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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그 가족사진관

2023.02.20

보그 가족사진관

힘들 때 우리를 위로하는 건 때로는 가족사진 한 장입니다. 가족사진은 우리 개개인이 지나온 역사의 기록이자 마음의 부적입니다. 가족사진 촬영은 그 자체로 즐거운 이벤트이기도 합니다. 가족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니까요. 어느 때보다 가족이 소중했던 2020년 ‘보그 가족사진관’이라는 간판 아래 열두 명의 포토그래퍼가 열두 가족을 촬영했습니다. 하나, 둘, 셋, 찍습니다!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가족사진을 찍었으면 가족이지.” 주인공은 자신을 학대하는 혈연 가족 대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들과 가족사진을 찍고 비로소 가족이 된다. 가족이니까 가족사진을 찍었던 우리 통념을 반전해서 보여준 장면이었다.

가족사진은 가족의 증명서처럼 여겨졌다. 근엄한 아버지, 인자한 어머니, 잘 자라준 자식들. 금장 테두리 액자 속 가족사진은 과거 우리 사회가 바랐고 당시 세대가 이루고 싶었던 가족의 이상향을 상징했다. 화목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찍었던 사진은 때로 허울뿐인 허상이었고 가족 구성원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우리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가족사진을 찍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 손엔 늘 스마트폰이 쥐어져 있다. 그럼에도 가족사진이 여전히 환기하는 건 그 시절 우리 가족이다. 주동자의 닦달에 시간을 맞추고, 가장 단정한 옷을 차려입고, 카메라 플래시가 터져도 눈을 감지 않으려고 눈에 힘을 주던 그 순간. 유난히 공동체 의식이 타올랐던 그 순간. 우리 가족이 다 같이 모였던 언젠가의 한날한시다. 해 질 녘 놀이터에서 맡은 된장찌개 냄새처럼, 어릴 적 엄마 스웨터에서 나던 세제 냄새처럼 가족사진은 언제 꺼내 들어도 사진을 찍던 그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가족은 부정할 수 없는 우리 삶의 가장 긴 목격자고 가족사진은 쌓이는 역사이자 기록이다.

‘가족사진의 사진가’ 아사다 마사시는 코로나19로 바깥 활동이 힘들어지자 매일 집에서 아내, 아들과 가족사진을 찍었다. 식탁에 소바 식단을 차리고 마당 화단을 가꾸는 농부가 되는 등 집 안에서 48일 동안 매일 상황을 바꿔 촬영하고 SNS에 올렸다. 아사다 마사시는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사진이 진가를 발휘하는 것은 ‘언젠가의 미래’라고. 사진은 하나의 기점이자 등대라 돌아볼 때마다 사진이 보내는 메시지가 달라진다고. 예닐곱 정도로 보이는 그의 아들은 ‘언젠가의 미래’에 코로나19 시대를 엄마 아빠와 깔깔거리며 모의 작당을 했던 시간으로 기억할까. 아버지의 연극에 끔찍한 전쟁 상황과 수용소 생활을 흥미진진한 게임으로 여겼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속 조수아처럼.

올 한 해 바이러스를 피해 온 가족이 돌아온 곳은 결국 집이었다. 전 세계는 인터넷망으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마치 농경 사회로 돌아간 듯 사회가 해오던 역할을 하나씩 가정이 해나가야 했다. 학교를 대신해 선생님이 되어야 했고, 음식점을 대신해 요리사가 되어야 했다. 집은 사무실이 됐고 휴식 공간이 됐다. 가족과 이렇게 오랜 시간 함께한 시대는 지금까지 없었다. 이로 인해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가족이라서 징그럽고 힘들기도 했다. 올해를 마무리하며 우리가 가족사진을 떠올린 이유다. 가족사진 촬영이 ‘언젠가의 미래’에 올해를 좀 더 아름답게 기억하게 해주는 마법의 가루가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가족사진 응모 공고를 낸 한 달 동안 <보그> 편집부에는 따뜻하고 간절하고 때론 시큰한 독자들의 사연이 계속해서 도착했다. 무조건 내 편, 아끼고 지지해주는 사람, 마음이 함께 있는 사람, 가장 가깝고 편한 존재,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관계. 건강가족기본법이 정해놓은 가족의 정의 “혼인·혈연·입양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기본단위”는 우리 가족을 담지 못했다. 마음이 가족이라고 인정한 이 시대의 진짜 가족이 오늘을 함께하고자 모였다. 우리는 두꺼운 벨벳 천을 걸고 앤티크 의자를 내놓는 대신 가족을 가장 그들답게 기록할 수 있는 열두 가지 방법을 찾아 열두 가족을 맞이했다. 언제나처럼 플래시가 터졌다.

