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모스트 페이머스
직업 탓 에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왕왕 쓰긴 했다. 하지만 때마다 나의 애정은 미중년들을 향해 있었다. 프라다 런웨이에 선 게리 올드만이나 윌렘 대포의 끝내주는 카리스마, 안 질환이 있냐는 멍청한 질문을 받을 정도로 촉촉하고 섹시하며 허랑방탕한 김윤석의 눈, <박쥐>에서 사제복 차림으로 “이제 전 쾌락만을 추구할 겁니다”라고 읊조리던 송강호의 쇳소리 섞인 목소리에 환호를 보냈다. 소싯적에 연하와 연애 한 번 안 해본 나라는 여자가 품을 수 있는 관록 있는 남자들에 대한 오래된 판타지. 그런데, 그런 여자가 변했다.
돌이켜보면 시작은 박보검이었다. 지금처럼 김연아와 평창 동계 올림픽 광고를 찍는 대단한 존재가 되기 전, 나는 그가 사이코패스 변호사이자 주인공의 동생으로 나온,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드라마 16부작을 오로지 그를 보기 위해 정주행했다. 영화 <차이나타운>에서 김고은의 첫사랑으로 나와 허무하게 죽임을 당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그의 천진난만한 캐릭터가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라 도무지 몰입할 수 없다고 비판할 때 나는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다. (사실 비판은 일리 있었다. 돈 받으러 온 일영
(김고은)에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직 식사 안 하셨죠? 뭐 좋아하세요? 찬거리가 없네. 아, 파스타 괜찮으세요? 오일 파스타가 빨리 되는데.”) 뜬금없게도 나는 극 중 포장마차에서 추레한 남방을 걸친 채 구부정한 어깨로 앉아 있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엉엉 울었고, ‘길티 플레저’로 간직하면 될 것을 괜히 얘기 꺼냈다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비웃음을 받아야 했다.
어쨌든 그 이후로 남자의 또 다른 매력(그것이 젊음이든, 섹시함이든, 뭐든)을 감지하는 신경 회로가 서서히 가동하기 시작한 것 같다. 미리 밝히자면, 나는 젊은 남자와 침대에서 뒹구는 쿠거족을 욕망하는 여자가 절대 아니며, 그럴 배짱도 못 된다. 차라리 이런 해명이라면 모를까.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의 한 장면, 40~50대쯤 보이는 어느 아저씨가 아들뻘 되는
청년(장발장이라는 캐릭터)의 옆모습을 보면서 말한다. “젊으니까, 참 예쁘네.” 극 중 청년은 아저씨의 지갑을 훔쳤고,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저씨는 청년에게 막걸리 한 잔과 함께 따뜻한 격려를 건넨다. 말하자면, 이 아저씨의 마음에 더 가깝다는 얘기다. 실‘ 화극장’에나 나올 그저 그런 사건 사고 같은 것이 아니라, 그저 ‘젊으니까, 참 예쁘네’다.
무명이 스타가 될 동안 될성부른 떡잎들이 탄생하긴 했지만, ‘박보검의 어깨’ 같은 느닷없는 유혹의 존재를 만나진 못했다. 드라마 <당신이 잠든 사이에>에서 수지를 짝사랑하는 경찰 한우탁으로 나온 정해인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백년의 신부> <삼총사> <블러드> <도깨비> <불야성> <임금님의 사건수첩> 등 어림잡아 10여 편의 영화와 드라마에 얼굴을 비칠 동안 한 번도 그를 눈여겨보지 않았던 게 이상할 정도인데, 한편 차라리 다행이다 싶다.
정해인의 첫인상은 ‘약간 덜 못된 김수현’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종석과 수지의 다정한 사랑싸움을 지켜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을 때, 나는 그가 ‘원본’보다 더 다채로운 캐릭터를 입을 수 있는 좋은 바탕을 가졌다고 믿게 되었다. 기쁜 것도, 슬픈 것도 아닌 씁쓸하고 쓸쓸해서 안아주고 싶은, 제3자의 아련한 미소. 팬심이 동한 나는 그의 전작인 독립영화 <서울의 달>을 찾아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불세출의 드라마 <서울의 달>을 리메이크한 22분가량의 이 영화에서 정해인은 동대문 패션타운에서 의류 구매를 대행하는 일명 ‘사입삼촌’ 지평 역을 맡았는데, 여기서도 딱 이 표정을 짓는다. 사랑이란 게 절대 내 마음대로 될 수 없음을 직시하게 되는 시기가 누구에게나 있는데, 어쩐지 정해인의 미소에는 그 근본적인 상실감이 짙게 깔려 있다. 슈퍼주니어의 동해가 출연, 모든 이슈를 독식해버린 <레디액션 청춘>이라는 독립영화에서는 입대 전 여자 친구와 어떻게 해보려는 지질한 청춘을 연기하는데, 그때의 웃음은 더 손에 잡힐 것처럼 생생하다. 그런 그가 그저 예쁘게 웃는 것이 자신의 전부가 아님을, 영화 <역모-반란의 시대>로 증명하고자 한 건 축하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평점 3.3이라는 숫자가 그에게 상처가 되지 않길 바라며 과감히 이 영화를 보지 않기로 했다. 대신 기억하는 사람 없어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온 그가 <슬기로운 감빵생활>에서 ‘악마의 유대위’ 캐릭터로 어떤 반전을 선사할지에 대한 긴장과 기대가 무한대로 증폭된 지금의 상태를 즐기기로 했다. “연기는 조금 못하더라도 아직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이 순진한 청년, 젊은 배우가 얼마나 상처받고, 그
럼에도 맹렬히 성장할 것인지 역시 나만의 흥미진진한 관전 포인트다.
