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그 포토 스튜디오 #4 무대 뒤에서 벌어진 일
누구나 주인공을 꿈꾼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우리는 알게 된다. 한 편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것이 무대 위 주인공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무대를 디자인하고 비추며, 움직임을 만드는 일을 통해 각자의 서사를 쓴다. 화창한 봄날, ‘보그 포토 스튜디오’를 통해 무대와 스크린 뒤에서 작품을 완성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무술감독, 캐스팅 디렉터, 극장장, 연출가, 무대 디자이너, 조명 디자이너, 크리처 무브먼트 아티스트, 기술감독, 특수분장사까지 작품 뒤 사람들의 세계도 다채롭다. 부러진 가지 끝에 새순이 돋고 보이지 않는 뿌리에도 양분이 쌓이듯, 이들의 시간에도 수고 끝에 결실이 맺힌다. 우리가 마주하는 작품은 결국 멈추지 않고 성장해온 이들의 손끝에서 완성된 것이다.

무술감독 정윤헌, 서민우, 김경애, 김예은

격렬한 액션 신 뒤에는 언제나 무술감독 정윤헌이 있다. 액션 동작부터 스턴트, 카 체이싱 같은 장면의 움직임을 설계하고, 촬영 각도를 조율하며, CG·VFX 팀과 협업해 하나의 액션 신을 완성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제대 후 우연히 ‘스턴트맨’이라는 직업을 접한 그는 정두홍 감독이 운영하는 액션 스쿨을 찾아 연습실과 장비 정리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184cm의 큰 키를 장점으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군도: 민란의 시대> 등에서 정우성, 강동원 대역을 맡았고, <베테랑> <파묘>를 비롯해 <메이드 인 코리아> 시즌 1·2까지 다수의 작품에 무술감독으로 참여했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찍을 때 중국 벌판의 석탄 기차에서 뛰어내렸는데, 그 순간이 아직도 짜릿하게 기억에 남아요. 아드레날린이 너무 돌아 촬영이 끝나고도 손이 덜덜 떨렸다니까요. 그 기분에 이 일을 못 그만둬.” 촬영장의 흥분을 전하는 것도 잠시, 그는 후배들의 안전을 감안해 현장에서는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제가 현장에서는 칭찬에 야박해요. 조금이라도 긴장이 풀리면 사고로 이어지니까, 가끔 ‘고생했어’ ‘잘했어’가 전부지. ‘저 양반이 왜 저래?’라고 하겠지만 오늘은 마음껏 칭찬해볼게요.(웃음)” 이번 촬영에는 평소 호흡을 맞춰온 서민우, 김경애, 김예은도 참여했다. 그는 서민우를 “영상과 액션 설계를 함께 고민하는 파트너이자 현장을 유쾌하게 만드는 친구”라고 칭찬한다. 김경애는 “팀 막내로 시작해 이제는 와이어 액션을 비롯해 다양한 스턴트를 익힌 베테랑”, 김예은은 “팀에 합류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막내”라고 덧붙인다. 오늘 자리하지 못한 팀원들까지, 후배들과 호흡을 맞출 때면 천군만마가 부럽지 않다.
캐스팅 디렉터 이기훈, 곽재준

주인공부터 그의 친구와 가족, 행인, 카페 주인까지. 영화나 드라마 한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몇 명에 이를까. 이기훈 캐스팅 디렉터는 작품의 시작점인 주연배우부터 촬영이 종료될 때까지 필요한 조·단역 캐스팅을 담당한다. “단순히 배우를 소개하는 것을 넘어 작품 전체의 결을 완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작업이에요. 그림을 그릴 때 물감 색을 고르는 일과 비슷하죠.” 그의 사전에 비슷한 인물은 없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참여할 당시, 김희성(변요한)이 후대에 기록을 남기기 위해 을사오적과 정미칠적을 촬영하는 장면에서는 실제 역사 사진을 뒤져가며 가장 닮은 인물을 찾으려 애썼다. 그의 집요한 디테일은 팀원 곽재준에게도 이어진다. 두 사람은 방영을 앞둔 <취사병 전설이 되다>를 위해 수많은 연극·뮤지컬 배우들의 오디션을 봤고,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한 <허수아비>에서는 새로운 얼굴을 찾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현장에서 배운 것이요? 순발력이죠. 캐스팅을 하다 보면 감독님이 원하는 이미지와 배우라는 조각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거든요. 예기치 못한 변수도 있고요. 즉각적으로 새로운 배우를 추천할 수 있는 순발력이 캐스팅 디렉터의 미덕이에요. 대신 밤낮없이 현장에서 울리는 카톡 때문에 깊은 잠은 포기한 지 오래입니다.(웃음)”
연출가 심재찬, 극장장 임수진, 무대 디자이너 이인애

