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당신이 기억해야 할 이름

2018.05.04

by VOGUE

    당신이 기억해야 할 이름

    초여름의 길목에서 전시 중인 예술가 구동희, 김민애, 김아영, 정금형. 오늘의 예술을 위해 시간과 사랑을 바치는 여성들이다.

    현장 탐정 구동희
    페리지 갤러리에서 열리는 전시 <“초월적 접근의 압도적인 기억들”>에서 구동희의 신작 영상을 만날 수 있다. 영상 30여 분에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셀카를 계속 찍는 여성, 영화관에서 자기 영상을 보며 잠든 배우, 거리에서 할 일 없이 그네를 타는 여성 등이 등장한다. 이 영상과 전시명은 무슨 연관인가? “사실 전시명은 ‘예술 작품 제목 생성기’라는 해외 사이트를 이용했어요. 무작위로 뽑은 다섯 개 중에 ‘Overwhelming Memories of Transcendental Approach’가 가장 장황하고 이해가 잘 안 되는 제목이었죠. 이걸 구글 번역기에 돌렸더니 ‘초월적 접근의 압도적인 기억들’이라고 나왔어요. 예술 용어로 남용될 것 같은 단어의 조합이죠. ‘예술 병신체’랄까요.(웃음) 사이트에서 가져왔기에 전시명에 따옴표를 붙여 사용했어요. 왜 그랬냐고요? 작가가 지정하는 언어가 너무 과잉 해석되잖아요. 예술에 대한 기대에 어긋나고 싶기도 했고요.“

    구동희는 1998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학사를, 2000년 예일대학교 미술대학원 조소과 석사를 마치고, 2010년 제1회 두산 연강예술상, 2012년 제13회 에르메스재단 미술상 등을 수상했다. 작가는 본인을 ‘형이하학적인 사람’이라고 말한다. “저는 본능에 충실하고 세속적인 거 좋아하고, 자주 누워 있곤 해요. 요샌 노화가 왔나, 글도 읽기 힘들고 음악도 잘 듣지 않아요.(웃음)” 그녀를 전시장에서 처음 만났음에도 털털하고 편안하다. 현장을 찾아다니는 작가이기에 그런 분위기를 내는 걸까. 구동희는 작업실이 따로 없다. “스튜디오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설치하는 작가가 있잖아요. 저는 촬영 현장이 작업실이에요. 어떤 사람이 오고, 어떤 공간에서 찍을 거란 스케줄을 짜고, 약간의 연출도 하지만 거기서 발견하는 상황이 굉장히 중요해요. 제가 근처를 계속 서성이는 이유죠. 관찰자, 탐정이 되어 무언가를 찾으려 해요.” 촬영 주제도 구체적이지 않다. “아주 거칠게 생각해요. 일반적인 줄거리가 있는 영화와는 다르죠. 주제를 명확히 전달하기 위해 정해진 대상을 촬영하고, 후반 정리하는 작가도 있지만 저는 그렇지 않아요. 영상을 일종의 운동이라 보면, 그걸 추동시키는 게 인물이죠. 거기서 발생하는 이미지는 가져오되 현장에서 발생하는 무언가, 후반 편집에서 달라지는 무언가를 더 기대해요.”

    ‘재생길 II(비수기), Way of Replay II(Off Peak)’, 2017

    이번 <“초월적 접근의 압도적인 기억들”> 역시 공간이라는 막연한 단어로 시작됐다. “공간이 없으면 촬영이 불가능하잖아요. 게스트하우스와 전시 공간이 나오는데 전자는 사람이, 후자는 작품이 묵어가는 곳이잖아요. 정박하지 않고 오고 가죠. 아는 후배의 게스트하우스를 개조하고, 아는 작가의 전시장을 철수하는 시점에서 두 공간을 촬영했어요. 특정 기능을 하는 공간의 사이 공간, 사이 시간을 담아내고 싶었죠.” 등장인물은 그녀의 지인 작가거나, 배우, 10년 만에 연락해 갑작스레 출연하게 된 친구까지 다양하다. 구동희는 인건비 때문에 예산을 넘겼다고 웃었다. 얘기했다시피 구동희는 ‘주제주의 기피’ 작가로 이는 예술을 하는 이유와도 통한다. “절대적인 주제를 잡기에는 너무 복잡한 시대를 살고 있지 않나요? 그저 이전보다 더 나은 작업을 하면 성취감이 들어서 예술을 해요. 이내 민망하고 부끄러워지지만요. 예술의 존재 이유를 묻는다면 저는 예술이 절대적으로 있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왜 없으면 안 되는지’ 부정해서 물으면 수천가지 이유를 댈 수 있어요.”

