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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앞둔 알렉산더 맥퀸의 션 맥기르: “하우스에 밝은 빛이 내리쬐면 좋겠어요”

2024.03.02

by 안건호

    데뷔 앞둔 알렉산더 맥퀸의 션 맥기르: “하우스에 밝은 빛이 내리쬐면 좋겠어요”

    “하우스에 밝은 빛이 내리쬐면 좋겠어요.” 지금 파리에서는 알렉산더 맥퀸의 2024 F/W 컬렉션을 위한 최종 피팅 세션이 한창이다. 모델들은 줄지어 서 있고, 옷을 담은 상자가 본사 건물에 속속 도착하고 있다. 이 모든 혼란 속에서도 데뷔 컬렉션을 앞둔 션 맥기르는 차분함을 유지하는 중이다.

    Photo: Pierre-Ange Carlotti

    건물 한쪽 벽면은 레퍼런스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데이비드 해먼스(David Hammons)의 방수포 연작, 존 체임벌린(John Chamberlain)의 자동차 부품을 활용한 조각상, 액정이 산산조각 난 션 맥기르의 아이폰을 담은 사진까지 각양각색의 이미지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다. 젊은 런더너를 담은 이미지도 여럿 있다. 피트 도허티와 만나던 시절의 케이트 모스, 머리를 위로 잔뜩 올린 채 뷔스티에를 입고 있는 에이미 와인하우스, 이번 컬렉션에 모델로 등장하는 옥스퍼드 재학생 베베 파넬(Bebe Parnell)까지. 말발굽을 본떠 만든 청키한 셰이프의 구두로 가득한 선반 하나와 이미 최종 승인이 난 룩이 쌓인 선반이 스튜디오를 양분하고 있다. 맥퀸 하우스에서 볼 법한 타탄 패턴과 신선함으로 다가올 몇몇 피스까지 말이다.

    “’새(Birds)’ 컬렉션을 살펴보는 것부터 시작했어요.” 일주일 전쯤 런던 스튜디오에서 대화를 나눌 때 션 맥기르는 새를 테마로 한 리 알렉산더 맥퀸의 1995 S/S 컬렉션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심플하면서도 어딘가 뒤틀린 구석이 있어요. 평범한 재킷이지만 어깨 라인이 조금 이상하거나 라펠이 너무 높은 식이죠. 완벽하게 재단된 옷을 무거운 타이어로 깔아뭉갰다고 해야 할까요? 리 맥퀸은 옷을 비틀고 부순 디자이너입니다.”

    알렉산더 맥퀸 1995 S/S 컬렉션. Condé Nast Archive

    맥기르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는 알렉산더 맥퀸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하우스의 CEO 지안필리포 테스타(Gianfilippo Testa)는 맥기르의 선임을 발표하며 그가 “하우스에 강력하고 창의적인 힘을 더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맥기르가 지닌 가장 큰 무기는 젊음이다. “요동치는 젊은 에너지가 필요해요. 온갖 유스 컬처가 섞인 런던처럼 말이죠. 맥퀸 하우스가 런던을 대표했으면 합니다.” 맥기르는 맥퀸이 늘 감정과 반발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그의 말처럼 맥퀸은 예전부터 어떤 하우스보다 노골적이고 발칙했다.

    ‘엉덩이골’을 드러내고 음모를 노출하던 그 악명 높은 범스터 팬츠처럼 말이다. 맥기르는 그 범스터 팬츠를 모던하게 재해석하며, 그렇게까지 직설적이지 않은 자신의 화법을 드러냈다. 여전히 엉덩이골에 걸치듯 입어야 하지만, 맥기르는 훨씬 루스한 핏으로 디자인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쿨하게’ 걸칠 수 있는 범스터 팬츠인 것이다. 맥기르는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옷을 선보이며 하우스를 이끌어나갈 생각이다.