엄마가 입은 도트 패턴 드레스는 비뮈에트(Bmuet(te)), 이너로 입은 블랙 드레스는 코치(Coach), 아빠가 입은 도트 패턴 재킷은 비뮈에트, 왼쪽부터 막내가 입은 블라우스, 베스트, 스커트는 비아플레인(Viaplain), 블랙 롱부츠는 잉크(Eenk), 셋째가 입은 블랙 드레스는 비뮈에트, 둘째가 입은 스트라이프 셔츠와 스커트는 비뮈에트, 털 슬리퍼는 오소이(Osoi), 첫째가 입은 화이트 셔츠와 레드 원피스는 비뮈에트.

주상우+최순자+주경희+주경선+주경진+주경은

네 자매와 부모님이 한집에 사는 조용할 날 없는 가족. 여섯 식구가 30년째 파주에 산다. 거실 한쪽 벽에는 작은 액자 하나가 걸려 있는데 막내 경은이 백일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관에 갔다가 서비스로 얻은 사진이다. “가족 구성원이 한 명씩 늘 때마다 비용도 눈덩이처럼 늘어갔기에 제대로 된 가족사진 한 장 찍지 못했어요.” 맏언니 경희는 “언젠가 네 자매가 성숙한 성인이 됐을 때, 환히 웃으며 가족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오늘 드디어 그 꿈을 이루게 됐다”며 가장 들떠 있었다. “아들만 넷인 집에서 자란 남편은 아들딸 상관없이 아이가 많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어요. 어쩌다 보니 딸 넷을 키우게 됐는데, 누구 하나 엇나가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준 것만 해도 정말 감사해요.”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느라 오늘처럼 모든 식구가 한자리에 모이는 날은 한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다. 아빠 주상우에게 딸 넷이 맡은 역할에 대해 물었다. “첫째 경희는 애교가 많아 막내 같은 역할을 하고, 둘째 경선이는 알뜰살뜰 식구 모두를 잘 챙겨요. 셋째 경진이는 재기 발랄해서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고, 막내 경은이는 존재만으로 모두의 기쁨이죠.”

PHOTOGRAPHER DUKHWA JANG HAIR 임안나 MAKEUP 박차경

(왼쪽부터)패치워크 버킷 햇, 프린트 카디건과 벨트, 화이트 니트와 데님 셔츠, 오렌지색 셔츠, 스웨트 팬츠는 폴로 랄프 로렌(Polo Ralph Lauren).

이설화+정영훈+방영숙+이태엽

“첫 번째 가족은 제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지죠. 어릴 적부터 지지고 볶으며 스토리를 쌓아가요. 하지만 가치관과 라이프스타일이 맞는 사람들이 함께 산다면, 그 또한 가족이죠. 우리 두 부부가 그래요.” 서퍼 이태엽이 아내 방영숙, 또 다른 부부인 정영훈·이설화와 설악해변을 거닐며 말했다. 이들은 2014년 캠핑과 서핑을 즐기는 부부로 인연을 맺었다. 당시 모두 직장에 다니면서도 주말이면 함께 바다를 찾고 겨울이면 따뜻한 나라로 서핑 트립을 떠났다. 인생을 좋아하는 나날로 채우자는 뜻을 모아, 퇴직금과 수중에 있는 돈을 끌어모아 팜서프까지 열었다. 셀프 인테리어를 끝마친 날 바다로 나가 함께 차를 마셨다. 이설화는 “이렇듯 인생의 중요한 부분,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함께하는 이들이 가족”이라고 했다. 방영숙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엄마, 아빠보다 더 자주 보잖아요. 매일 함께 식사하고 서핑해요. 가족의 범위는 얼마든 넓어질 수 있어요. 마음 맞는 서퍼들과 실버타운을 이루고 살자고도 얘기하죠.” 이들 가족의 영입 조건은 자연에 대한 존중, 서핑 문화의 공유다. 정영훈도 가치관이 가족의 중요 조건이라 덧붙인다. “서핑 자체가 파도를 ‘셰어링’하는 거잖아요. 파도를 양보하고 상대를 응원하죠. 이처럼 서로 아껴주고 지지하는 것이 가족이죠.”

