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엘라 허스트가 일하는 법
가브리엘라 허스트가 끌로에에 합류했다는 사실은 이 프랑스 브랜드에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열릴 거라는 것을 뜻한다. 허스트의 공식 데뷔 전날, <보그>가 투명한 목적성을 바탕으로 창조력을 발휘하는 이 디자이너를 만났다.
한겨울 오후, 끌로에의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가브리엘라 허스트(Gabriela Hearst)는 파리 8구에 자리한 끌로에 아틀리에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가 선보이는 첫 컬렉션의 첫 막이 곧 올라갈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텅 비어버린 한밤의 생제르맹데프레에서 분위기 가득한 영상을 촬영할 예정이었다. 마스크를 낀 어시스턴트들이 각 룩을 마무리하는 중이었고, 옷이 줄지어 들어찬 피팅 룸으로 모델들이 입장했다. 레드와 그린의 마블링 실크가 나부끼는 크레이프 드레스, 발목 길이의 청키한 니트 드레스, 1971년 조니 미첼이 입었을 법한 브라운 가죽을 스캘럽 형태로 마무리한 롱 코트 같은 의상이 그들을 기다렸다. 많은 사람이 허스트에게 질문을 쏟아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스페인어 억양이 약하게 느껴지는 어투로 ‘Oui, Merci(네,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하곤 했다. “제가 아는 프랑스어는 ‘위, 메르시’ 정도죠.” 허스트는 다소 미안한 듯한 어조로 말하며 지퍼가 달린 파카 소재로 목 부분을 처리한 두꺼우면서도 부드러운 재활용 캐시미어 판초를 만져보길 내게 권했다.
이미 존재하는 소재를 재활용해 완벽하게 재단한 새로운 뭔가를 창조하는 것은 클래식한 가브리엘라 허스트의 스타일이다. 우루과이의 소 목장에서 태어나 자란 그녀는(그래서 판초를 디자인했을 것이다) 미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가문으로 꼽히는 허스트의 자손과 결혼했다. 가브리엘라 허스트는 2015년 자신의 이름을 내건 브랜드를 설립했고, 곧 세련되면서도 지속 가능한 럭셔리로 그 입지를 다졌다. 우아함과 삶의 기쁨을 추구하며, 개척 정신으로 환경 위기를 둘러싼 이슈에 대해서도 소통해왔다. 칼 라거펠트, 스텔라 맥카트니, 피비 파일로가 이끌어온 편안하면서도 세련된 프렌치 페미닌 스타일로 널리 알려진 끌로에에서 허스트의 미션은 환경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참여 의식과 목적성을 브랜드에도 접목하는 것이다.
허스트는 3월 초에 공개한 첫 컬렉션에서 그 밸런스를 아름답게 선보였다. 영국식 자수, 스캘럽, 소프트한 컬러 팔레트라는 끌로에 언어를 이용하면서도, 합성섬유 사용을 줄이고 니트를 앞세웠으며, 공급망의 투명성과 업사이클링에 초점을 맞췄다. “빨리 해치워야 하는 수작업이 그렇게 많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파카 소재의 칼라가 달린 판초를 골라내며 매치스패션의 글로벌 패션 담당자 나탈리 킹엄(Natalie Kingham)이 말했다. 허스트는 아주 우아하고 어른 버전의 자신이 입은 옷이 어디서 오는지 알고 싶어 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끌로에 우먼’을 제안하고 싶었다고 얘기했다. “그런 것이 여성이 느끼고 보고 싶어 하는 거라고 봐요. 윤리적으로 같이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옷을 입고 싶겠죠. 스스로가 아주 멋지게 느껴질 거고요.” 킹엄이 덧붙였다.
허스트는 가브리엘라 허스트를 운영하는 동시에, 끌로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지명된 후 3개월이라는 기록적인 시간에 새로운 디자인을 선보였다. 미쳐버릴 정도로 바쁜 스케줄이었지만 드라이하면서도 유쾌한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다. “창의성이라는 측면에서 불만족스럽지는 않아요.” 그녀는 아틀리에 한쪽에 앉아 얘기했다. 지난해 12월 끌로에의 디렉터가 됐을 때, 많은 이가 허스트가 그 일을 원했는지 궁금해했다. 이미 이름이 알려진 자기 브랜드가 있었으니까. 질 바이든 박사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당선된 당일 저녁에 입은 흰 꽃무늬 자수 드레스가 바로 가브리엘라 허스트로 의회 연설에는 네이비 컬러를 입었다. 흔히 여성은 커리어와 가족에 관해서는 남성과 다른 잣대를 적용받곤 한다. 흔히 ‘오스틴’으로 알려진 그녀의 남편, 존 어거스틴 허스트(John Augustine Hearst)는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의 손자이자, 허스트 그룹의 경영진으로 여섯 살 된 아들 잭(Jack), 열세 살인 쌍둥이 자매 미아(Mia)와 올리비아(Olivia, 이 둘은 허스트가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자녀다)와 함께 맨해튼의 웨스트빌리지에 살고 있다. 이렇듯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던 가브리엘라 허스트가 파리에서 두 번째 일을 맡은 것이다.
