 돌이켜보면 나는 먼저 손 들어본 적이 없다. 누군가 나를 위한 멍석을 깔아주어야 마지못해 응하는 듯 일해왔다. 그것이 겸손이거나 미덕인 줄 알았다. 사실은 겁이 많았거나 교만했던 것이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바라던 영화 촬영 전날까지도 ‘나까짓게, 이제 와서’와 같은 생각이 발목을 잡았다. 몇 년간 써온 영화 비평을 모은 e-북을 낼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책으로 묶일 가치가 있나’ 하고 끝없이 반문했다. 나는 인생의 고질병과도 같은 그런 생각의 고리와 작별하고 싶었다. 어떻게든 페달을 밟아 삶을 다른 방향으로 굴려나가기 시작했을 때, 내 안에 작고도 커다란 변화가 시작됐다. 이왕 속도가 붙은 페달을 더 경쾌하게 밟아나가고 싶었고, 잠시 느슨해져도 좋으니 완전히 멈추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뭔가를 세상에 내보냈을 때 예상 밖으로 많은 사람이 응원해준 것은 나의 결과물이 완벽하거나 탁월해서가 아니다. 시도하고 몰두하는 사람을 볼 때 덩달아 힘이 솟고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경우 무기력할 때 그 기분에 사로잡히는 대신 어떤 일을 도모하는 쪽으로 에너지를 이동시키면 금세 기분이 나아졌다. 그것이 꼭 부나 명예를 가져다줄 일이 아니어도 상관없고, 오히려 무용할수록 좋다. 그러면 온전한 집중이 가능하니까. 나는 나만의 페달을 계속 밟아나갈 것이고, 누군가 시작이 힘들어 끙끙대면 얼마든지 등 떠밀어줄 것이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김현민(영화 저널리스트, ‘목요일 어떻습니까’의 작가)

    가정용 장식품과 음악 평론가 사이 얼마 전에 페이스북의 자기소개를 바꿨다. 원래는 ‘가정용 장식품’과 ‘음악 평론가’였는데 지금은 ‘음악 산업 평론가’로 바꾸고 ‘음악과 음악 산업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로 수정했다. 그리고 여기저기 흩어진 링크를 하나로 모아주는 ‘링크트리’라는 서비스를 써서 내가 연재하는 글과 진행하는 프로젝트 등을 한군데에 모았다. 프로필을 이 링크로 바꿨다.

    ‘가정용 장식품’과 ‘음악 평론가’는 매우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실용성은 없지만 집구석에 놔두면 ‘간지’가 나는 물건. 꽤 오랫동안 ‘음악 평론’의 역할은 이 정도라고 생각했다. 나름의 위트를 살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자괴감이 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누구라도 자신이 하는 일이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럴 것이다. 나는 1999년부터 프로페셔널로서 여러 매체에 글을 썼다. 드라마, 미디어에 대한 것도 있었지만 대체로 음악에 대한 글이었다. 처음엔 한국 인디 음악을 소개하는 글을 주로 썼고, 언젠가부터 K-팝에 대한 글도 많이 썼다.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여전히 ‘좋은’ 음악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새로 출현하는 음악을 살피고 있지만, 동시에 미디어와 음악 산업이 어떻게 재구성되는지 주의 깊게 살피는 중이다.

    사실 몇 년 전부터 고민이 많았다. 지금까지 내가 글을 계속 쓸 수 있었던 까닭은 내 글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뻔한 유행가는 싫고 다른 음악을 듣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다는 누군가에게, 혹은 BTS가 어떻게 빌보드 차트에서 1위를 했는지 궁금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믿음이 계속 쓰게 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역할이 점점 필요 없어진다는 생각을 했다. 유선 인터넷이 무선 인터넷으로 바뀌고, 유튜브와 SNS가 레거시 미디어의 주도권을 가져가는 과정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미디어 산업 전반에 거대한 변화가 벌어지는 과정에서 나 역시 거기서 예외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셈이다. 그래서 음악을 보던 관점에서 조금 벗어나 미디어, 컨텐츠, 비즈니스 영역이 어떻게 재구성되는지를 살폈다. 매우 압축해서 얘기하면 현재 음악뿐 아니라 거의 모든 영역의 산업 구조는 플랫폼이 주도하는 환경으로 바뀌고 있다. 그 배경에는 네트워크 환경의 혁명적인 변화와 그로 인한 미디어 산업의 수익 모델 변화가 있다. 음악, 영화뿐 아니라 글이나 생각에도 플랫폼이 지배하는 시대가 사실은 이미 도래했다. 이렇게만 얘기하면 마치 큰일이 난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진짜 중요한 건 플랫폼 간 경쟁이 심화될수록 큰 기업이 아닌 작은 그룹이나 개인에게는 더 많은 기회가 생길 수도 있다는 점이다. 플랫폼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필요로 하는 컨텐츠는 무한대로 많아지기 때문이다. 다만 거기서 속도와 규모가 중요해지기도 하고, ‘좋은’ 컨텐츠에 대한 기준이 기존과 달라지기도 한다.

