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사 베렌슨은 아직도 작은 노트를 들고 다닌다

2026.06.08

마리사 베렌슨은 아직도 작은 노트를 들고 다닌다

Courtesy of Zara

밑줄 치고 싶은 문장은 꼭 활자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상치 못한 대화에도 담겨 있죠. 대단한 정보를 쏟아내서가 아닙니다. 자신만의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들어도 메모하고 싶어지죠. 그런 낭만이나 감각은 교과서에 쓰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더 기억해두고 싶어지는 걸지도 모릅니다. 마리사 베렌슨과의 인터뷰가 그랬습니다. 일정상 서면으로 진행됐지만, 답변을 받은 지 며칠이 지나도록 여운이 남더군요.

사실 마리사를 치켜세우기 위해 첫 질문에 아부를 살짝 떨었습니다. 당신은 워낙 전설적인 인물이라 수식어가 많지만, 지금까지 이렇게 도전하고 있으니 새로운 버전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싶지 않냐고요. 단호하게 답하더군요. “달라져야 하나요?” 그러면서도 인생의 중요한 사실을 귀띔해주었죠. “마음을 열고, 감각을 깨운 채 살아가기. 그리고 자신의 직관을 믿기. 언제나 내면의 기준을 따랐고, 덕분에 멋진 사람과 공간을 만날 수 있었어요. 지금의 저는 그 사실을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된 사람일 거예요.”

그럴듯해 보이려고 급히 만들어낸 문장이 아니라, 지금까지 실천해온 삶을 그대로 말해주는 게 느껴졌습니다. 갈래가 다른 질문에도 결국 하나의 울타리 안에서 답했고요. 재밌는 일을 틈틈이 적어놓는 노트, 민낯과 맨발로 입던 카프탄 드레스, 여행지에서 사 모은 기념품, 이번 홈 컬렉션에 끌어온 별자리와 나비 문양,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선택한 브랜드, 자라까지. 그 궤변 없는 명료함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거나 바쁜 일상에서 놓치고 있었던 것이 가득했습니다. 솔직한 모습이 참 단단해 보이고, 그 단단함에 기대고 싶어진 대화였습니다.

마리사 베렌슨은 1970년대를 대표하는 모델이자 배우입니다. 디자이너 엘사 스키아파렐리 외손녀라는 설명 없이도, 패션과 예술에 관심이 있다면 한눈에 알아보는 이름이죠. 1960년대 중반, 당대 가장 영향력 있는 패션 에디터 다이애나 브릴랜드에게 발탁되어 세계 무대에 올랐고, 어빙 펜과 리처드 애버던의 렌즈 앞에 섰습니다. 1969년 어빙 펜이 촬영한 <보그> 누드 화보는 지금까지 전설로 남아 있고요.

1965년 ‘보그’ 화보 속 마리사 베렌슨. Getty Images

1967년 ‘보그’ 화보 속 마리사 베렌슨. Getty Images

모델로서의 전성기 이후엔 루키노 비스콘티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Death in Venice)>(1971)으로 스크린에 데뷔했고, 이후 밥 포시의 <카바레>(1972), 스탠리 큐브릭의 <배리 린든(Barry Lyndon)>(1975)에 연이어 출연하며 배우로서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여주었습니다. <카바레>로는 골든 글로브와 BAFTA 여우 조연상을 받았고요. 이후로도 앤디 워홀, 클린트 이스트우드, 루카 구아다니노까지 반세기 넘게 거장들이 마리사를 찾았습니다.

1982년, 발렌티노 프런트 로에 나란히 앉은 마리사 베렌슨과 앤디 워홀. Getty Images

이번엔 스크린이 아니라 홈 컬렉션으로 대중 앞에 나섭니다. 자라와 협업해 완성한 ‘더 하우스 오브 마리사(The House of Marisa)’ 컬렉션에는 마리사의 취향과 기억, 상상력이 담겨 있죠. 황금빛 나비 파티션, 별자리 식기, 여행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패브릭 등 영화 속 집을 거니는 것 같은 기분을 불러일으킵니다. 오랜만에 ‘대화의 맛’을 느끼게 해준 마리사 베렌슨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Courtesy of Zara

음악을 들으며 당신의 답변을 읽을까 봐요. 이번 컬렉션 이름은 ‘엔들리스 서머(Endless Summer)’입니다. 듣자마자 추억 속 여름날로 데려가는 노래가 있나요?