허스트에게 왜 이 일이 하고 싶었는지 묻자 답변은 아주 명확하고 직설적이기 그지없었다. “제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허스트는 2017년 끌로에에서 디자인하겠다는 꿈을 갖게 됐고, 추후 끌로에의 CEO 리카르도 벨리니(Riccardo Bellini, “제가 미친 사람인 줄 알았겠죠”라고 그녀는 말했다)에게도 그런 마음을 전했다. 지속 가능성에 대한 의지와 액세서리에 강점을 보이는 그녀의 커리어는 ‘목표 지향적 비즈니스 모델’이라는 벨리니의 새 브랜드 플랜에도 잘 맞아떨어졌다. 허스트는 가족과도 협상해야 했다. 그 자리를 받아들일 경우 벌어질 일에 대해 얘기를 나눈 것이다. “내가 그 일을 맡으면, 너희들 기분이 좋지는 않을 거야. 너희에게 쓸 시간이 부족해질 테니까.” 만약 가족들이 안 된다고 했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하지 않았겠죠. 그것이 현실이니까요.” 그렇지만 가족들은 그녀에게 도전해보기를 권했다.
가브리엘라 허스트는 키가 크고 광대뼈가 튀어나왔으며, 턱 정도 오는 길이의 옅은 금발에, 눈동자가 창백하다. 우리가 만난 날, 그녀는 자신의 첫 컬렉션을 입고 나타났다. 청키한 질감의 머스터드 컬러가 가미된 그린 니트 풀오버를 입고, 오프화이트 컬러의 플리츠 울 스커트, 크림색 크레이프 웨지힐 부츠를 신고 있었다. 커다란 골드 컷어웨이 귀고리에 메이크업은 거의 하지 않은 채. 새 컬렉션 론칭을 앞두고 스테이지 준비 총괄 과정에서 허스트는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여러 도전 과제를 끌어안고 있었다.
가브리엘라 허스트 라인은 그리스 신화의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처럼 구상하고 있다고 그녀는 말했다. 지적인 여성성을 보여주며 회사를 운영하는 여성에게 어울리는 의상을 만들 것이다. 반면에 끌로에는 아프로디테다. 사랑의 여신이자 좀 더 젊고 관능적인 매력을 보여준다. 그녀는 92페이지에 달하는 이미지 자료 책자와 이 두 브랜드가 공유하는 컨셉인 ‘수공예’ ‘지속 가능성’ ‘진정성’ ‘목표 지향성’을 보여주는 벤다이어그램을 작성해 벨리니에게 제출했다. 그러는 동시에 스타일의 차이점도 분명히 언급했다. “가브리엘라 허스트를 입는 여성은 공항에서도 스웨트팬츠를 절대 입지 않을 거예요.” 끌로에의 DNA라고도 할 수 있는 스캘럽 모티브를 활용한 디자인도 가브리엘라 허스트에는 없을 것이었다. 가브리엘라 허스트에서 보여주는 헴라인 디자인은 절대 무릎 위로 올라가지 않겠지만, 끌로에는 그럴 수 있다. 이것은 신비한 ‘끌로에 걸’이 성장해나가는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은 ‘끌로에 우먼’이에요.” 동시에 그녀는 끌로에는 젊은 감성을 유지하기를 바랐다. 열세 살의 두 딸과 그 친구들에게서 1980년대를 연상케 하는 영감을 얻었다. “여성으로서 더 젊어지고 싶기도 하지만 더 나이 먹고 싶을 때도 있거든요. 그렇지만 지루한 건 절대 싫어요.”
