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 그 자체에 집중하는 패션

젊음과 영생을 위해 젊음의 묘약을 들이켠 영화 속 주인공들. 동화 속 마녀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젊음을 원하듯 패션이 어느 때보다 젊음 그 자체에 집중하고 있다.



칼 라거펠트가 다시 한 번 론칭한 자신의 시그니처 브랜드 ‘칼 라거펠트’ 쇼룸. 그가 디자인한 옷들은 한마디로 발육이 좋은 10대부터 기껏 20대 중반까지나 아슬아슬하게 입을 만했다. 튜브를 연상시킬 만큼 지독하게 날씬한 스키니 팬츠엔 라거펠트의 옆모습을 간결하게 도안해 반복 패턴으로 만들어 은박으로 코팅돼 있었다. 또 소품들은 멀티숍 꼴레뜨의 계산대 옆에 진열하면 딱 좋을 만큼 알록달록 아기자기한 디자인이 대부분. 자신이 금쪽같이 여기는 고양이 ‘슈페트’를 캐릭터로 만든 플라스틱 브로치나 동전 지갑은 문방구에서 파는 초등학생용 가방 장식처럼 보일 정도였다. 동공을 찌릿찌릿하게 자극하는 형광색까지!

1933년생, 한국 나이로 치면 여든 살이 넘은 어르신인 칼 라거펠트! 숙녀에게 나이를 묻는 게 ‘금기’이듯 패션계에선나이를 캐묻거나 굳이 밝히는 일은 촌스러운 행위지만, 아무튼 그는 여든 살이 훌쩍 넘었는데도 여전히 정력적으로 일하는, 패션 십장생이자 불로장생의 상징이다. 그런데 패션계의 불사신으로 숭배되는 인물이 자기 이름을 걸고 만든 브랜드가 이토록 젊은 옷이라니(게다가 몹시 날씬해야 맘 편히 입을 만한 옷들이라니)! 라거펠트는 올봄 샤넬 컬렉션을 위해서도 20대 미대생 느낌을 원했다.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다 얼굴에 물감이 묻은, 붓으로 낙서한 듯한 백팩을 한쪽 어깨에 멘 모델들이 런웨이에 줄지어 나왔으니까.

예순두 살 때 칼 라거펠트는 에디 슬리먼의 디올 옴므 정장을 입기 위해 40kg 이상 살을 뺐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늘 꽃미남 청년들이 호위 무사처럼 보필하며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패션이 영감을 얻을 때 ‘페도파일’처럼 무거운 주제와 관련 있는지는 좀더 연구해 봐야 할 듯). 그런데 라거펠트만 “청춘 만세!”를 부르짖을까? 패션 하우스들은 ABO식 혈액형 따윈 문제될 게 없다는 듯 하루가 멀다고 젊은 피를 수혈하길 원한다. 스튜어트 베버를 코치로 밀어내고 로에베 가문에 수혈되는 피는 서른 살도 채 안 된 J.W. 앤더슨. 스페인 출신의 170여 년 역사를 지닌 가죽 명문가가 어딘가 불손하고 경솔하며 거침없는 젊음의 광기와 충동 어린 디자인 성향에서 장점만 쏙쏙 빼먹겠다는 의도다. 하긴 청춘의 무모한 패기야말로 점점 맥 빠져가는 하우스의 존폐에 있어 꼭 필요한 응급조치이긴 하다. 젊은 태도와 젊은 이미지로 늘 건강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 게 패션의 속성이기도 하니까.

패션이 젊음에 꽂힌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 몇 시즌을 보면 유난스러울 정도로 여러 군데서 활어처럼 팔딱팔딱 뛰는 젊음이 쉽게 눈에 띈다. 고상한 프렌치 마담 룩의 대명사로 통했던 엠마누엘 웅가로의 후임자에 대한 패션계의 관전 포인트는? 인물이 누구냐보다 그 인물의 취향이 뭐냐였다. 잠깐 머물다 만 여러 디자이너들에 이어 웅가로를 맡게 된 파우스토 푸글리시는 30대 후반으로 패션 연령대에서 볼 때 ‘중후’한 세대. 그러나 그가 추구하는 스타일은 가장 젊고 역동적인 펑크와 스트리트 감각이다. 파우스토가 운영하는 시그니처 브랜드는 20대의 광기 어린 이미지로 밀라노 패션 위크에서 승승장구 중. 지금 웅가로는 그 어느 때보다 젊은 모습으로 변신을 모색하고 있다.

