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여성에게 건네는 초대장, ‘2026 보그 리더’에서 일어난 일
〈보그〉가 ‘2026 보그 리더’를 열며 세상의 모든 여성에게 초대장을 건넸다. 여성들은 타인이나 사회의 시선, 평가에서 벗어나 자신의 목소리로 삶을 말했고, 그 울림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누구보다 나답게
<보그>가 세 번째 ‘보그 리더’ 행사를 열었다. 자신의 서사를 개척해온 여성 크리에이터들은 작품과 강연을 통해 영감을 건넸다. 이유 모를 뭉클함과 뜨거운 열정이 맞닿으며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10여 년이 흘렀다. 에디터로 일하는 동안 매달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원고를 쓰다 보니 일순간에 시간이 흘렀다. 잡지를 만들며 시간을 한 달 단위로 사느라 계절과 세월이 지나는 줄도 몰랐는데,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함께했던 또래 동료들이 여럿 사라졌다. (뾰족한 이유를 찾긴 어렵지만, 매거진 업계엔 여성이 다수다.)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후배들의 푸릇하고 맑은 기운에 감탄하는 날과 종알종알 친구들과 떠들며 생각을 나누던 때가 그리워지는 순간이 교차한다. 나의 가장 가까운 자극이자 위안이던 존재들, 반짝이는 재능의 그녀들은 모두 어디로 간 걸까. 순리처럼 누군가 정해놓은 방향, 속도, 정체성을 뒤로한 채 뚝심 있게 제 길을 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한 해 한 해 깊이 체감한다. 그래서인지 최근엔 여성의 목소리, 시선이 담긴 이야기와 창작물에 더 깊은 애정이 간다. 올해 3회를 맞은 ‘보그 리더’가 더 특별하게 다가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보그>가 여성을 이야기하고 지지하고자 매년 주최하는 ‘보그 리더’는 예술과 강연, 커뮤니티 등을 통해 여성의 연대와 주체성을 고찰한다. 그간 행사는 여성을 주제로 한 미술과 대화, 삶과 일의 관계 등을 깊이 있게 살펴왔다. 올해는 여성의 주도성을 주제 삼아 사진전과 아카이브, 토크 세션으로 기획했다.


3월 27일부터 29일까지 서울 용산구 레이어 스튜디오 20에서 열린 ‘2026 보그 리더’는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가 부여한 역할에서 벗어나, 자신의 서사를 써 내려간 여성들과 함께했다. 27일 시작을 연 것은 전시 ‘위민 바이 위민(Women by Women)’ 프리뷰 나이트다. ‘보그 리더’의 취지, 철학에 공감하는 아티스트, 브랜드 관계자 등이 하루 먼저 전시장을 찾아 작품을 살폈다. 전 세계 사진가와 비주얼 스토리텔러를 발굴·지원하는 플랫폼 포토보그(PhotoVogue)는 올해 ‘여성이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을 주제로 작품을 공모했는데 149개국에서 약 10만 점이 출품되며 반향을 일으켰다. 전시는 최종 45인의 패션·다큐멘터리·인물·예술 사진·영상·멀티미디어 작품 115점을 선보였다. 선정작은 누군가에 의해 묘사되고 평가되는 대상이 아닌 스스로 말하는 화자로서의 여성을 주목했다. 각자의 목소리와 이미지를 통해 여성 스스로가 정의한 ‘여성’의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전시장에서는 30주년을 맞은 <보그> 아카이브도 공개했다. 동시대 여성의 감각, 욕구와 가치를 가장 발 빠르게 포착해온 <보그>의 지난 화보와 커버를 통해 여성이 긴 시간 켜켜이 쌓아온 서사와 주체성의 입체적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프리뷰와 함께 관람객은 포토보그와 <보그> 아카이브를 관람하며 영국 왕실 공식 샴페인 하우스 ‘폴 당장’의 ‘뀌베 카르트 블랑쉬 샴페인’을 즐겼는데 감귤과 청사과의 상큼함과 우아함이 봄밤에 제격이었다.



다음 날인 28일 ‘보그 리더’를 찾아 크리에이터 토크 세션을 이끈 이들은 소설가 은희경, 배우 심은경, 미술감독 류성희, 영화감독 매기 강이었다. 끝없는 부침 속에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며 자신만의 길을 걷는 4인의 창작자가 자전적 경험을 나눴다. 탁월한 진행 실력으로 지난해에 이어 ‘보그 리더’를 다시 찾은 MC 이승국의 진행으로 네 사람의 토크 세션이 이뤄졌다. 네 명의 강연자 모두 장대한 성공담 대신 흔들리고 깨지는 과정 속에서 자신만의 언어를 구축했음을 고백했다. “저는 상투적이고 세속적인 사람이에요. 타인이 지닌 나쁜 면을 봤을 때 제 안에도 있을 거라 여겨요. 그런데 그런 옳고 그름의 틀이 있기에 소설을 통해 그 틀 밖을 볼 수 있죠”라고 말하는 소설가 은희경의 솔직함이 청중의 공감을 불렀다. 영화 <써니>를 촬영한 직후 불현듯 유학길에 오른 배우 심은경은 그 시기를 “실패의 감각을 몸으로 익힌 순간”이라 회상하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일본 문화에 빠져 지냈기에 시간을 낭비했다고 느낀 때도 있었어요. 되돌아보니 저만의 아이덴티티가 형성된 시기였어요”라고 덧붙였다. 실패가 결과가 아닌 과정임을 오롯이 받아들이게 하는 고백이었다. 그렇다면 그 과정 속에서 나만의 언어, 결과물을 축적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미술감독 류성희는 “살면서 보고 느낀 모든 것이 작업에 녹아들어요. 시각적인 기억을 넘어 땅에 발을 디딜 때의 느낌, 소리가 울리고 빛이 흐르는 방식 모두요”라며 매 순간 삶을 자각하고 창작의 여정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시사했다. 뒤이어 다양한 감독, 작품과 마주하는 미술감독으로서 “자신의 취향만 고집할 순 없어요. ‘무슨 영화 좋아하세요? 음악은요?’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잡스러움’이 필요해요. 하나에 몰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폭넓은 호기심 역시 중요해요”라며 조언을 더했다. 전 세계 열풍을 일으키며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감독 매기 강은 스쳐 지나가는 아이디어에 그치지 않고 결과물로 만드는 비법을 전했다. “정리되지 않은 아이디어일지라도 동료들에게 끊임없이 얘기해요. 대화 자체가 영감의 과정일 수 있거든요. 또 자신만의 스페셜티를 위해 한 분야만 파고들기보다 다양한 인생 경험을 쌓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결국 어떤 결과물이든 자신이 쌓아온 세계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소통하는 거니까요.” 연사들의 진심 어린 조언에 이제 막 사회에 진입한 20대부터 연륜의 너그러움이 느껴지는 중년까지 자리를 가득 메운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와 직업, 사회적 역할을 막론하고 우리 모두에게 일상적 용기와 영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했다.