이제 그녀는 가브리엘라 허스트라는 다소 작은 브랜드보다 훨씬 거대한 끌로에에서 지속 가능성이라는 접근법을 접목해보려고 한다. “이를 성공적으로 해낸다는 것은 가브리엘라 허스트라는 브랜드보다 훨씬 거대한 규모의 럭셔리 브랜드에서 해낸다는 의미가 더 클 거예요. 굉장히 야심을 자극하는 일이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매일 아침 저절로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런 추진력과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패션이 아닌 가족과 친구들이다. 지속 가능성에 대한 열정은 정의로운 분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녀는 2017년 케냐 북부의 투르카나에 세이브더칠드런과 함께 방문한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녀와 오스틴이 지원하는 자선사업이었는데, 물을 길어오기 위해 몇 마일이나 걸어가야 하는 영양실조 상태의 여성과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요즘에도 가족들이 이주와 기아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이 있다는 것이 너무 개탄스러웠어 요. 인류로서, 사업가이자 여성, 어머니로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봐요.” 그녀는 한 단어도 빼놓지 않고 힘껏 말했다.
끌로에는 훌륭한 여성 디자이너로 이어 내려오는 긴 전통을 보유한 브랜드다. 예외적으로 1983년 끌로에를 떠나기 전 부드러우면서 여성스러운 드레스 디자인으로 끌로에에 족적을 남긴 그 유명한 칼 라거펠트, 피비 파일로에 뒤이어 잠시 브랜드를 이끈 파울로 멜림 앤더슨이 있긴 하다. 스텔라 맥카트니의 지휘 아래서는 1990년대의 즐거우면서도 다소 가벼운 분위기를 보여주는 프랑스 브랜드로 거듭났고, 2001년 피비 파일로가 키를 잡은 후에는 그녀만의 보헤미안 글램 룩을 정의했다. 최근의 크리에이티브 디자이너였던 클레어 웨이트 켈러와 나타샤 램지 레비는 이러한 전통을 잘 계승한 컬렉션을 보여줬다. 그러나 허스트가 이끄는 끌로에는 트렌드만큼 가치에 새로운 포커스를 맞춰 보여줄 것이었다. 혹은 이러한 가치를 재조명하는 것이 최근 트렌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지 모른다. 현재의 ‘끌로에 우먼’은 다른 가치의 우선순위를 가진다. 파리 장식미술관의 디렉터 올리비에 가베(Olivier Gabet)에 따르면 허스트의 이런 행보는 아주 용감하다. “대중에게는 덜 알려진 인물이지만 1960~1970년대 끌로에가 보여준 전성기를 다시 한번 보여줄 수 있는 비전과 배짱이 있습니다.”
지금은 ‘가비(Gabi, 가브리엘라의 애칭)’가 있지만 끌로에는 또 다른 가비(Gaby), 즉 가비 아기옹(Gaby Aghion)에 의해 1952년 시작됐다. 그리스-이탈리아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열정적 사업가였던 가비 아기옹은 남편 레몽(Raymond)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모국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떠났다. 그리고 도착한 파리에서 이 부부는 갤러리 운영자 겸 안티파시즘 활동가로서 파리 센강 좌안에 자리 잡은 카페에 다니며 지성인들과 어울리곤 했다. 아들 필립 아기옹(Philippe Aghion)은 ‘창조적 파괴를 통한 성장 모형’으로 알려진 세계적 경제학자다. 아기옹은 굳이 일할 필요는 없었지만, 오뜨 꾸뛰르와 맞춤형 의류 시장 간의 괴리를 목격하고는 직접 디자인을 시작했다. 그녀의 고향이 떠오르는 프레시 코튼 드레스가 그 시작이었다. 이집트 사막의 핑크, 베이지색 모래를 연상시키면서도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손안의 실크’ 같은 면 드레스였다. 그리고 자신만의 브랜드로 만들어 부티크에 판매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하이엔드급 프레타 포르테 의상이 탄생했다. 끌로에는 “언제나 아주 여성스럽고, 매우 센슈얼한 동시에 시크하고, 세련됐죠”라고 가베가 말했다. 끌로에는 프랑스 실존주의의 전성기에 등장했지만, 이제 ‘환경주의가 화두’인 시대가 온 것이다.