소극장 산울림은 한국 연극의 산실이다. 1985년 연출가 고(故) 임영웅 선생이 개관한 후 많은 배우, 연출가, 스태프가 이곳을 거쳐가며 한국 연극사에 중요한 장면을 만들어냈다. (임영웅 선생은 1969년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초연하며 국내 부조리극을 알린 인물이다.) 내년이면 연극계에 발을 들인 지 50년이 되는 연출가 심재찬에게도 이곳은 특별한 의미다. 그가 열아홉 살이던 1972년, 명동예술극장에서 임영웅 선생이 연출한 <고도를 기다리며>를 본 날의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이후 선생과 인연이 닿은 그는 극장이 문을 여는 날부터 함께했다. “나를 아주 고생시킨 공간이야. 그때는 꼬마였으니까 연출만 배울 수 있나, 손에 잡히는 일은 다 했지. 청소부터 세트 짓고 예산 짜는 일까지, 근데 그 고생이 내가 연극계에서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양분이었어요.” 옆에 있던 임영웅 선생의 딸이자 극장장 임수진이 말을 보탰다. “지금 1층 카페도 당시엔 아버님과 단원들이 직접 운영했어요. 임대할 정신도 형편도 없으니까 매일 공연 끝나면 아버님과 선생님, 배우들이 맥주 나르고 그랬죠.” 그렇게 다들 스승과 제자, 연출과 배우, 스태프를 넘어 가족처럼 두 손 거들어 산울림을 만들어냈다. 긴 시간 산울림의 무대 디자인을 맡아온 이인애 역시 1989년 이곳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본 것을 계기로 연극인의 삶에 접어들었다. 한국 연극계의 세대를 이어온 공간인 셈. 다만 OTT, 브랜드 팝업처럼 보고 즐길 거리가 넘쳐나는 시대에 선배 연극인으로서 이들의 고민도 크다. 연출가 심재찬은 “영화나 뮤지컬이 산업으로 성장한 시대에 언제까지 ‘연극계를 보호해달라’는 말만 할 수는 없다”며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그럼에도 연극의 가능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극장장 임수진은 연극의 본질을 이렇게 설명한다. “연극의 매력은 사람과 사람이 마주한다는 사실입니다. AI를 비롯해 디지털 기술이 절대 대체할 수 없거든요. 제가 살아온 날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고도를 기다리며> 무대를 보아왔습니다. 근데 매번 달라요. 그날의 관객과 배우의 감정에 따라 공연의 공기가 달라지거든요. 서로 기운을 주고받고, 침묵 속에서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는 것, 그 매력에 우리가 연극하는 거 아닐까요?”
발레 기술감독 박창모

