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아가 ‘퀸’으로 불리는 이유
혼란과 혼돈 속에서 발견한 이지아라는 선명한 바람.
사랑하고 미워하는, 가지고 싶고 더 높이 오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얼마만큼 커질 수 있을까. 어쩌면 끝내 가닿지 못할 소용돌이 한복판에 이지아는 1년 넘게 머무르고 있다. 욕망의 분비물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펜트하우스>의 심수련을 연기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종종 다리 길이가 맞지 않는 테이블에 놓인 찻잔을 떠올렸다. 미세한 자극에 수면은 흔들리지 않지만 충돌에는 물결이 일기도 하고 거친 타격에는 태풍처럼 거세게 일렁이기도 했다. 하지만 수면은 오래지 않아 다시 잠잠해졌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일었을 온갖 일렁임. 그 일렁임을 잠재운 건 10여 년간 만난 인물들의 자랑스러운 면도, 못난 면도 기꺼이 껴안은 이지아 때문이라고 나는 자꾸만 생각했다.
검은색보다는 핑크색을 좋아하게 됐지만 변한 건 없다고 말하는 이지아는 사실 누구보다 자신을 그대로 내보이고 싶은 배우였다. 취향이 세분화되어 다수가 소비하는 콘텐츠가 줄어든 시대에 이지아가 출연한 <펜트하우스>는 시청률 30%를 넘기며 대중의 지대한 관심 가운데에 섰다. 연기하는 캐릭터 심수련과 배우 이지아 사이에 경계는 뒤섞였고 이는 선망 섞인 호감으로 자라났다. “캐릭터 자체가 사랑받아서 드라마 안의 캐릭터 이름으로 기억되기 쉽지 않은데 정말 감사하죠. <태왕사신기> 수지니, <베토벤 바이러스> 두루미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이지아는 오랜 친구를 만난 듯 편안한 표정이었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시즌 2의 막이 내린 후 어쩌면 마지막 반란을 앞두고 우리는 그저 이지아를 찍어보고자 했다. 그녀 스스로도 “채색되지 않은,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러니까 페이지를 넘기면 펼쳐질 흑백 세상 속 이지아는 평소 그녀에 가깝다. 이지아를 만난 이틀 모두 어쩐 일인지 비가 내렸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해요. 빗소리를 가장 좋아하고요. 젖어 있는 바닥을 바라보는 것도 좋아해요. 비가 많이 내릴 때는 소리가 정말 시원해요. 보슬보슬 오기보단 차라리 시원하게 왔으면 좋겠어요.” 연둣빛 계절에 시원하게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테이블이 아무리 흔들려도 찻잔은 절대 엎질러지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감정을 전하기 위해 텔레파시까지 선망하는 이 배우는 절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을 테니까.
새벽까지 <펜트하우스 3> 촬영이 있었어요. 다른 작품과 비교했을 때 써야 하는 에너지 결이 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분명히 다른 에너지이긴 해요. 드라마의 속도가 빠르다 보니 그 감정을 캐치하는 것만 해도 에너지 소비량이 엄청나요. 극한의 에너지, 극한의 감정을 몇 배로 쓰고 있어요. 감정을 많이 드러내야 하니까 쉽지 않은데 그나마 심수련 캐릭터가 가장 덜한 편이에요. 언젠가 해보고 싶은 다른 캐릭터가 있냐고 질문을 받은 적 있는데 없다고 대답한 이유가 자신이 없어서였어요. 안으로 삭이는 걸 더 잘 표현하는 스타일이라 지르는 연기를 할 때 어려움을 겪곤 해요.
심수련의 삶은 어떻게 바라봤나요. 사랑하는 사람 세 명이 죽었어요. 단순히 경험한 것이 아니라 셋 다 눈앞에서 죽었어요. 어느 누가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런 의미에서는 극한의 감정을 지닌 인물이 아닐까 생각해요. 초연해 보일 때도 있지만 감정이 크게 소용돌이치곤 하죠.
