깎느냐 마느냐, 영구 제모의 모든 것
깎느냐 마느냐. 오늘날 체모 그루밍은 취향이며 존중이자 운동이다. 나는 영구 제모의 길을 택했다.
한 달에 한 번, 헤어 염색을 위해 들르는 단골 미용실. 꿀잠을 부르는 두피 마사지를 받다 보면 늘 듣는 이야기가 있다. “어머, 고객님! 머리숱이 정말 많으시네요. 그동안 봐온 분 중 제일 많아요. 시술비 더 받아야 할 것 같은데요?” 칭찬으로 건넨 그녀의 한마디가 대체 왜 내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와 꽂힌단 말인가. 네가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중전이나 대비마마가 되고도 남았을 거라는 농담도 수없이 들을 정도였다(당시 구중궁궐 여인들의 가체 혹은 어여머리를 떠올려보시길). 고백하자면, 내 두피의 모공 하나에서 자라는 모발 개수는 무려 5~8개. 보통 3~4개인 것에 비하면 과연 압도적 수치다.
누군가는 나의 모발 유전자를 부러워할 수 있겠지만, 사실 나로선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 지난 수년간 이어진 ‘털과의 전쟁’ 때문이다. 머리숱이 많으면 몸에 자라는 털의 양도 상당히 많다는 뜻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인중에는 털이 거의 나지 않았지만, 2차 성징 후 쑥쑥 자라기 시작한 겨드랑이, 종아리, 허벅지, 팔 위의 잿빛 털은 학창 시절 내내 나를 움츠리게 만든 주범이다. 그리고 마침내 스무 살이 되던 해 레이저 제모 시술의 세계에 입성했고, 2년간의 꾸준한 시술 끝에 비로소 1차 ‘털 대전’은 일단락됐다.
다음 화살은 지난달 <보그>가 특집으로 다룬 바로 ‘그곳’으로 돌아왔다. Y존 제모의 필요성을 딱히 인지하지 못하던 내가(전 세계의 페미니즘 물결에 일렁여 체모를 자연스러운 그대로 두는 최신 트렌드를 따르고 싶었다고나 할까) 6년 전 여름, 팜스프링스 여행을 앞두고 결심이 섰다. 올리브영에서 1만원에 구입한 왁스 스트립으로 처음 셀프 비키니 왁싱을 시도하던 날을 어찌 있겠나. 입술을 꽉 깨물고 손바닥만 한 거울에 요리조리 비춰가며 오뜨 꾸뛰르 장인들이 수를 놓듯 정교한 작업에 몰두했다. 아마 2시간쯤 걸렸을까? 형편없는 왁스 품질, 힘 조절 실패, 꼼꼼하지 못한 부착 탓에 나의 소중한 ‘그곳’은 허리케인이 한바탕 훑고 간 것처럼 울긋불긋 볼품없었다. 세상에!
“털 위로 바른 왁스가 고르게 밀착되지 않으면 왁스가 제거되면서 털이 중간에 끊어질 수 있어요. 혼자 하다 보면 연약한 피부 조직이 탈락되는 위험도 피할 수 없고요.” 무무 왁싱 스튜디오의 장정윤 대표가 ‘폭망’ 원인에 대해 점검해주었다. 내친김에 처참히 실패한 셀프 왁싱을 뒤로하고 전문가의 손길에 의지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올 누드, 그러니까 몽땅 제거하는 게 좋겠어요. 털마다 자라는 주기가 다르니 리셋 개념으로요. 그다음부터는 주기를 맞춰보세요.”
드디어 나는 조도가 낮은 조명 아래 마사지 베드에 누웠다. 노크 후 들어온 전문 왁서가 일회용 나무 막대로 퍼낸 따뜻한 왁스가 내 ‘그곳’에 사뿐히 닿았다. 그런 다음 굳기 전, 평평하게 펴 바른 왁스 위에 천을 밀착시킨 뒤 ‘쫙!’ 하고 재빨리 뜯어낸다. ‘지금 뭐가 지나간 거지?’ 노련한 실력에 감탄하기도 잠깐. 난도 최상에 해당하는 외음부 중 치구 부분에 다다랐을 땐, 순간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마부터 시작한 땀줄기가 등을 타고 내려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알코올에 소독한 족집게로 미처 뽑히지 못한 짧은 털을 정리하면서 첫 브라질리언 왁싱 경험이 종료됐다. 휴! 고통의 몸부림은 40분간 이어졌지만 눈에 보이는 즉각적 미용 효과, 생리 시 찝찝함과 습기와의 이별이 떠오르자 그 고통쯤은 금세 망각했다.
