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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셰린의 밴시’ 모두 다 운명 속에서 슬픈 사람들

2023.03.22

by 민용준

    ‘이니셰린의 밴시’ 모두 다 운명 속에서 슬픈 사람들

    헤어질 결심을 하는 이도, 헤어지는 대상도 쓸쓸하고 아린 세계, <이니셰린의 밴시>에 관하여.

    <킬러들의 도시> <세븐 싸이코패스> <쓰리 빌보드>까지, 마틴 맥도나는 세 편의 영화를 연출하며 명망 있는 희곡작가에서 세계적인 영화감독으로 보폭을 넓히는 데 성공했다. 파도처럼 난데없이 삶을 덮쳐버린 재앙 같은 상황을 두고 서로 극렬하게 반목하는 이들의 갈등은 하나같이 드라마틱하다. 지극히 개인적이며 미시적인 사연임에도 자기 의지와 무관한 소용돌이에 휘말려버린 인물들이 극단적으로 치닫고, 예측할 수 없는 수순으로 뒤엉켜 나아간다.

    그리고 그 끝에서 더 이상 예전 같을 수 없는 여생이 그들에게 남겨진다. 마틴 맥도나의 영화는 그렇게 세상의 중력과 관계의 인력을 통해 변화하고 탈피하는 캐릭터의 세계를 거듭 들여다보고 도열한다. 벨기에 브루게, 미국 미주리 등, 낯선 지명을 무대 삼아 척박한 운명을 굴려나간다. 그리고 아일랜드 애런 제도를 배경에 둔 <이니셰린의 밴시>는 처음으로 자신의 고국에서 장편영화를 찍을 기회를 얻은 마틴 맥도나의 최근작이다.

    애초에 삶은 운명적이다. 적어도 시작은 그렇다. 태어난다는 건 실상 당사자의 의지와 무관한 사건이다. 그 누구도 자기 인생의 시작점을 결정할 수 없다. 그저 태어나버렸을 뿐이다. 그 누구도 자신이 선택한 바 없는 세상에서 삶을 시작한다. 모두의 삶은 그래서 공평하고, 각자의 삶은 그래서 불공평하다. 태어난다는 순리는 공평하지만 태어난 이후로 마주하는 현실은 결코 공평하지 않다. 누군가는 일찍부터 누리듯 살아가지만 누군가는 일찍부터 견디듯 살아야 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다분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팔자도 있고, 비좁은 확률을 뚫어내야 하는 팔자도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타고난 운명을 극복한 귀감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타고난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섬처럼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그것이 애초에 감당하고 있는 일인지도 모른 채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그런 운명에 속박된 삶을 인식하는 자와 그저 당연한 삶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자 사이에 벌어지는 기이한 파국의 영화다.

    아일랜드 이니셰린 섬마을에서 살아가는 파우릭(콜린 파렐)은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오후 2시가 되면 콜름(브렌단 글리슨)과 함께 펍에서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떤다. 그날도 자연스럽게 그럴 예정이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집을 찾아가 노크를 해도, 창밖에서 말을 걸어도, 콜름은 대답이 없다. 심상치 않다. 파우릭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다.

    오후 2시면 늘 친구와 함께 펍에 가는 것이 일상인 파우릭이 집으로 오자 동생 시오반(케리 콘돈)은 묻는다. “둘이 싸웠어?” 오후 2시면 늘 친구와 함께 펍을 찾는 파우릭이 혼자인 것을 본 펍의 사장 디바인(팻 쇼트)도 묻는다. “둘이 싸웠어?” 두 사람이 함께하지 않는 오후 2시가 찾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은 이상한 낌새를 느낀다. 파우릭도 그렇다. 자신은 친구와 싸운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친구는 그런 것처럼 군다. 뭔가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는지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기이할 정도로 일방적인 절교로 시작되는 영화다. 시작부터 밑도 끝도 없이 그렇다. 변화의 근거를 짐작할 수 있는 전후 사정은 전혀 드러나지 않은 채 그리 돼버린 상황부터 관객 앞에 떡하니 드러난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기상 상태를 예보하듯, 콜름은 파우릭에게 절교를 선언한다. 하지만 인간관계란 날씨처럼 결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기에 파우릭은 묻고 싶다.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을 잘못했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길 바라는지 콜름에게 묻는다.