    그런 예술이 젠더라는 벽에 부딪힌 적은 없을까. “여성이기에 특별히 불리한 작업을 한 적은 없어요. 운이 좋은 거겠죠. 하지만 제 동료만 해도 여자는 거의 없어요. 여자 후배들에게 더 잘해주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젠더를 작품에 들고 오진 않아요. 하지만 때론 나도 모르게 남자의 관점을 내재화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사실 예술가, 작품이 아니라 우리는 일상에서 더 젠더에 대해 생각하게 되지 않나요?” 구동희가 예술가로서 겪는 어려움 역시 일상과 맞닿아 있다. “그냥 사회가 힘들어요. 예술가로서 이 직업이 지속 가능할까라는 의문을 갖고 있죠. 가끔 외부 요인 때문에 궁지에 몰리는데, 그만큼 미래를 담보하는 사회 요소가 척박해 보여요. 이런 얘기도 조심스러워요. 예술가라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럴 테니까요.”

    김민애의 오래된 농담
    김민애의 개인전 <기러기 GIROGI>가 열리는 아뜰리에 에르메스에 갔다. 전시장은 가운데가 텅 비어 있다. 대신 하얀 벽에 참새, 비둘기, 갈매기, 닭, 오리, 청둥오리, 거위, 캐나다 구스, 백조의 부조가 있다. 천장까지 채운
    부조라 유독 참새 머리는 크게, 백조 머리는 작게 보인다. 천장의 조명 하나가 천천히 돌아가며 새들을 한 마리씩 비춘다. 빈 공간은 새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채운다. 박제된 새와 실제 새의 음성이 이질적이다. 이게 전시의 다 다. 그날 온 관객들은 무얼 봐야 하나 망설이다 한 마리 한 마리 새를 관찰한다. 나는 그냥 서 있다. 새들이 아무 의미가 없음을 사전에 들었기 때문이다.

    김민애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고, 영국 왕립예술학교 조소과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미술가를 칭할 때 회화 작가, 조각가 같은 장르를 구분하지 않는다. 영역을 넘나드는 작가가 많아진 탓이다. 김민애 작가는 “다루는 매체를 생각할 땐 조각 설치를 하는 사람이 좋을 것 같아요. 작품을 위해 사진이나 드로잉을 활용 할 수 있지만 저는 입체 미술에 관심을 두고 있어요”라고 소개한다. ‘어떤 작업을 합니까?’란 질문에도 명쾌한 답을 줄 것 같은 작가다. “현대미술의 오랜 질문이었던 ‘미술이 어떻게 미술이 되는지’가 궁금했어요. 저는 천재적인 무언가가 있어서 작가가 된 게 아니라 미술교육을 받고, 관련 학교에 가고, 그 안에서 또 영향을 받고, 거대 미술사의 흐름에 놓였기 때문이에요. 온전한 나는 없고 외부에서 온 것들이 나를 구성해요. 이걸 작품에 대입하고 싶어요. 작품을 작품으로 규정하는 게 그런 환경에 놓였기 때문 아닐까. 그런 의문을 제기하는 작품을 만들었죠. 예를 들어 기존 구조물에 부착해 작품을 만들고 끝에 바퀴처럼 움직이는 부속을 달았죠(김민애는 바퀴 달린 물건을 좋아한다. 작업할 때 재료 외에 중요한 요소로 바퀴 달린 책상을 꼽았다). 바퀴가 달렸지만 건축물의 일부기에 움직일 수 없어요. 나는 내 의지에의해서 움직일 수 없고 외부에 의해 규정됨을 보여주죠.”

