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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칭에 불만 있습니다

2023.06.05

by 이숙명

    호칭에 불만 있습니다

    TV에서, 거리에서, 식당에서, 서비스를 거래하는 곳에서조차 예사롭게 들려오곤 하는 친족 호칭에 거부감이 드는 이유.

    프랑스인과 얘기하다가 그가 고모, 삼촌의 출생 순서를 정확히 모른다는 데 놀랐다. “아빠 형제가 한 명 있는데 형인지 동생인지는 몰라”라는 식이다. 나는 그걸 어떻게 모를 수 있지, 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고, 그는 그걸 모르는 게 왜 이상하지,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몇 초 후에야 깨달았다. 프랑스에는 한국처럼 항렬과 나이를 따져가며 위계를 가르는 호칭 체계가 없다. 아버지가 형제를 형, 동생이 아니라 이름으로 부르는 것만 듣고 자랐으니 그들 간의 출생 순서가 선뜻 떠오르지 않을 수 있다. 호칭이 나이와 서열을 중시하지 않도록 의식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을 것이다. 이십진법 같은 괴상한 것을 쓰는 나라가 이런 데선 희한하게 효율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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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 프랑스인 옆에는 영어 이름 쓰는 한국 회사에 다니는 한국인이 있었다. “한국인이 왜 영어 이름을 써? 법적 효력도, 책임감도 없는 가명을 사용하는 상대와 무슨 비즈니스를 해? 회사가 왜 내 이름을 이래라저래라 해?” 등 여러 질문이 따랐고, 나는 최대한 간단하게 설명했다. “위계 서열을 강조하는 한국식 호칭 문화가 아이디어의 자유로운 흐름을 방해한다고 많은 기업이 그렇게 해. 외국에서 MBA 따고 잘 모르는 한국 기업에 낙하산으로 투입된 임원이 조직 분위기 쇄신한다고 꺼내놓는 카드가 보통 그거야. 조직 분위기가 좀 코믹한 쪽으로 쇄신되긴 하지.” 식민 시대 창씨개명도 아니고 본명을 버리라고 강제하는 것도 전체주의 아닌가 싶고, 굳이 영어 이름을 쓴다는 게 글로벌하다기보다 사대주의 같아서 외국인에게 설명하기가 창피했다. 출근하는 순간 사적 자아를 잊게 만들어주는 시술이라는 기발한 소재를 다룬 미드 <세브란스: 단절>의 K-리얼리티 예능 버전 같기도 하다. 직원들로 하여금 영어 이름을 짓게 하되 대표와 겹치지 못하게 했다는 한국 테크 기업은 또 어떤가. 조선 시대에 기휘라는 게 있었다. 임금 이름에 들어간 한자를 백성이 못 쓰게 하는. 인터넷 시대에도 인간이 이렇게 한결같은 걸 보면 마음이 놓이기도 한다. 하지만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는다. 시답잖은 고육지책이라도 써야 할 만큼 한국 호칭에 문제가 많은 건 사실이니까.

    한국 회사에서 영어 이름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진: 애플TV+의 미드 ‘세브란스: 단절’

    호칭은 한국어에서 가장 골치 아프고 비합리적이고 비윤리적이고 구시대적인 요소다. 부부가 상대 집안에 쓰는 호칭만 정리해도 이 나라에서 1등 성별이 뭐고 2등 성별이 뭔지 드러난다. 막역한 사이가 아니고야 이름만으로 호명하기를 꺼리는 문화 때문에 치르는 사회적 비용도 만만찮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호구 조사, 탐색, 협상이 필요하고, 실수했다간 누군가 기분이 상하고, 같은 호칭이라도 상대에 따라 돌아오는 반응이 다르다. 처음 회사라는 곳에 출근하던 날, 안내하는 사람이 없어 문간에서 한참 쭈뼛대던 나는 간신히 용기를 짜내 가장 가까이 앉은 사람에게 물었다. “저기요… 언니… 저는 어디로 가면 될까요?” 하필 그 ‘언니’는 작은 체구에 불같은 성질로 유명한, 한마디로 그 회사의 ‘너구리 로켓’ 같은 인물이었다. 귀엽다고 잘못 건드렸다간 아주 그냥 인생이 피곤해지는 상대 말이다. 게다가 그는 회사 영업팀이나 거래처 사람들이 룸살롱에 들락거리는 걸 자주 봐서 ‘언니’라는 호칭에 악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의 답은 0.1초 만에 내 고막을 찢고 사무실을 흔들었다. “내가 술집 여자야? 어디다 대고 언니래!” 공적 언어와 사적 언어를 구분할 것. 이게 내가 사회에서 처음 배운 교훈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여자로 살면 타인에게 이 원칙을 기대하기 어려운 순간이 많다.

    특히 비인척 관계의 중년 여성을 일컫는 호칭은 혼란스러워진 지 오래다. ‘아줌마’는 이모, 고모, 숙모, 백모 등 3촌 관계 여성을 일컫는 ‘아주머니’에서 유래했다. 그러다 ‘가정을 꾸렸을 걸로 짐작되는 연령대의 직함 없는 여성’을 친근하게 부르는 말이 되었다가, 언젠가부터 슬그머니 경멸의 어조를 띠기 시작했다. 예컨대 최근 항공기 착륙 중 승객이 비상구를 임의 개방해버린 사건이 있었다. 나는 인터넷으로 이 뉴스 1보를 접했는데, 거기 첫 번째로 달린 댓글이 ‘무식한 아줌마 어쩌고’였다. ‘아줌마’ 하면 ‘기계를 모르고 막무가내인 사람’을 떠올리던 게 ‘기계를 모르고 막무가내인 사람’ 하면 ‘아줌마’를 떠올리는 지경까지 간 것이다. 직함이 모호한 여성을 부르는 말인 만큼 ‘아줌마’에는 화이트칼라가 아닌 사람, 그리하여 스타일과 매너가 세련되지 못한 사람이라는 뉘앙스도 담겼다. 제 딴에 스타일 좋다고 자신하는 40~60대 여성 중 아줌마 소리 들어서 기분 좋을 사람은 거의 없다. 이쯤 되면 아줌마가 멸칭인 걸 인정하고 대안을 모색할 때가 되었다.