패션이 간절히 원하는 젊은 피로 알렉산더 왕을 맨 먼저 꼽았어야 했다. 1983년생인 그는 2013년에 발렌시아가 하우스를 차지했다. 뉴욕 패션 위크 때 열리는 자신의 시그니처 컬렉션 피날레 때 긴 생머리를 찰랑대며 맹랑하게 춤을 추며 뛰어나오던 바로 그 청년이 발렌시아가 경영진들의 눈에 든 것(니콜라스 게스키에르는 25세에 발렌시아가 하우스에 입문했지만, 그때는 하우스가 지금처럼 유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스터 왕은 발렌시아가 하우스가 1940~50년대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전성기에 필적할 만큼 전 우주적으로 유명해진 뒤에 이곳에 들어왔다). 결과적으로 게스키에르 시절의 실험적이고 진보적인 디자인보다 알렉스식의 스포티즘과 스트리트 감각이 돋보이는 요즘. 상표 디자인은 물론, 수익을 창출해야 할 가방과 매장까지 모든 면에서 좀더 ‘웨어러블’한 라벨로 조금씩 변형되는 분위기다.



패션 적십자사의 혈액관리본부라도 찾고 싶은 걸까? 기사회생을 갈구하는 유럽의 오래된 패션 가문들 사이에서는 드라큘라처럼 젊은 피 냄새를 찾아 킁킁대는 상황이다(말 그대로 ‘혈안’이 됐다). 이태리 패션 명가 아이스버그는 지방시와 파코 라반에서 경력을 쌓은 알렉시스 마샬(이제 겨우 27세)을 캐스팅했다. 디즈니 캐릭터가 인쇄된 색색의 니트 스웨터로나 대중에게 알려진 아이스버그 데뷔쇼 직후 소감은? 역시나 “하우스가 젊고 모던해지길 원한다”였다. 이를 위한 긴급 처방은 ‘갸루’로 대표되는 일본의 대중문화. 덕분에 과거 디즈니 티셔츠가 나이 든 어른들이 젊게 보이려고 애쓰며 입는 옷이었다면, 알렉시스 마샬의 아이스버그는 젊은 세대가 입는 젊은 옷. 다시 말해 다가올 시즌이면 패션 위크 행사장 주위에서 파파라치들의 새로운 먹잇감이 될 옷!

그건 파코 라반도 마찬가지다. 몇몇 디자이너들이 들고 나면서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던 이 하우스가 이번 시즌에 계약한 인물이 패션계에선 화제가 됐다. ‘아토’의 듀오 디자이너 중의 한 명인 줄리앙 도세나가 그 주인공. 서른 살을 갓 넘긴 그의 파코 라반 역시 몇 달 후 토미 톤이나 남현범 사진에서 자주 보게 될 게 뻔하다(요즘 같아선 스트리트 사진가들이 찍은 사진에 얼마만큼 자주 등장하느냐가 그 컬렉션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니까). 쇼 피날레에서 파리의 밤을 상징하듯 건들거리며 걸어 나오던 소니아 리키엘의 파리지엔 숙녀들은 제랄도 다 콘세이사오에 의해 단숨에 산뜻한 파리지엔 걸들로 변신했다. 모델들의 뺨은 복숭앗빛으로 바뀌었고, 우아한 모피 스톨 또한 발랄한 백팩으로 대치됐다는 이야기다.

