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가 그려낸 여인, 꽃, 그리고 영혼

2025.10.02

천경자가 그려낸 여인, 꽃, 그리고 영혼

꽃과 영혼과 여인의 화가 천경자. 지난해 탄생 100주년, 올해 작고 10주년을 맞은 그녀는 한국화에 대담하고 밝은 색을 도입한 채색화의 선구자이자 여자의 시선으로 수많은 여인상을 그리며 대중의 사랑을 받은 예술가다. <보그>가 동시대적 시선으로 그녀의 대표작을 재현했다.

1981년 작 ‘미도파의 초상’의 여인은 머리에 활짝 핀 능소화를 꽂고 있다. 미도파는 천경자가 둘째 딸 김정희에게 붙여준 별명. 눈동자와 피부에 금분을 자주 사용한 작가의 방식을 응용해 금색을 칠한 종이꽃으로 능소화를 표현했다. 종이꽃은 한지꽃 작가 이미나의 작업.
작가는 같은 모델의 포즈를 달리해 1989년 작 ‘청혼’과 1990년 작 ‘여인’ 두 작품을 완성했다. 딸이 자신처럼 살기를 원치 않았던 화가가 큰딸을 생각하며 그린 작품. 자개와 금속 소재 귀고리는 에트로(Etro), 모노그램 플라워 모티브의 컬러 블라썸 팔찌는 루이 비통 파인 주얼리(Louis Vuitton Fine Jewelry), 모자는 큐 밀리너리(Q Millinery).
천경자는 원래 배우가 되고 싶어 했다. 1968년 작 ‘청춘의 문’은 개인적 열망을 담아 평소 좋아했던 배우 그레타 가르보를 그린 작품. 안개가 낀 듯한 색채, 신체와 분리된 여인의 머리와 묘한 표정, 투명하게 표현된 신체 일부 등이 서늘한 느낌을 준다. 러플 블라우스와 재킷, 팬츠는 맥퀸(McQueen). 제일 위에 있는 디오레트 싱글 이어링, 제일 아래의 디오레트 반지는 디올 파인 주얼리(Dior Joaillerie). 갖가지 원석을 세팅한 알레그라 귀고리, 왼쪽의 꽃잎 모양 피오레버 펜던트는 불가리(Bvlgari). 아쿠아마린을 세팅한 플레르 드 하와이 펜던트는 반클리프 아펠(Van Cleef & Arpels). 틸다의 보우 다이아몬드 브로치는 그라프(Graff).
1982년 작 ‘황금의 비’는 제우스가 황금 비로 변신해 다나에에게 접근한 그리스 신화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경자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빨려 들어갈 듯한 여인의 눈으로, 주위를 감싼 황금빛과 어우러져 황홀경을 경험하는 델포이 신전의 무녀가 떠오른다.
1977년 작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는 작가가 22세의 자신을 회상하며 그린 작품. 작가는 생전에 작품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림 속의 여자는 결국 그린 사람의 분신이고 꽃이니 뱀이니 머리에 얹은 것도 한이에요. 한이 많아서 머리에 뭘 이고 그러는 거죠. 근데 한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화가가 이집트 여행 후 그린 작품 1984년 작 ‘카이로 테베 기행’의 구성을 재현하고 이집트 벽화 모티브 대신 꽃으로 모델 주위를 장식했다. 앞면은 화이트, 뒷면은 블랙 컬러인 니트 드레스, 꽃잎 모티브의 스트래피 힐은 페라가모(Ferragamo).
천경자는 동양화에 원색을 도입해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고 평가받는다. 정물화 ‘꽃’은 우리나라 전통 색상을 사용해 한국적인 정서가 강하게 드러난다. 꽃 장식의 오렌지 컬러 새틴 플랫 슈즈는 로저 비비에(Roger Vivier), 꽃잎 형태의 러플을 장식한 레드 슬링백 슈즈는 페라가모(Ferragamo).
1981년 작 ‘장미와 여인’은 ‘미인도’ 위작의 모티브로 알려진 작품이다. 풍성한 갈색 머리칼에 싱싱한 꽃을 가득 장식한 여인은 천경자가 그린 어느 여인보다도 화려하다. 흑백사진이 꽃의 디테일을 정교하게 드러내 정제된 화려함을 표현한다.
톤 다운된 색감이 부드럽고 서정적인 기운을 풍기는 1975년 작 ‘여인’. 원작의 연한 분홍색 화관을 광택 나는 레진으로 표현했다. 입체적인 파이에트 꽃 장식 네오프렌 드레스는 블루마린(Blumarine).
1973년 작 ‘길례 언니’는 천경자 여인상의 시초가 되는 작품이다. 소록도에서 간호사로 일한 지인으로 알려졌으나, 실존 인물이 아닌 상상 속 인물이다. 어린 시절, 어느 여름 축제에서 노란 원피스에 하얀 챙이 달린 모자를 쓴 여인을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아 작가가 만들어낸 캐릭터. 러플 네크라인의 보우 블라우스는 위크엔드 막스마라(Weekend Max Mara).
작가는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여인 누드를 자주 그렸다. 1988년 작 ‘누가 울어 1’도 그중 하나로, 벌거벗은 여인 곁의 강아지는 작가의 반려견 꽃순이다. 페이즐리 프린트 스카프는 에트로(Etro), 스카프 위에 놓인 리본은 장폴 클라리쎄(Jean Paul Clarisse), 체인 벨트는 돌체앤가바나(Dolce&Gabbana), 참 장식 체인 팔찌는 발렌티노(Valentino).
3년에 걸쳐 완성한 1973년 작 ‘이탈리아 기행’은 작가가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 흥미를 끈 이국적인 소재로 구성한 정물화다. 중앙에 봄의 여신 플로라의 얼굴이 그려진 보티첼리의 작품 도록을 배치했는데, 작가가 여행에서 보티첼리에게 큰 영감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페이즐리 프린트 스카프는 에트로(Etro), 모델이 착용한 로즈 드 방 팔찌는 디올 파인 주얼리(Dior Joaillerie).

