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부탁해> 20주년 기획전
〈고양이를 부탁해〉의 감독 정재은과 주연배우 배두나,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프로그래머 김현민이 20년을 통과하는 이야기를 나눈다. 시작은 8월 26일부터 9월 1일까지 열리는 제2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다. 그곳에서 〈고양이를 부탁해〉의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을 최초 상영하고 배두나 특별전도 만날 수 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김현민: 이렇게 두 분이 촬영한 건 20년 전 <고양이를 부탁해> 개봉 이후 처음인가요? 정재은 같이 화보를 찍은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아요.
오늘 함께 카메라 앞에 선 기분이 어땠나요? 정재은 저야 두나가 카메라 앞에 서 있는 걸 보는 게 익숙하지만, 두나는 내가 이렇게 옷을 차려입고 카메라 앞에 어색하게 있는 모습이 왠지 통쾌했을 것 같은데요?(웃음) 배두나 저는 감독님이 어색하시지 않을까 걱정이었죠. 보통 인터뷰 촬영을 해도 이렇게까지 본격적으로 입지는 않으시거든요. 정재은 스타일리스트께서 평범한 의상을 준비하겠다고 하셨는데… 그분 눈에는 이 정도가 평범했던 거죠. 배두나 제가 봐도 루이 비통치고는 평범한 편이에요(웃음). 정재은 팔을 어디로 빼야 할지 몰랐는데, 어쨌든 제 인생에 이런 경험도 해보고 즐거웠습니다. 저는 두나가 두 번째 입은 의상이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자유롭게 떠도는 유목민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사이파이했어요. 어쩐지 <고양이를 부탁해> 20주년과 잘 어울리는 느낌도 들고요.
오래된 미래 같은 느낌인가요. <고양이를 부탁해>가 2001년 10월 13일에 개봉했으니, 스무 살이 됐어요. 이번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20주년 기획전을 마련하고 있고요. 감독님은 한창 디지털 리마스터링 작업 중이죠. 정재은 20년이 흘렀다는 게 실감이 안 나요. 요즘 젊은 관객은 상상 못할 텐데, 이 영화는 필름으로 찍었어요. 카메라 딱 한 대로. 그동안 극장 상영 요청이 있었지만, 디지털 버전이 DVD 말고는 없었어요. 지금 보면 DVD는 화질이 많이 떨어져 2K나 4K로 디지털 작업을 하고 싶은데 비용이 문제였죠. 필름 상태로만 있으면 작품의 생명이 끊길 수 있어요. 필름을 계속 돌리면 마모되니까.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을 만들 수 있게 되어 아주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어제 영화를 DVD로 다시 보고 왔는데 영화에 세밀하게 그려진 IMF 시대의 풍경이 지금 코로나 시대와 데칼코마니처럼 겹쳐 보여 깜짝 놀랐습니다. 20년 전 관객이 만난 모습 그대로 복원할 것인지, 아니면 감독이 새로운 해석을 가할 것인지 관객으로서도 기대되는 작업입니다. 정재은 동시대 마인드로 디지털 색 보정을 하는 것이기에 저도 어떤 방식으로 해나갈지 <고양이를 부탁해>를 찍었던 최영환 촬영감독님과 잘 맞춰서 작업해보려고요. “이번에는 감독님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줄게요”하고 문자가 왔어요(웃음).
아,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태희(배두나)가 좋아하던 시인 주상에게 남긴 메시지가 당시 촬영 때 촬영감독님이 감독님께 한 말이라고 들었습니다. 배두나 정확히 그게 어떤 내레이션이었죠?
“니가 왜 그렇게 나한테 화가 났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게 단지 나 때문만은 아니겠지. 어쨌든 화 풀어.” 정재은 저도 이 작품이 데뷔작이었고, 최영환 촬영감독도 그랬기 때문에…(웃음) 우리가 사회생활이 많이 부족했죠. 배두나 그래서 제가 3시간 동안 현장에서 엄청 떨었잖아요. 지영(옥지영)의 무너진 집을 바라보는 장면 있잖아요. 그때 진짜 추워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데, 감독님과 촬영감독님이 서로 한마디도 안 하고 카메라 앵글도 안 잡고, 3시간을 버티는 거예요(웃음).
