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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레’ 냉철한 시선, 과감한 선택, 강렬한 여운

2022.11.22

by 민용준

    ‘세이레’ 냉철한 시선, 과감한 선택, 강렬한 여운

    결코 뻔한 길로 가지 않는 장르적 성취. <세이레>라는 올해의 발견.

    밤거리를 헤매는 남자는 무언가를 찾고 있다. 냉장고를 뒤지는 여자도 무언가를 찾고 있다. 여자의 배가 불룩한 것을 보니 임신한 것 같다. 여자는 사과가 먹고 싶다. 그래서 남자는 사과를 찾아 어두운 골목을 헤맨다. 그리고 가까스로 유일하게 불을 밝힌 과일 가게를 발견한 남자는 빨갛게 익은 사과를 구해 집으로 돌아와 여자를 부른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겉으로 보기에 멀쩡한 사과를 반으로 자르고 보니 속이 시커멓다.

    그때 방에서 나온 여자는 자신이 언제 사과를 먹고 싶었냐고 묻는다. 심지어 그 여자는 사과를 먹고 싶다며 냉장고를 뒤지던 그 여자가 아니다. 의아한 표정으로 보는 남자를 향해 “꿈꿨어?”라고 묻던 여자는 반쪽으로 잘린 썩은 사과를 들어 한 입 베어 물더니 이렇게 말한다. “오빠, 이거 태몽 아냐?” 그 여자는 임신하지 않았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감각을 교란하듯 불길하게, 영화는 시작된다. 그리고 점차 불길한 징후는 불안한 정황으로 번져간다. 이상한 꿈에서 깨어난 우진(서현우)은 갓난아이를 안고 있는 아내 해미(심은우)에게 꿈 얘기를 하다 머뭇거리고 말을 돌린다. 아무래도 본인의 꿈속에 등장한 여자가 지금의 아내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어느 날 우진은 부고 문자메시지를 받고, 아이가 태어난 지 삼칠일이 지나지 않았으니 가지 말라 아내는 당부하지만, 잠자리에서 뒤척이던 우진은 일어나 양복을 차려입고 아내의 만류에도 끝내 장례식장에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뜻밖의 인물을 만난다.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기 전 7년간 교제했던 애인 세영(류아벨)의 장례식장에서 만난 건 죽은 애인과 빼닮은 쌍둥이 동생 예영(류아벨)이었다. 세영과 사귀는 동안 본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는 쌍둥이 동생의 등장은 우진의 마음에 미묘한 진동을 일으킨다.

    ‘아기가 태어나고 삼칠일. 출산 후 21일 동안 금줄을 쳐 외부인의 침입을 막아, 다른 세계로 무사히 진입할 수 있도록 금기를 지킨다.’ 얼핏 들어보면 외국어 같기도 한 <세이레>라는 제목은 도입부 자막이 설명하는 삼칠일, 즉 세 번의 7일을 보낸 21일을 의미하는 순우리말이다.

    밖으로 통하는 문 위에 고추와 숯을 매단 금줄을 달고 막 태어난 아이를 외부 세계의 부정으로부터 21일간 보호한다는 금기는 단군신화에서도 확인되는 풍습이라 할 정도로 오래된 믿음이다. 그만큼 허무맹랑하게 여기는 이도 있겠지만 그래서 무시할 수 없는 신력으로 느껴지는 이도 있을 것이다. <세이레>는 이런 믿음의 상대적 격차를 갈등 구조로 틈입하는 스산한 서스펜스를 제시하는 독특한 미스터리 영화다.

    <세이레>를 연출한 박강 감독은 자신의 사적인 경험에서 영화적 모티브를 얻었다고 말한 바 있다. 부고를 듣고 장례식장에 가게 됐는데 얼마 전 아이를 낳은 사정으로 동행할 수 없게 된 지인으로부터 상주에게 미안한 마음을 대신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상주에게 그 소식을 전하자 상주로부터 아이가 태어난 것을 축하한다고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게 됐다는 것이다.

    대부분은 사소하고 당연하게 넘길 수 있는 순간이지만 박강 감독은 그 순간 영화를 봤다. “누군가는 미안해하고, 누군가는 축하하고, 이 상황이 굉장히 영화적인 순간 같았다.” 그래서 영화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27분 분량의 단편영화는 동명의 장편영화 <세이레>로 확장되고 발전했다.

    우진의 이상한 꿈속에서 썩은 사과를 베어 문 아내 해미는 되레 태몽을 확인한다. 그리고 애초에 사과가 먹고 싶다던 임신한 여자는 지금의 아내가 아니라 과거의 여자 친구였던 세영이다. 그러니까 임신한 과거의 여자 친구가 먹고 싶다는 사과를 지금의 아내가 베어 물었으나 그 사과는 썩은 사과였다. 영화의 도입부에 제시되는 이 기이한 꿈은 우진의 과거와 현재 상황을 단적으로 대변하는 동시에 잠재되고 억눌린 심리를 들춰내고 추측하게 만드는 영화적 단서이기도 하다.

