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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누군가에게 가족은 감옥이다

2022.11.11

by 민용준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누군가에게 가족은 감옥이다

    관계의 관성으로부터 탈출하고 해방되는 두 여자의 삶. 분명 올해의 영화.

    화장실 세면대에서 속옷을 빠는 여자가 있다. 알고 보니 화장실에 혼자 있는 게 아니다. 세면대 옆 양변기에 앉아 볼일을 보는 다른 여자가 또 있다. 빨래를 하던 여자는 좀처럼 고개를 돌리지 않지만 마주한 거울로 동태를 살피는 것을 보니 그 여자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그 와중에 변기에 앉아 있던 여자는 자신이 입고 있던 속옷을 벗어 세면대로 던져 넣고, 빨래를 하던 여자의 손이 잠깐 멈칫한다.

    잠시 후 속옷을 벗은 여자는 빨래를 하던 여자를 툭툭 치며 무언가를 요구한다. 그러자 빨래를 하던 여자는 세면대에 잠겨 있던 속옷 하나를 짜서 건넨다. 젖은 속옷을 툭툭 털어 입은 여자는 황급하게 뛰어나가고 그 광경을 물끄러미 보던 여자는 자신의 속옷을 벗어 세면대에 넣고 마저 빨기 시작한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라는 제목에서 지칭하는 두 여자는 엄마와 딸이다. 하지만 우리가 당연하다고 기대하는 모녀 사이와는 거리가 먼 관계처럼 보인다. 엄마 수경(양말복)은 애인으로 보이는 남자 종열(양흥주)에게는 극진하지만 딸 이정(임지호)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어 보인다. 무심한 수준이 아니다.

    생리통으로 고생하는 이정은 수경에게 약을 사다달라 문자를 보냈지만 수경은 애초에 문자를 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미안함을 표하는 대신 가시 돋친 말을 뱉는다. “넌 왜 내 안 좋은 것만 다 가져갔냐?” 그렇게 거실에 불도 꺼버린 뒤 어둠 속에 남겨진 딸을 두고 방으로 들어간다. 일말의 연민도 없다.

    많은 이들이 당연하다 여기는 혈연관계에 대한 고정관념은 영화가 시작된 지 10분 만에 완전히 박살 날 것이다. 유대감은커녕 서로 마주하는 것 자체가 고역이고 고통인 모녀 관계가 140분 동안 파국의 형세를 거듭 갱신한다. 심지어 딸이 그렇게도 보기 싫었던 것인지 운전대를 잡고 있던 엄마가 차 앞으로 걸어가는 딸을 향해 돌진하고 쳐버릴 정도다.

    그렇게 모녀 관계는 합의서를 작성해야 하는 가해자와 피해자 관계로 전환된다. 심지어 자동차 급발진 오작동을 주장하는 수경이 자동차 회사와 소송을 벌이자 이정은 자동차 회사를 위해 엄마의 거짓 혐의를 인정하기 유리한 증언을 한다. 두 사람에게 서로는 지옥이다. 그래서 면전에 있다면 둘 중 하나다. 보이지 않는 투명 인간 취급을 하던지, 악다구니를 쓰고 손찌검을 하는 엄마와 그걸 막는 딸이 되던지, 정말이지 남만 못하다.

    “가장 모순을 품고 있는 관계의 끝단은 가족이고, 특히 모녀 관계가 아닐까 생각했다.” 김세인 감독의 말처럼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엄마와 딸의 관계를 그리는 작품이자 수경과 이정이라는 두 여자의 관계를 그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딸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넬 생각을 해본 적도 없어 보이는 수경은 그야말로 야박한 엄마다.

    애인에게 쏟는 정성 절반만 나눠도 좋을 것 같은데 애초에 그럴 생각 자체가 전무해 보인다. 딸에 대한 애정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딸만 만나면 급격하게 불행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불행의 원흉을 내몰고 싶은 것처럼 악다구니를 쓴다. 그런 수경으로부터 이정은 달아나고 싶다. 하지만 독립하기에는 여건이 녹록지 않다.