    <기러기 GIROGI>, 2018

    이처럼 김민애는
    현대미술의 오래된 질문 혹은 농담을 작품에 대입했다. 작업할 때는 불필요한 부분을 최대한 지워가는 과정을 거쳤다. 예를 들어 이 색깔을 굳이 칠할지 논리적으로 따지고, 웬만한 덧붙임은 생략, 삭제했다. “하지만 그런 작업은 감정을 배제하는 과정이기도 하기에 건조함을 느꼈어요. 2013년 런던의 개인전(하다 컨템포러리의 <습관에 관한 소고>전) 역시 논리적인 계획으로 설치를 끝내니 답답했어요. 그냥 하면 안 되는 걸까? 막판에 아무 의미도 없이 고른 검은색, 분홍색 공을 여기저기 끼웠어요. 뭔가 트이는 기분이었죠. 2014년엔 아예 그 공을 주인공으로 <검은, 분홍 공>이란 전시를 열었죠.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을 주인공으로 가져오고 싶었어요.” 이번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전시명 ‘기러기’도 큰 뜻이 없다. 하다못해 전시된 새들 중엔 기러기가없다. 작품의 발단은 비둘기다. “이웃과 비둘기 문제로 싸웠어요.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 하는 생각에 화가 났죠. 근데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 게 어딨어요. 분노의 찌꺼기인 비둘기를 가짜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작업을 하고 싶었어요. 그때 인터넷에서 거위털과 오리털의 차이를 심각하게 비교한 글을 읽었어요. 그게 뭐라고, 좀 웃겼어요. 한편으론 오리랑 거위가 무슨 죈가, 얘도 새고 쟤도 새인데. 일부러 구글에서 아주 단순한 비둘기 이미지, 거위 이미지를 찾아 부조했죠. 가짜들이 전시장에 들어선 거죠.” 이럴 때 관객은 배신감마저 든다. 시간 내서 찾아와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는 관객에게 ‘아무것도 아닌데?’라고 던지고 가버리는. “저도 미술관에 가면 이 작품이 무슨 의미인지 텍스트부터 봐요. 그게 싫었어요. 뒤샹이 현대미술에 했던 질문을 의도 하고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제 작업을 뒤돌아보니 그렇더라는 거죠. 저 역시 온전한 자신이 아닌 현대미술의 흐름에 있는 거죠.”

    <Black, Pink Balls>, 2014

    김민애는 이전에 예술을 “개별적 분투를 사회화하는 과정”이라고 정의 한 적 있다. “많은 작가들이 당장 보상받지 못하더라도 고군분투하고 있어요. 그런 개별적 분투를 작업실을 넘어서 전시, 매체를 통해 발언하고 관객과 만나면서 목소리를 공유해요. 그래서 예술은 개별적 분투를 사회화하는 과정이라고 폼 잡고 얘기한 적 있어요.” 김민애는 더 이상 진지한 척, 폼 잡지않을 거라 말했다. 작업을 하는 이유도 “재미있어서죠”라고 답한다. “작업을 안 하면 제가 더 멍청해지는 것 같거든요.(웃음) 다만 관객이 작품을 통해 일상의 다른 부분을 들추거나 다른 시선을 갖길 바랍니다. 그래서 작업할 때 관객을 생각하면 더 신이 나요.” 김민애의 영감은 홀로됨에서 나온다. “저는 작업실에 오래 있지 않아요. 한때 그런 걸로 죄책감을 느꼈는데,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제일 중요해요. 우리 일상도 마찬가지인 거 같아요. 타인과 비교하지 않고 내게로 기준을 옮기는 시간이 많아지면 더 건강한 사회가 될 거 같아요.”

