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진짜 패션, 스타킹

당신은 왜 스타킹을 신는가. 추워서? 피부가 닭살이라서? 유행이라서?
사실 상관없다. 이유가 어찌 됐든 스타킹은 올 가을과 겨울 즐겨야 할 패션 아이템,
남이 아닌 나를 위한 진짜 패션 아이템이다.

왼쪽부터 케이프 미니 드레스는 발렌티노, 안경은 지방시, 얇은 15 데니어 스타킹은 월포드, 라운드토의 빨강 힐은 로저 비비에. 프린지 소매 장식의 실크 블라우스와 타이, 가죽 스커트는 샤넬, 크리스털이 장식된 스타킹은 월포드, 앵클 슈즈는 루이 비통. 슬리브리스 미니 드레스는 구찌, 안경은 디젤, 그물 스타킹은 아장 프로보카퇴르, 플랫 슈즈는 로저 비비에.

고등학교 때는 내가 걸치고 있는 건 전부 촌스럽고 시대에 뒤떨어져 보였다. 불투명 검정 스타킹도 그중 하나였다. 학교만 졸업하면 몽땅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곤 두 번 다시 쳐다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웬걸, 대학에 갔더니 양갓집 규수처럼 쫙 빼입은 선배들이 새까만 불투명 스타킹을 신고 돌아다니는 게 아닌가. 어느새 피부가 비치는 일명 ‘유리 스타킹’은 ‘싼 티’의 상징처럼 보였다. 그 후 스타킹은 암흑기를 맞았는데, 2000년대 후반에는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맨다리로 다니는 것이 패피임을 증명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멋쟁이 패션 기자 후배도 한겨울에 미니스커트를 입고선 맨다리에 깜찍한 리본이 달린 프라다 플랫 슈즈만 달랑 신고 돌아다녔었다. 참, 그러고 보니 2011년 11월 서울을 방문했던 50대 프랑카 소짜니도 두툼한 울 소재 꼼데가르쏭 코트 아래 로저 비비에 키튼힐을 신은 맨다리를 드러냈었다.

 

이처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스타킹은 패피들 사이에서 ‘하지 말아야할 패션’ 정도가 아니라 그냥 잊혀진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스타킹이 슬슬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작년 가을 시즌부터. 그런지 무드에 푹 젖은 생로랑의 캘리포니아 우먼들이 반짝이는 그물 스타킹을 신고 등장한 것이 결정적 순간이었다. 헴라인이 허벅지에서 찰랑이는 베이비 돌 드레스 아래, 둔탁한 레인저 부츠 위로 걸을 때마다 반짝이던 촘촘한 그물망 스타킹이라니(나일론 소재에 인조 크리스털이 잔뜩 달린, 이 이태리산 스타킹의 가격은 무려 1,290달러)! 또 지난봄 시즌 루이 비통의 전위적인 피시넷 전신 스타킹과 레깅스를 거쳐, 이번 시즌 주요 런웨이에도 등장한 스타킹은 한물갔던 패션 액세서리의 화려한 복귀를 선언했다.

 

지난봄에는 발목이나 무릎 높이의 양말이나 색색의 알록달록한 것들이 많았다면, 이번엔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검정 팬티 스타킹을 선보였다. 리카르도 티시는 영화 <양들의 침묵>을 떠올리게 하는 하늘거리는 나방 무늬 실크 의상에 예민해 보일 정도로 얇디 얇은-혹은 페티시적인-스타킹을 매치해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올리비에 루스테잉이 아프리카에서 온 힙합 여전사들의 전투복을 위해 선택한 건 어둠처럼 짙은 불투명 스타킹. 에디 슬리먼의 깡마른 60년대 돌리 버드들이 미니스커트와 고고 부츠에 걸맞는 짱짱하고 도톰한 스타킹 없이 다니는 건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미처 몰랐던 사실이 있다. 그동안 스타킹을 쳐다보지도 않았던 건 패션과 유행에 민감한 사람들이었을 뿐. 여전히 대부분 여자들은 보수적인 회사의 출근 복장으로, 예의를 차리는 격식 있는 자리에서, 그리고 프로페셔널해 보이기 위한 실용적인 이유로 꾸준히 스타킹을 소비해왔다는 사실. “한여름에도 검정 스타킹을 신은 적이 있죠. 상견례 자리였거든요. 살색이나 커피색 스타킹에 비해 조금 더워 보였지만, 그냥 신었어요.” 뷰티 브랜드 홍보대행사의 P는 예의를 갖춰야 할 자리에는 꼭 스타킹을 신는다고 말했다. 법정에 갈 때 절대 맨다리로 가지 않는 변호사 L은 스타킹 덕에 자신감을 얻기도 한다. “법정에 들어섰을 때 상대쪽 여자 변호사가 스타킹을 신고 있지 않으면 이미 그 소송에서 내가 이겼다는 걸 직감할 수 있죠.”