    어쩌면 딸을 학대하는 엄마 이야기처럼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수경을 그저 나쁜 엄마로 보는 것 같진 않다. 오히려 자기 욕망에 너무 솔직해서 엄마가 되는 법을 잘 모르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에서 수경은 애인과 있을 때와 자신의 딸과 있을 때 표정이 완전히 다르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가 수경의 그런 대조적인 표정을 거듭 보여주는 건 그 인물의 이중성을 지적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종열과 이정 사이에서 수경의 표정은 곧잘 다른 사람이 된다. 마치 멀티버스로 분리된 두 인생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온전히 다른 채널의 삶을 오가는 것처럼 보인다. 수경은 그저 사랑받고 싶은 여자일 뿐, 사랑할 줄 아는 엄마가 될 생각도 없고, 그럴 다짐을 해본 적도 없는 것만 같다. 그러니까 이정은 엄마를 잘못 만났다. 그리고 수경도 딸을 괜히 낳았다. 참 불쌍한 모녀 관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줄 모르는 엄마와 사랑받지 못한 딸은 서로 속 깊은 대화 같은 것을 나누진 못해도 같은 속옷을 입고 산다. 역설적이지만 서로 싫어하는 이들에게 서로 닮은 구석이 있다는 것을 체감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자신과 딸이 닮았다는 말을 듣고 정색하는 수경과 엄마가 정신병자라 그 아래서 자란 자신도 정신병자라고 울부짖는 이정은 결코 연대할 수 없지만 뭔가를 분명 공유하는 사이다. 그리고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가 그리는 모녀 관계 사이에 부재한 부성은 단 한 차례로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엄마도, 딸도 그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다. 수경은 소위 말하는 모성애라는 것이 결여된 사람 같지만 경제적으로 무능한 엄마처럼 보이진 않는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가 부성의 부재를 의식하지 않으면서 서로 극렬하게 반목하는 모녀 관계를 그리는 건 다분히 고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수경은 그저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여자다. 이정은 엄마가 싫기도 하지만 엄마에게 사랑받길 바라는 딸이다. 모녀는 공통적으로 서로를 의식한다. 이는 두 사람이 가부장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곧잘 믿곤 하는 남성성에 대한 관념에 갇히지 않은 엄마이자 딸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수경이 애인과 결혼하길 바라는 건 온전히 자신을 위해서이지 딸을 위한 가정환경을 마련하고 싶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딸에게서 해방될 수 있는 온전한 기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경에게 20대 후반의 나이에 다다른 이정은 이미 독립했어야 마땅한 딸이다. 하지만 수경의 발목을 잡는 건 자신의 딸을 아끼지 않듯, 남의 딸도 아낄 줄 모르는 자신의 마음이다. 기껏 자신의 딸에게서 탈출하고자 했건만 남의 딸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 기가 막힌다.

    그러니까 이것은 불경한 엄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일그러진 모성을 폭로하겠다는 야심의 발로가 아니다. 엄마가 돼선 안 될 여자가 어쩌다 엄마라는 운명에 휘말린 탓에 벌어지는 모녀간의 비극이다. 딸도 비극이지만 엄마도 비극이다. 물론 수경의 입장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어렵다. 수경은 엄마로서가 아니라 개인으로서도 이기적인 여자다.

    다만 그런 이기심이 수경의 삶을 놓고 봤을 때 그저 나쁜 것이라 매도할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그런 수경의 입장을 찬찬히 살피게 만들고 모성이라는 신화화된 감정을 희석시켜 그저 어느 한 여성이 봉착한 삶이 누군가의 삶에 전이하는 악영향을 관찰하게 만든다. 그로부터 새어 나온 어떤 물음을 골똘히 응시하길 권한다.