    김아영의 환상 특급
    “충분히 발달한 과학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 <스페이스 오디세이>로 유명한 SF 소설가 아서 C. 클라크의 말이다. 김아영은 클라크가 예언한 미래적 환상세계의 유능한 설계자다. 개인전 <다공성 계곡>이 열리는 일 민미술관 1층은 미래의 어느 우주여행사의 홍보 쇼룸 같다. 입구에선 ‘오셔닉 매직 솔루션’이라고 적힌 상품 안내 전단을 진열하고 있다. 내용은 이렇다. “플랫폼 A에서 B로, 웅장한 여정을 준비하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 중요하죠! 국경에 멋진 딜이 있어요.” 블랙홀처럼 어두운 실내는 관객들을 빨아들인다. 벽면엔 자사가 자신 있게 소개하는 행성의 풍경을 담은 듯한 사진이 걸려 있다. 그 공간을 빛으로 가르는 건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이라 명명한 총천연색 영상 작품이다.

    사이버 시스템의 오류와 미디어에 중독된 사회를 미술의 언어로 풍자한 이 영상은 넷플릭스 드라마 <블랙 미러>만큼이나 내용적으로 흥미진진하다. 영상에 사용한 완성도 높은 그래픽은 플레이스테이션 게임을 보듯 생생하고, 아바타 캐릭터를 통해 가상 세계로 이동하는 게임 같기도 하다. 이주 상담을 받는 영상의 주인공은 페트라 제네트릭스. 움직이는 큐브 형태의 지하 광물이다. 그 혹은 그녀, 아니면 그것과 마주 앉은 뚱뚱한 백인 남자 상담원은 자격 요건과 이주 과정 등에 대해 기계적인 설명을 이어간다. 영상 중간에 삽입된 광고 클립 속 노란 원피스 차림의 모델은 무표정한 상담원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쇼호스트 특유의 과장된 말투로 어서 빨리 이 멋진 서비스를 선택하라고 재촉하는 그녀는 지나치게 생기가 넘친다. 전시장을 찾은 젊은 관객들은 화면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영상 작품을 다룬 여느 전시와 사뭇 다른 풍경이다.

    ‘이 배가 우리를 지켜주리라’, 2016

    김아영의 작품이 현대미술을 낯설어하는 일반 대중에게도 설득력을 갖는 건 매혹적인 내러티브 구조와 상업 영역에서 활동한 이력이 있는 작가의 감각적인 연출 덕분일 것이다. 시각 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졸업 직후 MTV 프로모션 영상 등 인터랙티브 모션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한 경험이 있다. “나름 하이테크한 일을 했죠. 자본주의의 최첨병으로(웃음).” 영국에서 사진과 순수 미술을 공부하면서 본격적으로 개인 작업을 시작한 김아영은 해외에서 더 주목받는 작가다. 오쿠이 엔위저가 총감독을 맡은 제56회 베니스 비엔날레 본 전시에 참여하면서 세계 미술계에 첫발을 내디딘 그는 2015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하고 2016년 팔레 드 도쿄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국제갤러리 등의 단체전을 통해 가끔 소식을 전해왔지만 한국에서 여는 개인전은 실로 오랜만이다.

    <다공성 계곡>은 2017 멜버른 페스티벌의 커미션을 받아 지난해 10월 호주에서 먼저 소개했다. “프랑스에 2년 정도 거주하면서 제가 피부로 느낄 수밖에 없었던 이주와 난민 문제를 조사하고 있었어요. 호주 역시 이주민 정책이 뜨거운 이슈였고요. 우익 정권이 10년간 난민 거부 정책을 펼치면서 주변의 작은 섬 두 곳에 수용소를 짓고 배를 타고 온 난민들을 거기에 수용했는데, 인권 문제가 심각했다고 해요.” 영상과 사진에 등장하는 돌산 역시 호주를 배경으로 한다. 거기엔 식민 주체가 거대한 대자연을 볼 때 느끼는 낭만주의적 매혹과 압도적인 풍광에 대한 경외감, 공포, 체념 등의 모순적인 감정과 독특한 정서가 녹아 있다. “<행잉 록에서의 소풍>이라는 1970년대 공포 영화가 있어요. 여자기숙학교의 학생들이 행잉 록으로 소풍을 갔다가 실종된 사건을 다룬 몽환적인 영화죠. 멜버른 근처에 실제 배경이 된 장소가 있어서 일부러 찾아가봤는데, 초자연적인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지형 자체가 기이하더군요.”