체감이 그랬나요, 진짜 3시간이었나요?(웃음) 배두나 진짜 3시간이었을걸요. 요즘 현장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에요. 그때는 저도 어릴 때라 그런가 보다, 하며 마냥 기다렸어요. 정재은 그땐 우리도 어렸어(웃음). 배두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감독님이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리니까.
최영환 촬영감독님은 여전히 왕성하게 활약하고 계시잖아요. 감독님과 촬영감독님 모두에게 데뷔작이라 각자 구현하고 싶은 게 많았나 봅니다. 배두나 줄곧 궁금했어요. 그때 왜 그랬어요? 이제는 말을 좀 해보자. 왜 앵글을 잡지 않았는가! 정재은 저에겐 정말 중요한 장면이었던 거죠. 사실 두나가 3시간 서 있었던 건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이것만큼은 감동적이라 잊을 수 없어요. 제가 두나한테 다가가서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했더니 두나가 “감독님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세요, 전 괜찮아요”라고 하더라고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어요.
배우가 현장에서 그렇게 말해주면 감독은 진짜 힘이 나죠. 정재은 제가 단편 몇 편 만들고 장편 데뷔를 했잖아요. 그러다 보니 장면 하나하나를 잘 찍고, 숏 하나에도 의미가 다 우러났으면 했어요. 원래 콘티에서는 컷이 더 많은 장면이었는데, 한 숏으로 승부하고 싶은 의지가 강했어요. 무너진 친구의 집을 눈앞에 둔 태희의 감정을 한 숏으로 표현하려는데, 또 하나만 찍자니 불안함이 있잖아요. 조금 더 찍자, 무빙을 하자, 촬영감독은 아니다, 그럴 거면 이렇게 찍자, 하면서 3시간 고민하다 딱 1시간 찍었습니다. 미친 거 아니야?(웃음)
배우는 그날이 무척 인상적이었는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히 기억하는군요. 배두나 제가 기억력이 좋지 않거든요? 작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다 까먹어요. 그래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인 것 같은데, 그날만큼은 기억이 나요. 정재은 그 감동적인 말을 나한테 한 건 기억나요? 배두나 그건 기억이 안 나요. 그 의문만 계속 있었죠. 대체 왜? 왜 3시간 동안 말을 안 하지?(웃음)
배우에게 <고양이를 부탁해>는 어떤 의미인가요? 배두나 저의 가장 순수한 시절이 담긴 영화예요. 영화 몇 편을 찍고 난 후이긴 했는데, 그 영화 속 연기가 가장 날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소중하죠. 감독님과의 작업도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정말 거치길 잘한 과정이었다고 봐요. 기억나는 일화 중에 감독님이 태희 캐릭터로서 일기를 써오라고, 신 바이 신으로 캐릭터의 감정을 적어오라고 했는데, 그때는 그런 걸 왜 시키나 싶었어요. 감독님이 바라는 게 어떤 건지 잘 알지 못했죠. 그래서 대충 한 기억이 나요. 그 후에는 캐릭터가 되어 그런 작업을 할 기회는 없었어요. 다른 작품은 그렇게까지 깊게 들어가지 못한 것 같아요. 제가 가장 순수하던 시절에 저를 배우로 만들어준 영화인 것 같아요.
큰 의미가 있는 작품이군요. 배두나 이 작품을 하고 예상치 못한 칭찬을 많이 받았어요. 정말 놀랐죠. 시나리오를 봤을 때 태희가 그 정도로 드러나 보이지 않았거든요. 관객에게 보이기 어려운 역할이라고 생각했어요. 지영의 서사는 힘이 있고, 혜주(이요원) 캐릭터는 시대를 대변하는 면이 있는데, 태희는 약간 평범한 옆집 애 같기도 하고, 외계인 같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연기도 아무 의도 없이 했어요. 약간 그런 스타일이잖아요. 태희 자체가.
