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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경 “사랑은 발견된다”

2024.03.25

정서경 “사랑은 발견된다”

단 한 문장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창세기를 수십 번 써 내려간 시나리오 작가 정서경에게 아무것도 없는 빈 땅에서 의미 있는 새싹을, 든든한 나무를, 무성한 숲을 일구는 비결을 물었다.

실크 드레스와 이어커프는 펜디(Fendi).

휘겸재에서 열리는 ‘보그 리더: 2024 우먼 나우’ 행사에 연사로 초대하기 위해 지난 연말부터 연락했는데 마감이 한창이었다. 새 책이 드디어 출간을 앞두고 있다.

<나의 첫 번째 시나리오>라는 아주 예쁜 책이 돌고래 출판사를 통해 나온다. 이제 서문과 후기만 쓰면 된다. 사실 지금 쓰고 있는 드라마 극본 작업이 끝날 때쯤 마무리하려고 계속 미루고 있었다. 5월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번에는 각본집이 아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다닐 때 졸업 작품으로 쓴 시나리오다. 10여 년 전 단국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우연히 다시 읽고 나서 충격에 빠졌었다. 그때의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너무 투명하게 보이는, 부끄러울 정도로 솔직한 이야기라서. 쓰는 당시에는 나와 정반대인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고 여겼지만 다 쓰고 나니 그건 다름 아닌 내 이야기였다. 내가 내 방식대로만 시나리오를 쓸 수 있듯이 모든 지망생이 결국 본인만의 시나리오를 써야 한다고 믿기에 이 책을 내기로 결심했다. 나는 세상에서 딱 두 부류의 사람에게 깊은 연민을 느낀다. 이제 막 엄마가 된 사람과 첫 번째 시나리오를 쓰려는 사람. 내가 가르치는 일을 정말 좋아한다는 걸 알지만 강연에 얽힌 정말 끔찍했던 기억 이후 남들 앞에서 말하는 기회를 극구 사양해왔는데 이 책을 통해 내가 하고 싶은 많은 말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GV에서 모더레이터 역할로 셀린 송 감독과 함께 관객을 대면했다. 지난해 <바비>의 스페셜 토크에서는 그레타 거윅을 영어로 직접 인터뷰하기도 했다. 각본 창작 외의 바깥 활동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닿는 기회가 있다. 운명처럼. <패스트 라이브즈> GV는 미국에서 성장한 셀린 송 감독이 낯선 고향인 한국에 영화를 소개하기 위해 홀로 분투하는 것에 마음이 쓰였고, <바비>의 그레타 거윅 감독은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었다. 영화 <결혼 이야기>(2019)를 아주 재미있게 봤기 때문이다. 당시 아기가 태어난 지 100일 정도가 됐다고 했는데 30분 남짓한 만남 속에서도 정말 따뜻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톱과 팬츠는 에르메스(Hermès), 슈즈는 메종 마르지엘라(Maison Margiela).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와 배우들의 열연, 아름다운 미장센 등 여러 면에서 호평받은 드라마 <작은 아씨들>(2022) 이후 대중과 조금 더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드나?

시나리오를 쓴 지 20년째다. 내게 대중성은 항상 어렵고, 미스터리한 것이었다. 지금 여기서 나를 열심히 인터뷰하고 있는 당신도 ‘내가 기자라는 직업과 잘 맞을까?’ ‘어쩌다 하필 기자가 됐지?’라는 생각을 할 때가 분명히 있을 거다. 나도 똑같다. 그건 대중성을 신경 쓰기 때문이다. 노력해서 대중과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는 길이 분명 있겠지만 내 힘만으로는 안 되고, 도움을 받아야 하는 지점이 있다. 첫 드라마 집필작 <마더>(2018)는 사실 대중성이라는 것을 아예 생각조차 안 하고 쓴 이야기다. 당시 주변에서 이 드라마는 3%다, 5%다, 하는 말이 나는 어떤 의미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다 끝나고 나니 알겠다 싶었다. <마더>에서는 내가 시청자에게 너무 많은 고통을 줬고, 그에 비해 너무 적은 기쁨을 줬다. <작은 아씨들>은 달랐다. 고통과 쾌락을 함께 건넸다. <마더>의 관객과 <작은 아씨들>의 관객은 분명 다른데 관객층이 정말 다양하다는 것도 드라마를 통해 배운 점이다.

배우 전지현과 강동원의 출연으로 기대감을 키우고 있는 차기작 <북극성> 역시 드라마다.