    ‘사기 지질학’, 2016

    영상에 사용된 3D 레이어 그래픽은 호주의 지질 데이터를 영상으로 변환한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2016년 선보인 <사기 지질학>에서도 김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지층을 시뮬레이션하는 방법을 작품에 적용한 바 있다. “초음파를 탐지하듯 소리를 이용하더군요. 일정한 간격으로 폭파 장치를 설치한 후 폭파시키면 그 사운드의 잔향이 서로 다른 매질의 경계면을 만나 반사된대요. 그걸 컴퓨터가 3D로 만들어주는 거예요. 소리가 이미지화되는 과정 자체가 흥미로웠어요. 전 그런 것들에 관심을 갖고 있어요. 우리가 알 수 없는 땅속. 스위스 치즈처럼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고 광섬유 케이블도 묻혀 있어요. 그 사이로 석유와 미네랄 광물이 흐르고 데이터가 이동하죠.” 동시대 난민 문제나 다양한 이주의 양상과 함께 지하 케이블을 통해 움직이는 데이터의 마이그레이션 문제도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의 중요한 화두다.

    “이 작품엔 세 가지 층위의 다공성이 있어요. 그중 하나가 데이터 시스템의 구멍인데, 아무리 발전한 종류의 데이터 저장 매체라도 시간이 지나면 데이터가 조금씩 지워진다고 해요. 그걸 ‘비트 로트(Bit Rot, 비트 썩음)’라고 부르죠. 언제 데이터가 사라질지 모르니, 아마존이나 구글, 오라클 같은 곳에선 수많은 데이터를 새로운 플랫폼으로 옮기는 마이그레이션 과정이 항상 벌어지는 거예요. 또 다른 다공성은 내러티브 구조예요. 개연성이 떨어지는 영화에 대해 비평가들이 부정적인 의미로 ‘플롯 홀이 많다’고 얘기하는데, 전 구멍이 뻥뻥 뚫린 내러티브를 일종의 가능성으로 봤어요. 어차피 예술이 시도하는 게 논리 정연한 내러티브가 아니라면 거기에 빈 구멍들을 만들어놓고 관객들이 자율적으로 채워 넣을 수 있게 하고 싶었어요.”

    <다공성 계곡>, 2018

    마지막으로 지질학적 다공성이 있다. 땅 아래 켜켜이 쌓인 퇴적층은 자연이 기록한 지구의 역사서다. 근대 역사를 미시적 관점에서 다뤄온 김아영은 베니스 비엔날레 초청작이기도 한 ‘제페트, 그 공중정원의 고래기름을 드립니다, 쉘’ 시리즈부터 지난 몇 년간 땅속의 검은 기름, 석유 자본에 집중해왔다. 불에서 석탄, 석유에 이르기까지 에너지의 변천사는 곧 인류의 역사였다. 그는 한국의 산업 역군으로서 중동에 파견되었던 아버지 세대의 목소리와 쿠웨이트 진주잡이 다이버들의 이야기, 걸프 전쟁 등을 사운드, 영상, 설치 작업으로 엮어 한국의 근대현사와 환경문제를 비롯한 자본주의 시대의 글로벌 이슈로 풀어냈다. 파리 국립 오페라단 소속 안무가와의 협업한 ‘이 배가 우리를 지켜주리라’에서는 보이스 퍼포머들의 노래와 음악을 통해 국립 오페라극장 팔레 가르니에를 역청(원유 가공물)이 발린 성경 속 노아의 방주로 재현하기도 했다. 검은 인공 호수 위에 지어진 이 황금빛 극장은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실제 배경으로 유명하다.