    알고 보니 나름대로 이유는 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고 나니 파우릭은 더욱 이해할 수가 없다. 허탈하고 허망하다. 콜름은 파우릭이 그냥 싫어졌다고 한다. 자신에게 말실수한 것도, 잘못한 것도 없지만 그냥 그렇게 됐다고 한다. 어제까지 자신을 좋아했다고 믿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돌변해버린 상황을 파우릭은 좀처럼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알고 보니 애초에 좋아한 적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점점 화가 나기 시작한다. 콜름에게 화가 난 것인지, 구차하게 묻는 자신의 입장에 화가 난 것인지 모르겠지만 서운함이 점점 분노로 끓어가는 것 같다.

    싫어졌지만 미워하는 건 아니다. 흡사 음주는 했지만 음주 운전은 아니라는 궤변처럼 들리지만 콜름의 말은 진심이다. 파우릭이 너무 미워서 상종하고 싶지 않다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돌아선 게 아니라 애초에 진심으로 마주한 적도 없었음을 뒤늦게 고백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런 척도 하기 싫다는 의미다. 무의미한 수다를 떨며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아까운 콜름은 더 이상 파우릭에게 곁을 내주지 않을 참이다. 한심하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들어주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바이올린 선율과 함께 아름다운 곡조를 떠올리고, 작곡을 하고, 사색하며 여생을 살아갈 계획이다.

    물론 매몰차게 밀어내는 게 마냥 편한 건 아니다. 자신을 좋아한다고 믿는 파우릭을 갈 곳 없는 사람처럼 만든 건 미안하다. 하지만 파우릭에게 절교를 선언하고 나니 비로소 편안한 마음도 든다. 이건 단순한 변절이 아니다. 단호한 계획이다. 오빠를 지루하다고 말하는 콜름에게 시오반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데 대체 무엇이 변했냐고 묻는다. 콜름의 답은 이렇다. “내가 변했어.” 파우릭과 함께 맥주를 마시며 그의 말을 들어주던 어제의 콜름은 이제 없다.

    사실 파우릭과 콜름은 누가 봐도 ‘엄청 안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파우릭만 몰랐을 뿐,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사람들에게 콜름은 ‘지적인 사람’이었고, 파우릭은 ‘성격 좋은 사람’이었다. 파우릭은 콜름에게 가능한 지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사람이라는 걸 다들 알고 있었다. 콜름의 절교로 인해 비로소 파우릭도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게 된다. 하지만 콜름은 그 전부터 알고 있었다. 적어도 파우릭과 음악에 대한 대화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파우릭은 다정한 사람이고, 그런 성품을 딱히 밀어낼 필요가 없으니 감내하며 시간을 공유해왔을 것이다. 그런 콜름을 파우릭 역시 다정하게 느끼고 가까이 지낼 수 있는 친구라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은 지나갔다. 감내하는 시간이란 감내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때 끝나는 법이다. 콜름에게는 더 이상 파우릭과 보낼 시간이 필요 없다. 하지만 늘 콜름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당연했던 파우릭은 갑자기 자신에게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 콜름을 있는 그대로 볼 재간이 없다.