PHOTOGRAPHER WOOJEONG LEE HAIR 임안나 MAKEUP 유혜수

팬츠는 이자벨 마랑(Isabel Marant at Net-a-Porter).

슬리브리스 드레스는 크리스토버 에스버(Christopher Esber at Net-a-Porter).

권희라+권오나

전자 공학도 권희라는 청개구리 개구쟁이 오나와 대구에 산다. 오나는 태어난 뒤 할머니와 함께 살았지만 올해 8월 둘만의 공간으로 독립했다. ‘청소년 미혼 한부모’ 엄마 권희라의 공식 소개다. 만 19세가 되던 해 임신했고 오나를 낳았다. “만 24세 이하 미혼 한부모를 뜻해요. 사실 미혼모의 긴 말이지만 단순히 미혼모라고만 표현하고 싶지 않거든요.” 카메라를 좋아하지 않는 오나 때문에 공식적인 가족사진 촬영은 처음이다. “저만 기억하려고 돌 사진도 집에서 간단하게 찍었고 가족사진은 찍을 생각조차 안 했어요. 어린이집에서도 카메라를 드는 순간 엎드려 딴짓하는데 오늘 오나가 활짝 웃고 장난을 치네요. 너무 신기해요. 오늘이 저희에겐 도전이에요.” 새로운 가족이 생기는 순간 무계획적이던 자신이 변했다고 말한다. “오나를 낳기까지 고민도 많았고 출산할 때 너무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아기를 낳고 딱 안았는데 그 순간 뭔가가 있었어요. 이제 오나와 제가 함께 성장해가요. 오나를 통해 저도 꿈을 키우죠.” 내년에 법적 한부모가 되는 권희라에게 정부의 한부모 지원 정책은 아쉽다. “애정이 있다면 다 가족이에요. 오나의 대모 한나 언니는 런던에 살아요. 자주 볼 수 없지만 내가 언니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언니도 나와 오나를 사랑하고 생각해주니 정말이지 가족이죠.” 오나라는 이름은 따뜻할 온에서 따왔다. 기저귀를 벗어버리고 우다다다 뛰어가는 오나 주위로 온기가 가득했다.

PHOTOGRAPHER JUNKYOUNG LEE HAIR 오지혜 MAKEUP 박차경

엄마가 입은 드레스는 민주킴(MinjuKim at Net-a-Porter), 아빠가 입은 화이트 재킷과 팬츠는 피망(Piment), 딸이 입은 체크 원피스는 할로미늄(Halominium).

