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열, 소리 없이, 끈기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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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열, 소리 없이, 끈기 있게

2022-04-25T10:49:26+00:00 2022.04.25|

김무열은 긴 시간 지치지 않고 자신만의 변주를 감행해왔다. 그 어떤 파도의 흐름에도 훌쩍, 가볍게 올라탄다.

입체적으로 표현한 줄무늬가 돋보이는 피케 셔츠는 토즈(Tod’s).

뚜렷한 컬러 배색이 인상적인 피케 셔츠는 폴 스미스(Paul Smith), 노란색 줄무늬를 가미한 바지는 김서룡(Kimseoryong), 가죽으로 된 벨티드 샌들은 프라다(Prada).

김무열을 예의 주시하기 시작한 건 오래전 그가 <스프링 어웨이크닝>(2009)으로 무대를 장악할 때였다. 어른들의 시각에서 ‘불온한’ 청소년들. 기성세대에 도전하던 겁 없는 소년 ‘멜키어’를 보면서 청년을 훌쩍 넘긴 나이로 10대 소년의 반항을 감쪽같이 연기한 배우의 이름이 궁금했다. 아니 잊히지 않았다는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스크린 진출 후, 김무열에게 내재된 날 선 재능은 충무로에 ‘적합한’ 퍼즐 조각으로 적재적소에서 활용되어왔다. 무대 위 김무열이 ‘대학로의 아이돌’이라는 스타덤으로 강렬하게 수식됐다면, 스크린의 김무열은 숫자를 어디까지 늘려야 할지 가늠이 안 되는 주기율같이 복잡한 수의 연속이었다.

나는 <은교>(2012)의 노교수(박해일)에 대적하던 질투심에 똘똘 뭉친 제자 서지우 얼굴이, 어느 날에는 <기억의 밤>(2017)의 진석(강하늘)을 제어하던 비밀스럽고도 침착한 유석의 얼굴이 되었다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정직한 후보>(2019)에서 국회의원 주상숙(라미란)의 코믹 질주를 제어해줄 충직한 보좌관 박희철로 선회할 때, 긴 시간 지치지 않고 자신만의 변주를 감행해온 김무열의 도전에 익숙해졌구나, 알게 모르게 내가 이 ‘소리 없이 미세하고도 끈기 있는’ 김무열의 변화의 증인이자 지지자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무열은 연기를 ‘지속적으로 녹슬지 않게 연마해야 하는’ 기술이라며, 자신을 ‘기술자’라 평가하는 방법론의 배우다. 그 기술에는 화려한 잽이나 강한 펀치나 앞서가는 스피드가 포함되지 않는 대신, 기능을 뽐내지 않는 베이식한 기능이 탄탄하게 포진되어 있다. 10대 멜키어를 감쪽같이 연기하던, 내가 처음 본 청년 김무열은 이제 다양한 캐릭터 경험을 축적한 40대, ‘무소불위’의 연기를 감행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나이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나이의 무게에서 아직은 자유롭게 빗겨간 말간 얼굴을 한 채로,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신의 ‘나이’를 입기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

미성년자들을 처벌 대신 소년법으로 다루는 ‘촉법소년’ 문제를 정면으로 풀어낸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심판>의 연화지방법원 소년형사합의부 판사 ‘차태주’는 아마도 지금의 김무열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자연에 가까운 얼굴일 것이다. 그는 김혜수, 이성민, 이정은의 ‘열기’ 속에서 불길을 내주는 ‘무’의 에너지원으로 ‘무열’의 에너지를 발산한다. 김무열이 자신의 내공으로 한 줄 한 줄 첨예한 이 드라마의 혈을 어떻게 풀어내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지 경험하는 순간, 김무열에 대한 평가보다는 ‘아, 우리는 참 좋은 배우를 동시대에 보유한 관객이자 시청자구나’ 우리의 행운을, 즐거움을 가늠하게 된다.

요즘은 비대면 만남이 많은데 오랜만에 직접 대면하는 시간이라 더 반갑군요.

스튜디오에 야외 테라스까지 있어서, 로케이션 나온 듯한 느낌으로 촬영했어요. 날씨가 좋아서, 우리 틴틴이도 좋아하네요(여덟 살이 된 강아지 틴틴이는 대견하게도 촬영 내내 현장에 함께했다). 한동안 바빴는데 이제 좀 괜찮아졌어요. 얼마 전에 <그리드> 공개까지 끝냈고, 다음 작품을 이제 간간이 시작하고 있어요.