    “어느 날 석유를 어떻게 시추하는지 한번 들여다봤어요. 암반 사이에 주삿바늘 같은 시추공을 꽂아 석유를 쭉 빨아들인 후, 똑같은 양의 물을 채워 넣어요. 지반이 무너지는 걸 방지하기 위한 건데 너무 징그러운 거예요. 마치 피를 뽑고 식염수를 넣는 것 같잖아요. 우리가 살고 있는 지표면 아래 그런 물웅덩이가 얼마나 많을까요? 그 빈 공간을 상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공성의 개념에 관심이 생겼고, 여기까지 이어졌어요.” <다공성 계곡>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제페트’ 시리즈의 시적인 제목이 탄생한 배경도 흥미롭다. 김아영은 프로그래머와 함께 ‘기계 장치의 신’이라는 간단한 알고리즘을 만들었다. 자료 조사를 위해 수집해온 텍스트의 어절을 그 프로그램에 집어넣고 믹서에 돌리듯 특정 로직을 적용했을 때 갈려 나온 문장 중 하나가 ‘제페트, 그 공중정원의 고래기름을 드립니다, 쉘’이다. 중세 초, 신과의 현존 합일을 꿈꾸던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Sufi) 시인들이 신의 언어로 써 내려간 아름다운 시와 컴퓨터 알고리즘이 만들어낸 모호한 단어의 나열이 이토록 유사한 건 우연의 일치일까?

    ‘제페트, 그 공중정원의 고래
    기름을 드립니다, 쉘’, 2015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의 영상 스크립트를 쓰는 7개월 동안 김아영은 SF 장르에 빠져 있었다. “‘테크노바빌론’이라는 인디 게임이 있어요. 노스탤지어 그래픽의 사이버펑크물인데 매우 아름다워서 한동안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했죠. 옥타비아 버틀러의 소설도 그렇고요.”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역사와 판타지, 과학, 우주론 등을 테크노에 접목한 아프로퓨처리즘(Afrofuturism)을 보여주는 흑인 여성 SF 소설가 옥타비아 버틀러는 블랙 페미니즘을 음악적 키워드로 내세운 팝 스타 자넬 모네의 앨범에 큰 영향을 주기도 했다. “아프로퓨처리즘은 가능성 있는 예술적 조류라고 생각해요. 인종차별이나 성차별 같은 불평등의 문제를 리얼리즘이나 액티비즘으로 돌파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초월적 존재, 우주인, 과거에서 온 자로 설정하며 사변 속으로 끌어넣죠. 기괴하고 비현실적인 상황을 통해 오히려 저 멀리에서 우리의 현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고요. 저 역시 방법론적으로 사변 소설의 형식을 차용했어요. 앞으로도 당분간 그런 프로세스를 유지하고 싶고요.”

    SF 소설의 거장 아서 C. 클라크 원작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인류에게 문명의 지혜를 가르쳐준 검은 돌기둥의 정체를 밝히고자 노아의 방주처럼 거대한 우주선 디스커버리호를 타고 목성으로 향한다. 에너지의 변천 그리고 기술의 진보와 함께 진화해온 인류의 미래는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일까? 사람이 도구화되고, 도구가 인격화되는 물질 문명의 정점에서 우주로 떠난 영화는 니체의 철학을 담은 그 유명한 오케스트라 심포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시작된다. 김아영의 시선은 우리가 발을 딛고 선 땅 아래, 하늘보다 더 깊고 검은 지하 우주로 향한다. 거기엔 텅 빈 구멍들의 계곡을 헤매는 목소리가 있다. 전설 속 초인의 메아리가 울린다. “나는 어디서 나와 대등한 자를 찾을 수 있는가. 안일한 자들이여, 그대들은 멸망하고 말리라.”

    정금형의 쇼 쇼 쇼
    진공청소기와 사랑을 나누고 헬스장의 운동기구, 굴삭기와 교감해온 정금형이 청담동에 수상한 스파 숍을 차렸다. 지난 3월 9일 오픈한 정금형의 개인전 <스파 앤 뷰티 서울>은 포스터부터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풍긴다. 사진가 이강혁이 촬영한 포스터 사진 속에서 정금형은 커머셜 뷰티 화보의 모델처럼 목욕 수건 한 장만 두른 채 브러시와 꽃이 놓인 욕실 바닥에 앉아 포즈를 취한다. 송은아트스페이스가 위치한 청담동은 실제로 고급 스파 전문점과 에스테틱이 즐비한 동네다. 과거 앵두밭이었던 이 일대는 맑은 연못이 많아 청숫골이라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정금형이 보여주는 일련의 작업은 한국의 뷰티 산업이나 아름다움을 향한 열망과는 전혀 다른 얘기다.