낸시 시나트라와 리 헤이즐우드(Lee Hazlewood)의 ‘Summer Wine’이요! 언제 들어도 저만의 특별한 무드를 만들어주는 노래죠. 그리고 1960~1970년대 이탈리아 음악도 정말 사랑해요. 카프리섬과 지중해, 긴 여름밤의 낭만적인 자유 한복판으로 저를 데려다줘요.

여전히 많은 이들이 당신을 ‘1970년대의 뮤즈’로 기억합니다. 그런 당신이 2026년 초여름, <보그 코리아>와 인터뷰를 하고 있죠. 지금의 마리사 베렌슨은 어떤 사람인가요?

그 질문을 받으니 되묻고 싶어지는군요. 왜 예전의 나와 달라져야 하죠?

물론 사람은 변합니다. 경험이 쌓이면서 더 깊어지죠. 어쩌면 조금 더 현명해질 수도 있고요. 하지만 저는 언제나 같은 내면의 기준을 따르려 노력해왔어요. 바로 호기심과 경이로움입니다. 타인에게 마음을 열고, 다정함을 잃지 않는 것. 그리고 자신의 감정과 직관을 믿는 용기요. 그런 본능이 언제나 저를 이끌어주었죠. 덕분에 멋진 사람들과 공간을 만날 수 있었고요.

지금의 저는 그 사실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게 된 사람일 거예요. 마음을 열고, 감각을 깨운 채 살아가기. 그리고 자신의 직관을 믿기. 그것이야말로 인생을 여행하는 가장 아름다운 방식이라는 걸요.

1966년 ‘보그’ 화보 속 마리사 베렌슨. Getty Images

디올 2007 봄/여름 오뜨 꾸뛰르 쇼에 참석한 마리사 베렌슨. Getty Images

어린 시절, 외할머니 엘사 스키아파렐리 집에서 보낸 시간은 이번 컬렉션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그 기억들은 제 시각적 세계관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온전히 할머니의 영향만은 아니었어요.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저만의 스타일을 고집했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가 얼마나 많은 취향을 공유했는지 새삼 깨닫게 되더라고요. 당시에는 몰랐지만, 할머니의 감각이 제 안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거죠.

할머니는 상상력에 한계가 없고,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한 사람이었어요. 집 안 곳곳이 환상과 유머로 가득했죠. 초현실주의와 아름다움, 대담함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고요. 어린 시절의 인상은 마음속에 오래 남기 마련이잖아요. 이번 컬렉션 역시 그런 자유로움과 감성을 담고 있어요. 화려함과 독특함, 따뜻함과 관능미, 그리고 저마다의 이야기를요.

Courtesy of Z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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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집 안 중 어느 공간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셨나요? 특별히 아끼는 물건이나 가구도 있었나요?

거실을 정말 좋아하셨어요. 아름답고 독특한 물건으로 둘러싸인 공간이었죠. 방마다 책과 예술품, 패브릭이 가득했고요. 여행지나 예술가에게서 수집한 작은 보물도 정말 많았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선명해요. 할머니 주변에는 늘 신비롭고 창의적인 분위기가 감돌았거든요. 차갑거나 형식적인 집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개성과 상상력, 호기심이 시끌벅적하게 살아 숨 쉬는 공간이었죠.

수많은 브랜드 중 자라가 이번 이야기를 들려주기에 가장 적절하다고 느낀 이유는 무엇인가요?

자라는 놀라운 파급력을 갖춘 브랜드죠. 동시에 굉장히 열린 태도를 지니고 있고요. 저는 늘 아름다움과 환상, 감동을 더 많은 대중과 나누고 싶다고 생각해왔어요. 패션과 인테리어는 특정 소수만의 것이 되어선 안 된다고 믿고요. 자라는 이번 프로젝트의 의도를 빠르게 이해해주었습니다. 덕분에 제 개인적 감성과 즐거움을 자유롭게 담아낼 수 있었어요. 저에게 믿음과 자유를 준 협업이었죠.

조디악 글라스웨어 컬렉션 – 물병자리. Courtesy of Zara

실크 베이비 필로우. Courtesy of Zara

팩 오브 인섹트 플레이스 카드. Courtesy of Zara

황금빛 나비 파티션부터 별자리 식기까지, 홈 컬렉션 제품은 종류도 다양합니다. 실제 당신의 집은 어떤 분위기인가요?