    한동안 ‘아줌마’를 대체한 게 ‘이모님’, ‘어머님’이다. 그런데 이건 이것대로 이상하다. 누가 누구의 이모님이고 어머님인가. 발화자의 이모님, 어머님은 당연히 아니다. 다른 누군가의 이모님, 어머님일 것을 상정한 표현이면 요즘 시대상과 맞지 않는다. 예컨대 예능 <워크맨> 최근 편에서 도시락 가게에 간 MC 장성규는 여성 사장과 직원에게 싹싹하게 “누님, 누님” 하면서 분위기를 북돋운다. 그러고는 결혼은 했냐, 자녀는 몇 살이냐 질문을 이어간다. 일찍 결혼해서 자녀가 40대라던 직원은 나중에 식사를 하면서 사실은 비혼이라 고백하고, 장성규가 당황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이 클립이 바이럴되면서 장성규가 무례했다, 중년 여성을 무조건 ‘어머님’이라 부르면 안 된다 등 비난을 샀는데, 사실 그는 어머님이란 표현을 쓰지 않았다. 분위기도 좋았다. 그럼에도 이 클립은 중년 여성을 기혼으로 상정하는 게 요즘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교훈을 남겼다. 2000년대 중반까지도 20~30대 여자가 마트 시식 코너를 기웃거리면 “새댁, 이거 맛 좀 봐요” 소리를 듣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혼인 연령이 늦춰지고 비혼 직장 여성이 많아지면서 언젠가부터 영업, 판촉 현장에서 ‘새댁’은 금기어가 되었다. ‘새댁’을 소멸시킨 그 세대가 중년이 되었으니 다음 변화가 일어날 차례다.

    만일 타인을 ‘이모님’, ‘어머님’이라 부르는 게 발화자의 이모님, 어머님과 동년배니까 그들과 같은 수준으로 존중한다는 의미라면 간신히 말이 되지만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일을 하거나 물품 혹은 서비스를 거래할 때, 우리는 공적 자아로서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 친족 호칭은 이런 상황에서 상대방의 공적 자아를 은연중에 폄훼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카센터, 휴대폰 대리점, 건축, 인테리어, 이사 등 남성 서비스 제공자가 월등히 많은 분야에서는 아직도 중년 남성은 ‘사장님’, 중년 여성은 ‘사모님’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다. 남성은 설령 그것이 실제 지위가 아닐지라도 한껏 예우해서 사회적 지위로 호명하고, 여성은 가부장과의 관계에 기반한 사적 지위로 호명하는 것이다. 이모님, 어머님에도 마찬가지 문제가 있다. 사장, 요리사, 서버, 고객, 회원, 민원인 같은 공적 정체성이 뚜렷한 상황에서 굳이 친족 호칭을 들먹여 그들의 사적 자아를 끄집어낼 이유가 없다. 이도저도 귀찮으면 차라리 공공 기관처럼 성별 중립적이고 정중한 ‘선생님’으로 통일하는 것도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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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칭이 필수 불가결한 한국어 특성상 애매한 관계에서 사적 지위나 친족 호칭을 사용하는 게 친분을 다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유재석, 강호동 같은 이른바 ‘국민 MC’들이 이 전략을 잘 활용한다. 그들은 일반인 출연자에게 아버님, 어머님 소리를 살갑게 잘도 한다. MC 장성규가 <워크맨>에서 호평받은 이유가 초면의 비방송인과 허물 없이 어울리는 능력 때문이었는데, 거기에도 호칭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아버님, 어머님을 넘어 형님, 누님 소리도 넙죽넙죽 잘한다. 하지만 상대방이 선을 긋기로 작정하면 이 전략은 성공할 수 없다. 실제로 장성규는 방송에서 만난 배우 전도연에게 누나라는 호칭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다. 나는 20대에 술 취한 업계 남성이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래서 기겁했다. 우리가 그렇게 친합니까?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친목을 도모하는 자리가 아니면 그 순간 타인의 액면 그대로의 정체성을 호명하는 게 사회에서는 가장 깔끔하고 안전한 방식이다. <유퀴즈>나 <워크맨>을 보면서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나도 문화센터 같은 곳에 가면 젊은 수영 강사나 요가 강사에게 ‘어머님’ 소리를 들을 날이 머지않았구나. 과연 그 상황을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는 누구의 어머니도 아닌데? 그래서 나는 하루빨리 공적 만남에 사적 호칭, 친족 호칭 쓰지 않기가 올바른 매너라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프랑스처럼 시부모도 상사도 거래처 회장도 이름으로 불러버리는 세상이 내 살아생전에 올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언어 혁명’이라는 이름의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다만 우리가 서로에게 좀 덜 질척대기를, 더 공평하기를, 더 공적인 존재로 서로를 존중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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