    전시 기간 동안 정금형은 세 차례에 걸쳐 특별한 시연회를 개최했다. “시연회를 찾아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 제가 첫 번째로 자신 있게 보여드리고 싶은 제품은 핸드 앤 네일 브러시입니다. 손의 청결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겠죠?” 작가의 재치 있는 멘트에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비키니 수영복 차림에 초록색 수술 가운을 걸치고 나온 그는 한껏 우아한 톤으로 전시장의 기기묘묘한 전시품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가슴과 턱에 털이 돋아난 남자 마네킹의 상반신을 올린 마사지 침대, 역시 덥수룩한 수염이 난 마네킹의 머리통을 단 욕조. 빨간색 구명 튜브를 안장으로 매단 슬링 그네 밑엔 온몸에 털을 심은 전신 마네킹을 눕혀놓았다. 전시장의 마네킹은 모두 구조 실습용 인체모형을 개조한 것이다.

    <스파 앤 뷰티 서울>, 2018

    정금형은 순차적으로 마사지법을 선보였다. 마사지 도구가 되는 인형들은 정지된 상태 그대로이고 기를 쓰며 움직이는 건 사람이다. 온갖 자세를 동원해 손가락 사이까지 온몸을 구석구석 마사지하는 모습은 에로틱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장난스럽게 시작된 쇼는 점점 묘하게 흘러간다. 단계가 진행될수록 동작의 난도는 높아졌고, 쾌락과는 거리가 먼 진지한 몸부림은 유희의 대상이 아닌 영원히 성취 불가능한 욕망의 서글픔으로, 무언의 고통으로 관객에게 전도되었다. 더 이상 누구도 웃지 않았다. 관객들은 이 안쓰럽고 불편한 쇼의 마지막을 숨죽여 기다렸다. 작가의 기록용 영상 촬영 외에 일체의 촬영이 금지된 이 퍼포먼스는 각자의 기억으로만 남은 채 현실에서 지워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쾌적한 대화가 오갔다.

    “촬영을 통제한 데 특별한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너도나도 사진을 찍으면 공연에 방해가 되니까요. 물론 공연의 특성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저는 방해를 많이 받는 편이에요.” 조금 전 퍼포먼스를 끝낸 정금형은 다소 피곤해 보였다. 작업실 외에도 따로 연습실을 두고 신체 훈련을 이어가는 그는 매 퍼포먼스 때마다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낸다. 미국의 페미니스트이며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페기 펠런(Peggy Phelan)은 현존하는 신체의 사용과 사라짐을 공연의 중요한 속성으로 보고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되돌릴 수 없는 고통을 퍼포먼스를 통해 재현하는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이야기한 바 있다.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이와 같은 정금형의 일시적 재현 방식은 그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과 맞물려 하나로 정의하기 힘든 복합적인 감흥을 일으킨다. “글쎄요, 공연이란 게 매번 같을 수 없고, 사라지는 거니까요. 한편으로는 사라지지 않는 것도 문제겠죠.”

    ‘7가지 방법’, 2009

    이번 전시는 2017년 10월 런던 테이트 모던의 <테이트 라이브: 정금형>에서 선보인 신작 스‘ 파 앤 뷰티’를 재구성한 것이다. 송은문화재단과 델피나재단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통해 영국에서 개인전을 연 지난해 여름부터 작가는 ‘마사지’를 새로운 작업의 소재로 생각해왔다. “특별히 스파를 좋아하는 건 아니고요, 서비스를 주고받는 관계에 대해 생각하다 자연스럽게 브러시로 관심이 옮겨갔어요. 브러시가 내 몸을 문지르는 것이기도 하지만 내 몸이 브러시를 문지르는 것이기도 한 그 관계가 재미있게 다가왔거든요. 지금까지 제가 해온 공연에서 오브제와 나의 관계는 내가 오브제를 움직이는 것이기도 하고 오브제가 나를 움직이는 것이기도 한 움직임이었는데 브러시는 원래 그런 도구였어요.”