사실 나는 정해인이 신인 남자 배우에게 마치 관문과도 같은, 연기력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사이코패스 캐릭터를 맡는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면에서 양세종이 한발 앞섰다. <낭만닥터 김사부>에서 까칠한 도련님 역할로 얼굴을 알렸을 때, ‘쓸 만한 신인 한 명 나왔나 보네’ 했던 안일한 기대감이 1인2역을 맡았던 <듀얼>을 보면서 괜히 미안해졌다.
애석하게도, 내 주변에서 <듀얼>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 시청자는 나뿐이다. 나는 매회 쫓기고 얻어터지며 악전고투하는 양세종을 포기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런 도전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그처럼 무명 시절을 생략한 행운아라면 적당히 품위 유지하며 기다리기만 했어도 <사랑의 온도> 같은 완벽한 남자 주인공을 맡을 가능성이 높았을 거란 얘기다. 하지만 그는 앞머리를 올렸다가 내렸다가, 블랙 셔츠를 입었다가 점퍼를 입었다가 하며, 베테랑도 힘들다는 1인2역을 ‘겁 없이’ 맡았다. 사실 양세종의 연기는 드라마의 만듦새만큼이나 썩 훌륭하진 않았다. 하지만 만약 제작진이 인간 안에 공존하는 선악을 보여주고 싶었다면,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가 한쪽 입술을 살짝 올리며 이죽거릴 때의 차가움과 대한치과의사협회가 보증한 듯한 건치를 완전히 다 드러낼 때의 따뜻함의 온도 차가 꽤 컸기에, 나 같은 누군가를 속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한예종 연기과 출신에 그레고리 포터의음악을 듣는다는 식의 정보나 “모든 역할에는 각자의 사연이 있다” 같은 인터뷰 문장은 양세종이 꽤 예민하고 생각이 많은 남자임을 짐작하게 한다. 고
백하자면 그는 시골에서 나고 자란 내가 가진 서‘ 울 오빠’의 이미지에 딱 부합한다. 실제 그와 꼭 닮은 ‘서울 오빠’를 짝사랑한 적이 있는데, 그가 형편없는 포즈로 달리기하는 모습을 보고는 마음을 접었다. 그래서 양세종이 달리는 모습은 앞으로도 웬만하면 보지 않는 것으로, 애정을 지켜나갈 작정이다.
몇 달 전, <보그>가 우도환이라는 신인 배우에게 이례적으로 6페이지를 할애한 건 결국 성공적인 선택이었다. 그는 이미 각종 패션 브랜드의 뜨거운 러브 콜을 받고 있다는 후문이 들려오고 있다. 사실 그처럼 에곤 실레가 그린 날카로운 소년 같기도, 귀족적 권태감으로 스스로를 고양시키는 듯한 타마라 드 렘피카의 ‘다플리토 후작’ 같기도 한 젊은 배우는 흔치 않다.
영화 <마스터>의 조의석은 전작 <감시자들> 이후 또 한번 웰메이드 영화를 얼마나 깔끔하게 만들 수 있는지 보여주는 데는 실패했을지언정, 배우를 선별하는 꽤 괜찮은 안목을 가졌음을 증명하는 데는 성공했다. 우도환은이 영화에서 극 중 김엄마(진경)의 곁을 지키던 ‘스냅백’으로 출연했다. 그가 스크린에 얼굴을 드러낸 시간은 러닝타임 143분 중 겨우 3분 남짓. 대사는 단답형 대답이 전부였는데, 어찌나 입이 무거웠던지 벙어리 컨셉인 캐릭터인
줄 알았다. 그럼에도 영리한 우도환은 그 3분을 300분처럼 활용한다. 눈빛과 몸짓, 슬리브리스 밖으로 보이던 다부진 어깨와 팔 근육을 통해서. 한없이 다정해 보이다가 돌연 사나워지는 우도환 특유의 이중성은 그 후에도 완벽하게 활용되었다. 사실 사이비 종교 스릴러 <구해줘>나 보험 사기 추적 스릴러 <매드독>, 수직 상승의 기회를 준 두 편의 드라마 모두 우도환의 변신 혹은 변장의 컨셉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공통점이 있다. 심지어 <마스터>에
서도 그는 김엄마와 돈으로 얽힌 관계인지, 몸으로 얽힌 관계인지 살짝 고민하게 만든다. 잘생긴 것도, 못생긴 것도 아닌 오묘한 마스크,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기이한 장악력을 가진 눈. 우도환의 뛰어난 위장 능력은 속내를 적절히 감추고 드러내야 하는 멜로 영화에서 만개할 것으로 보인다. 천 개의 고원을 품고 있지만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으려는 그의 영악한 비밀스러움에취하기 위해서라도, 한국판 <리플리> 같은 작품이 하루빨리 나와야 하지 않
나 싶은 것이다.