그런 맥락에서 어떤 장면이 정말 좋았냐면, 태희가 지영에게 돈을 꿔줄 때 얼굴 보지 않고 쓱 건네잖아요. 그런 무심한 제스처의 순간이 탁월하다고 생각했어요. 정재은 두나는 아무 생각 없이 연기했다고 하지만, 사실 어떻게 건네줄까 많은 생각을 했을 거예요. 배두나를 떠올리며 태희를 만든 건 아니지만, 태희라는 캐릭터가 가진 요소는 배두나 본연의 것과 닮았어요. 현실과는 다른 차원에 있는 듯한 캐릭터. 약간의 판타지가 섞여 있죠. 그저 걷기만 해도 다른 공기가 연출돼요. 사람들은 늘 현실 너머를 꿈꾸잖아요. 그래서 태희 캐릭터를, 배두나라는 배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하는 태희는 나름 치열하게 진로를 고민하고 방황하지만, 누구에게도 헤아림을 받지 못하는 캐릭터예요. 늘 주위 사람들을 배려하고 연민하지만, 정작 본인은 이야기할 데가 없는 거죠. 그래서 어둠 속에 고양이와 둘이 있는 장면이 깊게 다가왔는데, 배두나 배우의 성격과도 비슷한 것 같아요. 주변인을 많이 챙긴다고 들었거든요. 정재은 저를 잘 챙겨주는 건 맞아요(웃음). 배두나 사람들을 챙기는 편이긴 한데, 지영에게 돈 빌려줄 때 당당하게 못 주는 거랑 비슷해요. 배려를 하지만, 대놓고 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해요. 스윽, 하는 편이죠. 정재은 그때 돈 건네주고 나서의 두나 표정이 진짜 귀여워요. 아마 그런 표정 하나하나 본인은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극장에서 자기 얼굴을 그렇게 집중해서 보기가 쉽지 않을 테니까요.
스무 해가 지났으니 지금쯤 보면 거리 두기가 되지 않을까요. 배두나 확실히 내가 나오는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기란 힘든 것 같아요. 정재은 그런데 너무 예뻐. 그 시절의 얼굴이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배우들을 분장 없이 최대한 내추럴하게 찍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가 느껴져요. 색 보정을 마치면 더욱 생생할 거예요. 배두나 맞아, 여드름 자국 다 나오고. 전 그런 게 좋았어요. 지금도 그렇게 찍고요. 그런데 감독님들이 싫어하시지. 내가 맨 얼굴로 찍는 걸.
감독으로서 왜 배두나 배우를 캐스팅했나요? 정재은 당시 <플란다스의 개>(2000)를 찍은 봉준호 감독님과 아는 사이였고, 그 영화를 정말 좋아했어요. 거기에서는 재미있고 엉뚱한 캐릭터라고 볼 수 있잖아요. 배두나라는 인물은 이런 캐릭터도 소화해내는구나 싶었죠. 그리고 예쁘잖아요. 제가 생각하는 태희 이미지에 딱이었어요.