막이 열리고, 무대 위 발레 공연이 시작된다. 무용가만큼 이 순간이 떨리는 이는 국립발레단 기술감독 박창모다. 그는 무대 전환부터 조명, 음향, 기계장치 같은 기술적 요소를 총괄하며 발레리노, 발레리나가 문제없이 공연할 수 있도록 조율한다. 단원들의 일정과 예산까지 챙기며 공연 뒤편의 흐름도 찬찬히 관리하고 있다. “최근에 작업한 존 노이마이어의 <인어공주>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빠듯한 일정에 해외 스태프와 협업해야 했고, 기술적으로도 난도가 높은 무대였어요. 관객은 눈치채기 어렵지만 많은 장치와 인력이 필요했거든요.” 그만큼 그는 지난 시간 동안 ‘협업’을 가장 크게 배웠다. 무용수나 스태프만으로는 공연이 완성되지 않는다. 모든 역할이 맞물릴 때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무대에 오른다. 그의 섬세한 조율은 발레리노로 커리어를 시작한 데서 비롯된다. 중고등학교 시절까지 유도를 하던 그는 대학 입시를 앞두고 뒤늦게 발레에 눈을 떴고, 스물세 살에 국립발레단 무용수로 입단할 만큼 빠르게 실력을 키웠다. 하지만 이 같은 성장도 잠시, 발레리노로서 커리어를 고민하던 그에게 당시 예술감독 최태지 단장이 “무용수가 무대감독을 맡으면 무대를 더 잘 이해하지 않겠느냐”며 새로운 제안을 건넸다. 무대에서 내려온 것에 아쉬움을 느낄 새도 없이 스태프와의 생활과 무대를 컨트롤하는 일이 그에게 잘 맞았다. 또한 그의 인생에서 불가분한 발레와 함께한다는 게 여전히 그를 행복하게 한다. 촬영장에 선 그는 이제 조명을 받는 일이 조금 낯설다고 했다. “무대에서 내려와 다른 사람을 비춰왔으니까요. 오늘 촬영한 사진만큼은 발레를 전공하고 아이들을 가르쳐온 아내에게 먼저 보여주고 싶어요. 지방 공연으로 1년이면 200일 가까이 집을 비울 때도 묵묵히 아들을 기르며 응원해줬어요. 지난해부터 아내가 투병 중인데, 작은 힘이 되면 좋겠군요.”
크리처 무브먼트 아티스트 전영, 임희종, 송승욱, 정의영

올해 상반기 기대작으로 꼽히는 연상호 감독의 영화 <군체>.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봉쇄된 건물 안, 감염자들의 기괴한 움직임을 만든 안무가 전영, 임희종, 송승욱, 정의영이 ‘보그 포토 스튜디오’를 찾았다. 촬영에 앞서 네 사람이 몸을 푸는 모습은 모든 스태프를 놀라게 했다. (임희종의 오른쪽 팔꿈치가 왼쪽 어깨까지 넘어온다는 걸 믿을 수 있을까.) 전영은 본 브레이킹 댄스를 결합한 크리처 무브먼트로 <부산행> <킹덤> <스위트홈> 등 K-좀비의 세계를 열었다. <군체>는 그를 필두로 모션아키텍트와 코스모스인아트 소속 안무가들이 모여, 시나리오를 토대로 프로덕션 초기 단계부터 움직임을 제안했다. 이런 협업은 무한에 가까운 움직임을 가능케 했고, 이전과는 다른 감염자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전영은 “갓 태어난 아이처럼 뭔가 어설프지만 본능적인 이들이 네 발에서 두 발로 목적을 향해 일어서 걷게 되는 과정을 보시면 등에 한기가 서리지 않을까 싶어요”라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군체>는 안무가들에게도 새로운 도약점이 되었다. 무대 위에서 긴 호흡으로 관객을 만나온 순수 무용가 임희종과 송승욱에게는 짧은 장면 속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각도나 떨림 같은 디테일을 더 정교하게 다듬는 기회였다. 그만큼 안무가들 역시 자신만의 예술 서사를 새로 써 내려가고 있다. “제 삶이 어떤 장르의 작품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지금도 새로운 장면이 쓰이는 과정이라고 여기거든요. 진행 중인 시리즈물 같달까요? 어떤 장면이 펼쳐질지 모르지만 열심히 춤추겠습니다.”
뮤지컬 연출가 김민정, 무대 디자이너 박상봉, 조명 디자이너 최보윤