이서경+황인환+황온유

이서경·황인환 부부는 온유가 생후 한 달이 되었을 때 입양 가족이 되었다. 이서경은 처음 온유를 만난 날을 잊지 못한다. “사회복지사께서 아기를 안고 걸어올 때부터 감격스러웠어요. ‘내가 이 아이의 엄마가 되는구나’라고 생각하니 그간의 아픔이 치유되는 것 같았죠.” 이서경은 난소 수술로 난임이 되었고, 갑상선암에 걸려 쇼호스트로 일하던 직장을 그만두고 항암 치료를 해야 했다. 그때 자신을 구원해준 것이 온유다. 이전부터 입양을 마음먹었기에 차근차근 준비했고, 그렇게 2013년 온유를 만났다. 온유 이름의 뜻은 따뜻함을 좋아하는 엄마의 성향을 따라 어질 온, 존재 자체로 축복이라 있을 유로 지었다. 영문 이름은 ‘On+You’로 ‘내가 항상 함께하겠다’는 의미다. 온유는 만 세 살 때 입양 사실을 처음 알았고 자랑스러워한다. “나도 엄마 배에서 나왔어?”라는 질문에 이서경은 이렇게 대답했다. “온유를 너무 사랑하는 누군가의 배에서 태어났지. 하지만 온유를 키우기엔 어렸고 아기를 눕힐 자리도 없었대. 하지만 온유를 우리와 만나게 해준 고마운 분이셔. 온유를 처음 만난 날 엄마는 너무 기뻐서 덩실덩실 춤췄어.” 이야기를 나눈 모녀는 함께 춤을 췄다. 이서경은 입양 사실을 숨길 생각이 없기에, 온유가 어릴 때부터 입양 동화를 읽어주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도왔다. 블로그에도 입양 이야기를 공개하고 있다. “온유가 상처받지 않고 크려면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바뀌어야 해요. 그래서 입양 관련 상담과 강연도 마다하지 않죠. 우선 입양이 대단히 칭찬받을 일이 아니라는 인식부터 퍼졌으면 해요. 입양은 결혼과 출산처럼 가족이 되는 방법일 뿐 대단할 것 없어요.” 아빠 황인환 역시 “가족이란 그 의미를 따로 생각해본 적 없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관계”라고 말한다. 온유에게 물었다. “엄마, 아빠가 언제 제일 좋아?” “선물 사줄 때요!” 그러더니 귀에 대고 속삭였다. ”사실 엄마 아빠랑 잘 때 제일 좋아요.”

PHOTOGRAPHER LESS HAIR 최은영 MAKEUP 문지원

아버지가 입은 레더 재킷은 구찌(Gucci at Yoox), 어머니가 쓴 페도라는 신저(Shinjeo).

배상훈+윤인숙+배가람+배효빈

배가람은 뷰티 브랜드의 러브콜이 끊이지 않는 손 모델이다. 늘 능숙한 손 연기를 보이는 그녀가 오늘만큼은 발끝까지 단장하고 <보그> 카메라 앞에 섰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여동생도 함께다. 가족이 모두 떨어져 살기 시작한 지는 8년 정도 됐다. 아버지 배상훈은 천안에, 어머니 윤인숙은 울산에, 두 자매는 서울에 살며 각자의 포트폴리오를 쌓아가고 있다.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 뒤로는 2년에 한 번 정도 다 같이 모이는 것 같아요. 재작년에 단양으로 가족 여행을 떠난 이후로 넷이 모인 건 오늘 <보그> 가족사진이 처음이죠. 이제 더 이상 네 식구가 다 함께 살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니 서글퍼요.” 어머니 윤인숙에게 가족의 의미를 물었더니 곰곰이 생각하다가 돌연 눈물을 훔치셨다.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을 지탱하게 해주는 힘의 원천이죠.” 막내딸 배효빈은 가족사진 촬영을 계기로 모였지만 이 기회에 깔깔 웃으며 대화도 많이 하고 촬영이 끝난 뒤엔 맛있는 식사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난 2월, 두 딸이 새로운 곳으로 이사했는데 코로나를 핑계로 한 번도 못 가봤어요. 잠자리는 편한지 잘 먹고 지내는지 오늘 한번 챙겨보려고요.” 촬영한 사진을 모니터링하며 아빠는 세 여자를 포근히 껴안았다.

PHOTOGRAPHER WONTAE GO HAIR 오지혜 MAKEUP 박차경

딸이 입은 플라워 패턴 티셔츠는 콜리나 스트라다(Collina Strada), 노란색 니트는 문선(Moonsun), 아들이 입은 파란색 스웨트셔츠는 스포티앤리치(Sporty&Rich), 엄마가 입은 재킷과 스커트는 잉크(Eenk).

딸이 입은 플라워 패턴 티셔츠는 콜리나 스트라다(Collina Strada), 노란색 니트는 문선(Moonsun), 아들이 입은 파란색 스웨트셔츠는 스포티앤리치(Sporty&Rich), 엄마가 입은 재킷과 스커트는 잉크(Eenk).

