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을 향한 패션계의 도전

‘화끈한 감자’로 떠오른 VR. 360도로 신세계를 만날 수 있는 새로운 세상에 패션이 뛰어들었다.가상현실이라는 미지의 대륙을 향한 패션계의 도전.

‘화끈한 감자’로 떠오른 VR. 360도로 신세계를 만날 수 있는 새로운 세상에 패션이 뛰어들었다. 가상현실이라는 미지의 대륙을 향한 패션계의 도전.
VR과 함께 새로운 패션 세상이 펼쳐진다. 모델이 쓴 VR 헤드셋은 삼성의 기어 VR. 트위드 수트는 모스키노(Moschino), 귀고리는 프라다(Prada), 목걸이는 스와로브스키(Swarovski), 왼쪽 반지는 구찌(Gucci), 오른쪽 반지는 수엘(Suel), 팔찌는 모드곤(Modgone)

3월 6일 저녁 7시를 조금 넘긴 시간. ‘카톡’ 알림 소리가 울렸다. 발신인은 파리 패션 위크 출장 중인 <보그> 편집장. 서울을 수호하고 있던 내가 뎀나 바잘리아의 발렌시아가 첫 컬렉션을 놓칠세라, 쇼장에 도착하자마자 현장 사진을 찍어 보내준 것이다. 회색 패드로 장식된 쇼장 풍경은 물론 일찌감치 도착해 독서에 열중하는 영국 <보그> 패션 디렉터 모습까지, 생생한 리포트가 내 ‘카톡’ 창에 올라왔다. 그러자마자 발렌시아가 홍보팀의 문자가 도착했다. “알람해드립니다. 발렌시아가 2016 가을/겨울 패션쇼가 30분 남았습니다.” 비록 파리 쇼장의 우아한 검정 의자가 아니라, 서울 어느 아파트의 소파에 앉아 있었지만, 나름대로 나 역시 쇼 관전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사실 쇼가 열리기 나흘 전 발렌시아가 하우스가 이번 컬렉션을 ‘360도 파노라마 뷰로 생중계’할 것이라고 전했다. 새 디자이너와 함께 새 시대를 여는 하우스의 변은? “타블렛 PC와 스마트폰 기기에서도 그의 쇼를 생생히 즐길 수 있도록 360도 파노라마 뷰로 중계함으로써 혁신적 테크놀로지를 통한 하우스의 새 역사의 서막을 알릴 예정이다.”

VR(Virtual Reality)이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아시다시피 그건, 가상현실이라는 가상의 공간에 현실과 비슷한 환경이나 상황을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360도 파노라마는 평면적 화면을 벗어나 우리를 둘러싼 모든 풍경을 보여주는 새 세상. 최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IT 업계의 패션 위크 정도?)’에서 삼성과 LG가 본격적으로 VR 관련 아이템을 선보이며 지금 한국은 온통 VR 이야기로 들썩이고 있다. 뉴스 검색창에 VR이라는 단어만 쳐도 1만2,000건에 가까운 기사가 쏟아진다. “VR, 혁명인가 허상인가” “가상현실, 어디까지 왔나” 같은 신기술을 소개하는 심도 있는 취재는 물론, “VR로 고소공포증 극복?” “VR 포르노 성공할 수 있을까?” 등 자극적인 내용까지. 새 아이템이라면 놓칠 리 없는 패션계 역시 VR의 세상으로 진입했다. 게다가 패션계에서는 신제품을 선점하는 자가 영원히 주목받는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 1998년 처음으로 인터넷 패션쇼를 선보인 헬무트 랭, 쇼가 끝난 직후 곧바로 아이템을 구입할 수 있게 조치한 버버리, 그리고 전통적 시즌 시스템을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한 톰 포드까지. 누구라도 먼저 IT 관련 신대륙을 정복하는 콜럼버스가 돼야 패션사의 한 챕터를 장식할 수 있다. 게다가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먼저 받아들이면 좀더 ‘스마트’해 보이고 세련돼 보이지 않나. 구글 글라스를 맨 먼저 선보인 DVF(비록 구글 글라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센트럴 파크 건너편에서 4D 패션쇼를 연 폴로 랄프 로렌, 그리고 애플 워치를 위해 굳게 닫힌 빗장을 열었던 에르메스까지.