시나리오를 받았을 무렵 20대 초반이었을 텐데, 자기 또래의 이야기를 받은 거잖아요. 하지만 저만 해도 당시에는 이 영화 속 이야기가 멀게 느껴졌어요. 저는 이들과 처지가 다른 대학생이었으니까요. 배우는 시나리오를 읽고 이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궁금해요. 배두나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시나리오를 읽고 작품 의도를 한 방에 간파할 수는 없었어요. 글을 잘 쓰시는 것 같긴 한데, 내가 이 작품에서 뭘 해야 될지 잡히지 않더라고요. 사실 거절할까 했어요. 그러다 감독님의 단편을 보고 단번에 생각이 바뀌었죠. 정재은 누구나 그랬을 것 같아요. 무슨 얘기인가 싶었을 거고. 배두나 시나리오 봤을 땐 이런 영화가 나올 거라고 예상 못했어요. 또 감독님 만나기 전이죠? 전 어릴 때도 감독님의 첫인상이나 전작을 보고 작품을 골랐어요. <플란다스의 개>도 오디션 보러 가서 졸다가 캐스팅된 케이스잖아요. 오디션 받기 싫어서 ‘아… 이런 데 왜 나를 보냈나’ 이러고 있다가. 그런데 감독님과 5분만 이야기해봐도, 이 사람은 다른 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때 그분이 스물여덟인가 그랬거든요. 사람이 너무 똑똑하니까 왠지 같이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정재은 감독님의 경우에는 감독님의 단편영화를 차에서 보다가 생각했죠. 이건 해야 돼.
정재은 감독의 첫인상은 어땠어요? 배두나 좋았어요. 자유롭고 너그러운 언니 같았죠. 일기 써오라고 할 때부터 점점…(웃음) 정재은 두나가 쓴 일기를 아직도 갖고 있어요. 맨 마지막에 ‘숙제 끝’이라고 쓰여 있어요.
정말 하기 싫었나 봐요. 정재은 너무 하기 싫었을 것 같아요. 몸으로 표현하는 사람에게 그런 걸 쓰라고 하니까. 배두나 진짜 어려운 게 뭐냐면 저는 캐릭터를 연구하고 분석해서 캐릭터를 쫙 정해놓고 가는 편이 아니거든요. 촬영 들어가서 한두 장면 찍어보면서, 캐릭터의 옷을 입고 분장을 하고 어느 공간에 놓여 캐릭터가 되는 스타일이에요. 찍기 전까지는 사실 잘 몰라요. 다른 배우들은 시나리오에 자기 캐릭터에 대해 엄청나게 써오는데, 나만 깨끗해(웃음).
배우마다 성향이 다르고 작품에 대한 접근법이 다르잖아요. 또 작품이나 역할에 따라 다를 테고요. 배두나 이 방식에는 단점이 있어요. 의상과 분장에 따라 얼마나 좌지우지되겠어요. 의상이든 공간이든 세트든 스타일이 견고하게 잡혀 있는 현장에서는 이 특성이 잘 발휘되고 영감도 쉽게 받을 수 있어요. 하지만 세팅이 허술하면 제 연기도 같이 허술해지죠. 정재은 제가 원한 것도 배우가 캐릭터를 분석하고 해석하기보다 캐릭터에 대해 더 생각하고 집중해줬으면 하는 거죠. 배두나라는 배우를 만났을 때 인상적이었던 건 태희는 무엇을 입을까를 먼저 고민하는 모습이었어요. 두나가 태희 의상을 직접 구하러 다녔어요. 배두나 영화에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태희는 왠지 협찬받은 옷이 안 어울릴 것 같아 광장시장을 돌았어요. 그런데 의상 팀 입장에서 보면 월권인 것 같아서 다음 작품부터는 그렇게 안 했죠. 정재은 영화 속에 나오는 빨간 점퍼가 두나가 구해온 거예요. 그게 시각적으로 태희 캐릭터를 만드는 포인트가 됐죠. 헐렁한 바지와 운동화 같은 것들. 귀여운 건 태희가 선원이 되고 싶어 하잖아요. 그래서 세일러 줄무늬 옷도 구해왔더라고요. 배두나 그거 아직도 우리 집에 있어요.