김기원+이혜나+김신오+김운오

대전에서 10년 가까이 가족사진관을 운영하는 김기원·이혜나 부부. 둘은 8년 전 대전에서 결혼해 여섯 살 신오, 다섯 살 운오를 키우고 있다. “가족사진 스튜디오를 열기 전에는 자그마한 아기 사진관을 운영했어요. 둘 다 아이를 정말 좋아했거든요. ‘우리에게 아이가 있다면 어떤 사진을 찍어줄까?’ 행복한 고민을 하며 컨셉추얼한 백일 사진, 돌 사진을 찍었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억지로 꾸민 사진을 찍고 싶지 않더라고요. 지금처럼 자연스러운 가족의 순간을 포착하게 된 건 3년 정도 됐어요.” 부부는 지금까지 5,000여 가족에게 애틋한 추억을 안겨줬지만 정작 자신들의 가족사진이 없음을 늘 아쉬워했다. “가족사진을 찍는다는 건 어떤 기분인지 저도 느껴보고 싶었어요. 생계를 목적으로 시작한 일이긴 하지만, 가족을 촬영하며 매일 사랑을 목격해요. 카메라 앞에서 다 같이 깔깔 웃다가도 돌아서면 눈물을 훔치고, 70대 할아버지가 장성한 아들에게 기습 뽀뽀를 하기도 하죠.” 사이좋은 연년생 남매인 신오와 운오는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새로 산 장난감 하나로 <보그> 촬영이 끝나는 순간까지 그저 신이 났다.

PHOTOGRAPHER JAEKWANG OH HAIR 박희승 MAKEUP 안세영

동생과 언니가 입은 패턴 카디건과 스커트는 낸시 부(Nancy Boo), 갈색 앵클 부츠는 처치스(Church’s), 하늘색 부츠는 팔로마 울(Paloma Wool), 모자는 메르베 베인더(Merve Bayindir at Net-a-Porter).

김슬기+김혜정

대구에서 여고생들을 가르치는 언니 김슬기와 서울에서 일러스트를 공부하는 동생 김혜정. 아빠,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주며 서로가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사이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타지 생활에 지쳐 고향 집을 찾았다가 추억의 앨범을 발견했어요. 세 살 아래인 저를 꼭 껴안고 볼에 입을 맞추는 언니. 그런데 성인이 되어 찍은 사진은 한 장도 없더라고요. 언니가 사진 찍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랬나 봐요.” 밤늦게 스튜디오에 도착한 자매는 촬영용으로 고른 트윈 룩이 마음에 드는지 연신 얼굴을 맞대고 셀피를 찍었다. 언니 김슬기에게 ‘자매’라서 좋은 점을 물었다. “일단 믿음이 있어요. 가족이니까요. 혜정이는 친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고민을 털어놓을 때 같이 고민해주고 진심으로 위로해줘요.” 4년 전 일러스트레이터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서울로 떠나겠다는 동생에게 언니는 “한번은 경험해봐도 좋겠지만 힘들면 언제든 돌아오라”고 말했다. 둘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메시지를 나누고 통화도 한다. 몸은 떨어져 있지만 마음은 늘 함께다. “서울 생활을 하면서 늘 힘이 된 건 언니였어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니에게 전화를 거는 것으로 에너지를 채웠죠. 영원한 내 편인 언니와 추억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요.” 인터뷰를 할 때는 생긴 것도 성격도 참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사진을 들여다보니 영락없이 자매다.

PHOTOGRAPHER PAKBAE HAIR 오지혜 MAKEUP 박차경

할머니의 연보라색 드레스, 손녀가 입은 재킷과 블라우스, 치마는 푸시버튼(Pushbutton), 할머니가 쓴 모자는 신저(Shinjeo).