 

미 국회의사당 의회 직원은 반 농담 반 진담으로 이런 이야기를 한 적도 있다. “국회의사당에서 한여름에도 유일하게 스타킹을 신는 여자들은 극보수 정당 의원 아래서 일하는 직원들이죠.” 패션산업 전문가 겸 분석가 마샬 코헨은 “여자들이 사회적 성공을 추구할수록 옷을 더 잘 차려입는 경향을 보인다”고 분석한 바 있는데, 그는 최근의 스타킹 판매율 성장세가 옷을 ‘제대로’ 차려입는 것에 대한 관심과 중요성이 높아지는 사회적 분위기와 상관 관계가 있다고 설명한다. 

 

한편, 사회적 규범이나 유행과 상관없이, 스타킹을 신은 다리가 맨다리보다 심미적으로 아름다워 보이기 때문에 꼬박꼬박 신는 이들도 있다. 뉴욕의 패딩 아우터 브랜드 맥케이지(Mackage)의 디자이너 엘리사 단은 드레스나 스커트를 입을 때 반드시 스타킹을 신는다. “특별한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스타킹 하나로 다리가 훨씬 멋져 보이니까요!” 유명 스타들을 담당하고 있는 스타일리스트 매리 앨리스 스티븐슨에 의하면 꽤 많은 할리우드 스타들도 스타킹을 애용하며, 스타킹 선택이나 연출에 능숙하기 때문에 대부분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밝혔다. “할리우드에서 가장 잘 지켜지는 비밀 중 하나죠.”

 

그녀에 의하면 여배우나 가수들이 격식을 차려야 하는 행사에 참석할 때 다리가 더 늘씬하고 피부톤이 고르게 보이도록 투명한 스타킹을 신는다는 것. 두 벌을 겹쳐 신는 경우도 있다. “비욘세는 공연을 할 때 투명한 살색 스타킹을 신고 그 위에 그물 스타킹을 신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리한나도 긴 상의나 짧은 하의에 가터벨트와 오버 니 스타킹(허벅지까지 올라오는 스타킹) 매치하길 즐기며, 레이디 가가는 거의 모든 사진에서 그물 스타킹을 신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저런 이유 따지지 말고 스타킹을 신어야 할 시점. 올가을 핫한 패션 액세서리로 스타킹이 스카프만큼이나 대세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리한나나 레이디 가가까지는 아니더라도 좀더 해박하고 실전에서 도움이 되는 어드바이스를 들려줄 사람이 필요하다. 주변에서 스타킹 마니아를 탐색하던 중 레이더망에 포착된 인물은 아담한 체구에 하이힐과 스커트를 즐겨 신는 패션 회사 MD. 그녀의 말이 워낙 ‘실전용’이기에 그대로 인용해본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건 아주 얇아서 속이 훤히 비치는 10, 15 데니어의 월포드 스타킹이에요.”

 

지방시 런웨이에서 속살이 비치는 시폰 의상에 매치됐던 바로 그 스타킹을 생각하면 된다. 잠자리 날개처럼 얇고 투명한 스타킹에 대한 그녀의 지론은 이러하다. “앞에서 보면 촛대뼈(무릎 아래로 솟은 정강이뼈) 부분은 잘 보이는 반면, 가장자리로 갈수록 검은색이 짙어져서 날씬해 보이는 효과가 있죠. 쉽게 뜯기니까 얇을수록 저렴한 걸 신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개인적으로는 얇을수록 질 좋은 스타킹을 신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얇으면 조직이 잘 보이는데, 가격대가 낮을수록 조직 자체가 균일하지 않고 거칠거든요. 그래서 구멍이 더 쉽게 나기도 하고.”