해외 라이선스 대작 위주로 돌아가던 국내 뮤지컬 신에 창작극 바람이 불며 균열이 일고 있다. 2022년 초연한 <더 테일 에이프릴 풀스>도 그중 하나다. 연일 매진 행렬을 이어가며 올해 세 번째 시즌을 준비하고 있다. 작품은 1819년 영국에서 발표된 최초의 뱀파이어 소설 <뱀파이어 테일(The Vampyre: A Tale)>의 저작권 논쟁에서 착안한 창작극이다. 무대 위에는 단 두 명의 배우만 등장하지만 작은 몸짓과 호흡 하나하나가 무대, 조명, 의상과 긴밀하게 호응하며 은유를 만들어 관객을 매료한다. 온라인에는 음악과 무대, 조명, 의상 속에 숨겨진 단서를 찾아낸 관객의 후기가 가득하다. 연출가 김민정은 <더 테일 에이프릴 풀스>를 “어떤 공연보다 ‘공이 많이 드는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뮤지컬 넘버 17에 “빛과 어둠의 세계에 나뉘어 서 있다. 새벽빛이 어둠을 밀어내는 걸 볼 때면 그곳에 머물고 싶어진단 말이야”라는 대사처럼 작품의 중심 키워드를 ‘경계(Border)’로 삼았다. 자유와 규범, 인간과 신, 빛과 어둠처럼 양극단의 개념이 뒤엉킨 시공간 속 두 인물을 구현하기 위한 고민이 이어졌다. 이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무대 디자이너 박상봉은 거울과 창, 공간의 레이어를 활용해 빛이 스며드는 구조를 만들었고, 조명 디자이너 최보윤은 밤을 밀어내는 새벽의 미묘한 블루 톤을 설계했다. 이런 디테일은 스태프의 끝없는 대화 속에서 완성됐다. 무대 디자이너 박상봉은 “스태프 모두가 작품 의도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은 덕분”이라고 말한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랄까요. 저녁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빛이 내부로 침투하는 장면을 고민했어요. 클래식한 무대에 하이글로스 바닥을 쓰자는 연출가님의 용감한 판단에서 호수가 연상됐고, 거울 이미지도 자연스럽게 따라왔죠. 스태프 모두가 같은 목표를 바라봤기 때문에 관객에게 아름다운 평가를 받은 듯합니다.”
특수분장사 심주영

북적이는 신사동 거리 한쪽, 특수분장사 심주영의 작업실에 들어서자 그가 해사한 웃음으로 ‘보그 포토 스튜디오’ 팀을 맞이했다. 그의 미소와 달리 공간의 풍경은 다소 낯설다. 작업대 위에는 실리콘 피부로 만든 손과 발, 아직 완성되지 않은 얼굴 모형이 놓여 있다. 수술실을 연상케 하는 신체 더미(Dummy)는 작품 속 그럴듯한 소품이 아니라 인체를 정밀하게 관찰하고 재현한 결과물이다. 오랫동안 미술을 공부해온 그는 인체가 지닌 입체감에 매료되어 조형과 특수분장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20여 년 동안 특수분장사로 활동하며 인체라는 새로운 캔버스를 탐구했고,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블랙의 신부>, 뮤지컬 <드라큘라> <데스노트> 등 다양한 작품에서 팬텀(Phantom, 인체모형)을 제작해왔다. “제 일이 가장 크게 드러나는 것은 디테일이죠. 피부의 두께감, 색의 미묘한 층, 완벽하게 대칭적이지 않은 형태 같은 것들이요. 사람들이 하나하나 주의 깊게 보지는 않지만 결국 작품의 진짜 온도는 그런 데서 생겨나거든요.” 최근 그의 관심은 한층 깊어지고 있다. 영화와 공연 속 팬텀을 만드는 일을 넘어, 의료와 재난 대응 훈련에 쓰이는 인체모형 제작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크린 밖 현실에서 ‘몸’을 연구하는 작업이다. “제 삶은 화려한 판타지보다는 느린 성장 드라마에 가까워요. 단번에 완성되는 장면보다 오래 쌓이는 시간이 더 중요했고, 저도 그렇게 조금씩 저만의 방식과 결을 만들어왔죠. 다만 그 안에 작은 판타지가 있다면, 보이지 않던 것을 결국 눈앞에 만들어낸다는 게 아닐까요.”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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