이서영+정혜숙

“할머니와 손녀보다 장녀와 장녀로 가족사진을 찍고 싶었어요.” 손녀와 할머니 사이에는 50여 년의 시간차가 있지만 손녀 서영이 엄마, 아빠보다 할머니가 자신의 마음을 더 잘 안다고 느끼는 순간은 ‘매일’이다. 맞벌이 부모님 대신,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할머니 혜숙에게 서영은 첫 손녀다. 분만실에서 처음 만나던 그 순간이 여전히 생생한 보물이요, 선물이다. “할머니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쉴 틈 없이 일하셨어요. 어릴 때도 동생 넷을 업고 밭에 엄마 젖 먹이러 가셨대요. 할머니가 살아오신 얘기를 들으면 가슴이 아파요.” 가족이란 ‘곁에 없어도 마음만은 늘 같이 있는 존재’로 여기는 서영은 할머니와 가장 친한 친구 사이기도 하다. 트로트를 좋아하는 할머니를 위해 팬클럽에 가입하고 영화를 예매해드릴 정도다. 할머니 정혜숙은 “마음이 착한 손녀”라고 거듭 말씀하신다. 요양원에 계시는 증조할머니에게도 마음을 쓰는 손녀다. “마음으로 많이 의지해요. 큰 힘이 되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손녀딸”이라고 말씀하시며 눈시울을 붉히신다. “제가 좀 무뚝뚝해요. 힘들게 살아 사랑을 주는 방법도 몰랐죠. 그런데 손녀에게는 끔찍할 만큼 사랑을 줘요. 얘가 잘못되면 목숨을 걸고 지켜줄 거예요. 그저 우리 서영이가 상처 안 받고 건강하게 잘 커줬으면 좋겠어요.” 패션모델을 꿈꾸는 서영은 언젠가 할머니의 인생을 담은 책을 쓰고 싶다. “가족사진을 찍은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지금까지 아픔을 잊고 앞으로는 아름다운 세상만 보시라는 의미로 할머니와 단둘이 가족사진을 찍고 싶었어요.” ‘장녀와 장녀의 만남’을 상징하는 가족사진은 어디에 걸어둘지 물었다. “사람들 가장 많이 보는 거실에 걸어놓을 거예요.” 할머니가 손녀의 손을 맞잡았다.

PHOTOGRAPHER SONGYI YOON HAIR 임안나 MAKEUP 문지원

구윤주 감독이 입은 점프수트는 르917(Le917), 엄마가 입은 트렌치 코트와 머플러는 코스(Cos), 둘째 딸이 입은 화이트 재킷과 와이드 팬츠는 르917.

문선숙+구윤주+구윤희+구윤영

<디어 마이 지니어스>는 구윤주 감독이 자신의 어머니와 동생 윤영이의 일상을 촬영해 대한민국 교육 현실을 바라보는 다큐멘터리다. 감독은 자신도 영재 교육을 받았지만 졸업을 앞두고 여전히 막막한데, 당시 초등학교 1학년 윤영이가 바쁜 공부 스케줄을 답습하는 것에 의문을 가졌다. 급기야 어머니와 윤영이가 눈물 바람을 일으키자 이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기로 결심했다. 주연 윤영이는 “다큐는 보통 지루한데, 재미있게 만들 거면 할게”라고 동참했고, 엄마 역시 “문제를 인식했기에 이번 일을 계기로 나를 돌아보고 싶어”라며 지지했다. 처음엔 두 달 촬영해 단편으로 만들 예정이었지만, 2015년 여름부터 3년간 촬영하고 편집도 수년이 걸려 지난 10월 개봉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완성작을 관람한 가족은 지금 누구보다 큰딸, 큰언니가 자랑스럽다. 사실 사춘기에 접어든 윤영은 친구들이 영화를 보는 것이 부끄럽지만. 어머니도 처음엔 충격을 받았다. “스크린에 윤영이의 눈빛이 담기는데 ‘내가 어린아이에게 이렇게까지 했구나’ 부끄러웠어요. 두 딸을 잘 키웠다고 막내 교육에 교만했던 것 같았죠. 마음의 숙제를 준 이 작품이 고마워요.” 초등학교 선생님이기도 한 둘째 구윤희는 “엄마의 스케줄대로 잘 적응했지만, 동생은 그렇지 못할 수 있음을 깨달았어요”라고 말했다. 가장 많이 변한 것은 구윤주 감독이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해”라는 물음에서 시작했지만, 엄마의 일상을 관찰할수록 얼마나 가족을 사랑하고 배려하는지 느낀 덕분이다. “몇 마디 말로 단정 지을 수 없음을 알았죠. 가족은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존재인 만큼 더 사려 깊게 다가가야 해요.” 얘기를 듣던 엄마가 똑같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가족은 나의 부끄러운 모습까지 드러내고, 자존심도 내려놓을 수 있는 가장 가깝고도 편안한 존재예요.”