 

라 펠라의 김유미 실장 또한 스타킹이 점점 얇아지고 시스루가 많아지는 추세라는 데 동의하며 광택감 있는 제품이 한결 다리를 매끈해 보이게 한다고 덧붙였다. “라 펠라 스타킹은 데니어 수가 10부터 15, 20, 25 등 5단위로 나와서 스타킹 명도를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는 게 장점입니다.”

 

라 펠라는 이번 시즌 도톰한 소재에 망 크기가 큰 가을 시즌용 망사 스타킹을 새롭게 선보였다. 사도마조히즘의 상징이 돼버린 그 망사 스타킹을 아까 언급한 스타킹 마니아는 어떻게 착용할까? “장식 없는 검정 미니 드레스처럼 밋밋하거나 딱딱하게 보일 만한 차림에 그물 스타킹이나 다이아몬드 패턴 스타킹을 포인트로 신으면 좋죠. 하늘거리는 실크 소재 검정 미니스커트나 반바지에도 잘 어울리고요. 그물이나 무늬가 있는 스타킹의 문제는 다리에 약간만 살집이 있어도 금세 무늬나 그물망이 늘어난다는 건데, 그럴 땐 망이 큰 걸 선택하면 훨씬 낫습니다.”

 

갑자기 갤러리아 백화점 포갈 매장에서 꽤 촘촘한 그물 스타킹 구입을 시도했을 때 매장 스태프가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신어보고 결정할 것을 권했던 게 떠올랐다. “한 번 신어보세요. 마네킹 다리가 아니고서야 종아리 부분에서 망 크기가 급격히 늘어나는 게 보기가 좀 그렇더라고요.”

 

현대 백화점 무역점의 월포드 매장은 유독 그물 스타킹이 많이 팔리는 걸로 유명하다(YG 엔터테인먼트 관계자가 한 번에 몇십 장씩 사간다고). 월포드는 이번 시즌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주얼리 타이츠를 선보였는데, 80데니어(피부가 거의 비치지 않을 정도의 불투명) 검정 스타킹에 작은 금색 금속 조각과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이 다이아몬드 형태 패턴으로 전체를 장식하고 있다. 한족에 50만원이 넘는 한정판이지만, 곧 TV 가요 프로그램에서 여자 아이돌이 신은 걸 보게 될지도 모를 일.

 

“스타킹을 신을 때 가장 어려운 건 의상뿐 아니라 신발과도 잘 어울려야 한다는 거예요. 일단 스타킹을 신으려고 마음을 먹었으면 의상, 스타킹, 신발의 삼단 콤보를 완벽하게 조화시켜야 하죠. 예를 들면 생로랑처럼 무릎까지 올라오는 롱부츠엔 짙은 스타킹이 더 잘 어울리는 것처럼요.”

 

문득 우리나라에서 스타킹까지 꼼꼼하게 체크하며 옷을 차려입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스타킹 마니아는 <키다리 아저씨>에서 주인공 주디가 친구의 실크 스타킹을 부러워하는 장면을 기억하느냐고 되물었다. “줄리아 펜덜튼이 매일 실크 스타킹을 신는다고 몹시 부러워하잖아요? 우리나라 정서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죠. 우리나라 사람들한테 양말은 그저 양말일 뿐이니까.”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옷은 비싼 걸 입어도 스타킹까지 질 좋은 걸 찾아서 신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스타킹이야말로 자기 만족의 정점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은 검정 스타킹인데 좀더 좋은 걸 사는 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죠. 순전히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착용감 때문이니까요.”

 

질 좋고 아름다운 패션을 즐기는 과정은 이제 가방에서 신발로, 신발에서 겉옷으로, 그리고 겉옷에서 속옷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 변화를 다른 기준에서 보자면, 패션의 기준이 타인에서 나로 이동하는 과정임에 분명하다. 좋은 소재의 예쁜 속옷을 갖춰 입는 것도 연인을 위한 것이 아닌, 나를 위한 행위로 바뀌고 있으니까. 좋은 스타킹을 구입하고 그 감촉을 느끼는 행위 역시 마찬가지. 나를 위한 작은 사치다. 이번 시즌 디자이너들도 적극 권하고 있으니, 여태껏 몰랐던 혹은 잊고 살았던 즐거움을 누릴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