    콜름과 파우릭이 언제부터 시간을 공유해온 사이인지, 어떤 계기로 친해진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 어울리게 된 건 이니셰린에서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니셰린은 조용한 섬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심심한 섬이다. 그 조용하고 심심한 섬 안에서도 그나마 분주하고 번화한 상점가에서도 거리를 둔 인적 드문 마을에서 살아가는 콜름과 파우릭이 친해질 수 있었던 비결은 그들이 그런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거기서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이니셰린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을 어울리도록 만드는 중매의 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너무 다른 사람이다. 파우릭은 이니셰린과 자연에 가까운 사람이다. 당나귀와 조랑말과 소를 키우고, 젖을 짜서 우유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심심하면 펍에 간다. 오후 2시에는 콜름을 만나 수다를 떤다. 좀처럼 변화 없는 그 삶에 특별한 이견이 없다. 하지만 콜름은 이니셰린에서의 삶에 의문을 갖는다. 그래서 늘 먼바다를 바라본다. 자신을 얽매는 땅의 중력 너머로 시선이 향한다. 파우릭에게는 이를 이해할 겨를이 전혀 없다.

    갑작스러운 절교 선언으로 침울한 오빠를 다독이는 시오반은 콜름에게 따져 묻는다. 오빠는 헤아리지 못하는 콜름의 마음을 시오반은 끝내 조금 이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시오반과 파우릭은 남매로 태어나 함께 살아가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다. 매일같이 책을 끼고 사는 시오반은 콜름만큼, 어쩌면 콜름보다 더 지적인 사람이다. 모차르트가 17세기 사람이라고 말하는 콜름에게 모차르트는 18세기 사람이라고 지적할 수 있는, 이니셰린에서 보기 드물게 똑똑한 사람이다. 그래서 시오반도 이니셰린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점 물음표로 다가온다. 외로움을 느낀 적 없냐는 시오반의 질문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파우릭은 시오반에게도 지루한 사람이다.

    하지만 남매이기에, 시오반은 파우릭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두둔하고 격려한다. 실상 시오반을 지루하고 외롭게 만드는 것도 파우릭이 아니다. 바로 이니셰린이다. 시오반의 똑똑함은 이니셰린에서 쓸모없는 재능이다. 그래서 시오반은 기로에 서 있다. 드디어 이니셰린을 떠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하지만 착한 오빠를 두고 떠나는 건 슬픈 일이다. 하지만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결정을 본의 아니게 돕는 건 파우릭이 아니라 콜름이다. ‘막연히 죽기만 기다리면서 혼자 만족하는 삶에 대한 걱정’을 느낀다는 콜름의 말은 시오반의 마음을 출렁이게 만든다. 막았던 물길을 열도록 이끈다.

    모두 다 운명에 예속된 사람들이다. 달라도 너무 다른 콜름과 파우릭이 친구로 엮인 건 이니셰린이라는 한정된 영토에 예속된 운명이기 때문이다. 시오반 역시 파우릭과 혈연으로 묶여 이니셰린에서 벗어날 여력이 없는 존재처럼 보인다. 파우릭만 유일하게 이니셰린에서 살아가는 삶에 하등의 불만이 없다. 그에게는 귀여운 당나귀가 있고, 자신을 아끼는 여동생이 있고, 오후 2시면 함께 맥주를 축이며 수다를 떨 수 있는 친근한 벗이 있다. 있었다. 그리고 이젠 없다. 결국 모두 다 파우릭의 곁에서 멀어지고, 사라진다.

    비로소 파우릭의 마음이 요동친다. 물론 파우릭에게는 죄가 없다. 그는 그저 자신이 익숙한 세계에서 마음 편히 살아왔을 뿐이다. 하지만 알고 보니 친구라 생각하던 이의 마음은 일찍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 알고 보니 여동생의 마음도 넘치기 직전이었다. 파우릭을 성격 좋은 사람이라 에둘러 말하는 모두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아둔한 사람이다. 그게 죄라면 죄였을 것이다. 지적인 친구와 똑똑한 여동생의 요동치는 마음을 모른 채 곁에 있었던 것 말이다. 파우릭은 태어나거나 속박된 영토 자체를 원죄처럼 견디는 이들 사이에서 마음 편히 살아간 것이 원죄가 돼버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 존재다.