<고양이를 부탁해>는 당시 메인스트림 영화였잖아요. 지금 이런 영화가 나온다면 독립예술영화 신으로 분류될 거예요. 너무나 눈부셨던 한국 영화의 호시절에 만들어진 영화죠. 정재은 지금 시나리오를 썼다면, 1억 미만 독립영화로 지원받아 겨우 만들었을 거 같아요. 배두나 정말 좋은 한국 영화가 많이 나오던 시절이죠. 그 무렵 <와이키키 브라더스>도 있었고. ‘와라나고 보기’ 운동도 있었죠. (와라나고 보기는 네티즌이 자발적으로 <와이키키 브라더스>, <라이방>, <나비>, <고양이를 부탁해>의 재관람을 촉구한 운동이다.) 정재은 전 이 영화가 당연히 흥행할 줄 알았어요(웃음). 배두나 저는 매 작품이 흥행할 거라 여기며 하죠. 그래서 상처를 오랫동안 받았어요. <플란다스의 개> 시나리오를 보고 이거 진짜 대박이다, 이랬는데. 왜냐하면 나는 읽으면서 깔깔댔으니까. 그런데 <고양이를 부탁해>도 안되고, 박찬욱 감독님의<복수는 나의 것>(2002)도 안되고. 난 그냥 내 감각을 믿지 않는 걸로.
<복수는 나의 것>은 저도 정말 좋아하는 영화예요. 영화 기자가 되고 난 뒤 어떤 영화를 가장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저의 대답은 늘 <복수는 나의 것>이었어요. 정재은 섭섭하네요(웃음).
<고양이를 부탁해> 개봉 당시엔 이입을 잘 못했어요. 나이가 들면서 점점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어요. 혜주의 순진했던 욕망을, 지영이 가진 가난의 무게와 곤란함을 지금 더 잘 아는 거죠. 두 분의 20대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정재은 남들보다 조금 늦게 영화 학교에 들어간 케이스인데, 영화감독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차마 하지 못했어요. 그저 영화업계에서 일하고 싶었죠. 저는 영화를 정말 좋아했고, 영화 보는 일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던 사람이에요. 개봉하는 모든 영화를 다 봤고, 영화제를 찾아다녔고, 영화를 보면 꼭 글로 남겼어요. 이 영화가 왜 좋은지 써 버릇하는 습관을 고등학교 때부터 이어갔어요. 영화감독이 될 줄은 몰랐고요.
당시만 해도 정재은 감독은 파격적으로 일찍 데뷔한 여성 감독이었죠. 배두나 그때 몇 살이었어요? 정재은 스물여덟에 준비해서 개봉했을 때가 서른 살. 배두나 다들 정말 아기들이었구나. 정재은 그러니 이해해줘, 3시간. 뭘 알았겠니(웃음).
배두나의 20대는요? 배두나 질풍노도의 시기였죠.
어떤 의미에서요? 커리어적으로? 배두나 개인적으로도요. 열아홉에 데뷔하기 전까지 저는 감정 기복이 없는 무척 착한 아이였어요. 숫기도 없고, 얌전하고, 감정을 표출해본 적 없는. 그저 엄마 말 잘 듣고, 학창 시절에 장기 자랑 하라고 하면 울고. 부끄러워서요. 지금은 카메라 앞에서 뻔뻔하게 포즈를 취하는 사람인데, 어릴 땐 누가 날 쳐다보기만 해도 힘들어 눈물이 났다니까요. 그러던 애가 어쩌다 보니 이런 일을 하게 돼서 감정을 쓰고 표출하고. 그러면서 갑자기 많은 변화가 온 것 같아요.
뒤늦은 사춘기였군요. 배두나 10대에 올 게 20대에 왔죠. 그때 많은 걸 경험하고 다양한 감정을 느끼며 나 자신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저는 스무 살 때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반항도 그제야 해봤고.
반항이라면, 어떤 수준이었을까요? 배두나 사소해요. 엄마한테 말대꾸하는 것도 20대 중반 넘어서 해본 거거든요. 저에게는 20대 자체가 사춘기였어요.
