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빈에게 귀를 기울이면
선하고 선명한 선율이 들린다.
박은빈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에는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태생부터 예민한 악기를 꾸준히, 집요하게 연주하는 자들에게만 일어나는 딱딱한 변화다. 일주일만 소홀히 해도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굳은살은 현악기를 다루는 사람들에게 훈장으로 불린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고 싶은 음대생 채송아 역할을 맡은 박은빈은 대역 없이 모든 곡을 직접 연주하고 있다. 6개월 동안 계속해서 바짝 잘라낸 조그만 손톱은 더 작아져 있었다.
사실 배우가 그렇게까지 연주를 해낼 필요는 없었다. 액션 장면을 위해 스턴트 배우가 있고 이런 전문 드라마를 위해 대역이 있다. 박은빈은 어릴 때 바이올린을 접한 적은 있지만 다시 음계부터 익혀야 하는 상황이었다. “맞아요. 제작진 누구도 이 정도로 열심히 할 거라는 기대도 안 했고 해서 되리라고 생각도 안 했던 것 같아요. 바이올린은 자세 잡기도 어렵거든요. 처음에 CG 테스트도 해봤는데, 바이올린은 워낙 얼굴이 밀접하게 있어 얼굴을 갈아 끼우는 게 불가능하더라고요. 그걸 알게 된 순간부터 정말 실력이 급향상됐어요(웃음).” 바이올린을 잡은 지 3개월 만에 카메라 앞에 섰고 6개월째인 지금, 시즌제 드라마에서 아역 배우의 성장을 두 눈으로 지켜보게 되듯 채송아이자 박은빈의 바이올린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과정을 두 귀로 선명하게 듣고 있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역할이라 처음에 흥미가 생겼고, 이왕 하는 거 잘하고 싶었어요. 저 역시 다른 작품에서 배우가 직접 연주하지 않는다고 느꼈을 때 몰입이 깨진 적 있었거든요.” 손끝 굳은살은 박은빈이 어떤 마음으로 연기를 하는지 아주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극 중 채송아가 연주하는 곡은 모두 박은빈이 실제 연습한 곡이다. 어떤 공통점이 느껴졌다면 박은빈의 취향을 감지한 것이다. “처음으로 좋아했던 곡은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이에요. 어릴 때부터 언젠가 꼭 연주해보고 싶었어요. 선율이 아름답고 슬프면서도 그냥 가슴에 내리꽂히는 느낌이었어요. 사실 어떤 곡을 연습해도 어려우니 당연히 여겼는데 나중에야 전공생들도 어려워하는 곡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바흐의 ‘샤콘느’도 다른 곡에 비해 활 보잉이 간단하다고 생각했는데 고난도의 곡 중 하나였고요.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도 마찬가지였어요. 모두 저의 무지에서 비롯된 착각이었죠.” 극 중에서 바이올린 연주가 끝날 때마다 악기에서 손을 떼지 않고 여운을 흘려보내는 모습을 보며 이 꾸준한 배우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박은빈으로서는 ‘제대로 한 거 맞나? 선생님이 괜찮다고 하실까?’ 생각해요(웃음). 이제는 조금 편해져 감정을 실으려고 하고 있죠. 어떤 곡인지 생각하다 보니 저절로 표정도 생기고 눈썹도 일그러지네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화장실만 다녀와도 몇 명이 죽어나갔거나 숨겨진 가정사 폭로가 이어지는 요즘 드라마와 호흡이 다르다. 삶의 어떤 부분을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음에도 그 호흡과 감정이 실제 우리 감정의 속도처럼 더디고 느리다. 많은 감정이 말로 드러나거나 휘발되지 않고 박은빈의 눈빛 속에 머물러 있다. “눈빛을 만든 8할은 감정선을 놓치지 않으려는 집념이었달까요(웃음). 말을 적게 하는 대신 마음으로 말을 많이 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눈빛도 마음을 따라가는 것 같아요. 저희 대본에 말줄임표가 엄청 많아요.” ‘소소하게 용암이 밑에서 들끓는 듯한 감정선을 잘 표현해내야 하는 작품’. 말줄임표 연기의 대가가 전해준 중요 포인트다.