    그러니까 <이니셰린의 밴시>는 운명에 관한 이야기다. 콜름과 파우릭은 이니셰린이라는 섬에서 만난 친구였지만 이젠 둘 중 하나가 절교를 선언했고, 나머지 하나는 그 선언에 당황하는 사이가 됐다. 여기서 곤혹스러운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거듭 마주칠 수밖에 없는 이니셰린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니셰린은 이들을 모두 한자리에 묶는 운명이다. 중력이다. 그러니까 선언하는 이의 입장은 결연해야 한다. 이별을 선언하려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의 마음보다 단단해야 한다. 확실해야 한다.

    3자 입장에서는 이게 뭐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결심한다면 어설프게 결심해서는 안 될 일이다. 결국 섬을 떠나지 못하기에 거듭 대면할 수밖에 없는 이와 서로 없는 사람처럼 지낼 수 있길 바란다고 말하는 건 결코 만만한 각오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그 단호한 결단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도 실행한다. 말을 걸면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보내겠다는 콜름의 경고는 허풍으로 날린 것이 아니다. 역시 이게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지만 타고난 운명에서 비롯된 문제를 견디기 위한 각오는 결연한 법이고, 이는 끝내 보는 이의 마음을 저릿하게 만든다.

    “그것이 사랑이든, 우정이든, 이별의 슬픔을 포착하고자 했던 것이 출발점이었다. 양쪽의 두 사람 모두 똑같이 끔찍한 입장이라는 전제에서 그 슬픔을 가능한 한 진실하게 다루는 것이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었다.” 마틴 맥도나 감독의 말처럼 <이니셰린의 밴시>에는 예사롭지 않은 상황이 있고, 그 상황은 고요하면서도 격정적인 감정을 전이할 뿐이다. 여기에는 특별한 교훈이 없다. 그저 그렇게 운명에 깊숙이 귀속된 어떤 사람의 입장을 헤아리면서 그 삶에 깃든 아이러니와 딜레마와 파토스와 서스펜스에 종종 곁들여진 유머와 함께 목도하는 것이다.

    개인의 의지만으로 극복할 수 없는 천혜의 문제를 평생을 짊어지듯 살아가야 할 이들의 삶을 연극적으로 목격하고 그 마음에 다가가는 것이다. 거기에는 특별한 메시지가 없다. 다만 상실과 통증과 연민을 감당하며 각기 분열하다 끝내 충돌하고 붕괴된 마음으로 연대하는 이야기로부터 환기되는 삶의 저력 같은 것이 전해질 뿐이다.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각별해서 더욱 각렬하게 어긋난 관계의 끝에서 콜름과 파우릭은 비로소 처연하게 마주한다. 모든 것을 잘라내고 멀리 보내고 활활 태워버렸으니 그 관계가 예전 같을 수는 없겠지만 비로소 가능한 거리가 유지된다. 그리고 그 정도 거리에서 서로 마주 보고 가능한 대화를 다시 시작한다.

    <이니셰린의 밴시>의 각본을 쓰고 연출까지 한 마틴 맥도나 감독은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지만 아일랜드 출신 부모님의 영향 아래 ‘아일랜드 사람이라는 걸 더블린에서 자란 사람보다 더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배웠다. 항상 아일랜드 음악을 듣고, 아일랜드식 축구인 게일릭 풋볼을 보며 자랐다. 어쩌면 아일랜드라는 운명 속에서 작가로 태어났을지도 모를 마틴 맥도나의 <이니셰린의 밴시>는 그가 스물네 살에 쓴 일곱 편의 희곡 중 하나를 기원에 둔 영화이기도 하다.