지난해 9월 영화 <보이스> 개봉 후로 넷플릭스 <소년심판>에 이어서 바로 디즈니+의 <그리드>까지, 정말 코로나 기간에도 쉬지 않고 연달아 작품을 내놓았어요.

<소년심판>은 촬영 종료 후 1년이 지나 최근 오픈되었고 <그리드>는 촬영 종료 직후에 오픈되다 보니 보시는 분들에게는 연달아 작품이 나오는 셈이 됐어요. 촬영 기간에는 좀 여유가 있었어요.

장르도 성격도 달라서 ‘다채로운 김무열’을 보여주고 인지하게 해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범죄물 <보이스>에서 보이스피싱 조직의 총책 곽프로는 김무열 연기 궤적을 좇던 팬들에게는 가장 큰 폭의 변화였죠. <소년심판>에서는 넉넉한 법복의 품만큼이나 인자한 좌배석 차태주였다면 SF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인 <그리드>에서는 관리국 직원 송어진을 보면서, 김무열의 냉랭함을 경험 중이에요. 딱 맞는 수트에 안경도 변화에 한몫했고요.

연달아 작품을 오픈하는데 캐릭터에 차이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일부러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 찾은 건 아닌데 무의식적으로 잘 찾아간 거 같아요. 작품 자체에 대한 흥미가 컸죠. 이렇게 조금 다른 캐릭터를 동 시기에 보여드릴 기회가 주어져서 저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OTT 출연작에 연달은 참여도 활발한 활동으로 각인되는 것 같아요. <소년심판>은 10부작을 내리 끊지 않고 하루 만에 다 봤어요. 워낙 정주행을 부르는 드라마인 데다, 눈물까지 불러와 눈이 시뻘게져서 다음 날 고생 좀 했죠.

그런 분들이 많더라고요(웃음)

OTT의 특성상 각자 관람 시간이 다를 수 있는데, 이렇게 화제작을 한꺼번에 푸는 방식이 시청자에게는 한 편의 영화가 개봉한 듯한 화제성을 제공해준다 싶어요. <소년심판>을 비롯해 <오징어 게임> <지금 우리 학교는> 등을 통해, 시청자들이 ‘물량 공세성’ 패턴을 완벽하게 학습했어요(웃음).

확실히 신체 건강에 좋은 작품은 아니죠(웃음). 공개한 날 밤새워 본 분을 다음 날 바로 만났는데, 되게 피곤해하시더라고요. 새벽에 보고 문자 주는 지인도 많고요.

OTT로 콘텐츠가 넘치면서 몰아 보기가 생활화된 저 같은 구독자를 불면의 밤으로 인도하는 주범이네요.

많이 몰입해서 보시는구나 느껴져요. 특히 새벽에 문자는, 뭐랄까 감동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상태로 와요(웃음). 너무 잘 봐주신 품평이라,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싶고요.

이런 반응이 국내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작품을 대표하는 배우로 짜릿한 일이겠어요.

정말 그래요. 제 SNS가 원래 고요했어요. 팔로워가 1,000명 정도? 와이프나 지인들이 태그를 한두 번 하면 조금 늘어나는 정도였는데 <소년심판> 오픈하고 나니 갑자기 팔로워가 늘어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아, 이게 글로벌 OTT의 힘이구나’ 체감되더라고요(웃음). 뮤지컬 처음 시작할 때 팬분들이 호응해주시고 팬 카페가 생기던 그런 기분이 요즘 들더라고요.

작품에 대한 피드백만큼 배우를 살찌게 하는 게 없잖아요. 글로벌 관객과 평단이 호응을 보내준다는 데서 얻는 기운도 상당할 것 같아요.

맞아요. 아직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전보다 조금 책임감이 더 생겨요. 그 책임감이라는 건 배우한테 에너지원으로 돌아오고요.

줄무늬 피케 셔츠는 폴 스미스(Paul Smith), 실키한 소재로 된 바지는 김서룡(Kimseoryong), 벨티드 샌들은 프라다(Prada).

그래픽 패턴을 더한 민소매 니트 상의와 골반에 걸친 짙은 갈색 바지, 겹쳐 입은 줄무늬 쇼츠는 프라다(Prada).