    갓 태어난 아이의 장래를 위해 부정한 기운을 물리쳐야 하니 금기를 지켜야 한다는 아내의 믿음에 순응하는 우진은 원래 과거의 애인이었던 세영에게는 아이를 갖고 싶지 않다고 말해온 전력이 있었다. 세영과 해미 사이에서 우진의 심경이 어떤 연유로 변화한 것인지 모르지만 그의 아이는 각기 다른 배에 두 번 잉태됐고 그중 한 아이만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이제 두 여자 가운데 한 여자는 세상에 없다.

    <세이레>는 죄책감과 두려움이라는 개별적 감정을 한데 밀착시켜 생경한 질감의 공포를 구축하는 영화다. 관객의 관점과 감상을 온전히 우진의 시점과 심리에 가둠으로써 해당 인물이 겪는 혼동과 혼란이 고스란히 객석으로 전이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시각 효과나 편집술을 동원하는 대신 우진의 기이한 꿈과 함께 시작된 불길한 예감은 파편적으로 재현되는 과거의 진실과 맞붙어 불온한 상상을 자극하는 양상으로 번져나간다.

    거세게 밀어붙이는 경향은 없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 팽팽한 끈을 놓지 않고 서늘하고 음습하게 극의 온습도를 적정하게 유지하는 듯한 일관된 연출로 좀처럼 평정심을 잃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그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어 시종일관 사실적인 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감각을 꾸준히 주입한다. 덕분에 비현실적인 영화적 설정이 하나같이 생생한 감각으로 전이되는 효과를 누리는 데 대체로 성공한 인상이다.

    무엇보다 <세이레>가 흥미로운 건 일상에 깃든 토속적인 미신을 소재로 취한 오컬트 영화의 전형을 따라갈 뿐, 장르적 기시감에 발을 들이지 않는 독특한 영화라는 사실이다. 아이에게 해가 될 불경함을 일찍이 물리치고 싶은 해미의 계획은 우진의 마음속에 자리한 과거의 애인을 향한 모종의 감정으로 인해 무마된다. 금기가 깨진다. 그 후로 의심과 강박의 민낯이 드러난다. 우진이 장례식장에서 돌아온 후로 아이가 아프자 해미는 금기를 깬 우진의 부정을 탓한다.

    그 앞에서 우진은 반박하지 못한다. 과거에 묻어둔 우진의 죄책감은 다시 자라나기 시작했다. 과거의 애인을 향한 죄책감과 그녀를 떠올리게 만드는 쌍둥이 동생에 대한 의구심과 지금의 아내에게 드러낼 수 없는 비밀이 된 그 모든 사실과 마음은 금기를 깬 우진이 감당해야 하는 현실과 뒤엉켜 더 깊은 착란과 착시로 그를 옭아맨다. 인물의 심리와 깊이 밀착하는 영화적 연출은 현재와 과거와 현실과 꿈 사이에서 예측할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는 인물의 상황에 보다 몰입하게 만드는 최상의 선택처럼 보인다.

    이처럼 장르적으로 새로운 입지를 다진 사례처럼 보이는 <세이레>는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몇 가지 상징과 은유를 통해 은근한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이기도 하다. 썩은 사과를 대면하는 우진의 시점은 더 이상 돌아보지 않던 과거의 과오를 대면하게 된 인물의 심리를 대변하는 동시에 일찍이 성경을 통해 얻은 사과의 상징성을 연상시키는 측면도 있고, ‘썩은 사과’라는 언어 자체의 중의적 인용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세이레>는 인과응보라는 단순 명확한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대상이 되는 인물을 악인으로 몰아가며 단죄하려는 심리와는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인다. 타인의 삶에 깃든 기이한 아이러니를 깊이 응시하고 잘못의 유무를 판단할 뿐 심판을 웅변하는 교훈극의 성격으로 나아가길 지양하는 작품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과오를 수습하지 못한 인물이 처한 심경의 지옥을 쉽게 거두지 않고 열어둔다. 가혹하진 않지만 결코 만만하지도 않다.

    이유 있는 악몽으로 환기된 과거는 현재와 맞물려 나선처럼 꼬이며 우진의 현실을 뒤틀어버린다. 불길한 예감은 불온한 상상을 자극하고 불미스러운 선택을 종용하며 불행한 감각을 자극한다. 애초에 넘어서는 안 되는 금기 이전에 선을 넘어버린 이가 돌아본 인과는 좀처럼 수습할 수 없는 선상의 응보로 떠밀려간 지 오래다. 먹을 때를 놓쳐 썩어버렸지만 겉으로는 탐스러운 사과처럼 안에서 무너진 마음은 끝내 바깥의 허물로 드러나 삶을 미끄러뜨린다.

    간과하고 넘어가 잠시 안도하고 잊었던 누군가와 달리 끝내 지워지지 않은 마음을 돌보지 못하고 내려앉은 누군가의 삶 사이에서 자라난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하면 이미 늦었다. 누군가는 사소하게 지나치고 잊었지만 누군가는 밟히고 지나간 자의 발자국을 담고 살아가는 법이다. 냉철한 시선과 과감한 선택이 돋보이는 <세이레>는 그 모든 인과의 기억을 가리키는 손가락 같다. 그 끝에 걸린 여운이 강렬하다.

    민용준(영화 저널리스트 &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사진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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