    여기에 대한 이해를 위해선 정금형의 지난 작업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연극과 무용을 전공하고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애니메이션 연출을 공부한 그는 일상의 사물에 캐릭터를 부여한 뒤, 화면 밖 실제 무대에서 애니메이팅을 시도해왔다. 인형사처럼 자신의 몸을 이용해 정지된 사물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다.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2005년 ‘피그말리온’에서부터 줄곧 그는 인형사이자 안무가, 무대의 주인공으로서 자신의 상대역인 사물과 애욕의 몸짓을 나눴다. ‘유압진동기’ , ‘7가지 방법’, ‘휘트니스 가이드’, ‘심폐소생술연습’ , ‘재활훈련’ 등 일련의 작품에서 그 상대는 굴삭기, 진공청소기, 운동기구, 심폐소생 실습용 더미 등으로 바뀌어갔다. 실제로 그는 헬스장에서 일한 경험이 있고, 굴삭기 운전면허증을 땄으며, 심폐소생술 자격증 프로그램을 이수하기도 했다. <스파 앤 뷰티 서울>의 안무 역시 실제 마사지법을 바탕으로 구성했다. 예를 들면 심장에서 먼 발끝에서부터 심장 방향으로 서서히 브러시에 닿는 몸의 마찰면이 이동하도록 움직이는 식이다.

    2년 전 서울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린 첫 개인전 <개인소장품>에서 그간 퍼포먼스를 위해 작가가 수집해온 각종 자료와 기계 장치, 인형, 도구를 전시한 바 있는 그는 <스파 앤 뷰티 서울>에선 전 세계의 다양한 보디 브러시와 수염 컬렉션, 의인화된 스파용품을 소개한다. 탈모 치료로 유명한 성형외과 광고와 브러시 제작 과정을 담은 영상, 뷰티 관련 기사와 화보를 연상시키는 사진도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건 역시 전시장 4층에 설치된 그네다. 어린이 놀이터의 그네와 성인용 마사지 침대 옆의 그네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물건이다. 섹스 토이 숍에서도 이색 체험을 원하는 어른을 위한 각종 놀이 기구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변의 벌거벗은 남자 마네킹들은 이 그네의 쓰임에 대한 야릇한 상상을 부추긴다. 성교는 가장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소통의 방식이기도 하다. 마사지는 애무와 닮았다. 정금형은 성적 코드를 내포한 이 음란한 그네에 인명 구조에 사용되는 구명 튜브를 달았다. 쾌락과 구원은 그렇게 하나가 되었다.

    그 과정은 극기에 가까운 고독한 왈츠다. 무대 위의 행위자는 상대와 호흡을 맞추고자 무던히 애를 쓰지만 차갑고 딱딱한 사물은 수동적으로 반응 할 뿐이다. 춤이 강렬해질수록 절망도 커진다. 욕망은 늘 비극으로 끝을 맺고, 무의미한 것을 위한 의미 있는 몸짓만 남는다. 정금형은 구도자와 같은 태도로 묵묵히 수행을 거듭할 뿐이다. “다음 작업이 무엇이 될진 아직 저도 모르겠어요. 오래전부터 생각해온 걸 하는 경우도 있고, 전혀 생각지 않은 걸 작업으로 진행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기대해주세요.” 정금형은 기존 한국 미술계에 없던 새로운 장르다. 스스로 구축한 장 안에서 그는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나아간다. 욕망의 땅에 신기루처럼 문을 연 기묘한 스파 숍 <스파앤 뷰티 서울>의 영업 기간은 5월 26일까지다. 외로운 영혼들을 위한 뜨거운 마사지가 준비되어 있다.

      에디터
      김나랑
      포토그래퍼
      민경복 , 김영훈
      컨트리뷰팅 에디터
      이미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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