팬데믹 이후 런던은 처음이었다. 사우나 같은 서울 날씨와 달리 바람이 선선했고 날씨도 맑았다. 화보 촬영을 위한 출장이라 느긋하게 관광할 시간 따위는 없었지만, 지난 6월에 시작한 제니 사빌(Jenny Saville) 회고전이 며칠 안 남았기에 도착한 날 오후 서둘러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로 향했다. 당연하게도,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컴퓨터 모니터 화면으로 보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얼굴이나 신체를 클로즈업한 캔버스는 한쪽 벽을 가득 채울 만큼 거대했으며, 능숙하고 계산적이라고 느껴지던 붓 터치는 폭풍이 쓸고 간 흔적처럼 거칠고 입체적이었다. 무엇보다 캔버스 속 여자들은 갤러리를 산소 부족으로 만들 만큼 붐비는 관람객보다 더 생생하고 공격적으로 원시적인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숨 막힐 듯한 에너지의 전시장과 달리 한산한 뮤지엄 숍에는 전시에 맞춰 여자 작가에 대한 예술 이론서가 여러 권 전시돼 있었다.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를 바라보는 여자(A Woman Looking at Men Looking at Women)>, <우리만의 세상: 역경에 맞선 여성 아티스트(A World of Our Own: Women Artists Against the Odds)> 등. <페미니즘 미술사 개론(A Little Feminist History of Art)>의 표지는 남자 친구에게 안긴 여자가 포크로 자기 눈을 찌르는 콜라주 사진이었다. 페미니즘에 대한 대중의 선입견이 오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떨쳐내며, 나는 소리 없이 아우성치는 호전적인 책 사이에서 작고 얇은 수전 손택의 에세이 <여자에 관하여(On Women)>를 골랐다.