    내 입장에서는 플랫폼 중심의 산업 구조를 살피는 것과 그 안에서 고군분투해야 하는 크리에이터의 입장 모두가 중요하다. 내가 만드는 가치란 사실상 그 두 가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때 나의 가장 큰 고민은 뜻밖에도 ‘나 자신’이었다. 나는 누구지? 내게 일과 삶은 어떻게 연결되지?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지?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그걸로 어떤 가치를 만들고, 결과적으로 누구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 싶지? 이런 질문을 몇 년 동안 계속 던졌다. 그 과정에서 좌절도 하고 실망도 하고 무엇보다 고독했다. 이런 얘기를 나눌 동료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컨텐츠, 특히 지식·정보·취향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들은 의외로 적지 않은 패배감에 시달렸다. 몇 개 미디어가 사라졌고, 회사도 사라졌고, 이직도 잦았다.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지인들도 많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가정용 장식품’이라는 말로 나를 설명하던 자괴감의 정체를 좀 더 정확히 파악하고 ‘음악 평론가’라는 일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5개월 전 ‘밤레터’라는 뉴스레터를 시작했다. 심야 라디오 컨셉으로, 매주 수요일 밤 9시에 디제이가 되어 음악과 고민 상담, 드라마나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10월 8일 현재 구독자는 950명 정도로 다른 뉴스레터에 비하면 많지 않지만, 매주 꾸준한 비율로 늘고 있다는 걸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 밤레터를 통해 나와 비슷한 과정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에게 나름의 도움을 주려고 여러 컨텐츠를 준비하고 있다. 구독형 컨텐츠 플랫폼 <퍼블리>의 CCO였던 김안나 님과는 ‘숨참레터’라는 제목으로 매주 한 번씩 ‘일하는 마음’에 대해 이메일을 주고받는다. <트레바리>에서는 음악 산업의 케이스 스터디를 통해 컨텐츠 비즈니스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진행 중이다. <라이프쉐어>라는 스타트업과는 일과 삶에 대한 밸런스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음악을 추천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준비해 진행하고, <원티드>라는 직장인 대상 서비스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마음에 대한 글과 음악을 소개하고 있다. 자체 유튜브와 팟캐스트 채널을 통해 컨텐츠 분야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인터뷰 컨텐츠도 따로 준비하고 있다. 물론 그 외에도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기준은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실제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다.

    나는 일과 삶이 잘 분리되지 않는 사람이다. 노는 게 일이고, 일이 곧 노는 방식으로 커리어를 쌓았다.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에 대해 생각을 전달하는 게 내 일의 본질이고, 그렇다면 지금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전달되는지 고민해야 하는 때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가정용 장식품’이나 ‘음악 평론가’라는 카테고리에서 조금 자유로워졌다. 나는 생각을 전달하는 사람이고, 그 방식은 프로젝트 기획이나 칼럼이다. 이 모든 것의 목표는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걸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생각지도 못한 뭔가가 될 수도 있다.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한다. 하필 코로나19가 터진 시점에서, 새삼 깨닫는 건 그 때문에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천천히 진행되던 변화가 코로나19를 기점으로 앞당겨졌을 뿐이다. 덕분에 우리는 혼란스럽지만 한편으론 어차피 예측이 불가능한 시대라는 사실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본다. 무엇을 하든 실패는 기본이고, 우리는 매우 오래 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뉴 노멀’이라면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건 미래에 대한 전략이 아니라 본질에 대한 탐구일 것이다. 이런 방향 아래 여러 가지 컨텐츠를 실험하는 TMI.FM이라는 브랜드 겸 사업자를 만들었다. ‘Take More Information’의 약자에 라디오의 느낌을 더한 것이다. 예측 불가능한 시대를 살아갈 우리에겐 더 많은 사례가 필요하기에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 말 많고 고독한 디제이처럼, 내 속도에 맞는 방식으로 천천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한다. 지금의 내 마음이다. —차우진(문화 저널리스트)

    에디터
    김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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