가브리엘라 허스트는 가브리엘라 페레수티 소우사(Gabriela Perezutti Souza)라는 이름으로, 우루과이의 5대째 내려오는 가문에서 1976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이주했으며, 어머니는 브라질과 포르투갈의 피를 이어받았다. 어머니 소니아는 여전히 우루과이에 거주하고 있으며, 태양광으로 에너지를 공급하는 농장에서 생활한다(허스트의 어린 시절 가족사진을 보면 말을 탄 어머니 사진이 있는데 간혹 인스타그램에 올라오기도 한다). 허스트는 4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쯤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에 가서 할머니와 함께 살며 고상한 영국 학교에 다녔다. “세계화 시대 이전이었어요. 열다섯 살 때까지 케이블 TV도 없었죠”라고 허스트는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변화를 만들지 않는 이상 미래가 너무 뻔했어요. 비슷한 배경의 누군가와 결혼해 아이도 같은 학교에 보내고 동네 테니스 클럽 회원이 되었겠죠.” 그녀는 더 많은 것을 원했다. 호주에서 고등학교 1년을 마친 뒤, 우루과이로 돌아와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했고, 파리와 밀라노에서 모델로 일했다. 그리고 뉴욕으로 넘어와 네이버후드 플레이하우스(Neighborhood Playhouse)에서 마이스너 연기론을 통해 연기를 배웠다. “진실함 속의 퍼포먼스에 대한 거였죠.” 훌륭한 교육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맞지 않았다. “디렉팅을 받는 것에 익숙해지지 못했어요.” 그리고 웨이트리스로 일하거나 소규모 쇼룸에서 일하기도 했다. 2003년 브루클린에서 그녀는 첫 의류 라인 ‘칸델라(Candela)’를 시작했고 실크 스크린으로 제작한 티셔츠를 판매했다. 어머니에게서 영감을 받은 말을 탄 날개 달린 여인을 묘사한 옷이었다.
그렇게 첫 브랜드를 시작했고 오스틴 허스트가 이 사업에 투자했다. 둘은 2004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파티에서 친구 소개로 만났다. “처음에는 별로 마음에 안 들었어요. 그걸 그이도 알아요”라고 그녀가 늘 그렇듯 직설적으로 말했다. 그렇게 그들은 계속 친구 사이로 머물렀다. 그러던 2011년 그녀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둘은 빠르게 가까워졌다. 그동안 유산 상속에 관한 소송이 있었고 가브리엘라는 최종적으로 승리해 농장을 상속받을 수 있었다. 그때 오스틴은 그녀에게 “아무도 나의 자기를 건드릴 수 없어”라고 적힌 카드가 들어 있는 거대한 화이트 플라워 꽃다발을 선물했고 2013년에 결혼했다. 발렌티노 드레스를 입고 시청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디올 드레스를 입고 자연사박물관에서 피로연을 열었다.
오스틴 허스트는 ‘가브리엘라 허스트’의 투자자면서 공동 창업자이기도 하다. 그녀는 간단히 성을 따서 페레수티(Perezutti)로 브랜드 이름을 정하려 했으나, 아무도 제대로 발음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어느 친구의 충고를 받아들여 가브리엘라 허스트로 정했다. 허스트의 투자와 가브리엘라의 디자인으로 만든 브랜드였다. “‘아내의 취미 생활이나 시켜줘야지’라는 생각으로 시작한 것은 절대 아니었어요. 이건 사업이니까요.” 그녀와 오스틴의 결혼 생활과 사업 간의 밸런스는 어떤지 물었다. 그녀는 눈을 굴렸다. “밤 11시에 침대에서 예산에 대해 미팅하는 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2019년 LVMH는 가브리엘라 허스트의 소규모 투자자가 됐다. 가브리엘라 허스트 제품은 소수의 리테일 매장과 그녀가 런던과 뉴욕에 소유한 매장 두 곳에서만 판매했다. 허스트의 니나 백은 보테로의 조각(니나 시몬이라 이름 붙은 조각상)에서 영감을 받아 아주 소량만 생산하는 바람에 긴 웨이팅 리스트를 받게 됐다. 오프라 윈프리는 해리 왕자와 메건 마클의 결혼식에서 착용했고, 몇 달 뒤 메건 마클도 착용했다. 허스트는 아주 영리하게 지속 가능성과 고급스러움이 만나는 절묘한 지점을 찾아냈다. “급속히 성장하는 시기에 살면서 많은 기회가 있지만, 지속 가능성 같은 것은 주목받지 못했죠.” 지속 가능성과 한 해에 서로 다른 두 개의 브랜드에서 네 개의 컬렉션을 진행하는 것을 어떻게 조화시키는지 묻자 그녀가 대답했다. “사업 규모를 세 배 이상 확장할 수 있었지만, 지속 가능성이라는 측면을 고려해 조금 천천히 가도록 결정했습니다.”