<소년심판>은 기본기 충실한 드라마에 대한 호응이 커요. 해외 리뷰를 보면, 1990년대 드라마같이 탄탄하게 가는 드라마라 반갑다는 평이 많아요. 자극적 소재나 장르를 벗어난 휴머니즘을 필요로 하는 시청자가 존재한다는 걸 보여줬죠.

한국 사회, 한국 법정, 소년 이야기다 보니 공개하기 전에는 우리 문화를 이해하지 않으면 공감하기 어렵겠다는 걱정이 있었어요. 그런데 막상 반응을 보니 그 경계를 뛰어넘는 무언가 보편적인 정서가 전달된 것 같더라고요. 한국 시청자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그런 부분에 대해서 갈증이 있었구나 싶었어요. 그동안 센 장르물이 대세였으니, 다른 톤의 드라마도 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머니백>(2018)으로 만났을 때, 할리우드 휴먼 드라마 <원더> 같은 작품을 보면서 받은 감흥을 이야기했어요. “사회 약자인 아이들의 사연을 통해 우리 모습을 투영하는 작품도 하고 싶은데, <기억의 밤> 같은 스릴러 작품 후라 센 역할만 들어온다”고 했어요. 돌아 돌아서 <소년심판> 같은 작품을 만난 게 아닐까요.

배우이다 보니 감명 깊게 본 작품이 있으면 그런 연기를 해보고 싶은 갈증이 생기더라고요. <소년심판>을 하게 된 계기를 돌아보면, 제가 시사에 관심이 많은 편이에요. 시사 프로그램이나 뉴스를 항상 봐요. OTT 구독에 ‘김무열의 취향’란은 다 다큐멘터리 위주일 거예요. 특히 제가 하는 작품에 레퍼런스가 될 만한 다큐멘터리를 엄청 챙겨서 봐요. <소년심판>은 소년 법정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데 흥미가 가더라고요. 또 판사라는 역할에도 매력을 느꼈어요. 정극 연기를 보여드릴 기회가 되겠다는 것도 끌렸어요. 뭣보다 함께하는 선배님들이 정말 작업해보고 싶은 배우였다는 점이 제일 크게 작용했어요. 지금 돌아보면, 내가 더 많이 쏟아붓지 못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소중한 경험이 된 작품이에요.

김혜수(심은석), 이성민(강원중), 이정은(나근희) 세 배우의 아우라와 캐릭터 특징이 ‘분출’하는 에너지였다면, 김무열의 차태주는 오히려 안으로 에너지를 ‘축적’하는 캐릭터예요. 극 전체에 감도는 에너지를 완화해줄 일종의 완충작용이랄까. 결과적으로 균형 있게 그려졌지만, 톤이 워낙 달라서 배우로서 이 에너지의 ‘갭’을 설득력 있게 그리기 위해 고심이 컸을 것 같아요.

촬영 전에 스터디하듯, 신 바이 신으로 준비를 철저히 했어요. 그런데도 리딩만으로는 실전에서 어떻게 보일지 가늠이 안 되는 게 사실이에요. 이 부분을 보완하려고 실제 판사님도 만나고, 재판 참관도 했어요. 그렇게 열심히 구하다 보니, 제가 모델로 삼을 만한 판사님을 찾게 되었고요. 차태주의 외형적인 부분, 갖고 가야 할 포인트가 될 만한 것들을 그분을 통해서 힌트를 많이 얻었어요.

차태주가 법정에 선 소년들에게 ‘헌신’하는 태도는 상당히 극화된 게 아닐까 싶었는데, 정말 그런 성정의 판사가 존재한다는 게 흥미롭네요.

실명은 밝히기 꺼리시는데 정말 계셨어요. 사실 소년 재판을 진행하는 판사님들은 심은석, 강원중, 나근희, 차태주까지 이 모든 판사의 모습을 조금씩 다 갖고 계시거든요. 각자의 신념에 따른 스타일을 갖고 있죠. ‘호통판사’로 잘 알려진 ‘천종호 판사님’ 같은 분도 있으시고요(웃음). 저희는 그 지점 중 어느 하나를 극대화해 캐릭터로 만들어나간 거죠. 제가 만난 그분은 정말 차태주처럼, 법정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를 찾은 것처럼 의지하게 되는 심성을 가진 분이었어요.