제 집은 아주 따뜻하고 다채로운 공간이에요. 탐미적이면서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를 좋아하거든요. 특히 여행하면서 모은 물건을 섞어두는 걸 좋아해요. 책과 꽃, 촛대, 패브릭, 추억이 담긴 물건, 예술품을 자유롭게 놓아두죠. 집이 너무 완벽하거나 지나치게 연출된 것처럼 보이는 건 좋아하지 않아요. 진짜 집이라면 사람의 온기가 느껴져야 하니까요. 감성과 아늑함, 그리고 영감을 주는 공간처럼 꾸미려고 해요.

뱀, 나비, 별자리처럼 마치 부적 같은 상징도 눈에 띕니다. 운명을 믿는 편인가요?

네, 인생이 참 신기하잖아요.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과 이유로 사람과 공간, 순간을 연결하니까요. 저는 늘 상징이나 영적인 감각에 끌렸어요. 점성술이나 변화, 직관 같은 것들이요. 특히 나비는 제게 변화와 자유를 속삭여주는 존재예요.

버터플라이 보로실리케이트(BOROSILICATE) 캔들스틱. Courtesy of Zara

코랄 메탈 캔들스틱. Courtesy of Zara

브랜치 앤 버드 플레이트. Courtesy of Zara

영화감독, 사진가, 화가 등 수많은 거장과 함께했습니다. 그들은 당신에게서 어떤 면모를 발견한 걸까요?

아마 신비로움과 섬세함 아니었을까요. 자유로움이나 상상력이었을 수도 있고요. 모두 세계관이 뚜렷한 사람들이었으니, 저마다 자신만의 환상을 제 안에 투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 역시 언제나 마음을 열어두려 노력했습니다. 창작에 대한 호기심도 잃지 않으려 했고요. 그들도 그런 면을 알아봐준 게 아닐까 싶어요. 저는 단순히 이미지로 남는 데는 관심이 없었어요. 삶을 깊이 있게, 온몸으로 경험하고 싶었을 뿐이죠.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옷을 입어오셨을 테죠. 그중 가장 나답다고 느낀 차림은 무엇인가요?

해변에서 맨발에 화장기 없는 얼굴로 햇살 아래 입은 심플한 카프탄 드레스요. 여기에 여행지에서 모은 주얼리를 더하는 걸 좋아해요. 그럴 때 가장 편안하고 은밀한 기분이 들어요. 자유롭고, 유행을 타지 않고, 가장 나다운 모습처럼 느껴지죠.

1976년 프랑스에서. Getty Images

지금 바로 손 닿는 곳에 있는 물건 중 매일 찾게 되는 것이 있나요?

제 아이패드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분위기에 비하면 조금 현실적이죠?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저는 완전 영화광이거든요. 예전에는 VHS 테이프를 끼고 살았다면, 이제는 작은 태블릿을 늘 들고 다녀요.

그리고 이번 자라 홈 컬렉션에도 포함된 작은 노트를 늘 곁에 둬요. 머릿속을 스치는 재밌는 생각을 적어두거든요. 저는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도 정말 좋아해요. 제게 상상력과 감성이 없는 삶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에요.

노트북 A6. Courtesy of Zara

노트북 A5. Courtesy of Zara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믿나요? 혹은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 있나요?

물론이죠. 어떤 것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아름다워진다고 믿어요. 마음을 열게 하는 방식이 달라지거든요. 감정은 더 깊어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집니다. 더 다정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죠.

그래서 나이 드는 것이 슬프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삶은 점점 더 풍요롭고 자유로워지거든요. 호기심과 상상력, 사랑과 우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요. 아름다움에 감동하는 마음도 마찬가지고요. 우리가 그것들을 소중히 돌본다면, 마음속에서 계속 자라난다고 믿어요.

“호기심과 상상력, 사랑과 우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요. 아름다움에 감동하는 마음도 마찬가지고요. 우리가 그것들을 소중히 돌본다면, 마음속에서 계속 자라난다고 믿어요”. Courtesy of Zara
하솔휘

하솔휘

웹 에디터

2025년 4월 <보그>에서 시작했습니다. 패션 감각이 필요한 모든 분야의 글을 씁니다. 많이 듣고, 다니고, 읽고, 고민하면서 제대로 된 글을 재밌게 쓸 줄 아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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