교과서에 게재된 성공 사례처럼 젊음과 함께 이룬 혁신에서 반드시 언급해야 할 상표는 겐조다. 아시다시피 겐조는 창립자 다카다 겐조의 후임자 안토니오 마라스 시대에 비교도 못할 만큼 현재 인기 절정의 순간을 만끽하고 있다. 겐조를 소유한 LVMH 간부들이 OC의 캐롤 림과 움베르토 레온에게 “너희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판을 깔아준 덕분이다. 또 생로랑은 ‘Yves’를 삭제한 뒤에 나이를 열 살 이상 거꾸로 먹은 것 같다. 스테파노 필라티가 고상한 숙녀에게 집중했다면, 에디 슬리먼은 LA와 런던의 발랑 까진 소년 소녀 취향이다. 예전 팬들이 전하는 수많은 ‘이브의 경고’에도 끄떡없이 건들대는 생로랑 걸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중(비평가들은 늘 당황하고, 바이어들은 늘 환호한다). 또 파리 패션계를 초월해 전 세계 소녀들의 새로운 ‘달링’으로 떠오른 기욤 앙리는 노숙한 까르벤을 수줍은 10대 소녀 분위기로 성공적으로 탈바꿈시켰다. 발렌티노 가문 역시 여인이 아닌 아가씨를 광고나 무대에서 원하고 있다. 모두 성공!

예를 더 들어볼까? 어딘지 으슥한 리카르도 티시는 지난 시즌, 아기 사슴 밤비를 끌어들여 키덜트 룩을 선보였다. 티시보다 좀더 으슥한 취향의 릭 오웬스는 터져나갈 듯 건강한 미국 여대생 스테핑 댄서들을 무대에 불러들여 아름다움에 대한 편협한 고정관념에 펀치를 날렸다. 마크 제이콥스의 루이 비통 마지막 쇼에서도 젊음의 흔적들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청춘의 심벌인 청바지와 바이크 재킷이 주얼 드레스 사이사이에 끼어 있었으니까. 셀린의 피비 파일로? 그녀가 우리 시대의 젊음 그 자체를 대표하는 스케이트 보드 룩에 빠져 있다는 건 계속해서 셀린 무대에 나오는 큼지막한 보드 스니커즈를 보면 알 수 있다. 올리비에 루스테잉이 만드는 발맹 컬렉션에선 아동복 코너에나 걸려 있을 법한 멜빵 의상의 하이패션 버전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거꾸로 쓴 야구 모자와 전갈 장식, 스터드 가죽 벨트 등으로 길거리를 배회하는 틴에이저들의 시시껄렁한 옷차림을 손맛 나는 꾸뛰르 의상과 짝지은 로다테의 멀리비 자매도 뺄 수 없다. 심지어 아퀼라노 리몬디가 전개하는 페이 무대에는 스누피까지 등장했다. 그렇다면 숙녀들의 대모 미우치아 프라다? 미우미우는 소녀 그 자체. 디올과 빅터앤롤프? 사립학교 교복에서나 볼 법한 와펜 장식이 이번 시즌상징이었다. 야구 점퍼와 함께 대학생들의 전유물이었던 스웨트 셔츠는 젊은 감각으로 스타일링할 때 없어선 안 될 필수 아이템이다. 멋쟁이들은 이 스웨트 셔츠를 샤방샤방한 풀 스커트와 함께 입고, 디자이너들은 스웨트 셔츠의 앞가슴에 또 어떤 기발한 메시지를 넣을지 시즌마다 고민한다. 당대 패션계의 젊은 피, 크리스토퍼 케인이 대표적인 예다.

한편, 패션 아이돌을 중심으로 한 패거리 문화도 젊은 패션에 폭발적 영감을 선사하며 가열된 패션 엔진의 동력이 됐다. 발맹의 올리비에 루스테잉이 일하는 방식을 보며 패션 칼럼니스트 린 예거는 이렇게 묘사한 적이 있다. “루스테잉과 그의 팀(칠레, 덴마크, 푸에르토리코, 그 밖의 먼 나라에서 온 쿨한 젊은이들)은 가끔 밤늦게까지 일한다.” 현재 패션이 원하는 바로 그 ‘쿨한 젊은이들’이 그들이다. 뉴욕에선 알렉산더 왕, 조셉 알투자라 등이 주변에 매력 만점 아가씨들을 늘 끼고 산다. 미식축구 선수들이 와르르 몰려 있는 것만큼이나 멋쟁이 젊은이들이 떼로 모여 있는 풍경은 ‘파워풀’해 보인다. 이거야말로 세대 갈등이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21세기식 패션 청년 문화!