그렇게 발산하고 나니 30대는 좀 더 편안했나요? 배두나 네. 갈 길도 뚜렷해졌고, 영화배우로 일하는 데도 완전히 적응했고. 10대 초반을 돌이켜보면, 집에서 만날 만화책만 봤어요. 제가 덕후 성향이 강하거든요? 혼자만의 상상 속에 지내다가 갑자기 시작한 사회생활이 힘들었던 모양이에요. 더구나 감정을 쓰는 직업에, 많은 사람 앞에 서야 하고. 지금은 레드 카펫 같은 행사도 아주 좋아하죠. 1초라도 더 천천히 걸으려고 해요. 예전에 청룡영화상에 <터널>(2016)로 초대받았을 때 하정우 오빠가 저를 당기면서 너무 빨리 걷는 거예요. 나는 한 발 한 발 가고 싶은데. 하하.
20대가 힘들었을 것 같은 게, 과거엔 영화 현장이 거칠었잖아요. 정재은 지금도 거칠어요. 배두나 지금도 다른 쪽으로 거칠죠. 어디나 그렇겠죠. 회사라고 뭐 안 그렇겠어요. 거기서 버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전투를 하고 있는 거죠. 정재은 특히 영화 현장은 한정된 시간 안에 집약적이고 밀도 있게 작업하는 환경이잖아요. 몇 달 찍고 또 흩어지고. 배두나 그렇죠. 가혹한 건, 촬영 끝나면 이제 내가 필요 없다고 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그렇게 온 마음을 쏟았는데.
배우들은 촬영 끝나면 갑자기 버림받은 기분이 든다는 말을 종종 하는데, 감독 입장에서는 편집과 후반 작업 하면서 모니터로 계속 보니 배우를 더 사랑하게 된다고 해요. 그런데 배우들은 이미 잊고 다른 작품 하고 있잖아요! 배두나 배우들은 감독이 한 편 만드는 동안, 세 작품 찍고 있고… 정재은 <고양이를 부탁해>만 해도 개봉 뒤 끝났다, 시원하다, 뭐 이런 생각을 했죠. 이제 나도 다른 거 해야지. 그런데 작업이 20년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어요. 아직도 색 보정 중이잖아요(웃음). 전 이 영화를 떠날 수 없네요. 거의 저의 분신 같아요. 배두나 <고양이를 부탁해> 촬영 때가 요즘도 가끔 생각나는 이유는 우리가 쏟은 에너지의 밀도가 엄청났기 때문이에요. 지금의 열 배 정도? 촬영감독님도, 감독님도, 배우들도 그랬고. 그래서 이렇게 오랫동안 붙잡고 있는 것 같아요.
거기에 마음이 담겨 있나 봐요. 배두나 맞아요. 꾹꾹 눌러 담은.
태희가 어떻게 살고 있을 것 같아요? 지금 마흔 정도 됐을 텐데. 배두나 생각 안 해봤는데… 그대로 잘 살고 있으면 좋겠어요.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하지는 않거든요. 저만 해도 타고난 성향이 잘 바뀌지 않더라고요. 세월에 풍화될 순 있고, 사회성이나 요령이 생길 순 있지만, 예전처럼 그렇게 물 흐르듯이 살고 있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고요. 정재은 태희라는 인물을 만들 때 연민, 몽상 이런 키워드를 많이 떠올렸거든요. 현실에서 여러 고충을 겪었겠지만, 예전의 그 느낌을 간직하고 있으면 좋겠어요. 잘 살고 있길 바라고요.