키아프와 프리즈 서울 직후 아트넷(Artnet)은 2025년 미술 시장 중간 발표 보고서를 공개했다. 컨템퍼러리 아트 분야에서 최고 판매가를 기록한 상위 10개 작품은 전부 초상화 혹은 초상화에 가까운 형식이었으며 그중 3점이 여자 작가인 마를렌 뒤마, 나라 요시토모, 제니 사빌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전부 여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여자의 초상화였다. 아트 전문 기자는 아니지만 나 역시 최근 2년 동안 온·오프라인에서 여자를 그리는 젊은 여자 작가(은지데카 아쿠니일리 크로스비(Njideka Akunyili Crosby), 안나 웨이언트(Anna Weyant), 제니브 피기스(Genieve Figgis) 등)와 그들의 작품이 주목받는 것을 봐왔다. 개인적으로 그들의 작품이 여자라는 생명체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여자를 꾸밈없이 드러낸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존재론적 고군분투로 충만한 제니 사빌의 작품처럼 말이다.

패션계는 늘 예술에서 영감을 얻어왔으며 특히 여자 예술가를 조명할 때 더 많은 담론과 힘을 가졌다. 내가 영세한 멤버십 잡지 인턴 에디터로 처음 패션계에 발을 들인 2004년에도, <보그> 패션 에디터를 거쳐 20년을 지나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는 지금도 이는 변함없이 적용되는 황금 법칙이다. 그중에서도 프리다 칼로와 조지아 오키프, 니키 드 생팔, 오노 요코는 특히 20세기 말부터 21세기 초까지 무수히 많은 디자이너의 무드보드에 레퍼런스로 등장했다. 패션계가 이들의 작품뿐 아니라 개인적인 삶과 스타일까지 추앙하고 탐닉하는 이유는 여자이기에 겪는 경험(사회적 편견과 비난, 질투의 대상, 바람피운 연인에게 버림받는 일, 성폭력의 피해자)과 아름답고자 하는 욕망(프리다 칼로는 몇 시간이고 거울 앞에서 공들여 치장했으며 니키 드 생팔은 패션모델 출신, 조지아 오키프의 옷장은 그 자체로 아카이브로 여겨진다)에 솔직하고 충실했기 때문이다.

9월 초, 전 세계 예술계 인사들로 북적인 서울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보그 코리아>는 아직 가시지 않은 그 열기와 기운을 담고자 10월호 주제를 문화와 예술로 정했다. 그리고 현대 예술에서 우리나라 여성 작가 계보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천경자를 주목했다. 해방 이후 한국 채색화 분야를 개척해 자신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구축했으며 죽을 때까지 평생 그림을 그린,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여자 화가. 배우가 되길 꿈꿨고 메이크업에 관심이 많았으며, 그림 외에 글쓰기에 대한 재능과 열정으로 10권이 넘는 저서를 남겼다.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면 화단에서 사라지는 게 일반적이던 그 시절 여자 예술가들과 달리 자신의 삶과 감정, 욕망에 충실했고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을 작품에 투영했기에 위에서 언급한 뮤즈들 못지않은 영감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을 화보로 오마주하는 과정에서 스태프 모두 당시 흔치 않았던, 여자의 시선으로 본 여자의 모습을 제대로 담아내는 데 집중했다. 세련되고 자극적인 작품이 넘쳐나는 요즘, 소녀처럼 소박한 천경자의 여인은 여자라면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그려본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과 닮았다. 보는 이를 사로잡는 빛나는 동공과 곱게 아이섀도를 바른 눈가, 단정한 입술, 오뚝한 콧날, 길고 가는 목과 쇄골, 머리를 장식한 색색의 꽃과 나비.

생전에 작가는 아름다운 여자라고 하면 ‘동네 미친 여자들’을 떠올리곤 했다. 가장 취약한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인 가장 자유로운 존재. 매 순간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솔직한 광기에서 작가는 아름다움을 느꼈을 것이다. 천경자는 자신의 꿈이 4차원의 세계에 사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그리는 것이며, 그들은 때로 마녀와도 같은 인상을 풍긴다고 말했다. 미친 소리처럼 들리지만, 여자라면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여전히 4차원의 세계로 도피해 숨을 돌리고, 미치지 않고서 세상을 살 수 있을까라는 의문은 생생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천경자의 여인은 화가가 태어난 지 100년이 지나고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VK

    컨트리뷰팅 패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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