그렇다면 미지의 신대륙인 VR에 맨 먼저 깃발을 꽂은 디자이너는? 바로 타미 힐피거. 그는 자신의 2015년 가을 컬렉션을 VR 카메라를 이용해 촬영한 뒤(암스테르담에 자리 잡은 ‘WeMakeVR’의 솜씨), 그 영상을 매장에서 직접 볼 수 있게 했다. 매장에 들른 고객은 삼성의 기어 VR을 쓴 뒤 지지 하디드가 걸어 나오는 모습을 360도로 체험할 수 있었다. “가상현실을 통해 이제 우리는 특별한 패션쇼를 매장에 소개할 수 있게 됐습니다.” 힐피거는 이렇게 설명했다. “놀라운 세트부터 음악 그리고 백스테이지의 결정적 순간까지 고객들은 옷이 움직이는 걸 볼 수 있고, 쇼에서만 만날 수 있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전통적 쇼핑 경험의 흥미로운 진화죠.” 물론 고객이 볼 수 있는 영상은 관객석에 앉아 있는 시선, 백스테이지 안에서 살펴보는 시선 등 미리 편집된 영상이다. 아직까지 고객에게 완벽한 자유가 허락되진 않았다. 가령 버튼만으로 지지와 함께 무대를 걷거나, 안나 윈투어 옆에서 쇼를 지켜보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가상현실을 통해 놀라운 세트부터 음악 그리고 백스테이지의 결정적 순간까지 고객들은 옷이 움직이는 걸 볼 수 있고, 쇼에서만 만날 수 있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전통적 쇼핑 경험의 흥미로운 진화죠.”

지난해 6월 디올은 아예 VR를 경험할 수 있는 신종 기구를 선보였다. ‘Dior Eye’라 불리는 헤드셋은 그 안에 장착한 스마트폰을 이용해 360도 영상을 경험할 수 있도록 3D 프린터를 이용해 탄생됐다. 이 고글을 쓰면 디올 백스테이지 풍경은 물론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둘러싸인 모델들, 사진가들과 함께 있는 라프 시몬스 등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이 트렌드에 걸맞은 경험은 테크놀로지와 꾸뛰르의 새로운 관계를 상징합니다.” 디올 하우스의 설명이다. “뛰어난 디테일과 함께 디자인된 VR 헤드셋은 디올 애호가들이 백스테이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경험할 수 있게 하고, 파리 패션계에서 가장 놀라운 쇼에 필요한 뛰어난 기술을 지켜보게 만듭니다.”

한편 스웨덴 디자이너 이다 클램본(Ida Klamborn)은 VR을 위해 새로운 앱까지 만들었다. ‘민주주의 프런트 로(Democratic Front Row)’라는 이름 그대로 관객에게 실시간으로 지난 2월 스톡홀름 패션 위크에서 열린 자신의 쇼를 생중계한 것이다. 물론 프런트 로에는 유명 스타나 에디터 대신 360도 카메라가 자리했다. 또 1,000명의 고객에게 구글과 함께 만든 카드보드 헤드셋(많은 사람들이 손쉽게 VR를 경험할 수 있도록 구글이 박스 종이로 만들 수 있도록 설계도를 공개한)을 미리 선물했다. 그리고 실제로 쇼가 펼쳐지는 동안 집에서 쇼를 감상한 고객이 실시간으로 ‘좋아요’를 눌러 카메라 로봇에 불이 들어오도록 했다. “계속해서 젊은 문화에서 영감을 받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많은 팬들은 패션계를 볼 수 없죠. 그렇기에 저는 가상현실을 통해 그들을 프런트 로에 초대해 전통적 패션계 구조를 부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미래에는 더 많은 기회가 열려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쇼장을 가득 채운 관객, 코앞을 지나가며 휘날리는 드레스 자락, 모델의 발걸음에 맞춰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 등등. 지금 가상현실은 패션 아웃사이더들을 프런트 로에 초대하고 있다. 구글 VR 카드보드를 고객에게 제공한 레베카 밍코프, 패션쇼를 360도로 감상할 수 있도록 한 탑샵, 척 테일러 스니커즈와 그 신발을 신은 유명인을 촬영한 영상을 만든 컨버스 등등. 보시다시피 가상현실의 세계에 입장한 패션 브랜드는 점점 늘고 있다. 또 패션 현장을 보다 더 생생하게 전하기 위해 화보 촬영을 360도로 공개하는 패션 잡지도 있다. 얼마 전 서울의 패션 사진가 김보성은 페이스북에 직접 촬영한 360도 영상을 올렸다. 최근 구입한 VR 카메라 테스트를 위해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영상을 공유한 것이다. <보그> 사무실에 모인 에디터들은 그가 촬영한 영상을 제대로 보기 위해 휴대폰을 상하좌우로 움직이며 신세계가 도래했음에 감탄했다. “보름 전 새로운 영상 작업을 위해 새 카메라를 구입했습니다. 그 테스트 영상이었는데, 페이스북이 360도 영상을 감상할 수 있는 플랫폼이다 보니 먼저 테스트했죠.” 이전에도 다양한 패션 영상 작업을 시도한 그가 신이 난 듯 설명을 이었다. “사실 신기한 건 얼마 가지 않아요. 어서 빨리 좀더 높은 수준의 패션 관련 작업을 하고싶습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우선 프레임이 없어집니다. 주변의 모든 환경이 캡처되는 환경이죠. 더 중요해지는 건 기획력과 연출력. 당연히 높은 프로덕션 품질이 보장돼야 하죠.” 360도로 즐길 수 있는 <보그> 패션 화보 촬영 현장?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지만, 모델 뒤의 지저분한 소품과 옹기종기 모인 스태프들의 모습이 과연 어떤 가치를 지닐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그의 말처럼 완벽한 프로덕션이 필요한 시점이다.