PHOTOGRAPHER SINAE KIM HAIR 임안나 MAKEUP 유혜수 SET STYLING 최서윤(Da;rak)

아빠가 입은 레더 팬츠는 인스턴트펑크(Instant Funk), 엄마가 신은 프린지 부츠는 로저 비비에(Roger Vivier).

아빠가 입은 레더 팬츠는 인스턴트펑크(Instant Funk), 엄마가 신은 프린지 부츠는 로저 비비에(Roger Vivier).

권이은정+다니엘 아히폰+이미카엘

만삭의 임산부와 남편이 아프리칸 음악에 신나게 춤을 추는 동영상을 봤다. 아프리칸댄스컴퍼니 따그(African Dance Company Tagg) 대표 겸 무용수 권이은정과 다니엘 아히폰 부부다. 당시 엄마 배 속에 있던 아기는 2018년 6월 출생했고, <보그> 촬영장에 세 가족이 아프리칸 원단으로 만든 옷을 입고 등장했다. 아기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엄마, 아빠는 아프리칸 음악을 틀고 계속 리듬을 탔다. 둘은 세네갈의 국제무용학교 에콜 데 사블(Ecole des Sables)에서 만났다. 권이은정은 본래 다른 전공이었지만 우울증을 춤으로 극복하면서 무용수가 되었다. 재즈, 태보 등 다양한 장르를 접하다 서아프리카의 춤에 빠져 2013년 아프리칸 공연예술그룹 포니케에서 활동하며 현지를 오갔다. 다니엘 아히폰 역시 고국 베냉에서 유망한 무용수였다. 권이은정은 다니엘의 춤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준다고 말한다. “무용학교에서 전 세계 댄서 40여 명이 자기 나라의 춤을 선보이는 시간이 있었어요. 환히 웃으며 베냉 춤을 추는 다니엘에게 반했죠.” 둘은 세 번의 결혼식을 올렸다. 첫 번째는 2018년 2월 베냉에서 올렸는데, 당시 이웃 나라 부르키나파소에서 열리는 국제무용축제에도 참가했다. 두 번째는 부천문화재단이 문화 다양성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마을 잔치를 열어줬다. 부르키나파소인들의 연주에 하객들이 춤을 추고 떡을 나눠 먹었다. 세 번째는 한옥마을에서 서아프리카 문화와 함께하는 전통 혼례를 치렀다. 젬베, 발라폰 등의 리듬에 가체를 쓰고 한복을 입은 권이은정이 춤을 췄다. 다니엘이 한국에 정착한 이유 역시 가족 때문이다. “어디서든 소중한 가족을 돌보고 사랑을 주고 싶어요. 언제나 집이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공간이 되도록 노력할 거예요.” 권이은정에게 가족의 목표를 물었다. “딴따라 가족이죠! 좋아하는 일을 하면 포기할 부분이 생긴다잖아요.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술 가족이 되고 싶어요.”

PHOTOGRAPHER JUNGWOOK MOK HAIR 임안나 MAKEUP 박차경

와이프가 입은 화이트 드레스와 재킷은 문선(Moonsun), 규진이 입은 자카드 재킷과 팬츠는 르 베흐미옹(Le Vermillon).