그간 인터뷰를 통해 만난 김무열이라는 배우의 화면 바깥 모습, 주변에서 귀동냥한 성격을 조합해보면, 차태주는 자연인 김무열의 성정에 가깝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간 거친 캐릭터 중 가장 본인과 싱크로율이 높지 않을까요.

제가 가진 요소가 조금 섞여 있긴 하죠. 평소 모습에서 출발한 부분이 있어요. 목표는 ‘조용조용하면서도 신념이 강한 판사를 만들어보자’였어요. 다른 캐릭터들과 차태주 간의 톤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지는 숙제였어요. 2화까지 촬영하고 미리 시사를 하는데, ‘내가 이 톤을 고수하는 게 맞나, 에너지를 좀 올려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더라고요. 그 고민이 들 때 이성민 선배가 명확하게 이야기해주셨어요. “김무열의 연기가 극의 중심, 캐릭터 간의 중심을 잡아주고 있으니 의심하지 말고, 끝까지 밀고 나갔으면 좋겠다”고요. 그때부터 확신을 갖고 할 수 있었어요.

보편적인 직업을 연기하는 것에서는 전형성도 어느 정도 확보해야 했어요. 말하자면, 연기를 두고 ‘옷을 입는다’는 말을 쓰는데, ‘판사라는 직업을 입는다’는 건 어떤 도전이었나요.

이성민 선배님이 옷을 입자마자 “야, 가문의 영광 아니냐?” 이러시더라고요. 판사복을 입고 나오니까 괜히 스태프 태도도 좀 달라지는 게 느껴졌어요(웃음). 판사님이 그러시는데, 한국에 판사복을 만드는 옷 가게가 한 곳인데, 거기가 원래 사제복을 만드는 집이래요. 그게 저한테 꽤 인상 깊게, 무게감으로 박혀 있었던 것 같아요. 특히 재판을 참관하면서 이 옷이 주는 무게감이 어떤 건지 학습해놓은 상태여서 더 강력하게 다가왔어요. 실제로 참관하지 않았다면 사실 이만큼 느껴보지 못했을 것 같아요. 누군가가 한 사람의 죄의 유무를 판단한다는 것이, 판결을 내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책임이 따르는지 강력하게 느끼지 못했을 거예요.

특히 그 처벌 대상이 ‘미성년자’라는 부분에서 이 드라마가 가져가야 할 톤, 방향성을 고심했을 것 같아요. 죄의 유무와 상관없이 아이들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차태주는 딜레마가 큰 캐릭터기도 했죠.

소년 법정을 이렇게들 말해요. ‘가장 눈물이 많은 법정’이라고. 소년들의 부모님은 법정에 들어오시면 시작과 동시에 계속 울고만 계세요. 이렇게 우시는 분들이 대부분 피해 소년의 부모가 아니라 가해자의 부모예요. 우리가 자칫 이 과정에서 범죄라는 행위를 조금이라도 미화하는 뉘앙스로 보이면 반감을 살 거라 생각했어요. 그럼에도 이게 성인 재판이 아니라 소년 재판이라는 점, 어쨌든 이들이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아이들이라는 점. 그런 존재를 법정에 세워 그들의 죄의 유무를 판단해야 한다는 강한 딜레마가 있었어요. 허투루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없었어요.

플랫폼의 변화가 확연하게 느껴지는 시기예요. 배우로서도 단순히 연기 스타일이나 장르 도전뿐 아니라, 바뀐 구조에도 적응해야 하는 숙제가 있어요. 전통적인 부분과 새로운 플랫폼 모두를 경험하는 세대죠.

일이 많아졌어요. 콘텐츠가 많이 제작되는 게 반가운 한편, 어느 때보다 고민도 많아졌어요. 양적 확장 속에서 우리는 또 어떻게 하면 강력하게 몰입할 만한 콘텐츠를 만들까, 휘뚜루 만들지 않기 위해서 고민하는 거죠. 지금 보면 평소의 다양한 경험이 이렇게 다양한 역할을 할 때 다 재산인 것 같아요.

한편 평소 생활도 간간이 노출해요. 서울에서 동떨어진 제2의 고향 양양에서의 생활은 ‘소박하면서 풍족한 김무열의 재산’ 역할을 해주는 것 같아요.

