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자신의 레이블 10주년을 맞이한 알렉산더 왕

2016.03.16

by VOGUE

    자신의 레이블 10주년을 맞이한 알렉산더 왕

    알렉산더 왕은 발렌시아가에서 떠났지만, 자신의 브랜드에선 10주년을 맞았다. 뉴욕에서 10년, 그리고 파리에서 3년, 그는 뭘 배우고 또 얼마만큼 성장했을까?
    VAN-SARKI-ALEXANDER-WANG-BRITISH-VOGUE

    “오늘은 우리가 조용히 보내기로 한 생일 중 하나입니다. 기념하기 위한 어떤 계획도 없어요.” 알렉산더 왕(Alexander Wang)은 장난스러웠다. 그날은 뉴욕 패션 위크가 열리고 있는 훈훈한 9월 밤이었다. 뉴욕 패션 위크는 허드슨 강 94번 부두에서 열리고 있었다. 왕의 쇼는 그의 브랜드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쇼가 시작되기 전, 이미 록 콘서트처럼 유명 인사로 가득한 프런트 로(칸예 웨스트, 레이디 가가, 니키 미나즈, 메리 J. 블라이즈 등을 포함한) 덕분에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31세의 디자이너(날렵한 사냥개처럼 마르고 평소처럼 반스 트레이너에 티셔츠와 자기 브랜드 진을 올 블랙으로 차려입은)는 축하할 일이 많았다. 증명해야 할 것도 많았다. 우리가 만났을 때 그는 발렌시아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마지막 파리 런웨이 쇼를 몇 주 앞둔 상태였다. 그의 재직 기간은 발렌시아가의 긴 역사로 볼 때 한순간이었다. 압력은 계속됐고 왕은 그걸 알고 있었다. 아니, 그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는 걸 알았다. “어떤 쇼라도 비슷한 느낌이 들어요. 그게 발렌시아가에서 제 마지막 시즌이 아니라 해도 그럴 겁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모델들이 비행복, 권투 장갑 끈을 맨 테니스 스웨터, 가죽 프린지가 장식된 아미 코트, 철물점에서 구입했을 법한 묵직한 체인처럼 보이는 끈이 달린 캐미솔, 그리고 쇼의 대미를 장식한 웨스턴풍 검정 가죽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등장했다. 주제가 있다면 ‘메시가 많이 가미된 뒤죽박죽’이라고 할 수 있다. 뭐든 미국적으로 해석된 옷이었다. 2016 S/S 알렉산더 왕 컬렉션은 이 시즌에 크게 부족하던 섹시한 활력을 제공했다. 그건 자신의 비전을 과거의 디자이너들과 섞지 않아야 한다는 진심 어린 목소리가 담긴 호소처럼 보였다. 왕의 무대 인사는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긴 런웨이에서 승리의 깃발을 나부끼는 듯 보였다. 공중에 손을 흔들고 관객들에게 키스를 날릴 때 트레이드마크인 긴 머리가 살랑살랑 흩날렸다.

    쇼는 매끄럽게 애프터파티로 바뀌었다. 그곳에선 루다크리스와 티나쉬와 릴 웨인이 공연을 펼쳤다. “밖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릴 때 영감을 얻어요.저는 축하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제 삶에는 그런 균형이 필요해요. 일할 때는 100% 집중합니다. 하지만 긴장을 푸는 것도 필요하죠. 나가서 활짝 마음을 열 수 있는 곳 말이에요.” 왕의 강점은 생기 넘치는 클럽과 음악 ‘씬’과의 관계에 있다. 예전엔 패션과 나이트라이프와의 교류가 공생 관계였다면 지금은 종종 저렴하고 타락한 방향 전환으로 여겨진다. 뉴욕에서 왕은 고상한 체하는 속물이 아니다. 그는 맨해튼의 인기 있는 나이트클럽과 브루클린의 창고 파티에서 목격된다. 당신은 우버 택시에서 굴러떨어지는 왕을 본 적 없을 것이다. 약간 짓궂긴 하지만 부랑자는 아니다. 그리고 솔직함은 신선하다. “저는 저답게 살 줄 알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저를 보고 놀라거나 충격받지 않죠. 오히려 사교계 기금 모금 때 스리피스를 입은 저를 본다면 반항한다고 느낄 겁니다.” 스트리퍼들은 다리를 벌리고 폴대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후터스(노출이 심한 옷차림과 풍만한 가슴의 직원들로 유명한 레스토랑 체인)에서 일하는 웨이트리스들이 미니 햄버거와 매콤한 치킨 샌드위치를 내왔다. 바텐더들이 ‘알렉산더 왕 10’이라는 글자가 조각된 거대한 얼음 위에 보드카를 붓자 아래 놓인 컵 안에 술이 담겼다. “저는 누구도 말짱한 걸 보고 싶지 않아요!”라고 왕은 무대에서 마이크에 대고 소리쳤다. “당신 옆에 놓인 술을 들고 단숨에 들이켜세요!”

