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손을 찬양하다

2026.05.15

손을 찬양하다

시간을 들여 책을 읽지 못한 지 꽤 됐다. 생각을 정리할 새도 없이 벌인 일들을 수습하고 새로운 일에 착수하느라 삶의 속도를 조정하기는커녕 시간의 유속에 떠내려가는 듯하다. 그간의 경험상 이럴 때일수록 어떻게든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한다. 안개 자욱한 흐린 머릿속에 빛을 던져주고, 어수선한 마음을 산뜻하게 하는 데 책만 한 게 없다. 책을 펼쳐 읽어나가면서 오래도록 다시 읽고 싶은 문장이 있다면 연필로 줄을 긋는 그때야말로 순수한 의미의 정화 시간이다.

스페인 출신의 헤수스 카라스코. 낯설고 생소한 이름의 작가가 쓴 네 번째 장편소설 <손을 찬양하다>(2026, 민음사). 책 제목과 소개 글만 읽고 이 책에 끌렸다. 손으로 하는 작업의 미덕, 의미, 가치를 존중하고, 손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아니라 손으로 뭔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오래도록 이야기하는 그런 책이라 짐작했다. ‘손을 찬양’하는 것이야말로 지금의 내게 꼭 필요한 일 같다. 동시에 너무 많은 종류의 일을 살펴야 하고, 여기저기 쉴 새 없이 돌아다니며 일하는 상황이 아닌가. 단순하고 명징한 몸짓, 산만하지 않고 집중해서 하나의 일에 매진하는 작업, 바로 손 쓰기다.

헤수스 카라스코 ‘손을 찬양하다'(2026, 민음사)

에세이처럼 보이는 이것은 소설이다. <손을 찬양하다>는 크게 보면 두 가지 플롯을 품고 진행된다. 하나는 ‘임시성’, ‘일시적 머무름’에 관한 통찰이다. 화자인 ‘나’는 작가다. 그는 아내 아나이스의 오빠 후아루의 친구인 이그나시오가 투자 목적으로 오래전 매입했다는 이 집에 들어섰다. “처음 발을 들인 날 아침에 우리는 이미 그 집이 언젠가 철거될 것을 알고 있었다.”(9쪽) <손을 찬양하다>의 첫 문장이다. 그렇다. 이 집은 결말이 정해져 있다. 철거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이그나시오의 계획에 따르면 이 집은 호화로운 호텔로 탈바꿈해 부를 창출할 것이다. ‘나’는 철거 전까지 비어 있는 이 집을 가족과 함께 머물며 사용한다.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곧 철거되는 집에서 산다는 건 이들 가족에게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집을 대하고, 살아가게 만든다.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길게 ‘나’는 이 집에 머물렀다. 무려 10년. 그사이 ‘나’와 가족은 집 여기저기를 손보고 수리하고 가꾸고 돌봐왔다. ‘나’의 가족, 친구, 지인, 동네에서 만난 사람들, 동물들, 곤충들까지 이 집에 드나들고 교류하기에 이른다. ‘나’는 임시적인, 잠시 머무는 이 거처에서 글을 쓰는 게 좋고 글이 잘 써진다. 그러다가 때때로 사람들을 만나고, 그사이 변화한 것과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들을 지켜본다. 이때 <손을 찬양한다>의 ‘나’는 깨닫는다. 일시적 머무름이란 단지 자신과 가족의 주거와 이 집의 상태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조금만 생각을 확장해보면, 세상 모든 일에는 결국 끝이 있기 마련이다. 삶도 죽음에 이를 것이다. 누구도 이 사실 앞에서 예외일 수 없다. 삶의 임시성이라는 이 자명한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삶을 좀 더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집에 머물고, 이 집을 가꾸며, 그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모든 괴로움의 어머니는 바로 죽음이다. 시간의 저편에 죽음이 있다는 걸 알면서 그 죽음에 힘겹게 도달하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끊임없이 고통이 솟아나는 샘과 같다.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죽음에 가까이 다가간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근본적인 과제다. 그렇게 가까이 다가가는 과정에서 사실 삶이 풍요로워진다.”(83~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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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찬양하다>의 또 하나의 중요한 서사는 단연 ‘손’이라는 신체와 그 활동에 맞춰 진행된다. 손을 쓰는 육체노동, 창의적 작업과 활동에 관한 경험, 역사, 일화가 펼쳐진다. 화자인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쓰던 망치를 집어 들고 뭔가를 만들려다 새삼 아버지의 손과 자신의 손을 생각한다. 교사로 재직하며 생계를 꾸렸던 아버지가 진정 열정을 보인 일은 손으로 하는 일이었다. 목공 선반 작업에서 그림 그리기로, 석고 부조로 관심의 영역을 옮겨가며 손으로 뭔가를 끝없이 만들던 아버지를 기억한다. 한편 작가인 화자 ‘나’는 40년간 손으로 글을 써왔다. 글이란 머릿속에서 구상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아 손을 움직여가며 써야만 시작되고 진척되고 완결되는 것이다. 일단 손을 움직여 쓰기 시작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작가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글을 써나가는 것 같지만, 실은 손가락이 이 모든 것을 써 내려가는 것이다. 작가는 오히려 자신이 무엇을 쓸지 모를 때가 많다. 하지만 손가락은 알고 있다. “자기가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몰랐던 어떤 것을 손가락은 기억한다.”(216쪽)

임시 거처인 집과 손으로 하는 여러 활동을 통해 배우게 되는 것들이 <손을 찬양하다>라는 세계를 직조하는 긴요한 씨줄과 날줄이다. AI를 비롯해 엄청난 기술 발전과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사회에서 수작업, 수공예를 시도한다는 건 과연 어떤 의미일까. 손을 써서 직접 만들어가는 활동은 얼마간 ‘가변성과 부정확성, 불연속성과 흔들림’의 특징을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특징 덕분에 수작업은 “유일무이한 것, 예측 불가능한 것, 미완성된 것, 불완전한 것을 향한 동경”(193쪽)과 직결되고 연결된다. 손을 찬양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시, 내 경우를 돌아보게 된다. 키보드를 치든, 펜을 들고 글을 쓰든, 손을 움직여나갈 때, 나 역시 내가 쓰는 이 글이 어떤 꼴과 형태, 형식일지 알 수 없다. 그저 흔들리는 상태로 더듬거리며 문장 다음의 문장을 손이 이끄는 대로 써 내려갈 뿐이다. 불완전한 이 과정을 지나고 나면,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나는 얼마간 새로 태어난 것만 같다. 이것이야말로 손이 이끄는 마법, 글쓰기의 놀라움일 것이다.

정지혜

정지혜

영화 평론가

영화 평론가입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남도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일했고, 부산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등에서 심사위원을 맡았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 아카입>의 책임 기획 및 필자였고, 하마구치 류스케의 <카메라 앞에서 연기한다는 것> 한국어판에 평설을 썼으며, <겨울 연습: 빛, 볕, 흐름, 소리>에 공저로 참여했습니다. 비평 워크숍 ‘플로모션(Flowmotion)’을 운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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