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향인이면서 외향인이다? ‘사회참여형 외톨이’에 대하여
나는 사회참여형 외톨이다. 집단에 무리 없이 섞이고 때론 즐겁지만, 자발적 고독이 필수다. 내향인과 외향인 모두에 속하면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 ‘이향인’이란 새로운 용어가 나왔다.

국립현충원에서 어느 순직자의 묘비 앞에 섰다. 일렬로 늘어선 묘비 수천 개 가운데 개인적으로 아는 분은 없지만, 헤드셋의 음성이 시키는 대로 하는 중이었다.
“자, 이제 죽은 자의 세계에서 산 자의 세계로 넘어갑니다.” 현충원을 나온 나는 자동차가 빠르게 오가는 육교로 향했다. ‘오디오 워킹 투어형 공연’인 <리모트 서울>에 참가 중이었다. 독일 창작 집단 리미니 프로토콜은 관객을 공연의 주연으로 내세우고, 공연장이 아닌 도시를 무대로 삼는다. 참여자들은 헤드셋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에 따라 2시간 동안 도심을 걸으며 사유한다. 2013년 베를린에서 초연한 이후 뉴욕, 런던, 상하이 등 65개 도시에서 진행됐고, 이번엔 서울이었다.
이날은 20여 명의 참여자가 국립현충원을 지나 지하철을 타고 강남의 성당과 빌딩, 인도를 걸었다. 때때로 미션도 주어진다. 가방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물건을 꺼내 상대방에게 보여주라 하고, 스스로 주연일지 조연일지 결정한 뒤 그에 걸맞은 걸음걸이를 권한다. 가장 재밌는 부분은 동작역에 둘러앉아 개찰구를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본 10여 분이다. 음성은 행인들을 배우라 명명하고 “자신의 인생에서는 모두가 주연”이라고 말한다. 바쁨을 연기하는 남자, 아이와 실랑이를 연기하는 엄마, 헤드셋을 낀 우리를 쳐다보다 가방을 떨어뜨리며 놀람을 연기하는 아주머니 등 우리는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를 지켜보다 박수를 보냈다. 혼자서는 도저히 못할 행동이지만 무리에 섞여 있으니 가능했다.
시험에 들기도 했다. 음성은 양 갈래 길에서 어디로 갈지 선택하라 했다. “집단 지성의 힘을 발휘해보세요.” 인사도 통성명도 없던 우리는 손짓으로 의견을 모았다. (헤드셋을 끼고 있어 말을 할 수 없었다.) 나는 뒤쪽에 가만히 서서 무리에 따르리란 입장이었다. 나름 의견은 치열해지다가(그만큼 손짓이 빨라지다가) 우린 오른쪽 언덕으로 가기로 했다. 음성은 “이런, 왼쪽입니다”라고 일러주었다. 집단 지성의 오류다.
공연이 막바지로 갈수록 음성은 우리를 집단으로 묶었다. 같이 전력 질주 하라 하고, 도로 반사경에서 단체 셀피 촬영을 요구했다. GS아트센터 로비에서 춤을 추라고 할 때는 집에 가고 싶어졌다. 나는 재미있다가도 서로를 보며 교감하라든가, 단체로 뭔가 하라고 할 때는 조금 힘들었다. 다행히 마지막엔 혼자 고층 빌딩에서 서울을 조망하라 했다. “수많은 개인이 움직이는 저 도심 속, 나는 물방울 하나인지, 수많은 물방울이 모인 흐르는 물인지”에 관한 사유는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나는 개인이자 집단이고, 집단이자 개인이니까. 아, 그러니 내향인인 나는 집단에 어찌 어울려 살아야 하나.
같은 날 영화 <군체>의 화보 촬영을 준비하러 <보그> 사무실에 갔다. 좀비를 연상시키는 감염자들과 생존을 걸고 싸우는 이 영화에서도 집단 지성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스포일러 때문에 자세히 말할 수 없다.) 영화를 보면 집단 지성은 우리를 과연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었을지 의문이 든다. 개미는 개별 개체의 지능은 높지 않지만, 페로몬이라는 화학물질을 매개로 정보를 공유하며 집단 전체가 더 효율적인 결정을 내린다. 하지만 잘못된 정보가 전파되면 한자리에서 원을 계속 돌다가 죽는 앤트밀(Antmil) 현상이 발생하기도 한다. 공연에 참가한 20여 명 역시 그만큼 살벌하진 않지만 집단 지성을 발휘해도 길 선택에 실패했다. 역사에서는 집단 지성이 일으킨 비극을 얼마든 찾을 수 있다.
하루에 서로 다른 매체에서 ‘집단 지성’을 이슈로 던졌다며 남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라는 계시 아닐까.” 그는 나의 ‘우주의 기운’ 타령에 지쳤기에 “알겠으니 그만하라”고 했다. 그에게 <리모트 서울>에 참가한 감상도 들려줬는데, 그는 자신이라면 절대 참가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세상에, 20여 명이 같이 2시간 동안 걷는다고? 게다가 춤도 춰? 거봐, 넌 역시 외향인이야.”