심수련 캐릭터는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서서히 달라져요. 그 변화 중 가장 인상 깊은 지점은 어디였나요. 악만 남은 수련이가 예전의 순수했던 수련이와 같을까요. 아닐 거예요. 수련이의 감정과 변화가 제게도 인상적이고 저는 충실하게 그 감정을 따라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절대적 악인이 있기에 복수의 방식이 내포한 비윤리성에 면죄부가 주어집니다. 그녀의 복수 방식에 동의하나요. 사실 좀 더 하고 싶어요. 속이 덜 후련해요(웃음). 현실적으로는 그럴 수 없겠지만 상상 속의 저라면 정말 더한 복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감정이에요. 앞으로 수련이가 훨씬 더 치밀하고 큰 그림을 잘 그려줬으면 해요. 그래서 통쾌하게 모두를 끝내줬으면 좋겠어요. 그냥 개인적인 제 바람이에요(웃음).
최근 방영하는 드라마 다수가 ‘복수’를 이야기의 큰 축으로 삼고 있어요. 지금 우리가 용서보다 복수를 감행하는 이야기에 열광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누구나 그런 경험 있지 않나요? 정말 힘들게 마음먹고 용서했는데 용서한 사람만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그런 경험. 그랬을 때 우리 마음에서는 정말 시원하게 복수하고 싶잖아요. 그런데 법의 테두리 안에 살고 있고, 도덕이나 양심 때문에 행동으로 옮기진 않아요. 복수하고 싶은 마음을 대리 만족시켜주기 때문에 열광하지 않을까요. 지금이 특별히 그런 시기라기보다 우리는 늘 이런 작품에 열광해왔어요.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 역시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꿈꾸듯 로망 삼아 보잖아요. 로맨스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심리라고 생각해요.
드라마를 관통하는 메시지 권선징악을 믿고 싶어 하나요. 그래야 하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심수련 캐릭터는 입체적이고 다채로운 가운데 ‘우아하다’라는 형용사를 가장 많이 떠오르게 했어요. 당신에게 우아함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최근에 붙지 않았나요? <맛남의 광장> 같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제가 우아하던가요?(웃음) 심수련은 복수하는 방식조차 우아해야 했는데, 그건 단순히 컵을 어떤 동작으로 잡는다거나 하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오히려 캐릭터의 정의로운 면이랄까, 보편타당한 면 같은 본질을 생각했어요.
추리소설을 좋아한다고 알고 있어요. 출연하는 배우들조차 다음 내용을 모르고 촬영하는 <펜트하우스>가 그 자체로 추리소설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추리소설은 작가와 하는 두뇌 게임인데, 이런 관점에서 즐기는 지점도 있나요. 있어요. 이 캐릭터의 감정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저뿐 아니라 다른 연기자들도 다 자기 ‘피셜’을 이야기해요. 만나면 ‘이렇게 해서 이렇게 될 거야’라는 식으로 엄청 대화를 나눠요. 작품에 임하면서 다음 내용을 상상하고 배우들과 나누는 경험이 처음이라 그 자체로 다들 너무 흥미로워해요. 문제는 거의 맞지 않거든요? 그게 함정이에요(웃음). 진짜 다들 혀를 내두르죠. 심수련은 연기가 전공이 아니었을까요(웃음). 사실 소설보단 인문 서적을 좋아하는데 로맨스 소설보다는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편이에요.
추리소설은 감성보다 논리가 중요한 장르죠. 부합하는 면이 있나요. 진짜 허당인데 어떤 면에서는 되게 논리적인 편이에요.
논리적인 면모는 언제 드러나나요. 이렇게 인터뷰할 때?(웃음) 항상 나를 놓고 정신없이 지내는데 논리 정연해야 하는 순간이 생기면 확 체계적으로 변하죠. 말이라는 건 제 생각과 다르게 전달될 수도 있으니까요.그래서 늘 생각했어요. 정말 있는 그대로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텔레파시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외계인들은 항상 그렇게 모든 감정을 전달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동경하곤 하죠.
진실, 진심이 전해지길 바라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평소 관심이 과학에도 닿아 있나요. 과학, 우주 좋아해요. 그래서 유튜브도 그런 채널을 많이 봐요. 어제 자기 전에도 하나 봤는데, 전 세계 모기를 없앨 수 있는 기술이 만들어지고 있더라고요. 남자 모기의 유전자를 변형시키는 거예요. 그렇게 교배하고 알을 낳으면 남자 모기만 남고 결국 박멸할 수 있죠. 모기 때문에 죽는 사람들이 전 세계적으로 1년에 72만 명 정도 된대요. 굉장히 흥미롭게 봤어요.