청춘 한복판에서 주인공 네 명 사이에서 쌓이는 건 감정이다. 무너지고 어긋나고 비워지기도 하지만 서로를 향한 감정은 블록처럼 차곡차곡 쌓인다. 이 세상에서 절대 참을 수 없는 건 재채기와 사랑에 빠진 자들의 웃음이다. 극 중 준영(김민재 분)과 송아는 얼굴만 봐도 자꾸 웃는다. “지문에 ‘같이 웃음이 터진다’라고 적혀 있진 않아요. ‘서로 어색하다’, ‘정말 어색하다’ 같은 지문이 확실히 많았어요. 기분 좋은 어색함과 멋쩍음이 포인트라고 생각했고 그런 연기를 할 때 민재랑 호흡이 잘 맞았어요. ‘이렇게 살릴 수도 있구나’ 서로 만족하면서 찍은 장면이 많았죠(웃음). 박은빈에게도 설레던 장면이 있다. “6회였던가요. 고백하려고 했던 게 아닌데 얼굴을 보는 순간 겉잡을 수 없이 흘러나왔던 장면을 찍을 때. 심장에도 손을 갖다 대고 있었지만 스스로도 두근거림을 많이 느꼈어요.”
사실 나는 이 드라마를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박은빈의 인물 설명을 듣고 보기 시작했다. “착하고 싫은 소리 못하는 사람”이라는 소개에 진행자는 “착하면 지루하지 않냐”고 되물었고 박은빈은 “사실 우리가 다 그렇지 않냐”고 답했다. 박은빈은 ‘보통 사람’, ‘평범한 사람’을 씩씩한 어조로 발음했다. “송아가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밖에 없게 하는 기운의 인물이라고 느껴졌어요. 화자, 청자, 관찰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세상의 모든 송아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 송아를 통해 자신의 삶도 응원하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 컸던 것 같아요.” 그리고 라디오에서 들려주던 차분한 음성 그대로 말을 이어갔다. “착한 사람을 좋아해요. 착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나쁘게 살아온 적은 없었고, 착한 사람이라고 불리는 게 다행이라고도 여겨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만만하게 여기는 것 같은 순간이 생기고 늘 시험에 드는 느낌이 들어요. 답은 아직 찾지 못했어요. 사이다를 갈구하는 시대죠. 누가 뭐라고 하면 쏘아붙이기를 원하지만 저는 절대 그러지 못해요.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인내하면서 살아가요. 후회하며 자기 발등을 찍기도 하고, 참아서 다행이라고 여기면서 성장해요. 송아도 답답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인내할 줄 아는 힘을 가진 사람이에요.”
브람스의 삶에 대해서도 짝사랑을 말했다. “한결같은 사람들을 좋아해요. 그들이 지닌 내적 단단함이 있어요. 무엇이 됐든 자기만의 것을 고수하고 그 방향대로 그저 굳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면에서 브람스가 클라라를 평생 사랑한 건 정말 대단해요. 브람스가 짝사랑으로 유명해진 건 짝사랑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 아닐까요. 변함없는 사람, 한결같은 사람, 순애보적인 사랑이 과연 가능한가요.” 물론 올해 25년 차 경력의 이 배우는 드라마와 현실을 명확히 구분한다. 현실을 드라마에서 보고 싶지 않아 하는 심리 역시 너무나 잘 안다. “보는 사람은 송아가 자신과 비슷해 좋아할 수 있지만 비슷해서 싫어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고민을 많이 하며 촬영했어요. 드라마 자체로는 어느 때보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고 생각했어요. 현장 분위기, 스태프분들, 동료 배우분들 모두 좋아 늘 웃으며 촬영했거든요. 그런데 어느 작품을 촬영할 때보다 잠을 못 잤더라고요. 깊이 못 자고 금방금방 깨고 아침에 눈이 딱 떠지고. 생각과 별개로 부담을 느꼈나 봐요.”