영화 <마스터>에서 우도환과 함께 이병헌의 심복 노릇을 한 벙거지 역의 박해수야말로 요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중이다. <슬기로운 감빵생활>에서 여동생을 구하려다 실수로 사람을 죽이고 복역한 야구 선수 제혁 역할로 매주 그를 만난다. 언젠가 신원호 피디를 만나게 된다면 딱 세 가지를 묻고 싶은데, 야구 혹은 야구 선수에 대한 애정의 원천(그의 작품에서는 야구가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어릴 적 친구와의 사랑에 집착하는 이유(<응답하라> 시리즈의 모든 것이었다), 그리고 박해수를 캐스팅하게 된 계기다.
사실 박해수는 부지불식간에 우리 곁에 있었다. 연극 무대에서는 꽤 잔뼈가 굵어 위의 애송이들과 함께 마음에 두는 것이 실례가 아닌가 싶을 정도지만, 그의 실물을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소지섭의 그것보다 더 길고 그윽한 눈매와 무대에서 백 마디 대사보다도 훨씬 강력하다는 그의 맨발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 비극, 셰익스피어, 안톤 체호프 게 알고 있는 지성파, 그리고 대사 스타일을 고치기 위해 끊임없이 신체 훈련, 보이스 코칭, 발음 교정, 발성법 등의 과학적인 수업을 듣던 노력파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사실 나의 호들갑은 한발 늦은 것일 수도 있다. 알고 보니 <육룡이 나르샤>에서 함경도 사투리를 쓰는 장수 이지란으로 나왔을 때부터 그의 은근한 매력에 빠져 ‘털보토끼’라는 애칭으로 부른 팬들도 많고, 실제 <남자충동> 같은 연극에서는 더블 캐스팅이었던 류승범과 비교해 절대 뒤지지 않는 티켓 파워를 발휘하기도 했다. 그가 맡아온 다양한 ‘수컷’의 매력은 생애 첫 주연 드라마에서 무식하고, 둔하며, 잘하는 거라곤 야구 밖에 없지만 누구보다 따뜻한 남자로 집대성되어 나를 매료시키고 있다.
영화계나 방송계의 담당자들은 “웬만한 남자 배우들을 모두 군대에 보낸 후라, 때아닌 젊은 배우 품귀 현상에 시달리고 있다”고 푸념한다. 이는 상대적으로 신선한 이미지의 젊은 배우들을 향한 관심이 더욱 이례적으로 뜨겁다는 분석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나는 이들이 상대적으로 어떤 이점을 확보했는지는 별로 관심 없다. 완성된 스타의 파워가 아니라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가능성, 노련한 배우들에게는 없는 폭발 직전의 에너지를 욕망하기 때문이다. 도무지 강력해질 수 없다는 건 젊은 배우들에게 천형과도 같은 과
제였으나, 이 혼돈의 시대를 즐길 때가 되었다. 산전수전 다 겪어 이젠 겁날 것도 없다는 식의 관조적인 여유 대신 오히려 노골적인 두려움과 멋모르는 패기가 요즘 같은 불확실성의 시대를 격려하는 동력이 된다. 장 콕토가 만든 신조어, ‘앙팡 테리블’들이 지금 우리에겐 매우 필요하다, 여러모로.
그런 점에서 나는 요즘 젊은 배우들을 보면서 호주 작가 벤 퀼티의 초상화를 떠올렸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만난 청년들의 초상화를 그린 그는 청년들에게 한 가지 공통된 포즈를 요구했다. 눈을 감은 채로 얼굴을 태양으로 향하게 한 후, 그 자세에서 눈을 뜨면서 광선을 시선으로 느끼는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것. 이들이 직면하고 있는 압도적인 무언가를 상징하고 포착하기 위해서였다. 이 젊은 배우들이야말로 바로 그 순간에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온전히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눈부신 성공 직전의 순간, 강렬한 광채를 직면하는 그들의 망막에 과연 무엇이 새겨질지, 그들을 지켜보는 우리의
마음에 무엇이 새겨질지 목격하는 건 무엇보다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 부디, 아름다운 그들의 눈이 멀지 않길 바랄 뿐이다.
- 에디터
- 윤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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