사실 작품만 놓고 보면 이제 드라마와 영화의 차이가 거의 없다. <마더>는 16부작이었고, <작은 아씨들>은 12부작이었고, <북극성>은 8부작인데, 다음에는 6부작을 쓸 수도 있다. 물론 영화가 가끔 그립긴 하다. 지금의 마음가짐으로는 2시간 분량의 이야기는 정말 금방 쓸 수 있을 것 같다.(웃음)

<작은 아씨들>의 김희원 감독과 이번에도 함께한다. 박찬욱 감독에 이어 페르소나를 공유할 수 있는 또 한 명의 친구를 만난 걸까?

내가 한 사람과 진득하게 붙어서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한번 잘 맺어놓은 인연은 못해도 10년은 간다. <북극성>을 작업하는 동안 김희원 감독님의 또 다른 면을 봐서 좋았고, 특히 고마웠던 점은 내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었다는 것이다. 내 입장에서는 내 이야기가 영상으로 구현되는 것이 마냥 좋지만 감독님 입장에서 보면 자기가 쓰지 않은 이야기를 납득하고 소화해서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촬영을 마무리하기까지 말 못할 마음고생이 많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 모든 과정에서 내가 감독님의 자유와 진실을 너무 많이 빼앗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20년 전, 공모전 심사 위원과 참가자로 처음 마주한 후 <친절한 금자씨>(2005)부터 <헤어질 결심>(2022)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판타지를 함께 완성한 박찬욱 감독과의 우정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감독님은 내가 어떤 말을 해도 재미있다고 해준 사람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 둘 다 INTP(논리적인 사색가 유형)다. 16가지 MBTI 유형 중 단 하나의 유형이 일군 세상에서 계속 우리끼리 재미있게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어느 순간 들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작업할 때 나오는 또 다른 내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때론 나의 코드를 온전히 이해하고 즐겨주는 훌륭한 파트너의 존재가 그립기도 하지만 새로운 세계에서 둘 다 잠깐 다른 사람이 되었다가 다시 만나도 분명 재미있는 일이 펼쳐질 거다.

독특한 수사 멜로극 <헤어질 결심>은 남다른 ‘말맛’으로 각본집 시장을 부흥시켰다.

‘서래’라는 캐릭터가 외국인 혹은 다른 세계로부터 온 외계인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말맛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작은 아씨들>과 <헤어질 결심> 모두 여러모로 나에겐 새로운 도전이었는데 왠지 그다음부터는 대중이 나의 개성이라고 느끼는 언어, 나의 ‘마더 텅’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아이가 모국어를 습득하듯이 창작자에게도 글을 쓰며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 문법과 변하지 않는 기본 이미지가 있는데 나에겐 그게 동화였다. 어릴 때 밥 먹듯이 동화책을 보며 습득하고 상상한 것들이 작품을 통해 계속 발화되어 나온 것이다. 하지만 <북극성>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언어를 시도했다. 또 다른 챕터에 다다랐다는 느낌이 든다.

니트 베스트와 벌룬 스커트는 마르니(Marni), 모피 부츠는 쥬세페 자노티(Giuseppe Zanotti).

글을 쓰며 느끼는 가장 순수한 즐거움은 무엇인가?

여행을 갔는데 뜻밖의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면 행복하지 않나. 글을 쓸 때도 그런 순간을 만나면 기쁘다. 거기에 머무는 순간이 진짜 좋은 거다. 어디론가 뛰어가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생생하게 일렁거릴 때가 있고, 어떤 인물이 뭔가를 위해 애쓰는 모습이 피부로 와닿아서 함께 애쓰게 되는 그런 마법 같은 순간이 나를 기쁘게 한다.

나를 위해 쓴 것처럼 쓰고 나서 즉각적인 위안을 받은 말이 있나?

최근작 <작은 아씨들>을 놓고 말한다면 두 가지가 떠오른다. “영혼은 어디에 살까. 난 내 영혼이 살 집을 갖고 싶었다. 이 집이 나를 받아줬다고 느끼는 순간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라는 ‘인주(김고은)’의 대사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나는 왜 술을 마실까. 왜 술 마시던 아빠 얼굴이 그렇게 슬펐을까. 내가 세상을 돌아다니며 그렇게 찾고 싶었던 뉴스는 바로 가난한 우리 가족의 얼굴이었다”라는 ‘인경(남지현)’의 대사.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인물의 겹과 겹을 거쳐 정말 밑바닥까지 내려가다가 어느 순간 ‘이 사람의 진짜 목소리는 이거구나’ 싶은 순간이 있다. 그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 때 해방감을 크게 느낀다.

