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경 개인전 ‘마치 MARCH’, 이토록 입체적인 봄의 산수화
바야흐로 봄입니다. ‘바야흐로’라는 부사는 ‘이제 한창’ 혹은 ‘지금 바로’라는 의미인데요. 이 어여쁜 단어가 특히 봄에 잘 어울리는 건, 그만큼 봄이 짧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봄이라는 계절은 얄궂은 데가 있어, 우리가 봄임을 인식하는 순간 저물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찰나의 봄을 즐길 방법을 저마다 찾아야겠지요. 그렇다면 올해만큼은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강서경 작가의 개인전에 가보기를 권합니다. ‘마치’, 즉 3월이라는 제목에서 헤아릴 수 있듯, 작가는 국제갤러리에서 여는 첫 개인전 곳곳에 봄기운을 심어둡니다. 봄이라는 시공간의 색이 은은하게 물든 전시장을 걷다 보면, 우리가 보는 봄과 느끼는 봄, 실재하는 봄과 희망하는 봄의 간극이 자연스럽게 없어지면서 그야말로 봄의 정수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강서경 작가는 회화의 개념을 평면, 조각, 영상, 액티베이션 등 다양한 매체로 실험하며 확장해온 미술가입니다.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답게, 특히 전통이라는 대상을 본인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해 동시대적인 동시에 현대적인 예술 언어로 표현하고 있죠. 이번에도 작업 세계의 주요한 요소와 개념이 포진해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 발명된 전통 악보 체계 혹은 유량악보인 정간보에서 출발한 ‘정(Jeong, 井)’ 시리즈, ‘정’에서 진화하되 작가의 남다른 기억을 바탕에 둔 ‘정 — 걸음(Jeong — Step)’ 시리즈, 작가의 매일의 시간을 축적한 ‘모라(Mora)’ 작업에서 공간성을 더한 ‘모라 — 누하(Mora — Nuha)’ 시리즈, 전통 공예 요소로 시간의 흐름을 표현한 ‘아워스 — 일(Hours — One)’ 시리즈, 중간중간 놓여 이정표 역할을 하는 조각 작품 ‘산 — 아워스(Mountain — Hours)’와 ‘산 — 꽃(Mountain — Flower)’ 등이 K3 공간을 여유 있게 채우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이번 전시를 회화와 조각이 그려내는 3월의, 봄의 산수화라 표현하고 싶군요.
강서경 작가의 작업에는 시간성에 대한 특별한 고찰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사실 현대에 동양화를 다룬다는 것 자체가 시간성의 개념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죠. 동시에 시간성은 공간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즉 강서경은 우리를 둘러싼 이 시공간의 이야기를 매우 정제된 미술 언어로 시각화합니다. 그래서 일견 매우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작가의 작업은 결국 그 시간과 공간을 이루는 우리의 몸, 우리의 움직임, 우리의 존재를 향해 있지요. 이를테면 작업 제목으로 등장하는 ‘아워스(Hours)’는 시간이라는 뜻이지만 굳이 번역하진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라는 뜻의 ‘아워(Our)’로 읽히기도 하는데요. 그래서인지 저마다 딛고 설 수 있는 땅의 규격을 그리드로 표현하고 그에 담긴 다양한 층의 시간성을 표현하는 전시는 ‘지금 여기’를 살아내는 ‘우리’에 대한 예찬으로 읽힙니다. 가늠해보면 삶에 대한 애정은 나를 둘러싼 시공간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되니까요.
지난해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강서경의 대규모 개인전 <버들 북 꾀꼬리>를 기억하시는 분도 많을 겁니다. 그때의 전시가 작가의 작업 세계를 종합해놓은 방대한 산문과도 같았다면, 이번 전시는 산뜻하고 담담한 한 편의 시처럼 읽힙니다. 봄의 색과 형태는 물론 소리와 향까지 함축해둔 공감각적인 시 말이죠. 전시작은 좀체 선보인 적 없는 신작인 동시에, 시간의 흐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자 하는 작가만의 예술적 수행의 결과물입니다. 작품 너머로 보이는 삼청동에서는 봄이 펼쳐지고, 그 안에서는 각기 다른 존재가 서로 관계 맺으며 봄을 은유하고 있습니다. 천천한 걸음으로 여전히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강서경의 생에 대한 애정, 그리고 우리 모두가 어우러지는 풍경에 대한 기록. 이에 ‘3월’보다 더 적절한 제목은 없어 보입니다.
- 글
- 정윤원(미술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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