양양은 일 없으면 가서 쉬고 노는 힐링 공간이에요. 지금처럼 사람이 많기 훨씬 전부터 맘에 들어 자주 갔거든요. 그때는 넓은 바다를 전세 내서 혼자 서핑하고 그러면서, 그 공간이 무언가를 풀어주는 역할을 하는 장소가 됐어요. 그런 여유 공간이 일할 때도 생겼어요. 예전에는 연기를 어떻게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어요. 특히 무대 연기를 할 때는 대본 보면 잠이 안 와서 잠을 설치고, 대본을 한시도 손에서 놓지 않고 떠오르는 거 다 적어놓고 일지 쓰고 그랬어요. 많이 시달리면서 살았죠. 그렇게 열중하는 시간이 필요한 건 맞는데, 그것만 고수해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을 얻었어요. 밸런스가 필요한 것 같더라고요. 특히 이 일은 매번 트라우마와 맞닥뜨려야 하는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예민함을 증폭시키고 폭발시키기를 반복하는, 일종의 시한폭탄을 쥐고 사는 일인데, 항상 그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어느 순간부터는 일이 없어도 충분히 그 시간을 살아나가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죠.

혼자라면 공유하지 않을 라이프스타일을 아내 윤승아의 유튜브 ‘승아로운’ 채널을 통해서 접하게 돼요. 조금 쑥스럽거나 어색한 모습이 스타일이자 재미로 보여요. 간질간질 보게 만드는 매력이 있어요.

개인의 삶을 공유하는 게 자연스러운 시대잖아요. 너무 방어적이지 않으려고 해요. 물론 저도 음식 먹기 전에 찍는 사진에 염증을 느끼던 시절이 있거든요(웃음). 그런데 어느 순간, 누군가를 의식하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니 편해지더라고요. 그렇게 오픈 마인드가 되는 데 도움을 준 게 결혼이었어요. 결혼하고 함께 생활하면서 스스로 더 유연해졌어요.

그런 유연함을 바탕으로 장르적 측면에서도 어디로 튈지 모를 방향을 보여주고 있어요. 곧 <정직한 후보 2>에서는 전편에 이어 휴먼 코믹 장르로 돌아와요.

좀 자학적으로 본다면, 이렇다 할 대표작이 없기 때문에 강력한 인상을 아직 주지 못했다는 것도 있는 것 같아요(웃음).

잘 포장해서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로 표현해볼게요(웃음).

아직 다 보여드린 게 아닌데,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하든 잘 보여드릴 자신이 점점 생겨요. 자만이 아니라 도전하고 싶은 욕구가 더 커져요. 일을 하는 햇수가 많아지다 보니까 계속 해나갈 수 있는 힘을 축적해나가는 방법을 익혔어요. 매번 다른 캐릭터를 만나는 게 정말 저한테는 큰 힘이 돼요.

‘해외 진출’이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전 세계에서 한국 콘텐츠에 관심을 갖고 소비하는 요즘, 플레이어로서 역할이 필요한 시기이기도 하죠.

글로벌하게 네트워킹된 상태다 보니 저를 보여줄 기회도 많아진 게 사실이에요.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이미 경력이 많은 나를 어떻게 새롭게 어필할까 고민도 크죠. 뒤처지지 말자는 생각에 젊은 친구들을 끊임없이 보고 배우는 거죠. 전 스스로 일종의 ‘기술자’라고 생각하거든요. 계속 기술을 갈고닦아서, 제 기술이 필요한 역할을 만나면 잘 쓰고, 그렇게 계속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직은 후배 배우들을 향한 ‘젊은 친구들’이라는 지칭이 어색한데요.

이제는 현장에서 ‘선배님’ 이야기를 듣는 게 익숙해지기 시작했어요. 얼마 전에 친구가 “1982년생인데 좀 어려 보인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외형적인 부분에서 역할을 맡는 데 한계가 보인다는 말이기도 한데 예전 같으면 그 얘기가 오래 남아 고민거리가 됐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마음이 안 들어요. 이 모습으로 보여줄 수 있는 걸 더 해보자 싶어요. 정말 달라진 것 같아요. 조급해하지 않고, 지금 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VK)

니트 상의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안에 겹쳐 입은 셔츠는 아르켓(Arket), 줄무늬 쇼츠는 로로 피아나(Loro Pia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