    그 당시 쓴 희곡 일곱 편 중 여섯 편은 아일랜드 서부 지역을 배경에 두고 있었고, 그중 세 작품은 애런 제도를 배경에 둔 것이었다. 마틴 맥도나의 경력이 궤도에 오른 뒤 이는 애런 제도 3부작이라 명명됐는데 성공적인 작품으로 평가된 <이니시만의 절름발이>나 <이니시모어의 중위>와 달리 <이니셔의 밴시(The Banshees of Inisheer)>는 공개되지도, 공연되지도 않은 희곡이었다. 단지 마틴 맥도나가 그런 희곡을 썼다는 사실과 그가 처음 쓴 그 버전이 공개될 가치가 없다고 여겨서 공연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비화로 알려졌을 뿐이다.

    그런 마틴 맥도나가 <이니셰린의 밴시>를 만들게 된 건 4~5년 전쯤 홀로 이니셔섬을 찾아갔던 경험 덕분이었다. 애런 제도를 이루는 세 개의 섬 중 하나인 이니셔섬은 너무 현대적으로 변했다는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애런 제도의 본모습일 잘 보존된 나머지 섬 이니시모어섬과 아킬섬을 배경에 둔 가상의 이름을 떠올렸고 이를 무대 삼아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 그러니까 이니셰린은 실제 지도에 없는 이름이다. 하지만 1923년 4월을 알리는 달력은 이니셰린이라는 이름이 허구의 무대를 넘어 현실의 비유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게 만드는 정보로 제시된다.

    이니셰린과 인접한 것으로 보이는 본토에서는 내전이 한창이다. 포탄이 터지고, 불기둥이 솟고, 폭발음과 총성이 바다를 건너 이니셰린으로 날아들며 사람들의 시선을 잠시나마 빼앗지만 이니셰린은 내전과는 무관한 땅처럼 평온하고 차분하다. 그런 이니셰린에서 콜름과 파우릭의 절교로부터 비롯되는 갈등과 충돌은 본토의 내전을 환기하는 은유이기도 하고, 그 내면을 이해하게 만드는 단초로서도 유효해 보인다. 절교를 선언할 이유가 있다 해도 받아들이기 힘든 마음이 어디로 흐를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지난한 갈등은 실상 사소한 마음에서 자라나고 번진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을, 한때는 친구였지만 지금은 적이 돼버린 이들의 세계가 애초에 품고 있었을 마음을 상상하게 만든다.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콜름과 파우릭만큼 중요한 캐릭터는 시오반처럼 보이는데 그녀는 유일하게 이니셰린을 떠나는 인물이기도 하다. 자신의 능력으로 비로소 운명을 등지고 가능한 삶을 개척하고 실현하는 데 성공한 시오반은 두 남자가 벌이는 내전 사이에 낀 여성이기도 했다. 시오반이 그 지긋지긋한 운명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비로소 자신의 세계로 나아가는 존재가 된다는 사실은 <이니셰린의 밴시>가 남기는 일말의 위로 같다. 반대로 뜻밖의 통증과 애수를 안기는 건 경찰인 아버지로부터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엉뚱하고 강인해 보여서 좀처럼 걱정할 구석이 없어 보이던 도미닉(배리 케오간)이다.

    콜름의 선언 이후로 외톨이가 된 파우릭은 모두가 무시하는 도미닉과 어울리며 설움을 토로하기도 하는데 그만큼 그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도미닉의 황폐한 마음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순간 영화에 잠재된 그림자가 더욱 짙게 드리우는 인상이다. 결국 떠나는 자가 있다면 남겨지는 자가 있고, 이겨내는 자가 있다면 무너지는 자도 있는 법이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그 사이에 자리한 아픔에 초점을 맞춰 응시하고 통감하길 권하는 감정의 영화다. 그저 바라보고 받아들일 뿐이다. 공포와 전쟁, 용서와 평화도 모두 다 거기서 시작되는 운명일 것이다. 어쩌면 삶이란 그렇게 운명을 응시하는 데에서 맞는 새로운 바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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