김규진+와이프+페퍼+퓨리

만난 지 4개월 만에 결혼한 김규진과 와이프는 결혼 1주년을 맞았다. (현행법상 동성 간 결혼이 인정되지 않아 뉴욕에서 혼인신고를 하고 서울에서 식을 올렸다.) 가족 구성원은 존재만으로 제 몫을 다하는 페퍼, 퓨리까지 넷이다. 결혼하니 얼마나 좋으냐는 질문에 정말 너무너무 좋다고, 서로의 퇴근을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눈부신 얼굴로 답한다. 와이프 역시 연애도 좋았지만 결혼하니 신뢰가 더 쌓이고 앞으로 무엇을 더 쌓아갈지 기대된다고 말한다. 마케터답게 김규진은 “원래 따로 일을 했다면 이제 M&A를 해서 한 회사가 됐달까요”라고 산뜻한 비유를 덧붙인다. “저도, 부모님도 미숙하다 보니 부딪치는 일도 있었어요.” 와이프가 말한다. “그때보다 지금 저는 훨씬 성숙했고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법도 알아요. 내가 선택한 가족 안에서 마음이 더 편해요.” 1년 사이 많은 일이 있었다. ‘한국 국적 유부녀 레즈비언’으로서 책을 내고 국회에서 포괄적 차별 금지법 기자회견에도 참석했다. “친구가 결혼 1년밖에 안 됐냐며 많이 들어서 결혼 8년 차는 된 것 같다고 그러더군요. 하하. 사실 저는 현재를 사는 사람이라 옛날에 어땠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하지만 옛날이 그립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 없으니 현재가 더 만족스러워요.” 건강하게 평범하고 행복한 일상을 이어가길 바라는 가족의 소식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6개월째 휴면 상태지만 조만간 ‘부부 혜택 어디까지 받아봤니’를 쓸 예정이다. 통신사 가족 혜택 같은 일상 도전기다. “태어나 가족사진을 딱 한 번 찍었는데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가족사진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았는데 와이프와 페퍼, 퓨리와 즐겁게 사진을 찍으니 이것이 비로소 가족사진이구나 싶어요. 오늘은 그런 날로 기록될 것 같습니다.”

PHOTOGRAPHER HYEA W. KANG HAIR 임안나 MAKEUP 유혜수

할머니의 진주 목걸이는 먼데이에디션(Monday Edition), 블랙 드레스는 듀이듀이(Dew E Dew E), 엄마가 입은 코트는 잉크(Eenk).

주덕순+김태용+정윤선+김도원+김도형

“통영에서 어린 딸의 손을 꼭 잡고 무작정 지나가는 차를 잡아 어디든 데려다달라고 했지. 그렇게 대구에서 터를 잡고 손주 둘이 성인이 될 때까지 내 손으로 다 키웠소.” 주덕순 할머니 말씀이다. 춤도 추고 모델 일도 하는 엔터테이너 도형의 초청으로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코로나19 발발 이후 처음이다. 첫차로 서울로 올라오신 할머니는 새벽부터 손수 싸셨다는 유부초밥과 떡을 스튜디오 한쪽에 고이 풀어놓으셨다. “기자 양반도 이거 조금이라도 먹고 일해요. 이렇게 일찍부터 아침도 못 먹고 일하는 거 보면 엄마 마음이 얼마나 안 좋것어.” 음악 강의를 나가는 어머니와 예술 관련 사업을 하는 아버지가 늘 바쁜 탓에 두 아들 도원과 도형은 할머니와 보내는 시간이 더 길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뒤로 할머니를 오래 못 봬서 늘 마음이 불편했어요. 정말 헌신적으로 저희 형제를 키워주셨거든요. 그러고 보니 할머니와 찍은 사진도 2년 전이 마지막이네요.” 곱게 단장을 마친 할머니가 메이크업실에서 나오시자 두 손자가 뛰어나와 팔짱을 꼈다. “우리 할머니 정말 미인이시죠? 젊으셨을 땐 더 고우셨어요.” 왕관을 씌워드리자 할머니는 눈시울을 붉히셨다.

PHOTOGRAPHER JONGHA PARK HAIR 임안나 MAKEUP 박차경 SET STYLING 최서윤(Da;rak)

    에디터
    조소현, 김나랑, 공인아
    패션 에디터
    남현지
    스타일리스트
    김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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