    그에겐 레디 투 웨어 라인의 규모를 키워야 하는 또 다른 과제도 주어졌다. 맥기르는 이 역시 완벽하게 해낼 거라 믿는다. 아일랜드 태생인 맥기르는 어릴 때부터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확신을 가졌다고 말한다. 열일곱에 학교를 마치고 영국으로 떠날 때도 그랬다. 확신에 찬 그의 모습을 본 뒤, 부모님은 그의 결정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맥기르는 평범한 더블린의 교외에서 기계공 아버지와 간호사 어머니(부모님을 비롯해 맥기르의 남동생과 여동생까지 이번 컬렉션에 직접 참석한다) 밑에서 자랐다. 그가 처음 패션을 만나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영화였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팬이었던 아버지가 그에게 <저수지의 개들>, <펄프 픽션> 같은 영화를 보여주었다. 맥기르는 벼랑 끝 삶을 사는 아웃사이더를 보며 ‘쿨하다’고 여겼다. 그 전까지 맥기르는 저널리스트를 꿈꿨다. 영화의 세계에 빠진 후, 옷으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전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언제나 컬렉션에 메시지를 담아냈던 리 맥퀸과 사랑에 빠진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맥기르는 1950년대와 1960년대, 쇼윈도 장식가로 일했던 할머니로부터 재봉을 배웠다. 빈티지 의류를 사 모으고, 직접 교복 테일러링도 했다. 리 맥퀸처럼 옷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전달하기 위해.

    알렉산더 맥퀸 1995 S/S 컬렉션. Condé Nast Archive

    리 맥퀸이 사망한 2010년 당시, 맥기르도 런던의 그저 흔한 젊은이였다. 세인트 센트럴 마틴 지원을 준비 중이던 아일랜드 출신 이민자 말이다. 그는 리 맥퀸의 마지막 두 컬렉션, ‘풍요의 뿔(The Horn of Plenty)’과 ‘플라톤의 아틀란티스(Plato’s Atlantis)’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는다. “맥퀸은 저뿐 아니라 문화 전반에도 큰 영향을 줬죠. 레이디 가가가 그 컬렉션 옷을 입고 ‘배드 로맨스’를 불렀으니까요. 돌이켜보면 패브릭도 정말 특별했습니다.”

    2009 F/W 컬렉션. Courtesy of Alexander McQueen
    2010 S/S 컬렉션. Courtesy of Alexander McQueen

    런던에 도착한 뒤에는 옥스퍼드 스트리트의 신발 가게에서 일한 적도 있었다. 동성애자였던 그에게 무례하던 몇몇 직원 때문에 일을 그만둬야 했지만 말이다. 당시 상황을 어머니에게 전화로 설명하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곳을 떠나라는 어머니의 조언을 듣고 나서였다. 그 후 멕기르는 게이 바에서 일했으며, 세인트 마틴의 전설적인 패션 전공 교수 루이스 윌슨의 도움으로 장학금을 받고 2014년에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시몬 로샤, 크리스토퍼 케인, 조나단 선더스와 같은 세인트 마틴 출신 선배들은 대부분 졸업하는 즉시 개인 브랜드를 론칭했다. 하지만 경기가 침체된 2014년에 졸업한 맥기르의 동기 대부분은 대기업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맥기르의 선택은 유니클로의 모기업 패스트 리테일링이었다. 크리스토프 르메르와 함께 유니클로 U 라인을 디자인하며 경력을 쌓았다. 그는 일본에서 살며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말한다. “문화는 다르지만, 결국 일본도 아일랜드와 똑같은 섬이잖아요. 섬나라 사람들은 어딘가 이상하죠!”

    잠시 앤트워프로 거처를 옮겨 드리스 반 노튼에서 일한 뒤에는 다시 런던으로 돌아왔다. JW 앤더슨에서 그가 걸었던 길은 ‘탄탄대로’였다. 남성복, 여성복을 거쳐 결국 레디 투 웨어 디자인을 총괄하게 되었다. 맥기르는 존경하는 디자이너로 조나단 앤더슨을 비롯해 존 갈리아노와 릭 오웬스, 일본 출신의 준야 와타나베, 이세이 미야케, 레이 가와쿠보를 꼽는다. 그에 따르면 이들 모두 비전통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인물이다. 급진적인 아이디어를 현실화하고, 종국에는 모두가 어떤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는 사람들.

    10년 넘게 디자이너로 일해왔지만, 맥기르는 여전히 젊은 사람들과 일하는 것을 즐긴다. 그는 모두가 자유로울 수 있도록 방임하면서도, 필요하다면 직접 관여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스타일리스트 마리 셰(Marie Chaix)와 어시스턴트 한 명을 제외하면, 스튜디오의 인원 모두가 맥기르보다 오래 맥퀸에서 일해왔다. 몇몇은 리 맥퀸 시절부터 함께해왔고, 이들 모두 새로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난 상태다. 맥기르는 남의 의견을 수용할 줄 아는 꽤 유연한 리더다. 모두가 맥기르의 취향을 알아가는 반면에 그는 개개인이 지닌 특기를 파악하고 있다.