패션을 즐기는 많은 사람들이 팔팔한 젊음을 원하는 지금, <보그 코리아>는 마이분, 지춘희와 함께 팝업 프로젝트 시즌2를 기획하며 바로 이 ‘젊음’에 주목, 요즘 대세인 아웃도어 라이프를 곁들여 ‘G20’란 팝업 브랜드를 론칭했다. 이미 잘 알겠지만, G는 지춘희의 이니셜이며 20은 바로 그 20대의 젊음을 표기한 것. G20 팝업 스토어엔 마이분을 드나드는 20~30대의 젊은 여성들과 20대 패션 블로거들로 가득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숫자인 20, 여기에 젊음을 표현하기에(혹은 유지하거나 회복하기에) 최적의 장르인 스포츠와 아웃도어가 결합돼 발산된 패션 에너지 덕분에 서울의 밤은 후끈 달아올랐다.

젊은 디자이너들이 만든 젊은 옷을 입으려는 젊은 아가씨들이라…. 이건 지극히 본능적인 절차다. 그런데 요즘엔 50세가 훌쩍 넘은 ‘시니어’ 그룹들도 이런 옷들을 입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라거펠트가 디올 옴므의 가느다란 정장을 입기 위해 40kg을 감량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 범세계적 신상 털기 전문 사이트쯤되는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안나 델로 루쏘는 1962년생. 50세가 훨씬 넘은 그녀는 이태리 <보그> 시절엔 전위적인 옷을 입는 철학적 스타일로 유명했지만, 그 후엔 패션쇼장에서조차 ‘튀는’ 옷을 입기 위해 용을 쓰고 있다. 걸어 다니는 쑈‘ 복(패션쇼 의상)’으로 유명한 그녀가 지난 시즌 생로랑 꽃무늬 미니 원피스 입고 나타났을 땐 사실상 ‘에러’였다. 생로랑 광고 모델인 카라 델레바인 또래에게나 어울릴 옷이었으니까. 미키마우스 모자를 쓰고 출현했을 땐 또 어땠나(누군가는 ‘나잇값을못한다’며 혀를 끌끌 찼다)! 패션이 원하는 젊음이 부작용을 일으킨 순간이었다.

패션이 젊음에 주목하는 건 태초부터 늘 있었던 일이라고? 패션의 변덕이 죽 끓듯 하다는 걸 아직도 모르시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패션은 성숙한 여인들을 위한 ‘부티’가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처럼 잘잘 흐르는 옷들을 제공했다. 이름 하여 레이디라이크, 마담 룩, 퍼스트레이디 룩 등을 당대 여성들에게 새로운 경향으로 제안한 것. 덕분에 카디건 트윈세트나 진주 주얼리, 캐시미어 스카프, A라인 스커트와 펌프스가 여성들에게 불티나게 팔렸다. 하지만 지금 그 여인들은 몹시 따분해 보인다. 대신 여성들은 젊음에 집착하고 있다. 그건 대중문화와 연관이 깊다. 지금 세상은 아이돌 셀럽들에게 점령당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고, 예정된 수순처럼 그들의 옷차림은 사회현상을 넘어 당대 패션의 새로운 사조가 됐다. “10대가 선호하는 패션 및 소비 유형은 브랜드와 유통에 있어 가장 민감한 사안이다”라고 분석한 기사도 있다. 20대는 패션 소비에서 절대적이니까. “20대 여성 소비자들은 패션 기업들의 공략 1순위 타깃으로 변치 않는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라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요즘 10대들은 빨리 20대가 되어 교복 자율화로부터 독립해 맘껏 모양내길 원한다. 또 30대들의 경우 20대 아가씨와 구분하지 못할 만큼 싱그럽고 매력적이다. 40대와 50대? 인류 역사상 유례없이 탄탄한 젊음을 유지한 채 20대를 타깃으로 한 브랜드에서 거리낌 없이 옷을 사 입는다. 패션에서만큼은 모든 세대가 20대에서 접점을 찾은 것이다. 바야흐로 당신에게도 심신이 젊음에 도취된 ‘패션 화양연화’가 다시 시작될지 모른다. “어려 보이시네요”라거나 “피부 좋으시네요”란 말보다 더 확실한 칭찬과 익숙해져야 할 시기다. 요즘 10대들이 외모를 품평할 때 최고로 치며 입에 달고 사는 유행어. “쩐다, 쩔어!” “완전 까리해!” 등등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