끌로에에서도 동일한 접근을 시도하고, 탄소 배출량과 물 소비량을 2025년까지 25%가량 줄이기로 결정했다(본사와 파리에 있는 부티크는 100% 재생 가능한 에너지로 운영된다). 끌로에는 파카를 탈착 가능한 침낭으로 제작해 노숙자와 난민 캠프에 제공한다는 참신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네덜란드 비영리단체 셸터수트 재단(Sheltersuit Foundation)과도 콜라보레이션을 시작했다. 허스트의 첫 끌로에 컬렉션을 위해 셸터수트 창립자이자 네덜란드 출신 디자이너 바스 티머(Bas Timmer)는 끌로에의 재고 패브릭을 이용해 다채로운 컬러의 백팩을 디자인했다. 해당 제품의 판매 수익 일부는 난민을 고용한 셸터수트의 매장을 지원한다(직원들에게 침낭 파카는 무료로 제공한다). “그걸 이타적 디자인이라고 부르더군요.” 보주 광장(Place des Vosges)에서 만났을 때 티머가 말했다. 그는 레인 재킷에 후드 스웨트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끌로에 재고 패브릭으로 만든 것이었다. “우리가 하는 콜라보레이션은 패션계나 비영리단체에 분열을 초래할 수 있죠. 만약 끌로에가 멈추지 않는다면 더 많은 브랜드에 영향을 끼칠 겁니다.”
허스트는 정식 디자인 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엄청난 양의 스케치를 해왔다. 아이디어를 모으기 위해 꾸준히 꿈을 기록하며 많은 부분을 본능에 기대 행동했다. 가장 친한 친구이자 뮤즈이며 가브리엘라 허스트의 공동 창업자로 끌로에에 함께 입사한 스테파니 드 라발레트(Stephanie de Lavalette)와도 긴밀히 협업한다. 2000년대 초반에 만난 두 사람은 프랑스인 라발레트가 금융계에서 일할 때 맨해튼의 뱅크 스트리트에서 함께 살던 사이였다. “가브리엘라는 제게 하버드 디자인대학원 학장 같다고 말하곤 했어요.” 라발레트는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패션쇼 프로덕션뿐 아니라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등 경영 전반을 관리한다. “회사가 성장하면서 역할도 바뀌었죠.” 허스트는 아들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라발레트 아들의 대모다. 허스트와 라발레트는 부모의 죽음과 자식의 탄생 과정에서 서로를 위해 곁에 있었다. 라발레트와 얘기를 나누며 ‘가브리엘라 허스트’와 ‘끌로에’의 벤다이어그램 교집합에 들어 있던 다른 단어가 왜 ‘친구’와 ‘가족’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라발레트와 나는 끌로에 아틀리에 허스트의 사무실에서 녹차 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가족사진과 아트북, 시집 등이 선반에 가득했다. 앨런 긴즈버그, 파블로 네루다, 힐마 아프 클린트와 기하학 관련 서적이었다. 자연 상태에서 발견되는 패턴과 형태는 형이상학적 의미가 있다는 개념으로, 허스트가 최근 탐독하는 내용이라고 말했다(코로나 기간 동안 많은 사람이 그랬듯 그녀 역시 넷플릭스를 보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라틴아메리카의 로큰롤 관련 다큐 시리즈와 데이비드 애튼버러의 다큐멘터리 <우리의 지구를 위하여(A Life on Our Planet)>다). 사무실 한쪽 벽에는 좋은 친구이자 브루클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아티스트 더스틴 옐린(Dustin Yellin)의 기후 변화에 대한 콜라주 작품이 걸려 있다. 둘은 브루클린의 비스티 보이즈 (Beastie Boys) 공연에서 팬으로 만났고, 환경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가까워졌다. 가브리엘라와 오스틴은 브루클린에 있는 옐린의 파이오니어 워크스 아트 스페이스의 후원자가 됐다. 허스트가 어떤 인물인지 알려달라고 하자 옐린은 이렇게 대답했다. “신비하면서도 친절하고 마음이 넓죠. 열정도 넘치고. 그러면서 끝없이 밀어붙이는 힘이 있어요… 이 정도면 될까요?”