브라질리언 왁싱은 꾸준한 인그로운 헤어(피부 안에 박힌 짧은 털) 관리가 뒷받침될 때 빛난다. 음모는 다른 부위 털과 달리 머리카락처럼 두껍기에 자칫 후추를 뿌린 듯 표피 안쪽으로 자라 군데군데 지저분해질 수 있다. 음부에 털이 없으니 이제 돋보이는 건 시간문제. “물리적 자극을 주는 왁싱 직후에는 모근에 상처가 나기 마련인데, 모근이 회복되는 3일 동안은 유분이 없는 수분 제품으로 뾰루지가 나지 않도록 진정시켜야 해요. 그리고 일주일에 두세 번씩 자극이 적은 스크럽제로 각질을 제거하면 인그로운 헤어와 색소침착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브라질리언 왁싱의 1회 지속력은 불과 2~3주. 3주가 지나면 슬슬 ‘마의 구간’에 접어든다. 갓 깎은 억센 잔디처럼 속옷이나 레깅스를 뚫고 나와 일상생활마저 꽤 난처해지는데, 면도하지 않고 있다가 6~8주 뒤 모근이 약해졌을 때 한 번 더 왁싱 리터치를 받으면 고통도 덜하고 깔끔하게 유지된다.
그렇게 왁싱 VIP 고객 5년 차가 되던 해, 무수한 ‘뜯김’ 끝에도 끄떡없는 음모 양에 지친 나는 브라질리언 레이저 제모라는 시술에 솔깃해졌다. “레이저 빛 에너지가 털을 포함한 멜라닌 색소에 선택적으로 흡수된 다음 모발 뿌리에 해당하는 모낭과 주변 세포를 파괴하는 원리예요.” 리츠피부과 박경제 원장이 설명했다. “‘아포지플러스’는 반영구 제모에 적합한 알렉산드라 이트레이저와 피부 조직을 탄력 있게 만들어주는 타이트닝 레이저를 조합한 인기 레이저 장비입니다. 미국 피부과학회지 연구 논문에 실린 내용을 보면 다른 제모 레이저보다 1.5배 이상 높은 제모 효과를 보였어요. 피부가 밝을수록, 털 색깔이 진할수록 효과가 좋아요.”
10년 전, 몇백만 원대의 전신 레이저 제모 시술을 받을 때만 해도 ‘영구 제모’의 꿈을 실현할 레이저 장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영구 제모는 제모 시술 종료 6개월 후 제모한 부위에 털이 다시 올라오지 않는 것을 정의하는데 모낭에 있는 모유두 세포, 즉 털을 만드는 집이 파괴되어야 영구 제모가 가능하다. 성장기, 퇴행기, 휴지기를 지나는 털 가운데 성장기 모발에만 모유두 세포가 있어서 레이저는 4~8주 간격을 두고 최소 5~6회 실시해야 효과를 볼 수 있다(털의 굵기나 밀도, 부위, 털이나 피부색에 따라 달라지며 나의 경우 10회 이상을 추천했다).
셀프 면도를 한 다음 날 병원에 들렀다. 여의사 진료를 요청한 뒤, 이번엔 차가운 형광등 조명 아래 치료실 베드에 누웠다. “왁싱이 ‘기절’이라면 레이저는 ‘죽음’이래.” 친구의 사전 경고와 달리 웬걸? 말 그대로 1도 아프지 않았다. 찌릿찌릿하게 간헐적으로 느껴질 뿐 10분 안에 큰 아픔 없이 시술이 마무리됐다. 레이저 제모 장비 중 최신 버전에 해당하는 ‘아포지플러스’는 레이저 조사 시 강력한 에어쿨링 시스템이 함께 가동되어 열 손상으로부터 표피를 보호한다. 무엇보다 제모 젤 없이 피부에서 3cm 정도 떨어져 조사하는 비접촉식이라 한결 위생적이며 제모의 단골 부작용인 색소침착의 위험을 덜었다는 것이 장점 중의 장점이다. 시술 후 1~2주가 지나면 제모된 털이 자연스럽게 탈락하고, 더딘 속도로 털이 다시 자란다. 그러나 왁싱 후 털이 자랄 때처럼 소름 끼치는 간지러움 따윈 없다!
그렇다면 레이저 영구 제모의 취약점은 과연 없는 걸까? 모근을 뽑는 왁싱과 마찬가지로 모근을 파괴하는 시술이므로 모낭염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게 사실이다. 하루 이틀 정도 울긋불긋해지고 조금 붓는 건 정상 반응이지만, 만약 증상이 쉽게 사라지지 않거나 드물게 수포가 발생하는 경우 즉각 적절한 치료를 받아야 후유증을 예방할 수 있다. 음부를 보호하는 털이 사라지면서 해당 부위가 건조해질 수 있으니 샤워 후 보디로션도 섬세하게 발라야 한다. 특히 요즘 같은 여름엔 태닝 후에 색소의 밀도가 높아져 모낭염 화상의 위험마저 높아지므로 시술을 고려 중이라면 이 시기만큼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또 충분한 시술 경험과 레이저에 대한 전문적 이해가 있는 병원을 선택하는 건 안전한 털 관리를 위한 필수 사항이다.
영구 제모라는 고행길을 걷기 전엔 숙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음모의 긍정적 역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실 털이 민망하고 쓸데없다는 편견부터 버려야 한다. 그래서 현재 나의 음모는 안녕하시냐고? 털이 떠난 자리에 보송보송한 느낌과 상쾌함만 존재할 뿐이다. 그리하여 나는 후회 없는 결정이었노라고 단언한다. 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나를 칭찬해주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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