몽글거리고 설레는 감정을 보여준다는 점을 제외하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사실 냉정한 시선을 드러낸다. 어떤 분야에서만큼은 재능은 결코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고, 좋아한다고 모두 그 일을 할 수는 없다는 현실이다. 직시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맞닥뜨리는 순간을 포장지로 감싸거나 완충재를 두지 않고 드러낸다. 배우 역시 소수의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부여되는 재능이 절실하게 여겨지는 일이다. 다섯 살 때 아동복 모델로 활동을 시작해 2년 후 드라마 <백야 3.98>로 데뷔한 소녀는 스스로 확신을 얻기까지 얼마나 자주 차가운 눈을 떠야 했을지 나는 궁금했다. “어릴 때는 이 일을 하고 싶어 했던 주체가 부모님이 아니라 나였어요. 그래서 어떻게든 잘해왔죠. 하지만 저는 정말 내성적이에요. 어느 순간 끼가 넘치고 친화력도 좋고 연기하는 게 정말 즐거워 보이는 또래를 보며 배우가 내 적성에 맞을까 혼란스러웠던 적이 있어요. 그때 어른 선배님 한 분이 저 같은 성격이 훨씬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고 오히려 연기할 수 있는 저력이 있다고 조언해주셨어요. 드러내지 못하는 감정을 연기로 승화시키면 더 좋은 길이 열리겠구나 하는 믿음이 생겼고 그 믿음으로 어려운 순간들도 보낼 수 있었어요. 타고난 연기자라면 어땠을지 가끔 생각할 때가 있는데, 그래도 나만의 방법으로 열심히 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열아홉 살까지 출연한 드라마만 마흔다섯 편이다. 배우 박은빈의 필모그래피는 광활하고 광범위하다. 실제 나이와 배역의 나이, 실제 성격과 배역의 성격 등을 충돌시키지 않는 건 박은빈의 힘이다. 스물두 살 때 <구암 허준>에서 허준의 부인 다희 아씨 역을 맡아 노년까지 한 여자의 인생을 전부 보여줬고, 실제 자신과 정반대 캐릭터로 꼽은 <청춘시대> 송지원은 인생 캐릭터로 남았다. 그리고 지금 사람들은 목소리만 듣고도 박은빈을 알아본다. <스토브리그>에서 “선은 네가 넘었어!” 벼락처럼 소리를 질러도,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좋아해요” 초여름 공기처럼 고백해도 박은빈은 사라지지 않는다. 특히 몇 년 사이 흥미진진한 작품을 ‘박은빈이라서’ 더 흥미진진하도록 만들었다. 터닝 포인트가 된 작품을 묻자 박은빈은 망설임 없이 <비밀의 문>을 꼽았다. “혜경궁 홍씨 역할을 하며 캐릭터를 발전시키는 게 배우로서 흥미롭고 값진 경험임을 알게 됐어요. 대본에 주어진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담는 법도 배웠고요. 그런 경험 덕분에 <청춘시대>에서 나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실험해볼 수 있었어요. 어릴 때부터 막연하게 뭘 하든 막상 하면 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자기 효능감이 있긴 했어요(웃음). <청춘시대>에서는 시청자들도 내가 노력한 만큼 좋아해주시는 게 느껴져 자신감을 얻었죠.”
이제 그녀는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흥행 요정’ 아니냐고 묻자 <스토브리그> 때 생긴 수식어니 오래되지 않았다고 바로잡는다. “솔직히 <스토브리그>,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모두 결과에 상관없이 하고 싶었던 작품이에요. 그동안 잘 안된 작품도 있어서 차분해졌는진 몰라도 제겐 과정이 중요해요. 결과가 좋았어도 스스로 곪아 있을 수 있고 흥행은 되지 않아도 기분 좋게 떠올릴 수 있는 작품도 있거든요. 일희일비하지 않고 작품을 하다 보면 누군가에게는 의미를 남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어요. 앞으로도 하고 싶은 작품을 선택하겠지만 보는 분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함께 고려할 거예요.”