몇 주 뒤 나는 허스트와 어느 봄날 아침에 만나 함께 걸으며 더스틴이 말한 의미를 깨달았다. 나는 그녀가 파리에 처음 여행 왔을 때 어땠는지 물었다. 무슨 대답이 나올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그녀는 모델 활동을 위해 넥스트 에이전시에 갔었다고 대답했다. “18세부터 21세까지 섭식 장애로 고통받았어요.”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주아주 심각한 폭식증이었어요. 그러고는 며칠 동안 토하기만 했죠. 다른 중독 증상처럼 이것도 하나의 중독이었어요.” 그녀의 부모는 걱정이 많았고 파리에서 모델 활동을 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여권도 있고 5,000달러도 모았으니 ‘저 갈래요’라는 정도의 생각이었죠.”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데, 테라피스트가 있었거든요. 제 앞에서 부모님께 ‘파리에 가면, 죽을 겁니다’라고 말했어요. 그 말을 듣고는 ‘좋아, 파리에서 죽지 뭐’라고 생각했죠.”
정말 끔찍한 나날이었고 허스트는 이런 이야기를 공개한 적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모든 나쁜 생각이 합쳐져 있었던 것 같아요.” 현재 그녀는 섭식 장애와 정신 건강 문제를 겪은 이들을 도우려고 한다. 폭식증과 거식증에 맞서본 경험은 그녀의 인생을 바꿨다. “어떤 종류의 중독이든 치료받는 것은 나이도 상관없고 삶의 전혀 다른 부분으로 살아 돌아와 또 다른 희망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자기 안의 악마를 직면해야 해요. 자신에게 치료할 부분이 있다는 것을 똑바로 봐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강해질 수 있어요.”
그러다 몽소 공원의 벤치에 앉아 여성성과 모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분홍 꽃이 지고 새잎이 나오기 시작했다. 트위드 캐시미어 니트 드레스를 입고 코트를 걸치지 않은 허스트는 중세 시대에 전설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힐데가르트 폰 빙엔(Hildegard von Bingen)부터 세계적 리더와 거친 인터뷰를 하기로 유명한 오리아나 팔라치(Oriana Fallaci)에 이르는 강한 여성상으로부터 오랫동안 영감을 얻어왔다고 얘기했다. 그녀는 첼시 매닝(Chelsea Manning) 출소 후 첫 주요 매체 인터뷰를 위한 수트를 디자인한 것에 대해서도 자부심이 있었다.
허스트의 일란성 쌍둥이 딸들은 태반과 양막을 공유하는 단일 양막 쌍둥이였는데, 이로 인해 매우 위험한 임신기를 보냈다. “그렇게 두려운 적이 또 없었어요. 만약 아이들을 잃을 경우 정신적으로 극복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거든요. 정말 열심히 기도했습니 다.” 그녀는 26주 차에 맨해튼의 모건스탠리 어린이 병원에 입원해 8주를 보내며 검사를 받았다. “양막낭에서 자기들끼리 엮여 목을 조를 위험이 있었죠.” 당시 남편이었던 프랭클린 아이잭슨은 벤처 캐피탈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매일 밤 병원에서 잠을 잤다. 그리고 쌍둥이는 건강하게 태어났다. “인생을 다른 관점에서 보게 하는 많은 일을 겪었어요.”
그녀가 새로 정의한 우선순위는 디자인에도 드러났고, 즐기면서 기쁨을 느낀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강한 자아를 가진 여성을 보여주었다. 파리에 머물며 그녀는 쌍둥이 딸들과 화상 통화를 했다. 서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조언했고 패스트 패션은 원치 않았다. 이전에 그녀는 패션 브랜드에 대해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책임감을 아주 많이 느껴야 해요. 현재 성장하는 세대는 소비 욕구나 물욕이 그렇게 많지 않은 세대니까요.” 공원에서 돌아오며 중간에 라발레트를 만났고 그녀가 머무는 호텔에 도착했다. 허스트에게 성공을 어떻게 정의하냐고 묻자 그녀는 라발레트와 마주 보고 웃었다. 잘 자고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고 먼저 대답한 뒤 날카로운 답변을 내놓았다. 그녀에게는 목표가 명확했으니까. “환경에 영향을 덜 주는 글로벌 비즈니스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아이디어는 있지만, 도와줄 많은 사람이 필요하죠. 이게 우리 일이 추구하는 겁니다.” (VK)
- 글
- RACHEL DONADIO
- 포토그래퍼
- THÉO DE GUELTZ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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