어떤 태도를 견지하며 콘텐츠를 보나요. 평소 모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모기를 없애는 기술이 있을 것 같은데 왜 아직일까’ 의구심을 늘 품었어요(웃음). 많은 정보를 취합하는 게 중요하니까 자주 찾아보는 편이에요. 그래야 판단할 수 있으니까요.
주변 사람들은 당신의 그런 관심사를 흥미로워하나요. 아니요(웃음). 사실 이런 제 자신은 좀 드러내지 않는 편인 것 같아요. 최근에 <온앤오프>라는 프로그램을 하면서 드러났지만.
찾아낸 정보는 어떻게 정리하고 보관하나요. 여러 가지를 다각도로 생각해서인지 책을 읽고 돌아서면 까먹어요. 유난히 그런 편이라 내용을 정리하고 요점을 적은 다음에 다 종이로 프린트해놓죠. 그런 자료가 집에 잔뜩 있어요. 요즘은 바빠서 못하지만 예전에는 그렇게 했어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더 자주 보여주고 싶다는 바람을 종종 내비쳤는데, 최근에 예능 프로그램에 여러 차례 출연하며 연기하는 캐릭터가 아닌 자신을 드러냈어요. 늘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기회가 없었어요. 예전에는 이렇게 인터뷰를 하면, 생각하던 이미지와 너무 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10명을 만나면 10명한테 모두 다. 매번 그런 얘기를 들으니 나는 항상 나였는데 뭐가 다르게 느껴진 걸까 고민스럽기도 했어요. 그런데 예능 프로그램을 하고 그 간극이 좁혀진 느낌이라 좀 편해졌어요. 달라진 건 없어요. 이제라도 나로 봐주셔서 좋아요.
스릴러, 액션, 블랙코미디 같은 장르의 혼종, 빈부 격차, 학교 폭력 등 극화한 현실의 반영, 인간의 본성을 건드려서 끌어내는 공감 요소, 캐릭터의 매력 등 <펜트하우스>에는 즐길 거리가 정말 풍성합니다. 엔터테인먼트적 관점에서 당신이 가장 매료된 지점은 어디인가요. 광선 같은 속도감 아닐까요. 연기하며 따라잡기 힘들 정도의 속도임에도 그 안에 현실적이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현실과 맞닿아 있는 욕망, 솔직한 감정이 다 표현되어 있어요. 실제로 대본이 다른 작품보다 길어요. 30~40% 이상 더 찍고 제작진이 속도감 있게 편집해요. 저희는 걸어가거나 문 여는 장면 없잖아요. 다음 장면에서 이미 이야기를 하고 있죠(웃음).
우스갯소리로 ‘왜’라는 의문을 품는 사람은 김순옥 작가의 드라마를 볼 자격이 없다고 해요. 배우로서 ‘왜’라고 의문을 품은 적은 없나요. 품지 않았어요. 현실에서는 더한 의문이 들고 의심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이라는 게 뭐지?그런 상식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데?’ 싶죠. 이 작품은 그런 지점을 굉장히 극대화해서 표현했어요.
세상을 냉소적이거나 비판적으로 보는 편인가요. 그렇죠. 냉소적인 편이에요. 원래 그랬다기보다 서서히 변한 것 같아요. 곰팡이가 자라나듯.
이면을 보려는 시도가 그런 태도로 이어지곤 해요. 그런 부분을 다른 사람들보다 인지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온몸으로 열려 있는 편이에요. 이런 태도가 배우 일을 하는 데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긴 어렵지만 분명한 건 캐릭터에도 열려 있다는 점이에요. 이럴 수 없다고 여기기보단 사정이 있을 수 있겠다 싶거든요. 작가님에게 여쭙기도 하고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더 좋은 아이디어가 생기는 경우도 꽤 있어요.