박은빈은 연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신을 객체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저도 연기하면서 제가 아닌 삶을 연기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잖아요. 예를 들면 ‘송아는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애구나’ 하고 느끼는 순간순간이 저로 하여금 연기를 계속하게 하는 것 같아요.” 박은빈에게 연기란 삶을 알아가는 과정처럼 보인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그녀가 연기했던 인물이 허공 속 스크린에 후드득 펼쳐진다. “연기할 때 ‘박은빈이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은 배제하려고 해요. 제 사견을 덧붙여 ‘박은빈이라면 안 그랬을 텐데’ 하는 생각이 때로 그 역할과 혼연일체를 막는 것 같거든요. 그러다 보니 ‘이건 박은빈이 아니라 송아의 표정이구나’ 구분이 잘돼요(웃음). 그런 작업이 되게 재미있고요.” 메소드 연기라기보다 캐릭터 스위치를 딸깍 끄고 켜는 전환에 가깝다. ‘부캐’를 운영하는 듯한 말투다. 희망 부캐를 골라달라고 하자 <청춘시대> 송지원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연기할 당시에 대척점에 있는 캐릭터였기 때문에 처음에 낯을 많이 가렸어요(웃음). 얘는 왜 이러지 이러면서. 그런데 2년 동안 시즌 1, 2를 통해 많이 가까워졌고 편해졌어요. 저는 박은빈으로서 부끄러운 순간이 많아요. 창피하고 도망가고 싶을 때 송지원 모드를 켠다고 생각하면 어디선가 자신감이 뿜어 나올 것만 같아요.” 작품에 들어가 있을 때 박은빈은 도토리를 모아놓는 다람쥐처럼 에너지를 저축한다. “그런 캐릭터는 에너지가 많이 필요해서 평소에 차분해질 때가 많아요. 연기를 안 할 때는 에너지를 온전히 나를 위해 쓸 수 있어서 제 모습으로 돌아오고요. 그렇게 사는 것 같아요.” 개인 박은빈의 스위치를 딸깍 켜면 심심함도 못 느끼고 외롭다는 생각도 해본 적 없는 박은빈이 드러난다. “혼자 시간을 잘 보내요. 애초에 외로움을 느껴볼 새가 없었달까요.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립할 수 있는 힘을 엄마가 길러주셨어요.” 직업병 때문에 한국 작품은 ‘만약에 내가 했으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온전히 쉬고 싶을 때는 할리우드 배우들의 SF 영화나 마블 시리즈를 본다. 자신이 마블 영화에 출연하리라곤 상상하지 않는다.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웃음). 그분들의 세계는 따로 지켜줬으면 좋겠어요.” 개인 박은빈은 컨텐츠가 부족해 유튜버가 될 수 없고, 혼자서도 즐겁지만 촬영 현장에서 스태프와 웃고 떠들 때가 조금 더 즐겁다.
삶에 강렬했던 순간에 울려 퍼진 음악은 시간이 흐르면 그 순간을 상기하는 매체로 남는다.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는 올 한 해 연둣빛 공기 같은 순간을 불러올 것이다. ‘꿈꾸는 일’, ‘공상’처럼. “봄, 여름, 가을 세 계절을 송아와 함께하고 있는데 비 냄새가 가득한 것 같아요. 워낙 태풍 때문에 비가 많이 내렸고, 극 중에서 비가 메타포를 많이 담고 있거든요. 비의 느낌이 송아의 스물아홉 살 처지와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시간이 지나고 나면 흰색이 떠오를 것 같아요. 바이올린 케이스도 흰색을 썼지만 송아에게는 흰색이 가장 잘 어울리거든요. ‘내 나이 스물아홉 살은 송아와 일맥상통했지’ 이렇게 떠오를 것 같아요.”
송아가 바이올린을 좋아하는 이유는 마지막 회에 공개된다. “바이올린은 두 발로 서서 하는 악기예요. 내 몸과 일치되어 악기와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부분이 어렵고 좋아요. 같은 곡이라도 연주하는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다 다르고 활 쓰는 게 달라요. 몸의 움직임에 따라서도 소리가 달라지고요. 바이올린이 있고 사람이 연주하는 게 아니라 사람과 바이올린이 함께 공명하는 느낌. 그래서 바이올린을 좋아하게 됐어요.”
답변을 마친 박은빈은 몸을 일으키더니 나에게 두 눈을 맞추며 “충분히 대답이 되었을까요?”라고 물었다. 다시 채송아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4회분 촬영이 남아 있었다. 바람은 차갑고 파란 하늘은 눈부셨지만 어쩐지 비 냄새가 나는 늦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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