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을 위한 지침서

봄기운 완연하다. 어디 멋진 데로 떠나볼까 검색창을 두드리는 당신에게 산책 문학의 대가들이 조언한다.
차라리 산책이나 하는 것이 낫다. 걷자, 걸어보자.

일찌감치 예술가들은 알고 있었다. 집채만 한 트렁크를 끌고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곳을 새롭게 대하고 마침내 깊숙한 속살을 대면하는 것이야말로 우주를 경험하는 진짜 여행이라는 것을. 단, 신발 끈 조여 매고 두 발로 직접 나설 것! 우선, 평생 산책을 예찬했던 일본의 문호 나가이 가후의 도쿄 산책기 <게다를 신고 어슬렁어슬렁>이 좋은 지침이 될 것이다. “나는 그저 목적 없이 느릿느릿 걸으며 쓰고 싶은 것을 마음껏 쓰겠다”라고 선언한 작가는 히요리게다를 신고 한 손엔 박쥐우산을 든 채 길을 걷는다. 세상에, 산책이 이토록 생생한 창조 행위였던가. 욕심 없이 걷는 산책자의 눈에 들어온 작디작은 골목과 공터, 나무와 절, 벼랑과 언덕, 그리고 석양이 다시금 새로운 의미를 얻는 과정을 좇는 것은 경이롭다. 도시의 뒷골목에서 수수한 생명을 발견할 때마다 온 마음을 다해 감탄하며, 마침내 세상에 둘도 없는 수제 지도까지 그려냈으니(벚꽃길에는 벚꽃을, 버드나무가 있는 곳에는 버드나무 실가지를 직접 그려 넣었다) 그야말로 ‘산책 문학의 대가’라 부를 만하지 않은가.

 

한쪽에는 ‘산책 만화’도 있다. 똑같은 물건을 보고도 전혀 다른 상상을 펼쳐 보이곤 하는 만화가들의 솜씨를 고려해볼 때 그들의 산책법도 남다를 터. 작가 구스미 마사유키와 만화가 다니구치 지로의 황금 콤비가 만들어낸 솔로 미식가의 도쿄 맛집 산책 이야기 <고독한 미식가>를 기억하실지. 외근 나왔다가 소나기를 만나 뛰어들어간 시장통 식당에서의 한 끼, 너무 일찍 출근하는 바람에 평소엔 지나치던 회사 근처 식당에서 먹게 된 단출한 아침, 출장길 호텔 근처 골목을 배회하다 포장해 먹은 길거리 간식… 돌이켜보니 길을 걷다 우연히 맛의 신세계를 발견하는 이 작품은 앞으로 보여줄 산책 만화의 맛있는 예고편이었다! 이들 콤비는 이어서 함께한 <우연한 산보>를 통해 ‘산책의 즐거움’에 대해 작정하고 일갈했다. 문구 회사에서 일하는 영업 사원인 주인공이 바쁜 근무 중, 혹은 휴일에 산보를 즐기며 문득 시야에 들어오는 삶의 장면을 포착해낸다. 무심코 들어선 골목에서 중고 그림책방이나 아주 좁은 카레 가게, 늙은 히피들의 소풍을 마주하게 되는 주인공은 흐뭇한 표정으로 되뇐다. “아, 무작정 걸어도 좋은 곳으로 나오는구나.”

그리고 마침내 다니구치 지로가 <에도 산책>이라는 본격 산책 만화를 그려냈다.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은퇴 후 천체관측과 측량을 배운 노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그는 걸음의 수로 거리를 재는 것을 소일거리 삼아 날씨 불문 구석구석을 산책한다. 그의 느릿한 발걸음을 좇노라면 한 번쯤 상상해봤던 옛사람들의 산책길에 동행하는 듯 생생한 감상에 빠져드는데, 가히 예술이라고 해도 좋을 완성도 높은 그림 때문일 터다. 개와 고양이와 거북과 개미는 물론 흐드러지게 핀 벚꽃길과 눈 내리는 들판, 별이 총총한 밤하늘과 폭풍우 치는 바다까지 세상 모든 풍경을 눈앞에 그려내는 세밀한 표현력은 압권. 걷다 마주치는 세상 만물을 소중히 어루만지는 작가의 사유는 ‘산책의 정석’이라 할 만하다. 주인공처럼 따뜻한 시선으로 일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모든 산책이 축제나 다름없을 터인데!

 

‘미스터리의 여왕’ 미야베 미유키가 써 내려간 산책 이야기는 어떨까. 스스로 ‘소설이 아닌 최초의 책’이자 ‘이상한 책’이라고 표현한 <미야베 미유키 에도 산책>은 소설을 쓸 때는 그다지 돌아다니지 않고 극히 제한된 범위에서만 움직이는 작가가 직접 걷고, 보고, 써낸 도보 여행기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신장결석으로 갑자기 응급실에 실려간 작가는 ‘그저 많이 걸으라’는 의사의 조언까지 받은 터. 미미 여사(그녀의 광신도들은 그녀를 이렇게 부른다)는 자신의 시대물에 등장하는 도쿄의 사적을 직접 걸으며 옛 시대의 ‘시간과 거리감’을 직접 체험한다. 에도시대의 유배지나 죄수들이 처형당했던 사형장 등 산책 코스가 조금은 살벌하지만 미스터리 여왕의 본분을 잊고 곰살맞게 수다를 떠는 작가를 만나는 기쁨도 쏠쏠하다. 덕후들이라면 조금은 ‘아줌마스러운’ 언사에 실망할 수도 있겠으나, 그녀가 소개한 일곱 개의 산책 코스 중 한두 개쯤에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슬금슬금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자, 산책이란 단어가 조금 새롭게 다가온다면 <우연한 산보>를 만들 때 구스미 마사유키가 세웠던 세 가지 원칙을 새겨볼 만하다. 첫째, 가이드북이나 인터넷 등을 통해 미리 조사하지 않는다. 둘째, 그때그때 재미있어 보이는 쪽을 향해 적극적으로 옆길로 샌다. 셋째, 시간제한을 두거나 그날 안에 하겠다는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정말이지 여행이 아닌 일상이 어디 있겠는가. 걷자, 걸어보자. 뒷골목으로 가자, 사잇길을 걷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