다면적 인간의 모습이 도드라지게 드러난 작품이에요. 평소 당신이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궁금합니다. 정해져 있지 않아요. 보이는 게 다라고 믿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죠. 사람을 볼 때도, 그 어떤 걸 볼 때도 마찬가지예요. 섣불리 판단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저도 그렇게 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동안 ‘이지아는 어떨 거다’라는 선입견을 많이 받아왔잖아요. 그런 시선을 몸소 겪어서일 수도 있고, 예전부터도 그런 생각을 해왔어요.
일인이역에 대해 스스로 어려움을 토로했지만 완전히 다르게 인물을 표현하고 때로는 헷갈리도록 두 인물을 섞은 당신의 연기에 감탄이 이어졌어요. 외모가 바뀌어 있으면 젖어들기 쉬운데,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연기하기가 어려웠어요. 상대방의 연기를 받아서 하는 스타일인데 그 또한 없었고요. 결국 생각한 건 ‘그냥 그 인물이 돼야지’ 뿐이었어요. 체계적인 면을 총동원해서 연기하려고 노력했어요. 사실 이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지금까지 해온 연기와 결이 다른데 그런 지점에서 많이 배웠다고 생각해요. 이런 인물을 표현할 수 있게 된 과정 자체가 큰 의미인 작품이에요.
<세 번 결혼하는 여자>에서 자기 자신과 결혼을 택하고 <나의 아저씨>에서 불륜을 저지르는 연기를 했죠.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당신을 통과해 인물을 보면 ‘그럴 수 있겠다’ 생각이 바뀌곤 했어요. <나의 아저씨> 윤희는 사실 그래서는 안 됐어요. 바람피운 것까진 그렇다 쳐도 꼭 그 사람이어야 했을까 그런 얘기가 많았죠. 그런 윤희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게 감독님과 저의 목표였어요. 정말 고민이 많았는데 결국 완전히 나쁘고 미운 캐릭터로 남진 않았어요. 그만큼 윤희를 사람들에게 이해시켰다고 생각해요. 수련이도 보편타당성이 있는 캐릭터이긴 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해요. 하지만 보는 사람들에게 수련이가 이해가 가도록 만드는 게 제 역할이에요. 그 가운데 ‘상처’가 있는 것 같아요. 상처를 가진 캐릭터에게 더 애정을 갖고 있어요. 이들을 더 잘 표현해서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요. 윤희를 처음 봤을 때 솔직히 두려웠거든요. 너무 미움받을 것 같고 이래선 안 될 것 같았어요. 그런데 그렇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이해받았을 때 배우로서 쾌감도 있었어요.
데뷔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뭔가를 해서 사람의 마음을 만지고 움직일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고 배우 일에 대한 동기를 밝혔어요. 수많은 작품을 거치면서 이 동인은 변화했나요, 변함없나요. 누구나 아픔이 있지만 사람들이 다 알아주진 않아요. 우리 역시 아픔을 더 드러낼 수도 없어요. 아픔 있는 캐릭터에 애착을 가지는 이유는 아픔을 잘 드러내서 이해시키고 싶은 마음 때문이에요. 캐릭터가 살아 있게 만들고 그 캐릭터를 통해 사람들과 같이 공감하고 같이 울기도 하며 위로가 될 때 마음을 만져준다고 봐요. 그 생각은 아직도 변함없고 더 크게 자라나고 있어요.
<펜트하우스> 시청률이 30%를 넘었어요. 지상파 드라마의 높은 시청률은 대중성을 견인합니다. 감회가 남다르죠. 그리고 무엇보다 이 작품 하면서 어린 팬이 많이 생겼어요. 지인이 딸이 팬이라고 사인을 요청해와서 몇 살이냐고 물어봤더니 열 살, 여섯 살이라고 하더군요. 서툰 글씨로 적은 팬레터도 받아봤어요. 여성 팬들을 얻은 건 너무 기쁜 일이고, 어린 팬들이 생긴 건 생각지 못한 정말 신기한 경험이에요. 그래서 궁금하기도 해요. 딸뻘로 나오는 배우들의 인기는 이해가 가는데 엄마 캐릭터인 저의 어떤 지점에서 여섯 살 아이가 팬이 되었을까요.
동화책에 나오는 ‘퀸’처럼 보여서 아닐까요. 참고해서 더 ‘퀸’답게 스타일링해야겠네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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