    맥기르는 매일같이 디키즈의 배기 팬츠, 세인트 제임스의 니트를 입고 다이아몬드 후프 이어링을 낀다. 그의 파란 눈과 꼭 어울리는 이어링이다. 대화할 때 그는 상대방과 눈을 맞추는 걸 좋아한다. 스튜디오를 바삐 오가는 그의 움직임에는 활기가 느껴진다. 평상시 수영을 즐기며, 쇼를 앞두고 요가를 시작한 덕분이다.

    모두가 션 맥기르가 알렉산더 맥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선임되었다는 소식에 환호한 것은 아니다. 또 하나의 럭셔리 브랜드가 멀끔한 외모의 백인 남성을 고위직에 앉혔고, 모두에게 사랑받은 몇 안 되는 여성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사라 버튼을 맥기르로 대체하는 것을 본 사람들은 분노했다. 맥기르는 버튼을 향한 존경심을 숨기지 않는다. “사라는 하우스의 언어를 누구보다 잘 이해했어요. 리 맥퀸의 열정을 이어가고, 그가 정립한 코드를 확대한 인물이죠.” 그리고 그는 자신의 선임을 둘러싸고 한차례 논란이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복잡한 상황이죠. 저로 인해 다양성에 관한 논의가 더 활발하게 이뤄질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결국 창의성이란 다양한 환경에서 비롯되니까요. 그런 대화가 이어지는 것이 중요하죠.”

    알렉산더 맥퀸 1995 S/S 컬렉션. Condé Nast Archive

    지난달엔 맥기르가 이끄는 맥퀸의 첫 캠페인 이미지가 공개됐다. 아티스트 토미 말레코프(Tommy Malekoff)가 촬영을 담당했고, 리 맥퀸 시절 런웨이에 선 모델 데브라 쇼(Debra Shaw)와 프랭키 레이더(Frankie Rayder)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과거 리 맥퀸이 McQueen의 c를 Q 안에 그려 넣던 스케치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새로운 로고 역시 찾아볼 수 있다. 쇼와 레이더는 하우스의 시그니처와도 같은 해골 모티브의 가면을 쓰고 등장한다. 캠페인에서는 하우스의 여러 DNA 중 하나인 ‘고딕’이 짙게 묻어난다. 맥기르는 조금은 장난스러우면서도 노골적인, 날것 그대로의 무드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캠페인은 여느 ‘첫 시도’가 그렇듯, 상반된 반응을 불러일으켰지만 그는 여전히 침착하다. 오히려 지금 같은 상황을 ‘쿨하다’고 여길 뿐. 리 맥퀸 역시 “사람들이 내 디자인을 보고 아무것도 못 느끼는 것보다 싫어하는 편이 낫다”고 말한 적 있다.

    리 맥퀸에게는 언제나 어둡고 거친 면이 있었다. 맥기르는 다르다. “슬픔, 음울함 같은 감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정신 건강에 문제를 겪는 사람도 너무 많고요. 패션으로 그런 감정을 해소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패션이 사람들을 낙관적인 방식으로 흥분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파리에서 열린 프리뷰 세션 중 그는 ‘거친 글래머(Rough Glamour)’라는 말을 사용해 컬렉션을 설명했다. 다만 일상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지난해 인스타그램 계정을 삭제했다. 일에 온전히 집중하고 조금 더 건강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일주일에 한 번씩 심리학자를 찾아가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상담하는 시간도 갖고 있다. “사람의 뇌가 작동하는 방식에도 큰 흥미를 갖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 뇌는 모든 것에 반응하면서 살잖아요. 수많은 생각의 갈래가 어디서 온 것인지, 깊이 명상하는 걸 좋아합니다.” 그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아니라 카를 융의 분석심리학에 빠져 있다고 고백했다.

    몇 시간 후 있을 데뷔 컬렉션을 위해 맥기르는 모두를 파리 차이나타운의 중심부로 초대한다. 과거 식료품 도매시장이던 올림피아드를 베뉴로 선택한 것. 맥퀸은 늘 파리의 ‘부촌’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쇼를 선보여왔고, 맥기르 역시 이 전통을 따른다. 쇼를 앞둔 그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리 맥퀸은 역사상 최고의 디자이너입니다. 정말 그렇게 여겨요. 지금으로서는 제 미래가 기대될 뿐입니다.”

    사진
    Courtesy Photos, GoRunway
    출처
    www.voguebusin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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