    디자인, 비즈니스, 파티, 태도와 관련해 왕의 이런 전형적이고 미국적인 요소는 발렌시아가에서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는 피고용인이었어요. 최후 결정을 내리는 건 제가 아니었어요. 그건 제게 엄청난 변화였죠.” 2012년 발렌시아가에 고용된 후 그는 발렌시아가 매장을 녹색 대리석으로 바꾸고 하우스 설립자에 대해 숭배하는 형태의 옷을 만들었다(새로운 게 뭔지 그 맥을 정확히 짚어내는 재능을 지닌 디자이너의 입장에선 지나칠 정도로 아카이브를 존중했다고 할 수 있다). 뉴욕에서 그의 브랜드는 틈새시장을 갖고 있다. 그의 쇼는 놓치지 말아야 할 주요 행사다(비록 그가 브루클린에서 쇼를 선보여 많은 에디터들이 겁에 질렸지만 모두 참석했다). 또 다른 쇼와 차별된다. 그러나 파리 럭셔리라는 엘리트 세계에서 그의 발렌시아가는 눈에 띄지 않았다. 왕은 프랑스 수도에서의 생활에서도 단절감을 느꼈다. “늘 제가 통과할 수 없는 온실 안에 있는 느낌이었어요. ‘내가 외국인이기 때문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는 한 달에 두 번씩 그곳을 방문하면서도 아파트를 얻지 않고 호텔에 머물렀다. 그곳에는 언더그라운드 나이트클럽을 함께 전전할 패거리도 없었다. 스타일리스트 바네스 트레이나(고교 동창)는 그와 함께 쇼를 준비했다. “우리는 매일 밤 조용한 일식집에 가곤 했습니다”라고 왕은 말한다.

    Balenciaga 2016 SS

    Balenciaga 2016 SS

    Balenciaga 2016 SS

    Balenciaga 2016 SS

    Balenciaga 2016 SS

    왕의 실적은 생로랑(역시 케어링 그룹이 소유한)의 에디 슬리먼이 세워놓은 높은 기준으로 평가받았다. 그가 재직하는 동안 발렌시아가는 해마다 두 자릿수 성장을 달성했다. 케어링이 정확한 숫자 공개를 거부할 것이기에 그게 정확히 얼마를 의미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생로랑의 놀라운 판매 실적이 이 럭셔리 패션 그룹의 판도를 바꾸어놓을 중요한 사건임을 증명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케어링은 2015년 7월 31일 이렇게 발표했다. “발렌시아가와 알렉산더 왕은 오늘 처음 정한 계약 기간 외에 계약을 갱신하지 않는 데 합의했다.” 그것은 기네스와 크리스의 ‘호의적 이혼 준비’,마크 바이 마크 제이콥스의 종결과 비슷했다. 그렇기에 막후에서 진짜 무슨 일이 진행됐는지 낱낱이 공개되진 않을 것이다.