영화를 보면 혜주가 태희에게 철딱서니 없고 어리다고 타박하는데, 철이 없거나 어린 게 아니라 삶에 대한 시선이 다를 뿐인 것 같아요. 배두나 한국 사회라서 태희가 유독 특이해 보이는 것 같아요. 한국은 정말 열심히 살아야 하는 나라거든요. 정재은 핵심을 말하는 것 같아. 태희는 열심히 살아가는 애가 아니야. 배두나 태희가 몽상가처럼 보이는 이유는, 연기할 때도 그렇게 했지만, 흐르는 대로 가고자 하는 아이이기 때문이에요. 저도 당연히 열심히 살죠. 전 진짜 열심히 살아요. 그런데 잠깐 걷기만 해도 남들은 계속 뛰고 있기 때문에, 아, 이래선 안 되지, 싶어져요. 그런 사회 분위기가 있어요. 거의 모두가 열심히 살기 때문에 열심히 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약간 낙오자로 보는 시선도 있고. 사실 대충 살아도 행복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이번에 배두나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새삼 느꼈어요. 배두나라는 배우는 정말 열심히 일해왔고, 좋은 필모그래피를 가졌구나. 배두나 특별전이라는 행사가 쑥스럽긴 해요. 아직 갈 길이 머니까요. 하지만 저는 제가 배우인 게 너무 좋고,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작품을 골라왔다고 자부해요. 물론 가끔 아닌 작품도 있죠. 어떻게 항상 마음에 드는 것만 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저는 작품을 정말 신중히 골라요. 계약하기 직전까지 계속 고민해요. 그렇게 하나하나 고른 작품이라 특별전에 상영될 작품, 다 볼만할 거예요. 정재은 두나는 겸손해서 무슨 특별전이냐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이렇게 다양한 작업을 지속한 배우가 과연 있나요? 한국에 머물지 않고 각국의 영화감독과 좋은 작업을 해왔잖아요.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에 그런 행보를 다시 돌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것 같아요.
바깥에서 볼 때 배두나의 행보는 무척 도전적이고, 모험에 가까워요. 사람이기에 새로운 환경에 놓이면 두렵기도 할 텐데, 장벽을 장벽으로 느끼지 않는 것 같고. 요즘 같은 고립의 시기에 그 꿋꿋한 모험의 여정을 다 함께 보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힘이 솟을 것 같아요. 배두나 그냥 배가 떠돌다가 어디 닿은 거예요. 남들은 제가 모험과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아 할리우드 문도 두드리고 프랑스 영화에도 출연한다고 생각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고 저도 태희와 비슷한 스타일이에요. 물 흐르듯이 가요.
배가 기슭에 쓱 닿은 건가요? 배두나 그리고 항구에서 적응을 너무 잘하는 거죠. 저도 제가 그렇게 적응을 잘할 줄 몰랐어요. 저는 집에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미국에서 어느 감독이 시나리오 보내고 싶다고 해요. 그래? 진짜? 그런데 전 영어를 못해서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스타일은 아닌 거죠. 그래서 감독과 스카이프로 미팅을 했죠. 내 시나리오 봤어? 네. 어떻게 봤어? 인터레스팅. 하하하. 지금은 이 말이 부정적인 의미라는 걸 아는데, 그땐 흥미로웠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예요. 판타스틱, 어메이징, 이런 좋은 단어가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클라우드 아틀라스>(2012)에 캐스팅됐어요. 낯선 언어로 연기해도 자기들이 나보다 영어 잘하니까 알아듣겠지 했어요. 상황 적응이 빠른 거지 열성적으로 기회를 두드리는 타입은 아니에요. 연기를 좋아하긴 하지만.
이번 영화제 상영작은 아니지만, 저는 <터널>을 좋아해요. 그때 연기가 끝내줬거든요. 배두나라는 배우에게는 몽상가나 비현실적 이미지가 있다고 하지만, 사실 누구보다 현실에 견고하게 발 디딘 연기를 하는 배우라고 생각해요. 배두나 20대에는 현실적 무대에서 판타지가 가미된 캐릭터를 맡았다면, 30대 들어서는 SF나 장르 성격이 강한 영화에서 더 현실에 발붙인 연기를 해야 한다고 여겼어요. 내 캐릭터에게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니까. <고양이를 부탁해>에서는 공기처럼 있으려고 노력했지만, <터널>의 경우는 남편이 터널에 갇힌 심각하고 피 말리는 상황이잖아요. 하정우 오빠는 오히려 터널 안에서 영화 분위기를 밝게도 만들지만, 바깥에서 지켜보는 저는 현실적인 위치에 있어야 했어요. 재난 사고가 단순한 영화적 사건으로 소비되지 않게 하려고요. 정재은 저는 <비밀의 숲>에서의 연기를 정말 좋아해요. 배두나 <비밀의 숲>에서도 공기처럼 존재했죠(웃음).