문득 당신의 학창 시절이 궁금하다. 그 시절 어떤 여자들을 동경했나?

<빨간 머리 앤>의 앤! 몇 해 전 넷플릭스 드라마로 나왔을 때 정말 반가웠던 이유다. 오랜만에 다시 앤을 보며 느낀 것은 내가 당시 앤이 지닌 희망에 매료됐었다는 사실이다. 파양되어 집을 떠나는 날에도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며 “오늘은 그 길이 참 멋있을 거야”라고 말하는 앤의 꺾이지 않는 희망 말이다.

반항 혹은 방황의 시절도 있었나?

난 지금도 반항적인 편이다.(웃음) 최근 중학교 2학년인 둘째가 가출 계획을 세우려는 것 같아 미리 말을 흘리고 있다. “버스는 몇 번을 타고 가고, 카톡 하나만 남겨라. 그럼 안 찾아갈 테니까. 햇반하고 참치 통조림은 가방에 꼭 넣고.”

커팅 톱은 에르메스(Hermès).

당신을 비롯해 워킹 맘 11명의 이야기를 엮은 에세이집 <돌봄과 작업>(2022)을 읽으며 예상치 못한 곳에서 웃음이 터졌다. “모두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어. 하지만 실상을 말할 수가 없었을 거야. 그러면 내가 아기를 낳지 않으려 들 테니까”라는 대목에서 말이다.

책이 나오고 나서야 다른 분들의 글을 읽었는데 사실 너무 부끄러웠다.

하지만 두 아이를 낳은 후 “진짜 사랑이 아닌 것은 쓰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쓰고 싶어졌다. 관객과 시청자들이 원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그렇게 해서 나는 ‘엄마’라는 사람이 되었다”고 덧붙였다.

이제 엄마와 작가라는 정체성이 한 몸처럼 완전체로 느껴진다. 일과 육아를 ‘병행한다’는 느낌을 넘어서. 아이들이 어느덧 고 1, 중 2가 되었기 때문에 많이 자유로워지기도 했고, 이제 아이들도 내 일을 잘 이해해준다. 아이를 낳기 전에 고양이를 기르며 유유자적하던 삶이 내겐 ‘패스트 라이브즈’처럼 느껴진다.(웃음)

사랑이 많은 사람처럼 보인다.

사랑은 발견된다. 나도 선천적으로 사람이 좋아서 사랑이 막 흘러넘치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이가 생기고, 끈끈하게 일하는 동료들도 생기다 보니 내 안의 사랑도 점점 커졌다.

여전히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당신은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당신이 지닌 가장 여리거나 아이 같은 면은?

하나 있는데 말하고 싶지 않다.(웃음) 최근 스위스 융 연구소에 다니는 지인에게 꿈 분석을 의뢰한 적 있다. 그러면서 풀린 조각이 많은데 전부 비밀이다. 꿈이 내가 나 자신에게 보내는 메시지라는 걸 인정하자 수많은 개인적인 의문이 해소됐다. 글을 쓰는 일이 그렇듯 마음의 구조를 분석하고 그것을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풀어내면서 내가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땅이 어디인지 찾고 있다.

자기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지만 목소리를 내기 주저하는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있다면?

<던 월>(2017)이라는 암벽등반을 다룬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를 꼭 봤으면. 암벽은 계단과 달리 길을 스스로 만들어 올라가야 한다. 무엇을 얼마나 꽉 붙잡아야 하는지 오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끝내 등반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른다. 내가 고르는 길이 곧 유일한 길이다. 시나리오를 쓰는 일도 똑같다. 같은 이야기를 날마다 얼마만큼 진심으로 반복할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내 뒷모습만 바라보고 100명의 스태프가 따라오는 상황에서 보이지 않는 길을 만들려면 의심 속에서 아주 조금씩이라도 계속 움직여야 한다. ‘어쩌면 내일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나이가 들어서 좋은 점은 그 말이 정말 맞다는 걸 안다는 데 있다. 이 말이 와닿지 않는다면 오늘의 한 걸음을 통해 실패로 이어지는 수많은 길 중 하나를 완벽하게 제거할 수 있다고 간주해보자. 그렇기에 다시 도전할 수 있고, 오늘 실패한다고 해도 내일은 더욱 높아질 가능성에 기대볼 수 있을 테니까.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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