    왕은 자신의 쇼가 끝난 뒤 무대 인사 때 보였던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사람들이 명랑하고 쾌활하다고 묘사할 만한 디자이너는 많지 않다. 지금 선택의 기로의 서 있는 왕 같은 디자이너의 경우엔 더 그렇다. “저는 미래에 대해 아주 흥분하고 있어요. 그거야말로 제가 집중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다음엔 뭘 하고 싶지?’ 저는 짧은 시간 동안 우리가 발렌시아가에서 할 수 있었던 모든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껴요. 하지만 지금은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패션쇼가 열리기 며칠 전 왕은 뉴욕 소호에 있는 자신의 매장에서 파티를 열었다. 파티 요소를 갖춘 홍보 행사로 대중에게 개방된 파티였다. “불안해요”라고 그가 매장에 들어서며 농담했다. “사람들은 아주 실망할 거예요. 칸예가 와 있을 거라고 기대할 테니까요.” 그는 팬과 셀카를 찍기 위해 멈췄다. 또 다른 팬들과의 셀카 타임이 이어졌다. 끝이 없었다. 그들 모두 왕이 자선단체 ‘두섬싱(Dosomething.org)’을 위해 디자인한 스웨트셔츠와 티셔츠로 이뤄진 저가 미니 컬렉션을 구입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 옷들은 6,495달러짜리 체인 메일 시스 드레스 같은 아이템 옆에 쌓여 있었다. 이번 행사는 브랜드 10주년을 기념하는 많은 이벤트 중 하나다. “10년을 압축하는 건 힘들어요. 매번 열리는 컬렉션과 광고 캠페인이 중심축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서 많은 것을 배웠고 늘 스스로에게 도전하며 발전해왔으니까요. 그리고 팀으로서, 하나의 기업으로서 매번 다른 것을 향해 전진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첫 매장을 열던 때가 중요한 순간이었다고 말하고 싶군요.”

    2011년 모피 해먹이 걸린(여전히 당당하게 걸려 있으며 현재는 왕이 디자인한 8,800 달러짜리 빈백 체어도 놓여 있다) 소호 부티크가 문을 열었을 때 그것을 경호 체계의 변화에 대한 은유로 보지 않긴 힘들었다(예전엔 요지 야마모토 매장이 있었다). 왕은 올 초 스물다섯 번째 매장(그리고 유럽의 첫 매장)인 런던 플래그십을 열었다. 메이페어의 앨버말 스트리트에 위치한 놀라울 정도로 세련된 여러 층의 매장이다. 603㎡가 넘는 이곳은 현재까지 이 브랜드 매장 중 가장 커서 왕의 명성을 자랑할 만하다.

    Alexander Wang 2016 SS

    Alexander Wang 2016 SS

    Alexander Wang 2016 SS

    AAlexander Wang 2016 SS

    Alexander Wang 2016 SS

    10년 동안 선보인 옷 중 팬들이 뽑은 베스트셀러를 모은 캡슐 컬렉션도 판매 중이다. 여기에는 모피 프린지 소매가 달린 모터사이클 재킷, 레이스업 가죽 쇼츠, 그리고 팔에 술 장식이 달린 가죽 스웨트셔츠가 포함돼 있다. 이들 아이템은 올 블랙이며 섹시하고 약간 전복적이다. 이런 형용사야말로 알렉산더 왕이라는 브랜드를 정의하기에 제격이다. 2014 S/S 캠페인은 공중화장실의 안나 이버스(배수구 옆 바닥에 누워 있거나 변기 위에 앉아 있거나 세면대 위에 다리를 벌리고 널브러져 있거나)가 주인공이다. 그것은 존 워터스 감독의 <암컷 소동(Female Trouble)>의 배드 걸 욕실 장면을 사진가 스티븐 클라인이 응용한 듯하다. “그의 디자인에는 몇 가지 아이러니가 있어요”라고 모델 한느 가비 오딜은 얘기한다. 그녀는 왕을 위해 일하기 전부터 그의 친구였으며 현재 알렉산더 왕 광고에 등장하고 있다. “보다 가벼운 주머니가 달린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부츠! 유머가 있고 여전히 세련됐죠.”