두 분은 경력 초기부터 함께했고, 여전히 인연을 이어오고 있어요. 늘 마음으로 서로를 응원할 것 같아요. 정재은 제가 도움만 받는 것 같아서 두나에게 미안하죠. 여기서 공개하기 어려운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배두나 에이… 빵을 몇 번 얻어 드셨죠. 제가 집에서 빵을 굽거든요. 정재은 두나와 20년 후에 <고양이를 부탁해 2>를 꼭 찍자고 약속했는데, 벌써 20년이 됐네요.
후속편이 나온다면 어떤 이야기가 될까요? 정재은 생각해봤는데, 아직 잘 잡히지가 않아요. 친구들에게 “이런 스토리 어때?” 하고 들려줬는데 그만두라고 하는 거예요. 들어보세요. 두나(태희)가 오랜 여행에서 돌아왔어요. 배두나 20년… 너무 오랜데? 정재은 되게 오랜 여행에서 돌아와서 혜주네에서 살게 된 거예요. 배두나 혜주는 어떻게 됐어요? 정재은 부동산 투자를 해서 아파트도 몇 채 있고, 나름 성공한 삶을 살고 있어. 그런데 태희는 갈 데가 없는 거야. 태희는 한비야 씨처럼 국제 구호 단체를 돌아다니면서 세상을 위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된 거죠. 그런데 서울에 집이 없는 거야. 혜주네에 와서 생활하는데, 혜주 아들하고 사랑에 빠지네? 배두나 혜주 아들 열 살 아니에요? 정재은 고등학생. 혜주가 아이 공부를 지나치게 혹독하게 시켜서 마음 둘 곳이 없는 거지. 뭐, 이런 스토리를 말했더니 다들 그만두라고(웃음). 무엇을 하느냐가 핵심인 것 같아요. 이 친구들이 오랜만에 만나서 무엇을 하느냐. 배두나 나는 이 스토리 괜찮은 것 같은데. 정재은 하여튼 <고양이를 부탁해 2>는 20년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기 때문에 개봉은 어려운 상황인 것 같고(웃음). 대신 <고양이들의 아파트>가 오는 11월에 개봉할 예정이에요. 배두나 감독님의 다큐멘터리는 왜 OTT에서 볼 수 없어요? 정재은 저작권을 팔지 않은 거죠. 다큐멘터리 작업의 판권은 제가 갖고 있거든요. 가급적이면 사람들한테 많이 안 보여주는 방식을 택하고 있어요. 배두나 아니 왜요? 안 보여주고 싶은 그 마음은 뭐예요? 정재은 <아파트 생태계>(2017) 같은 영화는 사람들이 꽤 좋아했어요. 하지만 극장 배급은 안 했거든요. 다큐를 볼 관객은 한정되어 있는데, 거기에 따르는 비용이나 사람들의 수고를 따져보면 개봉하지 않는 게 맞겠다 싶었죠. 배두나 저는 영화는 무조건 많은 사람이 보는 게 좋다는 입장이에요. 어떻게 보면 그게 우리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거든요.
배두나 배우는 정재은 감독의 행보를 지켜보며 어떤 생각을 했어요? 배두나 감독님이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며 즐거워하고 행복하시면 그것도 응원해요. 그런데 저는 감독님의 극영화가 보고 싶어요. 다시 이쪽으로 끌어들이고 싶어요(웃음). 정재은 극영화도 준비 중이고, 오랜만에 극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노력해볼게요(웃음).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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