    수경도, 이 정도 서로에게 해방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서 서로에게 지옥이 된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그들의 지옥에 일말의 출구도 열어주지 않는다. 서로 감정적으로 적절한 타협점을 마련하는 화해의 클라이맥스 같은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심지어 더 가혹하게 인물을 몰아세운다. 자신밖에 모르는 엄마에게 질린 이정은 끝내 짐을 싸서 집을 나온다. 그나마 기댈 수 있는 상대가 생겼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인은 매정한 엄마와 또 다르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엄마에게 사랑받기를 그저 갈구했지만 실패했음에도 엄마 곁에 자리하는 건 가능했지만 자신을 이해해준다고 믿었던 타인은 다가갈수록 이해할 수 없게 냉랭하고 자신을 밀어내는 것만 같다. 수경 역시 마찬가지다. 애인의 사랑을 얻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의 딸은 자신의 딸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렇게 타인과의 관계 맺기에 각자 실패한 수경과 이정은 다시 한집에서 상봉한다.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의 관계에 없던 온기가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한데 머물 뿐이다. 그렇게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불가피한 반목과 무심하고 불안한 동거의 밤을 전전하던 이정은 비로소 깨닫는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제목처럼 범상치 않은 모녀 관계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모녀 관계 그 자체에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가족은 서로에게 어디까지 내주어야 하는 걸까. 우리는 가족 이전에 서로에게 타인이고 개인이다. 그래서 서로의 역할을 당연하게 생각하면 갈등이 빚어지는 것 같다. 각자의 역사를 존중하고 분리하는 게 관계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김세인 감독의 말처럼, 엄마란 가족 중 유일하게 성씨가 다른 구성원이기도 하다. 다음 세대 가족 구성원을 제 몸에 잉태하고 낳았음에도 자기 성을 물려줄 권한이 없다고 여겨지는, 가족 공통의 성씨에서 분리하듯 호적에 다른 성씨로 기록되곤 하는 존재다. 그런 엄마가 당연히 자식을 품어야 한다는 건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한 일이기도 하다.

    물론 모성의 가치를 꼭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모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엄마가 아닌 것도 아니다. 다만 그 물리적 지위가 신화적 운명으로 포장되고 그 자격에 어울리는 행동을 강요당하는 처지가 되는 것도 어딘가 이상한 일일 것이다. 혈연이라는 울타리가 공통의 삶을 묶는 우연일 수는 있겠지만 각자의 삶을 제한하는 필연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가 그리는 모녀 관계의 극렬함은 모성을 강요하는 사회를 향한 강력한 질문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결코 물러섬이 없다는 점에서 놀라운 작품이기도 하다. 김세인 감독의 말에 따르면 엄마와 함께 속옷을 공유하는 사이라는 점 외에는 온전히 상상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라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모성에 대한 관념에 질문을 던지는 어떤 기존 영화와 비교해도 이보다 강력하게 자기주장을 밀고 나간 작품은 드물 것이다. 단 한 순간도 뻔한 관성에 휩쓸리지 않고 당연한 관념과 타협하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이해하기란 불가하겠지만 인정한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자신을 품지 못하는 엄마에게 안아달라고 애원하는 딸이 되는 것도 지옥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은 입장에서 매일같이 눈에 밟히는 딸에게 화가 나는 엄마가 되는 것도 지옥이다. 타인은 지옥이라고 하지만 타인만도 못한 가족은 그래서 감옥이다.

    그러니까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지긋지긋하게 맞춰지지 않는 삶으로부터 비로소 탈출하고 해방되는 어느 모녀에 관한 이야기다. 죽여버리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뱉는 엄마의 말은 딸의 마음에 거듭 생채기를 냈지만 한두 번이 아닌 그 말은 어느덧 딸의 마음을 무덤덤하게 다졌다. 그렇게 엄마도, 딸도, 공평할지 몰라도 각자 감당해온 어둠 속에서 긴 시절을 버티다가 끝내 제각각의 세계로 남거나 나아가 살아야만 한다. 비록 뛰어난 인생은 아니라 해도 사는 데까진 살아가야 하는 삶 속에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던 제 삶의 규격을 비로소 찾아가면서, 역설적이지만 그렇게 동떨어져가는 세계에서 일찍이 닮을 수밖에 없었던 어떤 운명을 떠올린다 해도.

    민용준(영화 저널리스트 &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사진
    배급사 찬란 공식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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