무모한 도전과 실패를 딛고
신념과 실천을 넘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비즈니스를 이끄는 여성 리더들이 ‘2026 보그 리더’를 찾았다. 본질을 좇는 과정에서 마주한 실패와 성장, 성공의 이야기에는 자신의 일을 꿈꾸는 여성 후배를 향한 애정이 담겼다. 그 여정에는 까르띠에 여성 창업 이니셔티브가 함께했다.

전날의 뜨거운 여운이 다음 날인 29일에도 이어졌다. 비즈니스 리더 토크 세션이 열리며 많은 이들이 행사장을 찾았다. ‘까르띠에 여성 창업 이니셔티브(Cartier Women’s Initiative, CWI)’가 파트너로 함께해 행사 취지를 강화했다. 2006년 시작된 CWI는 매년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이끄는 여성 창업가 30인을 전 세계에서 선발해 지원하고 있다. 이번 비즈니스 리더 토크 세션의 포문을 연 문우리 포티파이 대표, 박지원 세이브앤코 대표 역시 2023년과 2024년 각각 CWI 펠로우로 선정돼 동아시아 지역 1위에 올랐다. (정신의학과 전문의 문우리는 병원에서만 환자를 진료하는 것에 한계를 느껴 온라인 멘탈 케어 서비스 포티파이를, 텍사스 대학교 디자인학과 조교수였던 박지원은 남성 위주의 디자인, 정보의 콘돔 패키지에서 문제를 발견해 세이브앤코를 설립했다.) “CWI는 단순한 창업이 아니라 소셜 임팩트를 미치는 여성 창업가에게 관심과 혜택을 주는 프로그램이에요. 자칫 소셜 임팩트와 실리적 사업을 분리해서 생각하기 쉽잖아요. 제가 CWI에서 만난 아프리카의 한 여성 창업자는 수입산 이유식만 본국에 유통되는 것에 문제를 느껴 현지 식재료를 사용해 집 뒷마당에서 사업을 시작했어요. 그걸 보며 우리가 하는 작은 생각과 일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체감했죠.” 문우리가 작지만 의미 있는 도전에 대해 언급했다. 뒤이어 박지원은 “창업이란 새로운 도전은 사실 거절과 실패의 연속이에요. 그러나 그 실패와 거절을 통해 성장한다는 마인드가 필요해요”라고 단단한 마음가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뒤이은 세션에는 장기하, 혁오, 백현진 등 뚜렷한 개성의 아티스트를 이끄는 강명진 두루두루 아티스트 컴퍼니 대표가 등장했다. 강명진은 일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미덕으로 ‘솔직함’을 꼽았다. “성경에 믿음, 소망, 사랑 중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잖아요. 비즈니스에서 제일은 ‘믿음’입니다. 실수도, 잘못도 회복할 수 있지만 신뢰는 그렇지 않아요. 아티스트에게 피드백을 할 때도 마찬가지죠. 설령 다수가 좋아하지 않더라도 솔직한 예술이야말로 가장 오래간다고 느끼거든요.” 뒤이어 박신후 오롤리데이 대표는 ‘행복’을 중요시하는 자신의 철학을 브랜드에 투영하고 이를 대중과 함께하며 쌓아온 경험을 공유했다. “사업 10년 차 무렵이 가장 힘들었어요. 이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겨 ‘이런 지옥이 어딨을까?’ 싶을 정도였죠. 그런데 제가 좋아하는 일이기에 이 모두를 과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무수히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쓰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맞다고 봐요.” 궁극의 모든 선택에는 자신의 행복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 의견이다.


예측 불가능한 매일 속에서 자신을 믿고 나아가는 태도야말로 주체성의 원천이다. 기쁨과 슬픔이라는 솔직한 감정이 교차한 ‘2026 보그 리더’를 마무리하며 다음을 기다린다. 자리를 메운 여자들의 행복하고도 씩씩한 걸음 위에서 또 다른 가능성의 이야기가 시작될 테니까. VK
- 컨트리뷰팅 에디터
- 유승현
- 포토그래퍼
- 박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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