    왕에겐 남성복과 여성복뿐 아니라 자체적으로 열성 팬을 거느린 ‘T’ 라인도 있다. 그래서 이 컬렉션을 디퓨전 라인으로 불러선 안 된다. 이를 포함해 개인 소유인 왕의 브랜드는 가족 사업이다. 왕의 형 데니스는 CPO, 그의 형수는 CEO다. 그의 어머니 잉은 비공식적으로 컨설팅과 고문 역할을 맡고 있다. 이 브랜드는 재정적 세부 사항을 밝히려고 하진 않지만 <뉴욕 타임스>가 “알렉산더 왕은 지난 3년간 해마다 약 20%씩 성장했다. 그리고 2013년엔 1억 달러를 넘어섰다”라고 평한 것이 꽤 현실적이라고 대변인은 얘기한다. 이 모든 것을 거느린 왕의 직함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고 해서 그가 ‘크리에이티브’한 면에만 집중하는 타입은 아니다. “저는 전체 그림에 관심을 쏟습니다. 머천다이저,판매원들, 홍보, 배송, 생산팀과 더 많은 얘기를 나눌수록 그들이 일하는 데 뭐가 필요한지 더 많이 알게 되죠. 디자이너가 CEO와 아주 동떨어져 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패션의 선사시대라 할 수 있어요. 저는 모든 회의, 라인 편집 등 전반적인 부분에 관여하고 모든 사람을 참여시킵니다. 디자인팀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이 옷걸이 문제인지 제조 문제인지 늦은 배송이 문제인지 파악한다면 우린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왕은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 성장했다. 부모님은 중국에 플라스틱 공장을 갖고 있다. 파슨스에서 패션을 공부하기 위해 뉴욕으로 이사했지만 2년 만에 중퇴했다. 교수 중 한명인 진 라킨(Gene Lakin)은 그를 또렷이 기억한다. “왕은 다른 학생들과 마음이 잘 맞았어요. 다들 왕에게 뭐든 물어봤죠. 집중력이 대단하고 아는 게 많았지만 거만하지 않았어요. 이곳처럼 경쟁이 심한 학교에서 학생들은 아주 건방지기 마련인데, 그 건방진 태도에 걸맞은 실력은 없죠. 하지만 그는 전혀 달랐어요.” 왕은 학교에 대해 이렇게 추억한다. “저는 아주 돈독한 우정을 쌓았어요. 그리고 뭐가 맞지 않는지 알게 됐습니다.” 왕의 브랜드는 그가 옷을 판매할 만한 매장을 찾아 트렁크에 자신의 스웨터를 넣고 초대받지 않은 매장을 돌아다니며 시작됐다. 초창기 오프닝 세레모니는 그의 신생 브랜드를 취급한 최초의 매장 중 하나였다. 첫 런웨이 쇼는 2006년에 열렸다. 모델 겸 디자이너 에린 왓슨이 스타일링을 맡았다(왕의 친구이자 위층에 사는 이웃이었다). “알렉스는 모든 사람에게 파티에서 쫙 빼입지 않아도 된다는 걸 보여주었어요”라고 말하며 그녀는 웃었다. “‘그거 알아? 신경 쓰지 마!’ 싹둑 자른 데님 쇼츠, 하이힐, 그리고 티셔츠를 입은 채 평소 어떤 드레스를 입을지 결정하느라 스트레스 받는 그런 파티에도 가라는 거죠. 사람들은 그 컬렉션을 보고 ‘와우! 이젠 좀더 나다워질 수 있겠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뒤 많은 상이 그에게 주어졌다. 겨우 3년이 지난 후 왕은 CFDA/Vogue 패션 펀드를 받았다. 당시 그의 데이트 상대는 조 크라비츠였다. 그녀는 나중에 T 광고에 등장한 친구다. “그의 미학은 아주 단순해요. 그는 그것을 트렌디하지 않게 만듭니다”라고 그녀는 말한다. “덕분에 늘 시대를 앞서가는 느낌이 들죠. 그는 이 모든 성공에도 불구하고 예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어요. 그 성공을 잘 다룰 줄 알아요. 이 점이야말로 그가 어떤 사람이고 그에게 뭐가 중요한지 말해주죠. 그에게 중요한 건 친구들, 가족들, 그리고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겁니다. 그는 고등학교 친구들과 여전히 친하게 지내고 있어요.” 자신이 만든 브랜드의 지속성에 대해 왕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뭔가 잘 풀리지 않을 때 곧바로 다시 일어서거나 ‘그거 알아? 그건 정말 엿 같아!’라고 말하는 법을 배웠어요.” 그는 잠시 멈추더니 말을 이었다. “그래요, 화가 나거나 좌절하거나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그러고 나서 다음 일을 계속할 뿐입니다.”

      윌리엄 반 미터(William Van Meter)
      포토그래퍼
      VAN SARKI, JAMES COCHRANE, GETTY IMAGES / MULTIBITS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