“VR의 파워는 바로 접근성입니다.” 지난 1월 모스크바 패션 위크와 함께 다양한 가상현실 이벤트를 선보인 회사 ‘YouVisit’의 CEO 아비 맨들바움(Abi Mandelbaum)은 이렇게 주장했다. 그는 지금처럼 거대한 VR헤드셋은 80년대 벽돌 같은 휴대폰이 사라지듯 새롭게 진화할 테고, 그렇게 되면 더 많은 가상현실 패션 콘텐츠가 쏟아질 것이라 장담했다. 그전엔 패션의 대형 대문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던 패션 팬들이 패션의 탄생 현장을 그대로 지켜볼 수 있다는 말이다. 신세계가 펼쳐질 거라고 호언장담하는 그가 강조하는 건? 패션 브랜드가 어서 빨리 이 가상현실로 향하는 열차에 탑승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 역시 솔깃하다. “새로운 세상을 만난 고객의 충성도를 먼저 낚아챌 수 있으니까요.”

다시 3월 6일 저녁, 나의 아파트 소파. 미리부터 가상현실에서 발렌시아가를 만날 준비를 모두 마친 나는 자신만만했다. 발렌시아가가 이번 쇼를 위해 준비한 앱을 다운 받은 아이폰 6S와 갤럭시 S7을 커피 테이블 위에 나란히 두고, 그 옆에는 삼성의 기어 VR 헤드셋까지 준비했다. 드디어 약속한 시간 7시 30분이 지나자, 두 개의 스마트폰 화면을 통해 동시에 현장이 생중계되기 시작했다. 고맙게도 발렌시아가에서 내게 배려한 자리(카메라가 자리한 자리)는 최고의 상석. 맞은편에는 미국 <보그>의 안나 윈투어가 앉아 있었고, 그 앞으로 구찌의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자신의 파트너인 조반니 아틸리와 함께 걸어 들어왔다. 내 ‘옆자리’에 앉은 미국 <베니티 페어> 패션 디렉터는 뒤에 앉은 마켓 디렉터와 농담을 주고받았다. 이 모든게 휴대폰을 움직이거나 VR 헤드셋을 쓴 채 고개를 돌리는 것만으로 내 눈앞에 펼쳐졌다. 몸을 완전히 돌리자 내 뒤에 앉은 파리 갈리에라 패션 박물관의 큐레이터인 올리비에 사이야르가 보였다. 만약 현장에 있었다면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뎀나의 발렌시아가라니! 정말 기대되지 않나요? 당신은 어때요?”

그러나 불행히도 신세계는 썩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쇼 시작 시간이 가까워지자 접속자가 몰렸고, 영상 버퍼링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심했다(아마 360도 영상의 데이터 크기가 아직 실시간으로 전송되긴 어려운 점이 있었을 것이다). 결국 쇼가 시작되기 전, 두 개의 화면은 죄다 멈춰버린 최악의 상황. 다급히 현장에 있던 편집장에게 “쇼 시작했어요?”라고 물었지만, 묵묵부답(아마 그는 쇼에 푹 빠져 있었을 것이다). 겨우겨우 연결됐다 싶을 땐 모델이 걸어가는 모습이 흐릿한 픽셀로만 확인됐고, 피날레 행진하는 모델 무리는 수묵화가 번지듯 두리뭉실한 형체로 보였다. 또 10분 동안 헤드셋을 쓰고 벗고, ‘새로 고침’을 위해 앱을 껐다 켜고, 스마트폰을 이리저리 움직이느라 진땀을 뺐지만, 겨우 패션 가상현실의 코앞까지 갔다가 내팽개쳐진 기분. 게다가 진짜 현실로 돌아오자 지독한 어지러움까지 찾아왔다. 순간 영화 <매트릭스>의 가상현실인 매트릭스를 설명하는 스미스 요원의 대사가 떠올랐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만 현실을 자각하지.” 그러나 묘하게도 그 와중에 패션 신대륙을 저 멀리서나마 희미하게 목격했다는 성취감만은 잊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