그와 나의 외향인, 내향인 논쟁은 꽤 오래되었다. 누가 봐도 내향인인 그는 나를 두고 “내향 호소인”이라고 했다. 내향인은 절대 단체 활동에 스스로 참가하지 않으며, 나처럼 약속이 많지 않다는 거였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과 어울릴지라도 귀가하면 ‘사회적 숙취’에 시달렸다.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들어온 날도 마찬가지다. 침대 아래 다른 세계로 꺼져버리고 싶을 만큼 지친다. 인터뷰를 한 날에는 듣는 귀와 말하는 입을 다 소진한 기분이라 며칠은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인터뷰이와 대화하는 시간은 즐겁다. 그러고 보니 내가 내향인이라고 소개할 때마다 이런 유의 부연 설명을 했다. “지금 당신들과 있는 이 순간은 즐거워요. 충실하고 싶고요. 그런데 혼자만의 시간은 꼭 필요해요. 그러니까 내일 또 만날 순 없어요.”
나의 항변도 소용없이 친밀한 사람(남자 친구)에게 외향인이라고 ‘가스라이팅’을 당하다 보니 최근 들어 내가 정말 외향인인가 싶기도 했다. MBTI에서 I가 90% 나오는 이유도, 내가 그런 성향일 거라고 몰아가기 때문 아닐까. 김영하 소설가가 한 방송에서 “(MBTI는)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를 검사하는 것”이라 했듯이 말이다.
최근 드디어 날 설명해줄 단어를 찾았다.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이 만든 내향성, 외향성의 이분법 모두에 애매하게 발을 걸친 이들을 위한 용어, 이향인(Otrovert). 임상심리학자 라미 카민스키(Rami Kaminski)가 ‘다른’을 뜻하는 스페인어 ‘Otro’와 방향을 돌리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어근 ‘-vert’를 결합해 만든 단어로, 번역할 때는 ‘다를 이(異)’ 자를 쓴다. 이들은 내향인, 외향인 어디에도 속하지 않거나 속하는, 사교적인 외톨이다. 큰 특징은 집단의 소속감이나 인정을 갈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단체에서 겉돌지도 않고 무리 없이 어울리는데, 그 한가운데서 같이 동요하기보단 한 발짝 물러서서 관망한다. 또한 단체의 기준보다는 자신을 더 신뢰하고, 정서적으로는 혼자 있을 때 더 만족한다.
나는 언제나 출발점이 ‘우리’가 아니라 ‘나’였다. 내가 이 직업을 선택한 이유도 책상에 앉아 혼자 글을 쓰기 때문이었다. 물론 틀렸다. 인터뷰만 해도 상대와의 깊은 소통이고, 촬영할 때면 많은 스태프와 여러 사항을 조율하고, 사무실에는 언제나 동료, 선후배, 상사가 있다. 어쨌든 단체 생활을 하며 큰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글 쓰는 나만의 시간도 즐기고 있으니, 이향인으로선 최적의 직업이 아닌가 싶다. 아, 이렇게 이향인으로 나를 규정해버렸다.
이향인은 집단보다 개인화된 문화가 주류가 된 이 시대에 자연스러운 출현이다. 어릴 때부터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집단주의와 소속감을 강요받고 초연결로 피로해진 이들이 이향인을 자처할 것 같다. 이향인의 발견에 즐거워하자 친구는 “역시 한국인은 자기를 규정받고 싶어 한다니까”라며 웃었다. 나는 유치하게 항변했다. “이향인은 외국에서 먼저 나온 개념이거든? 카를 융도 외국인이고 MBTI도 외국에서 나왔거든? 그리고 별자리도!” 나의 진심은 이거였다. 규정받고 싶기보다는 이해받고 싶은 것이다.
물론 카민스키가 수많은 환자를 진료하며 도출했다는 이향인의 모든 성향에 해당되진 않는다. 예를 들어 ‘섞여 들어가기보다 차별화되길 선호한다’가 있는데, 난 집단에선 무색무취이고 싶다. 20여 명이 양 갈래 길에서 거수투표 할 때 다수에 맞춰 뒤늦게 엉거주춤 손을 드는 유형이랄까. 그러니 이향인은 그저 나를 이해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 전부를 설명하지 않는다. “우리와 다른 사람의 차이만큼 우리와 우리 자신의 차이도 크다”고 몽테뉴가 말하지 않았나. 오늘의 나와 어제의 내가 다르고, 분마다 자기 분열을 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가수 김국환도 몽테뉴와 비슷한 사상을 노래했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한 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앞서 방문한 국립현충원의 묘비 뒷면에는 고인의 돌아가신 날짜와 장소가 적혀 있다. 1953년 국군수도병원의 한 침대에서 순국하신 분의 희생은 고귀하고 감사하지만, 결국 우리가 맞이할 죽음에선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겉치레를 다 거두면 혼자라는 진실만 남으며, 그 혼자인 나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봐야겠다는. 물론 사회인의 도리는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말이다. VK
- 피처 디렉터
- 김나랑
- 아티스트
- 존 스프롤(John Spr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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